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빛바랜 ‘사대천왕’의 꿈 … 두 남자는 그래도 칼을 간다

리위안차오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 보시라이 충칭시 당 서기

  • 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0-10-01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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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전 차세대 ‘빅4’의 일원으로 꼽히던 리위안차오와 보시라이.
    • 신진기예 리커창과 시진핑에 밀려 나란히 물을 먹긴 했지만, 가슴속 뜨거운 야망은 식지 않았다. 부민강성(富民强省)의 인간 본위 경제성장으로 후진타오의 눈도장을 받은 리위안차오는 640만 공산당 간부의 인사권을 틀어쥐었고, ‘범죄와의 전쟁’과 부패 척결을 기치로 내건 보시라이는 ‘대륙의 포청천’으로 불리며 인민의 지지를 끌어 모으고 있다. 과연 두 사내는 여봐란듯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아올 것인가.
    빛바랜 ‘사대천왕’의 꿈 … 두 남자는 그래도 칼을 간다

    리위안차오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리위안차오(李源潮)와 보시라이(薄熙來). 이들은 2007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가 열리기 직전만 해도 시진핑(習近平), 리커창(李克强)과 함께 차세대 지도부를 구성할 사대천왕(四大天王)으로 불렸다. 사천왕은 불교 용어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왕천(四王天)의 주신인 4명의 외호신(外護神·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을 가리킨다. 그러니 이들 4명이 2012년 가을 이후 10년간 중국의 핵심지도부를 구성할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제17차 당 대회 직전 시진핑은 상하이(上海) 당 서기였고, 리커창은 랴오닝(遼寧)성 서기, 리위안차오는 장쑤(江蘇)성 서기, 보시라이는 상무부장으로 막상막하의 지위에 있었다. 이들이 2012년 이후 중국 권력서열 ‘빅4’인 당 총서기 및 국가주석(1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2위), 국무원 총리(3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전국 정협 주석·4위)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었다.

    리커창·시진핑에 밀려나

    하지만 제17차 당 대회가 끝난 다음날인 2007년 10월22일 열린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드러난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부 구성은 이 같은 사천왕 구도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2002년 이후 태자당(太子黨·중국 당, 정, 군, 재계 고위층 자녀)의 선두주자로 불려온 보시라이는 급부상한 다크호스 시진핑에 크게 뒤졌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한직을 떠돌다 장쑤성 서기까지 어렵게 올라온 리위안차오 역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의 선두주자이자 후배인 리커창을 따라잡지 못했다. 두 사람은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부인 9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포함된 시진핑과 리커창에 밀려 25명의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올라가는 데 만족해야 했다.

    제17차 당 대회 이후 단행된 인사에서 가장 불만이 큰 사람은 보시라이였다. 제16차 당 대회가 열린 2002년 한때 제4세대 지도부 구성을 앞두고 원자바오(溫家寶) 현 총리를 제치고 총리에 임명되리라는 소문까지 나돌던 보시라이였지만, 5년 뒤인 제17차 당 대회 이후엔 차세대 총리는 물론 부총리로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당 대회 직후 주어진 자리는 충칭(重慶)시 서기. 이는 6년 연하의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서기가 이미 맡았던 자리다. 그만큼 차세대 지도부 경쟁의 선두대열에서 크게 멀어진 것. 사천왕 중 한 사람이라는 말도 더는 나오지 않는다. 되레 여섯 살 연하인 왕양이 사천왕으로 거론되고 있다.



    보시라이는 인사에 불만이 많았는지 충칭시 당 서기로 안배를 받은 뒤에도 한참동안 상무부장으로 대외활동을 계속하며 충칭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제17차 당 대회 직후 중국 공산당의 새 지도부가 공표된 뒤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조직부장이 된 시진핑과 리커창, 리위안차오가 베이징에 도착해 신고하고 위정성(兪正聲) 후베이(湖北)성 서기가 상하이 서기로 가는 등 임무 교대가 속속 이뤄졌지만, 보시라이는 11월 말까지 베이징에 눌러앉았다.

