2010년 10월호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단 하루 일하더라도 다시 승무원 하고 싶어요”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0-09-17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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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년 만에 나온 해고무효 판결
    • 철탑 농성, 무서워서 정말 하기 싫었지만 책임감에 올라가
    • ‘철의 노동자’ 같은 전투적 노동가는 안 불러
    • 남아도 후회하고 나가도 후회하고… 380명이 34명으로
    • 20대엔 예쁘게 보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진짜 서비스 하고 싶어
    •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던지…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작은 가슴 속으로

    네가

    열차 되어 지나간다

    덜컹덜컹 쿵쿵

    내 가슴이 떨린다



    흔들린다

    네가 지나가면

    빈 고요

    내 마음엔 두 줄

    금만 남는다

    -배준석, ‘열차같이’

    그녀의 해맑은 웃음자락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라는 표현은 상투적이다. 그런데 세상사의 고통이란 시간이 지나면 상투적인 게 되지 않던가.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31)씨는 두 시간 넘게 얘기하면서 한번도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다. 그러기엔 지난 시절의 고통이 지루할 만큼 길었다. 눈물 따위는 말라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법원이, 자신을 비롯한 KTX 여승무원 34명에 대한 해고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린 8월26일만큼은 눈물과 재회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판사 최승욱)는 코레일(한국철도공사)에서 해고당한 KTX 여승무원 34명이 회사 측을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청구소송에서 “양측의 직접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인정된다”며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코레일 측에 이들이 복직할 때까지 월 급여와 더불어 그동안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우리가 옳다는 걸 많은 사람에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정말 기뻐요. 몸 피곤한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었거든요. 이번에 판결 나오고 예전 사진을 보니 지금의 모습이 너무 늙었더라고요. 실제로 악플에 상처 받기도 했습니다. 승무원 얼굴이 그게 뭐냐고. 제가 1979년생인데, 79~82년생이 가장 많아요.”

    이들은 2004년 코레일에 입사했다. KTX 여승무원 공채 1기였다. 2006년 코레일은 비정규직인 이들에게 자회사인 KTX관광레저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이를 거부하고 정규직 전환을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재계약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들을 해고했다. 입사 당시 ‘2년 후 코레일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34명

    여승무원들은 파업을 벌였다. 점거농성을 하고, 단식투쟁을 벌이고, 삭발을 하고, 40m 철탑에 올라갔다. 애초 380명이 파업에 동참했으나 2008년 11월 법적 소송으로 투쟁방식을 바꿀 무렵엔 10분의 1도 남지 않았다. 이탈한 승무원들은 회사와 타협해 자회사로 옮기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34명의 투쟁은 처절했다. 이들은 어느덧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적 존재가 돼 있었다.

    이번 판결은, 불법과 편법이 판치는 비정규직 고용의 문제점을 법원이 인정하고 시정을 명령했다는 점에서 공공기관 노사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코레일은 오씨 등과 직접 근로계약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계약기간이 끝나면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경우 근로계약을 체결할 의무가 있었는데도 계약갱신을 거부했다. 오씨 등이 자회사로 이적하지 않았다고 해서 해고한 것은 정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무효다.”

    이제 사람 얘기를 해보자. 꽃다운 청춘을 투쟁의 강물에 흘려보낸 그녀를. 20대의 앳된 처녀에서 30대의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한 그녀를.

    서울 용산역 대합실에 나타난 그녀에게선 코스모스 향기가 풍겼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다. 선입관인지 몰라도 투사 이미지는 아니다. 지난 4년간 투쟁의 선봉에 섰던 그녀는 지금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다. 5개월 됐다. 지난해 11월 결혼했다.

