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태풍이 지나간 자리, 사랑이 지나간 자리

  • 황주리│서양화가│

    입력2010-10-01 13:4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태풍이 지나간 자리, 사랑이 지나간 자리

    <그녀와 함께 춤을>, 캔버스에 아크릴, 91×73㎝, 2005, 황주리 作

    무서운 밤이었다. 유리창이 떨어져 나가고 바람소리가 귀신소리처럼 들리던 잠 못 이루던 밤, 나는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경기도 양평의 호젓한 강가에서 혼자 사는 친구는 바람소리만 들어도 무섭다고 했다. 정전이 되고, 정원의 나무들이 다 쓰러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된 집에 홀로 남아 친구는 탄식을 했다. 뉴스를 보니 그 태풍 일던 날, 바람에 날아다니는 기왓장에 맞아 즉사한 노인도 있었다. 고층 아파트의 유리창들이 깨져 땅바닥에 유리 조각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다행히 무사한 밤을 보낸 나는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한강변에 나가보았다. 큰 나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고, 작은 꽃나무들은 거의 다 허리가 꺽인 채 쓰러져 있었다. 무사한 것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휘어가며 자신을 지키는 갈대였다.

    지진이나 태풍처럼 천재지변에 의해 죽음을 맞는 일은 너무 허망하다. 슬퍼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허망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

    얼마 전의 일이다. 화랑을 경영하는, 어머니의 오랜 친구 한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입원했다가 별 이상이 없어서 곧 퇴원했다고 했다. 다음날 갑자기 나빠져서 다시 입원, 급작스러운 괴사현상이 일어나면서 한 시간도 안 되어 돌아가셨다.

    그날 밤 문상을 간 나는 늘 아줌마라고 부르던 그분의 영정을 바라보며 처연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재작년인가 전시차 같이 외국에 나갔을 때 내가 찍은 사진들이 하도 근사하게 나와 e메일로 보내드려야지 생각만 하면서 보내지 못했다.

    그뿐인가? 올여름 그리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돌아가면 와인을 좋아하는 아줌마에게 와인 한 병 들고 꼭 찾아가야지 했더랬다. 날 때부터 나를 보아온 아줌마와 나의 인연은 사실 깊다면 참 깊었다. 어릴 적 아줌마에 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쯤인 것 같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 옥구슬이 굴러갈 것 같은 목소리, 작고 통통한 몸매와 주름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은 팔십이 다 될 때까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도 감각도 어느 젊은 사람보다 훨씬 젊었다. 인터넷이 이 나라에 처음 상륙했을 때, 적지 않은 나이로 인터넷을 배우기 시작했던 놀라운 분이었다. 그 통통한 몸매에도 옷을 입는 감각이 어찌나 뛰어난지, 외국에 나가서도 멋진 한복을 입고 자태를 뽐내며 걸어갈라치면 온 사람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 뿐인가? 이 세상의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은 다 아줌마와 처음 먹어본 것들이다. 어릴 적 미8군 안에 들어가 처음 먹어본 피자가 그랬고, 파스타가 그랬다. 그래도 아줌마는 이 세상에서 김치와 고추장과 흰 쌀밥을 제일 좋아했다.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쌀밥이라도 나오면 가지고 갔던 김치와 고추장을 꺼내 먹으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화가가 된 나와 화랑을 경영하는 아줌마는 운명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화가로 데뷔한 곳이 바로 그분이 경영하던 통의동에 있는 ‘진 화랑’이다. 전시를 같이 다니면서, 혹은 뉴욕에 있는 내 스튜디오에서 같이 밤을 지새우면서 나는 늘 그분의 연인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 사랑하면 비극으로 끝난다고 말하던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이제 그분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가 화가로 성장하면서 사실 우리 사이는 많이 소원해졌다. 아마도 아줌마는 나 때문에 섭섭한 일이 많았던가 보다. 다 키워놓으니까 다른 화랑들에서 전시를 하는 게 늘 섭섭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올여름 여행길에 갑자기 와인을 좋아하는 아줌마가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와인 한 병 들고 가 회포 한번 풀지 못하고, 나는 영안실에서 그녀의 영정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화랑 1세대 창업주 중의 한 사람인 아줌마가 화랑을 연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고,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아줌마의 화랑에 가면 천경자와 장욱진과 남관의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아줌마가 신사 한 분과 같이 오셨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그분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자 영친왕의 아들, 이구 선생이라 했다. 그 뒤로도 나는 그분을 여러 번 뵈었다. 친절하고 조용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닌 부드럽고 따뜻한 분이라는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분은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한국말로 대화하려고 애쓰셨다.