    이에 따라 광둥성 당 서기에 임명된 왕양과 부총리로 올라와야 할 왕치산(王岐山) 광둥성 서기 역시 자리를 옮길 수 없었다. 홍콩 언론은 그해 11월13일 열린 충칭시 위원회 제3기 제2차 전체회의에서 왕양과 보시라이가 각각 이·취임식을 할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보시라이는 이 회의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중앙조직부장 리위안차오가 보시라이와 함께 충칭에 도착한 것은 한참 뒤인 11월29일.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은 이틀 뒤인 12월1일에야 “며칠 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왕양과 보시라이를 각각 광둥 및 충칭 서기에 임명하고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될) 왕치산은 더 이상 광둥성 서기를 맡지 않도록 했다”고 보도해 인사이동이 완료됐음을 공표했다.

    빛바랜 ‘사대천왕’의 꿈 … 두 남자는 그래도 칼을 간다


    나이가 뭐길래…

    보시라이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자신의 나이다. 1949년 7월생인 그는 후진타오(胡錦濤), 우방궈(吳邦國), 원자바오와 함께 현 지도부, 즉 제4세대 지도부에 진입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진입에 실패했고 홍콩의 정치 분석가들은 그가 2012년 가을 이후 구성될 제5세대 지도부에서 주요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후진타오 지도부 출범 후 그가 미처 예상 못한 일이 발생했다. 당과 국가의 지도부 연경화(年輕化) 정책에 따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위원은 70세, 부장(장관)급은 65세, 부부장(차관)급은 60세로 나이가 제한됐다. 게다가 2007년 10월 제17차 당 대회 때는 중앙정치국 위원의 제한연령이 만 68세까지 내려왔다. 당 대회 개최시점을 기준으로 만 68세가 넘으면 장·차관급 이상의 직책에 임용될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에 당선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17기 중앙위원 선출과정에서 적용된 연령제한은 이보다 더 엄격했다. 당 대회 개최시점에 만 68세가 넘은 사람은 물론, 당 대회 개최 당해연도의 1월1일을 기준으로 만 67세가 넘은 사람은 모두 중앙위원으로 선출될 수 없도록 한 것. 이에 따라 제17차 당 대회가 열린 2007년의 새해 첫날 현재 만 67세를 넘은 1940년 1월1일 이전 출생자는 모두 중앙위원에서 탈락했다.

    제17차 당 대회의 인사를 주도한 쩡칭훙(曾慶紅)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은 1939년 7월생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설정한 연령제한을 어길 수 없다면서 후진타오의 거듭된 유임 요청에도 퇴진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발휘할 능력은 모두 발휘했다. 내가 질 책임도 모두 졌다. 이제 나는 중앙 지도부의 어떤 자리에도 있을 이유가 더는 없다”며 끝내 물러났다. 대신 그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자신의 계파인 왕강(王剛), 시진핑, 보시라이, 왕치산, 멍젠주(孟建柱), 저우샤오촨(周小川), 차오쭝화이(喬宗淮), 류위안(劉源) 등을 여기저기 깔아놓았다. 퇴진하더라도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보시라이는 쩡칭훙보다 꼭 열 살 아래다. 따라서 201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2007년에 쩡칭훙이 물러났듯 2017년 열릴 제19차 당 대회 이후엔 중국 지도부 자리에 머물 수 없다. 10년간 최고지도부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은 권력서열 1~4위의 핵심 요직은 차지할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장쩌민 전 총서기가 최고권좌에 오른 이후 당 총서기 및 국가주석,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총리, 전국 정협 주석 등 핵심 요직은 10년마다 주기적으로 교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1950년 11월생인 리위안차오는 비록 2007년 17차 당 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상승세를 타고 있다. 우선 201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가능성이 100%에 가깝다. 그리고 일단 진입하면 2022년, 즉 72세가 될 때까지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

    ▼ 리·위·안·차·오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780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지난해 말 현재) 중국 공산당원 중 간부 640만명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당내 최고의 핵심 요직이다. 특히 각 성의 당 서기와 성장 등 4100여 개 요직은 모두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의 손을 거쳐 결정된다.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제17차 당 대회 이전엔 장쩌민과 쩡칭훙의 측근인 허궈창(賀國强) 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맡고 있었다. 2002년 말 당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후진타오 총서기는 집권 전반기(2002년 가을~2007년 가을) 당의 인사를 주무르는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지 못한 것이다. 집권 제2기에 들어선 후 주석이 리위안차오를 중앙조직부장에 앉혔다는 것은 리 부장이 그만큼 후 주석의 신임이 두터운 퇀파이의 핵심 멤버임을 뜻한다.