    우리는 용산역사 6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의 끈적거리는 햇살이 테이블 위에서 노닥거렸다. 창밖으로 펼쳐진 용산의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용산은 희망의 도시이자 분노의 도시다. 비정한 도시다. 제2의 강남을 꿈꾸는 장밋빛 청사진 이면엔 철거민들의 한과 고통이 서려 있다. 인터뷰는 내가 주제어를 던지면 그에 맞춰 그녀가 고백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분노

    “5년간 싸우는 동안 사장이 5차례 바뀌었어요. 초기의 이철 사장을 빼고는 다들 대화 자체를 거부했어요. 정부, 특히 노동부에 대한 분노가 컸지요. 국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몇 의원은 도와줄 것처럼 말해놓고는 실제로는 도와주지 않았어요. 위선이었던 거죠. 물론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철도공사죠. 법적인 판단에 맡기겠다, 1심 판결이 나오면 따르겠다고 약속하고는 이제 와 항소하겠다니까요. 무책임하고 기만적인 행위죠. 이는 단체협약 위반이기도 합니다. 단협안에 1심 판결에 따른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거든요.”

    오씨의 말마따나 코레일은 1심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 판결 직후 “여승무원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았다는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다. 고등법원에서는 다른 결과가 있을 것”이라며 항소 방침을 밝혔다.

    “그간 회사는 진정성을 갖고 사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인 적이 없다”고 비판한 그녀는 사측의 불법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노동부가 철도공사에 보낸 공문을 보면 ‘KTX 여승무원 일은 외주화할 수 없다’고 돼 있어요. 승무 업무는 상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도급이나 파견은 불법이라는 거죠. 철도공사의 정규직 인원은 제한돼 있어요. 그래서 편법으로 홍익회를 이용해 채용한 거죠. 입사 당시 잠시 위탁근무를 하는 것이라며 2년 뒤엔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었죠.”

    2004년 1년짜리 계약직으로 입사한 오씨는 소속이 몇 차례 바뀌었다. 하는 일은 똑같은데 회사 이름이 계속 바뀐 것이다. 하나같이 코레일의 자회사였다. 2004년 3월 철도공사는 재단법인 홍익회에 승무 서비스를 이관하고 오씨를 비롯한 여승무원들을 공개 채용했다. 홍익회는 철도청 근무 중 공상(公傷)으로 퇴직한 자와 순직한 자의 유가족에 대한 원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다.

    2004년 12월 승무 업무가 한국철도유통으로 넘어가면서 홍익회는 원호사업만 맡게 됐다. 오씨의 소속은 철도유통으로 바뀌었다. 철도유통은 승무 서비스와 함께 철도역 구내 및 열차 내 식품과 물품 판매를 맡았다. 여승무원들은 코레일이 자신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은 채 승무 서비스를 철도유통에 넘기자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철도유통 근무는 불법파견에 해당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승무 업무의 특성상 코레일이 실질적인 사용자 지위에 있으므로 자신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정부기관에 진정서를 넣는 한편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면서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2006년 5월 철도유통은 새로 설립된 코레일의 또다른 자회사인 KTX관광레저로 승무 서비스를 이관했다. 여승무원들의 신분은 다시 관광레저 직원으로 바뀔 판이었다. 철도유통이나 관광레저 같은 자회사의 근무여건은 본사에 비해 열악했고 보수도 낮았다. 여승무원들이 파업을 결행하자 철도유통은 이들을 모두 해고했다.

    고통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육체적 고통은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가족과 주변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건 견디기 힘들었어요. 가족이 힘이 되기는 하지만, 반대로 가족 때문에 나간(이탈한) 사람도 많아요. 가족과 친구들을 이해시키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고립됐다는 느낌이었지요.”

    어지간히 마음고생한 게 아닌 모양이다. 하긴 명색이 기자인 나만 해도 그들이 왜 싸우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고작 좀 안됐다고 여겼을 뿐이다. 오씨는 “파업을 3년이나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엔 한 100일 할 줄 알았어요. 몇 번 고비를 넘기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되겠지 하다가 3년이 지나버린 거죠.”

    노조의 명칭은 전국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KTX승무지부였다. 그녀는 지부장을 지내면서 대언론 창구 노릇을 했다. 자연스럽게 해고된 여승무원들의 대표로 부각됐다.

