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보물로 재지정하라”

사진 진위 논란, 그 후

  • 김희연| 신동아 객원기자 foolfox@naver.com |

    입력2010-10-01 1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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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위 논란 겪으면서 보물서 해제
    • “연행 사진은 가짜 아닌 진짜” <국가보훈처>
    • “원판 아닌 신문에 실린 사진 보물 지정 어려워”<문화재청>
    • 역사적 가치, 무게 고민해야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보물로 재지정하라”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 선서식에서 찍은 사진.

    한일 강제병합 이후 100년이 흘렀다.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인물로 윤봉길 의사가 있다.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일제의 전승 기념식에서 윤 의사는 물병 모양의 폭탄을 일본 장성들에게 던졌다. 의거 이후 연행되는 윤 의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놓고, 문화재청과 유족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

    1932년 4월29일 오전 11시40분 중국 상하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고 1차 상하이사변에서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일제의 기념행사가 열렸다. 일본국가 제창이 끝날 무렵,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음으로 잠시 어수선해진 틈을 타 연단 중앙으로 폭탄이 던져진다. 당시 나이 25세의 대한남아 윤봉길이 던진 물병 모양의 폭탄이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군 사령관 등이 죽고 다수의 일본인이 다쳤다. 이날 윤봉길 의사가 현장에서 연행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국내외 여러 신문에 실렸다.

    거사가 있은 지 8개월 후인 1932년 12월19일 윤 의사는 두 발의 탄환을 맞고 목숨을 잃는다. 시신은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유족에게는 흰 손수건, 가죽지갑, 회중시계 등 유품만이 전해졌다. 이 유품들은 윤 의사 고향인 충남 예산 충의사의 윤봉길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인 1972년 8월15일 윤 의사의 일부 유품이 보물 제568호로 일괄 지정된다. 4년 후인 1976년 5월21일 몇 점이 추가로 보물로 지정됐고, 이때 윤 의사가 연행되는 모습을 담은 사진 2점도 보물에 포함됐다.

    연행 사진은 진짜인가?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보물로 재지정하라”

    일본 아사히신문 1932년 5월1일자 호외에 게재된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1999년 윤 의사의 연행 사진과 관련해 진위에 관한 의혹이 제기된다. 사진은 1932년 5월1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게재된 것이다. 일부 역사교과서에도 실린 것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이다.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가는 윤 의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사진이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한 쪽의 대표선수 격은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강효백 교수다. 상하이 주재 총영사를 지낸 강 교수는 사진 속 윤 의사의 모습이 한인애국단 선서식 사진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진위 논란이 가열된 뒤 연행 사진 2점은 보물에서 해제되기에 이른다.



    연행 사진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쪽에는 충남대 국사학과 김상기 교수(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가 있었다. 김 교수는 연행 사진 2점을 놓고 비교했다. 김 교수가 비교한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이 저술한 ‘도왜실기’에 실린 사진으로 일본 통신사 니혼뎀포(Nihon Dempo)가 제공해 영국계 신문이 보도한 것이다. 김 교수는 반일감정을 고려해 아사히신문이 윤 의사의 핏자국을 숨기려 한 것 같다며 두 장의 사진은 촬영 시점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현장에서 찍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윤 의사를 마지막으로 본 백범 선생이 ‘도왜실기’에 실은 사진이 가짜일 리 없다는 주장이다.

    연행 사진이 가짜라는 측의 강 교수는 사진 속의 얼굴이 겁에 질린 중년남성이라는 점에서 윤 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김 교수가 비교한 두 장의 사진 모두 일본에서 조작한 가짜라는 것이다.

    윤 의사 연행 사진의 진위를 가리려는 논쟁은 10년 가까이 이어진다. 세간의 흥미를 끌 만한 주제여서인지 성형외과 교수의 분석, 언론의 추적 보도, 네티즌의 관심 등이 뒤엉켜 혼전이 계속됐다. 2008년 8월8일 국가보훈처는 연행 사진이 진짜라고 공식 발표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의뢰해 내린 판정이다. 그러나 최초로 의혹을 제기한 강 교수는 아직도 승복하지 않고 있다.

    유족, “보물 해제 철회하라”

    국가보훈처가 연행 사진이 진짜라고 확인하자, 유족과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측은 보물 해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원래 보물이었으니, 진짜인 것이 확인된 만큼 다시 보물로 복원해달라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보물로 재지정하라”

    1946년 6월16일 임시 특별열차 ‘해방자호’에 실려 서울역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동생 윤남의 선생이 들고 가는 모습. 뒤에 한복을 입은 백범 김구 선생이 보인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보존국 유형문화재과 오춘영 연구관은 “신문의 사진, 즉 인쇄된 사진을 보물로 지정하기는 힘들다”면서 “많은 부수가 인쇄된 신문이 희소성이 있는지, 원판 사진이 아닌 ‘아사히신문’이 보물이 될 수 있는지 등 논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했다. 문화재청도 이 연행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보물 지정은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하고 있다. 다음은 문화재보호법 4장 1절 23조(보물 및 국보의 지정) 1항의 내용이다.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지정할 수 있다.”