    리 부장은 후 주석이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하던 1983년 12월부터 1985년 11월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끝으로 구이저우(貴州)성 당 서기로 옮길 때까지 약 2년간 후 주석과 함께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일했다. 후 주석은 1982년 12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돼 1984년 12월 제1서기로 승진했다. 이 시기에 같이 일한 사람들이 바로 리 부장을 비롯해 리커창 상무위원과 류옌둥(劉延東) 정치국 위원이다. 이들 3인은 현재 퇀파이의 핵심이자 후 주석의 측근이다.

    리 부장은 당시만 해도 서기처 서열에서 처음엔 후보위원에 불과했던 리커창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후 주석 후임으로 쑹더푸(宋德福)가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선출됐을 때 리위안차오는 9명의 중앙서기처 서기 중 류옌둥 다음의 차석이었다. 반면 리커창은 서열 6위였다.

    빛바랜 ‘사대천왕’의 꿈 … 두 남자는 그래도 칼을 간다
    하지만 후 주석과의 인연을 계기로 승승장구한 리커창과 달리 리 부장은 중앙서기처 서기를 마친 뒤 중앙대외선전소조 1국장, 중앙대외선전소조 부조장, 중앙대외선전판공실 부주임, 국무원 신문판공실 부주임, 문화부 부부장 등 약 10년간 한직을 떠돌았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때 공청단 일부 간부들이 학생시위를 지지한 것과 관련해 류옌둥과 함께 문책을 당한 것. 당시 리커창은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가라”며 여러 차례 권고해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로 인해 그는 리커창에 뒤처졌고 공청단의 5세대 1인자에서 2인자로 전락했다.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장쑤성 서기로 임명된 2002년부터다. 경제성장 방식의 전환 필요성에 대해 일찍이 후 주석과 교감을 나눈 그는 다른 지방 지도자들이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과학발전관’과 ‘조화사회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장쑤성 서기로 취임하자마자 종전의 구호인 ‘강성부민(强省富民)’을 ‘부민강성(富民强省)’으로 바꿨다. 앞뒤 글자만 바꿔놓은 것 같지만, 전자는 물질을 우선시하고 후자는 인간을 본위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장쑤성의 발전계획도 국내총생산(GDP) 성장만 중시하는 방식에서 성내 전 지역이 골고루 잘사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과거 장쑤성은 경제가 매우 발달한 창장(長江) 유역의 쑤난(蘇南) 경제권, 쑤난보다는 못해도 그런대로 살 만한 쑤중(蘇中) 경제권, 역사 및 지리적 원인으로 인해 경제가 매우 낙후된 쑤베이(蘇北)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같은 성에 제1세계부터 제3세계까지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

    골고루 잘사는 省으로!

    그는 지역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2005년 3월 ‘쑤베이 진흥을 위한 산업건설 전략’을 세우고 산업과 재정, 과학기술, 노동이 쑤난에서 쑤베이로 흐르도록 ‘4개 전이(轉移)’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2006년 처음으로 고정자산 투자와 재정수입, 외자도입, 수출액 등 각종 경제지표에서 처음으로 쑤베이가 쑤난의 성장속도를 추월했다.

    나아가 ‘조화사회’가 단순한 정치 구호에 머물지 않도록 4개 분야, 25개 항목으로 된 ‘조화사회 표준지표’를 처음 고안했다. 1인당 GDP는 물론 도시의 가처분 소득, 실업률, 엥겔계수, 녹지비율, 분배구조, 촌민 자치율까지 넣어 만든 종합지표다. 이처럼 노력한 결과 장쑤성은 최근 1만명당 살인사건 발생률이 1.02명으로 일본보다 치안상태가 더 좋은, 안전하고도 살기 좋은 지역으로 변모했다.

    그는 제17차 당 대회에서 당장(黨章)에 지도이념으로 올라간 ‘과학발전관’도 적극 추진했다. 2004년 4월 장쑤성의 민영 철강회사인 톄번(鐵本)이 서우두(首都)강철의 2배 크기로 불법 확장하려 하자 이를 과잉투자로 규정해 아예 톄번의 문을 닫아버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000여 개의 과잉투자 항목을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덕분에 장쑤성의 과잉투자는 확실하게 바로잡혔다. 원 총리가 이를 거시조정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았을 정도다.