    2008년 9월 철탑농성을 끝낸 후 여승무원들은 현장투쟁을 접었다. 한 달 뒤 법원에 ‘근로자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가처분신청을 낸 데 이어 11월엔 본안소송을 냈다. 1년10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나온 것이다.

    오씨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을 묻자 철탑농성을 꼽았다. 2008년 8월 그녀와 동료 4명은 서울역에 있는 40m 높이의 조명철탑 위로 올라갔다. 철탑농성은 한 달 가까이 계속됐다. 임시 막사에서 새우잠을 잤다. 생리적인 문제는 간이시설에서 해결했다. 먹을 것은 밑에서 올려 보내졌다. 그녀의 고백은 뜻밖이었다.

    “정말 올라가기 싫었어요. 무서웠거든요.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올라갔습니다.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요. 거기서 그만두자니 너무 억울했지요.”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철도공사는 더욱 강경해졌다. 타협도 없었다. 공사 측은 그녀들을 관광레저 직원으로도 못 받는다고 쐐기를 박았다.

    “너무 분했어요. 철도공사를 압박하려 (철탑에) 올라간 것인데 전철 운행에 방해가 안 되니까 그냥 내버려두더라고요. 모든 노동운동이 다 그런 것 같아요. 대화하다 안 되면 극한투쟁을 벌이는 거죠. 저도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투쟁

    2006년 봄 파업이 시작됐다. 오씨는 조합사무실 침낭에서 잤다. 집에는 2~3주에 한 번씩 잠깐 들렀다. 용산역과 서울역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돌렸다. 꿈쩍도 하지 않는 공사 측을 압박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국회 헌정기념관을 점거해 한명숙 당시 총리 면담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음식 반입이 차단된 채 며칠간 떨던 여승무원들은 강제로 끌려나왔다. 국회와 정부청사, 청와대 앞에서 돌아가면서 1인 시위도 벌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가서도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명절 때 서울역과 용산역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데 아는 사람이 볼까봐 모자를 푹 눌러썼어요. 초라한 기분이었지요. 정말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던지. 혹 가다 친구라도 만나면 하루 종일 우울했지요.”

    오씨는 파업을 하면서 경찰서 유치장에 세 번 갇혔다. 구속 직전까지 몰렸던 상황도 있었다. 점거농성으로 기소돼 법정에 서기도 했다. 코레일은 파업에 참여한 여승무원들에 대해 업무방해를 이유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법원은 회사 손을 들어줬다. 배상금은 조합비로 해결했다.

    파업이 길어지면서 승무원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투쟁만 하다가는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단체로 조조영화를 보고 한강에 모여 운동을 했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밤에는 통닭과 맥주를 시켜 먹었다. 오씨는 틈틈이 불어공부를 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탈출구가 필요했어요. 남자들은 파업하면 밤에 술 마시잖아요. 우리는 그 시간에 뮤지컬을 봤지요. 콘도에 가서 토론하고 온천욕도 하고. 술 마시는 거나 그거나 비용은 똑같지요. 20대 여자들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찾은 거죠.”

    혹시 학생 시절 운동권이었을까.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노동운동이라곤 해본 적도 없고요. 아무것도 모르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싸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투쟁이라는 게 낯설었지요. 동지라는 말도 어색했고요. 파업할 때도 ‘철의 노동자’나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전투적인 노래는 안 불렀어요. ‘바위처럼’이나 그 뭐 있잖아요. 생각이 잘 안 나네. 하여간 밝고 경쾌한 노래를 많이 불렀지요.”

    그녀는 끝내 그 생각이 안 난다는 노래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나는 그 노래가 혹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가 아닐까 싶었으나 굳이 그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눈물

    눈물 얘기를 물어보는데, 그녀는 햇살처럼 웃으면서 대답했다.

    “철탑에 올라갈 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올라가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갔지요. 부모와 남자친구가 나를 어떻게 볼까,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원래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 편이에요. 아무리 힘들어도 찔끔거리는 정도죠. 그런데 그때는 펑펑 울었어요. 정말 힘들었거든요.”