    1970년대 그때가 아줌마가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 같다. 사업차 외국을 자주 드나들던 아줌마와 그분은 그 시절 유럽뿐 아니라 중동에도 자주 갔다. 이란에서 아줌마가 가져다준 그림엽서들 속에서는 아름다운 모슬렘 양식의 지붕들과 금으로 만든 골동주전자나 낯설고 신비로운 장신구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이가 없던 아줌마는 특히 나를 참 예뻐했다. 그림을 잘 그리니까 나중에 유명한 화가가 될 거라고 늘 말씀하셨다.

    렘브란트 유화 화구를 처음 선물로 준 사람도 아줌마이고, 맨 처음 피카소 화집을 선사해준 사람도 아줌마다. 그녀가 외국에 다녀오면서 사다준 선물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화려한 레이스와 단추로 장식된 밝은 노란색 롱 드레스는 공주님이나 입을 만한 옷이어서, 나는 한 번도 입고 외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 주기도 아까워서 서랍에 몇 십 년을 넣어두고 있다가 며칠 전 찾아서 꺼내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아마도 액자에 넣어서 걸어두면 좋을 것 같은 그 옷을, 누구에게 선사하면 좋을까 망설이다가 결국 주인을 찾지 못했다.

    1989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문상을 와서 가장 슬프게 운 이가 바로 아줌마였다. 나는 그녀가 백 살까지 살 줄 알았다. 걷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건강했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에서 연인과 함께 찍은 오래된 사진 속 아줌마의 얼굴을 보니 참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본인들이 다 세상을 떠난 뒤, 사랑이 끝난 지 그렇게 오랜 뒤에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사랑의 속성에 관하여 잠시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척 사랑했다 해도 사랑의 유효기간이 지나 서로 다른 길을 걷다가 다른 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아름답지만, 사실 실제의 삶은 그저 계속 어긋나는 쓸쓸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게 아닐까?

    하긴 그게 바로 삶의 본질이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우리의 삶 속에서 피고 졌던 가장 아름다운 꽃, 사랑에 관하여 그저 아름답게만 추억하는 것이 사랑에 관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을 주제로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후일담을 들으니 아마도 이구 선생은 아줌마 유위진 여사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유일한 사랑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문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보다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그분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따로따로 떠올랐다. 날 때부터 질곡 많은 삶을 살았던 이 나라의 마지막 황세손과 10년을 함께했던 그의 연인이라는 설명보다는, 나는 그들의 사랑에 관해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사랑이 지나간 자리
    黃珠里

    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 ● 홍익대 대학원 석사(미학)

    미국 뉴욕대 대학원 석사(스튜디오 아트)

    개인전 28회, 국내외 단체전 300여 회 참가

    석남미술상, 선미술상 수상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 등 발간


    옛날 옛적에 어느 멋진 모던보이와 어느 아름답고 지적인 모던걸이 사랑을 나누었다. 그 자태가 얼마나 멋지던지 그들을 곁에서 구경하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한 바람의 태풍이다. 그 질곡 많았던 태풍이 지나간 허허로운 자리에 아침은 오고, 수천 개의 전봇대가 쓰러져도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내가 오래된 화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줌마가 그리운 목소리로 “주리 왔나?” 할 것만 같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