    2007년 5월 중국의 3대 호수 중 하나인 우시(無錫)의 타이후(太湖)가 오염돼 녹조현상이 발생, 식수로 쓸 수 없게 됐을 때도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장쑤성의 GDP가 15% 줄어도 좋다”며 화공, 야금, 인쇄, 염색, 제지, 전기도금 등 폐수를 많이 배출하는, 호수 주변 업체 2150개를 퇴출하는 극약 처방을 한 것. GDP만 끌어올리면 ‘만사 오케이’로 여겨온 기업 및 지방 관리들의 환경의식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정책들이 장쑤성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장쑤성 서기로 재임하던 2004~06년 3년간 장쑤성의 발전 속도는 전국 3위를 기록했다. 실업률도 계속 내려가고 있다. 최근 중앙정부가 내세우는 ‘좋으면서도 빠른(又好又快)’ 발전을 미리 실천한 셈이다.

    장쑤성 사람들은 리위안차오 하면 곧바로 ‘12345 시정(施政) 방침’을 떠올린다. 여기에 그의 시정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는 과학발전관을 하나의 통령(統領·통솔 강령)으로 삼고, 샤오캉(小康·잘사는 중산층) 사회와 현대화의 2가지 목표를 먼저 실현하며, 과학적이고 조화롭고 선도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부민(富民)·과학교육·환경보호·에너지 절약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둬 평안하고 문화가 숨 쉬며 진실하고 법치가 실현되며 환경이 깨끗한 장쑤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2000년부터 7년간 장쑤성에서 근무한 그는 평소 “장쑤성은 가장 부유한 성은 아니지만 가장 조화가 잘 실현된 지역”이라며 자신의 성공적인 정책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태자당과 상하이방도 호평

    출생 신분상 태자당인 리 부장의 아버지는 문화대혁명 직전 상하이시 부서기를 지낸 리간청(李幹成)이다. 그의 스타일은 ‘불요불굴’의 아버지를 닮았다는 평가가 많다. 리 부장의 당초 이름은 ‘이원조(李援朝)’다. 부친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넷째아들이 태어나자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자’는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의미에서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한자 이름을 발음만 같은 ‘源潮’로 바꿨다.

    비록 혁명가 집안의 태자당이지만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모친의 여동생인 이모 집에서 자랐다. 윈난(雲南)성의 석탄 광산에서 일하는 이모를 따라 리위안차오는 다른 형제와 달리 상하이의 부모와 함께 있지 못하고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 모친 뤼지잉(呂繼英)의 여동생은 언니가 아들을 4명이나 낳자 이를 부러워해 리위안차오를 데려다 직접 기른 것으로 알려졌다. 리 부장의 형제자매는 모두 5남2녀.

    그의 학력은 매우 다양하다. 1982년 푸단(復旦)대 수학과를 졸업했고 1990년 베이징대 경제관리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엔 중앙당교에서 문화예술 관련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2년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개발도상국 지도자 연수’도 받았다. 수학, 경제학, 문화예술 등 여러 영역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박사학위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그가 ‘사회주의 문화예술의 생산에 관한 약간의 문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것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일하던 1998년. 주위에서는 그의 논문 내용이 마치 당 고위지도자들의 연설문 같다고 말한다. 논문 지도교수는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교수를 지내다 1988년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1990년대 초 퇴임한 장류(江流·88) 교수다. 권력으로 박사논문을 얻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동갑내기인 가오젠진(高建進) 중앙음악학원 교수다. 리 부장의 장인도 일찍이 상하이시 건설위원위 부주임을 지낸 당 간부 출신이다. 차분한 성격의 부인은 1979년 상하이음악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리위안차오와 결혼했다. 아들 리하이진(李海進)은 2003년 푸단(復旦)대 회계학과에 들어가 졸업했다.