    좌절

    “이철 사장 있을 때는 기대가 컸던 만큼 좌절도 컸어요. 노동부에서 시정조치를 권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대가 컸지요. 아,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며칠 만에 더 큰 좌절을 맛보았지요.”

    내부적으로는 동료들의 이탈에 큰 좌절감을 맛봤다. 파업한 지 500일쯤 됐을 때 많은 동료가 빠져나갔다. 정말 우리가 끝까지 싸울 수 있을까, 회의가 밀려들었다. 철탑까지 올라갔는데도 해결되지 않았을 때는 절망의 끝을 보는 듯싶었다.

    “동료가 하나둘 떠나는데, 가지 말라고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없는 거예요. 그냥 참아보자는 얘기밖에. 남아도 후회하고 나가도 후회하는 상황이었지요. 워낙 투쟁기간이 길다 보니 내부적인 갈등도 생겨났어요. 나간 사람들도 두고 온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을 거예요. 나간 승무원들이 밉다가도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모두 피해자인 셈이죠.”

    외로움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용산역 대합실. 오미선씨는 “정말 제대로 된 고객 서비스를 하고 싶다”고 복직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1심 선고가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난 이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였어요. 그간 주변에 KTX 승무원이라고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웠거든요.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바라보니까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잖아요.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우리 사회는 남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해요.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만의 문제로 치부하죠. 그래서 늘 외로웠죠.”

    원래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학 다닐 때는 학과에 남학생이 훨씬 많아 기를 못 폈다(체육학과를 나온 그녀는 한때 아르바이트로 수영강사를 했다). 파업을 겪으면서 남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회문제에도 눈을 뜨게 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이 여전히 심각하잖아요. 기형적 정규직도 많고. 너무 힘이 약해요.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후회

    “노조 가입을 안 했다면 지금쯤 7년차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을 텐데…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해요. 몰라도 될 걸 알아서 더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다시 하라면 못해요. 동생이 이런 일에 나선다면 도시락 싸들고 말릴 겁니다.”

    오씨에 따르면 중간에 타협의 여지도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내키지 않은 타협이었지만.

    “절충할 수 있을 때 절충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요. 주변에 끼치는 파급효과도 컸을 테고. 싸움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졌어요. 만약 회사와 타협했다면 투쟁 명분이나 정신이 사라졌겠지요. 되게 부담스러웠어요. 노동계에서 비정규직의 꽃이니 상징이니 하면서 지원하는 게. 저는 성격상 강경파는 못 돼요. 그런데도 상황에 몰려 강경한 척했지요. 철탑엔 정말 올라가고 싶지 않았어요. 책임감 때문에 올라간 거예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는 걸 느꼈죠.”

    가족

    “엄청난 경쟁을 뚫고 승무원이 됐을 땐 정말 내가 대단한가 싶었지요. 여기저기서 축하전화가 걸려오고. 아빠는 주변에 자랑하느라 정신없었지요. 승무원 제복이 자랑스러웠어요. 자부심도 있었고.”

    오씨는 딸만 넷 있는 집안의 장녀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들 같은 딸’이라며 늘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의 깊은 애정은 파업기간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댁 쪽은 달랐다.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TV에 농성 중인 그녀의 모습이 비치면 “며느리 될 사람이 독해 보인다”고 걱정스러워했다. 전화를 걸어 “너, 힘들게 살지 말아라. 즐겁게 살아야 한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1심 판결이 나온 후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다시는 그런데 나서지 말라. 뭐든지 너무 앞장서지 말라”고 충고했다. 반면 친정부모는 마냥 자랑스러워했다. 심지어 “가문의 영광”이라며.

    “아빠는 전에는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보면 욕했어요. 그런 분이 딸 때문에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시위대에 박수를 쳐줘요. 동생들도 다 저를 지지하고요.”