    문화재위원회는 대통령령에 의해 위원장 1명, 부위원장 2명을 포함해 120명 이내의 위원으로 이뤄진다. 유형문화재의 지정과 해제는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에서 다룬다.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은 역사상 또는 예술상 보존가치가 있는 것을 문화재로 지정하도록 하고 있으며, 시행규칙에 따르면 근대매체인 사진 가운데 ‘파손·부식·훼손이 심하여 판독할 수 없는 것, 수록내용 중 중요한 부분이 멸실되어 자료로서 가치가 없는 것, 같은 종류의 매체가 현존하는 것이 많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도록 했다.

    윤 의사 연행 사진은 신문에 실린 것이기에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진과 같은 근대매체의 산물이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어서, 보물과 시·도문화재를 막론하고 기록유산 근대매체 시청각류로 분류되는 문화재가 거의 없다. 우국지사 황현 선생의 사진이 그가 죽은 후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와 함께 보물로 지정돼 있고, 대한제국 시기 세브란스병원에서 선교의사 에비슨과 조수 박서양이 수술하는 장면을 담은 유리 건판 필름이 등록문화재에 이름을 올린 정도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동언 연구위원은 “독립운동가와 관련한 자료는 체포나 연행 당시 사진이 실린 신문인 사례가 많다”면서 “연구자에게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하나 문화재 지정에 관해서는 애매하고 조심스럽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윤봉길 의사 사진의 진위 논란은 사람들을 자극하는 이야깃거리이긴 했으나, 그보다는 연행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 윤 의사 연행 사진이 어떻게 보물로 지정됐을까? 문화재보호법은 1962년 제정됐고 34차례 개정됐다. 구 법률은 체계가 복잡하고 난해해 올해 1월 ‘문화재보호법’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문화재수리 등에 관한 법률’의 세 갈래로 정리됐다. 1976년 연행 사진을 보물로 지정할 당시의 문화재보호법은 지금과 다르다. 사진과 같은 근대매체에 관한 특별한 언급이 없고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다소 모호한 기준만이 존재했다. 심의를 맡은 문화재위원회도 지금보다 적은 수인 30인 이내로 구성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문화재 관리 기준 엄정해야

    물론 법률이 개정된다고 해서 그에 맞춰 문화재 지정을 죄다 재검토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보물은 화재로 인해 없어지거나 국보로 승격되지 않는 한 해제되는 일이 거의 없다.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은 진위 의혹이 불거져 해제됐다가 국가보훈처가 진짜라고 결론지은 뒤 복원과 관련해 논란이 일어난 특이하고 불운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보물로 재지정하라”

    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주씨는 “보물로 복원을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재청은 사진이 실린 신문은 애초 보물로 지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본다. 윤봉길기념사업회와 유족 측은 문화재청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윤봉길기념사업회 지도위원이자 윤 의사의 조카인 윤주 선생은 “이제는 학계의 원로가 된 예전 문화재위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후배들이 심의 한 번으로 해제한 뒤, 보물로 복원을 못하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유족 처지에선 문화재청의 태도에 일관성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문화재청이 문화재 관리에 소홀한 모습도 보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문화재청은 국가보훈처가 진짜라고 공식 인정한 뒤이긴 하지만, 의혹에 휩싸였던 사진을 보물로 재지정하는 것이 적잖이 부담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원판사진이 없는 상황에서 최초 보도된 신문의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윤주 선생은 “연행 사진의 진위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10년이 걸렸다”면서 “보물로 재지정하는 일 또한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말했다. 윤봉길기념사업회 측은 앞으로 관련 책자를 내고, 학술대회를 개최해 윤 의사 연행 사진을 보물로 재지정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펼칠 예정이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을 도시락 모양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폭탄 두 개를 준비했으나 터뜨린 쪽이 물병형, 미처 못 던지고 남은 쪽이 도시락형이어서 이쪽이 더 유명해진 탓이다. 기념식이 열린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물품이 도시락, 물통, 일장기라서 폭탄의 모양이 그렇게 정해졌다고 한다.

    윤 의사는 젊은 나이에 거사를 치르고 세상을 떴으나 15세에 결혼해 이미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농촌계몽운동 차원에서 야학을 통해 학생을 가르치고, 20세에는 ‘농민독본’이라는 교재를 손수 만들기도 했다. 22세에는 농촌진흥과 자립을 목적으로 ‘월진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윤 의사는 상하이에서 백범 선생을 만나 자신의 결의를 밝힌다. 1932년 1월에는 그보다 앞서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윤 의사는 이때의 폭탄보다 성능이 좋은 것을 구해 투척 연습까지 하면서 거사의 성공을 다짐했다.

    “이러한 일이 조선 독립을 위해 직접적인 효과는 없다 할지라도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조선의 건재함을 알릴 수는 있다.”

    윤 의사의 ‘판결서’에는 이런 대목이 남아 있다. 윤 의사는 연행 당시에도 당당한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80년 세월이 흐르고 난 지금 우리는 희미한 한 장의 사진이 실린 신문들로 윤 의사의 의거와 족적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 사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그만큼 가치 있는 근대 사료가 부족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상하이 의거 가치

    해제된 연행 사진 외에 보물 제568호로 지정돼 남아 있는 윤 의사의 유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선서문, 유서, 손수건, 회중시계, 농민독본, 월진회 통장…. 연행 사진이 과연 이들보다 역사적 가치가 떨어지는 걸까. 연행 사진이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는 심각히 고민해볼 일이다.

    문화재, 특히 근대 유산에 대한 국가 차원의 합리적인 기준 설정과 종합적인 관리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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