    사랑

    오씨가 뒷날 결혼하게 된 남자친구를 처음 만난 건 2006년 7월. 파업에 들어간 지 3개월쯤 됐을 때였다. 해외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남자친구는 1년에 한두 번 귀국했다. 그녀도 파업을 하고 있어 애초 정상적인 데이트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연히 전화와 e메일 데이트를 즐기게 됐다. 그녀는 주로 새벽에 e메일을 써 보냈다.

    “사실 뜨거운 사랑을 했던 건 아니에요. 전화와 편지를 자주 하다 보니 사랑이 싹 트더군요. 그는 ‘뭘 하든 지켜봐주겠다’고 했어요. 돈은 자신이 벌겠다며. 그 말이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됐어요. 해외에서 인터넷을 통해 제가 점거농성하고 연행된 걸 알았나 봐요. 그런데 그의 반응은 ‘왜’가 아니라 ‘괜찮아?’였어요. 내가 굳이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었지요. 그만큼 이해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애틋함보다는 편안함으로 다가왔지요. 인생의 동반자라는 느낌. 그는 우리 가족도 잘 포섭했어요. 연말이나 명절 때 나 대신 우리 집에 찾아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어요.”

    투쟁의 원동력은 열정이다. 싸워본 자는 안다. 가열한 분노의 옆구리로 열정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열정은 때로 사랑으로 승화한다. 오씨의 사랑도 극한투쟁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으리라. 파업에 동참했던 한 여승무원은 자신을 조사했던 경찰관과 결혼까지 했다. 경찰에 연행돼 조사받다가 불꽃이 튄 것이다. 이래서 남녀간 사랑은 불가해한 것인가 보다.



    그녀가 한숨을 훅 내쉬었다. 꿈 많던 20대는 이제 아련한 추억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승무원의 꿈을 키워왔다. 제복이 참 멋있어 보였다.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뭔가 나눠주는 걸 좋아했던 그녀는 서비스직이 자신에게 딱 맞다고 생각했다.

    “KTX 승무원 생활은 육체적으로 고단했지만 보람 있었어요. 고객이 나의 작은 서비스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때 가장 보람을 느꼈지요. 하루에 8~9시간 서서 근무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어요.”

    법원 판결로 복직의 길이 열렸지만 공사 측의 완강한 태도로 봐 실제로 복직이 이뤄질지는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녀의 꿈은 물론 복직해 다시 승무원 제복을 입는 것이다.

    “광화문, 여의도, 강남, 서울역을 돌면서 가장 부러웠던 게 직원증을 목에 걸고 다니는 회사원들이었어요. 우리끼리 농담으로 휴대전화기라도 걸고 다닐까, 했죠. 26세에 입사해 파업을 하고나니 32세가 됐어요. 이제는 다른 데 취업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2007년 이후엔 이력이 없어요. 공백기죠. 몇몇 회사에 원서를 내봤는데 다 퇴짜 맞았어요.”

    그녀는 “일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철도공사에 대한 애착이 커요. 단 하루 일하고 그만두더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어요. KTX 열차만 보면 반가워요. 고객으로서 KTX를 타보니 고객 불만을 알겠더라고요. 객실에 승무원이 안 보이는 겁니다. 사실 지금도 승무원 수가 모자라요. 20대엔 예뻐 보이고 싶을 뿐이었죠. 지금은 정말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기회가 주어질지….”

    사람을 나누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명분파와 실리파로 나누는 것도 그중 하나다.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은 대체로 실속 없는 삶을 살아간다. 세속적인 기준에 비춰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출세하고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실리를 좇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명분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명분을 내건 싸움은 멋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초라하기만 하다. 이기기도 힘들지만, 이겨도 남는 게 없다.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그런데 그게 다일까. 그래도 세상이 아름다운 건 명분을 위해 싸우는 바보 같은 사람들 때문 아닐까. ‘그까짓’ 정규직 약속을 안 지켰다고 싸우느라 그토록 좋아하던 승무원 일도 못하고 금쪽같은 청춘 4년을 허비한 오미선씨는 정말 바보다. 그 바보에게 단 하루도 복직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코레일이라는 공공기관은 잔인한 집단인가. 허준영 사장의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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