    학위 문제와 중앙조직부장에 기용된 뒤 ‘인사 패권’을 휘두른다는 비난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중화권 언론에서 그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이 돈 적은 없다. 친인척 관리도 스스로 조심하고 있다. 국가항천국(航天局) 지방사무소에서 일하던 리 부장의 셋째형 리젠즈(李建之)는 퇴임을 앞두고 연봉 100만위안을 주겠다는 회사의 제의를 거절하고 월 3000위안을 주는 상하이의 작은 부동산 연구기구에 들어갔다. 장쑤성 서기인 동생의 정치 전도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리 부장은 공청단에서 무려 8년간 일했다. 후 주석이 미는 퇀파이 인사지만 태자당이나 상하이방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가 2012년 가을 구성될 제5세대 지도부에서 핵심 요직에 무난히 기용될 것이라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빛바랜 ‘사대천왕’의 꿈 … 두 남자는 그래도 칼을 간다
    ▼ 보·시·라·이

    중국의 정치권력은 후 주석을 영수로 한 퇀파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쩡칭훙을 좌장으로 한 태자당, 장쩌민 전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상하이방(上海幇) 등 크게 3대 계파가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지만, 시진핑 전 상하이 당 서기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차세대 지도자 가운데 ‘태자당’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보시라이였다. 태자당은 고위 관료 등의 자제로서 당·정·군의 핵심 요직에 포진한 인사를 말하는데 모두 4000여 명에 달한다.

    186㎝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보시라이는 누가 봐도 태자당이다.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보이보(薄一波·1908~2007)의 둘째아들로 장인 구무(谷牧)도 부총리를 지냈다. 특히 덩샤오핑(鄧小平)과 매우 절친했던 보이보는 3세대 지도부 막후에서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던 ‘8인 원로’ 중 하나다. 그는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과 함께 장쩌민-후진타오 체제 확립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제17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에 밀리긴 했지만, 보시라이가 중앙정치국 위원까지 올라온 데는 이런 부친의 후광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보시라이는 아버지 덕택에 곧바로 중국 핵심 권력기관인 중앙서기처 연구실과 중앙판공청에 배치됐다. 하지만 2년 뒤인 1984년에 지방 근무를 자청, 랴오닝성의 낙후된 농촌 진(金)현의 부서기로 배치됐다. 그는 뿌리 깊은 지방보호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지방세력의 야유와 조롱뿐이었다. 보이보는 좌절한 아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실제 행동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라.”

    지방보호주의가 왜 나쁜지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줘 다른 사람이 따라오도록 하라는 충고였다. 그곳에서 4년간 근무하다 다롄(大連)시 상무위원으로 떠날 무렵 다롄시 진저우(金州) 구로 행정구역이 바뀐 진현은 향진기업, 가족계획, 교육, 체육, 과학기술 보급 등 10여 개 분야에서 모두 ‘선진’지역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텅 빈 환송회

    보시라이는 다롄시에서 선전부 부장에서 시 서기까지 12년간 근무했다. 다롄 시는 보시라이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다롄이 ‘북방의 홍콩’으로 불리게 된 것도 보시라이 덕분이다. 다롄시 사람들은 축구와 의복 축제, 보시차오(薄熙草)를 합쳐 ‘다롄 삼보(三寶)’라 일컫는다.

    다롄 삼보는 여성 작가 천쭈펀(陳祖芬)이 보시라이가 다롄시장으로 재직할 때 처음 쓴 말이다. 천쭈펀은 보시라이가 서명을 할 때 ‘래(來)’자를 초서로 흘려 써 ‘초(草)’자처럼 쓰는 것과 다롄시 녹화사업에 대한 보시라이의 특별한 애정을 감안해 이 말을 만들어냈다. 보시라이가 다롄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다롄의 녹지화 비율은 41%까지 올라갔다. 또 그가 다롄시장과 당 서기를 거쳐 랴오닝성장으로 승진한 2001년, 유엔이 세계 500대 환경도시를 선정했을 때 중국에서는 유일하게 다롄이 꼽혔다.

    랴오닝성장으로 있던 2001~04년에는 낙후된 랴오닝성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진력했다. 랴오닝성 사업가 1000명을 대동하고 잘사는 광둥성을 찾아가 경제협력 상담을 벌이며 벤치마킹하려 노력했다. 그가 추진한 ‘동북진흥’ 정책은 2003년 중앙정부의 국가전략으로 채택됐다.

    이처럼 시골 현 부서기에서 시작해 20년 만에 성장을 거쳐 중앙의 상무부장까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 그이지만, 세상의 시선이 곱지는 않다. 정치적 업적 역시 그와 관계가 좋은 매체에 의해 부풀려졌다는 말이 많다.

    이런 뒷말이 나오는 것은 그의 업무 스타일이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밤중에 부하를 찾아 업무를 물어보는 것은 그의 장기다. ‘심야에 휴대전화로 찾기(半夜機叫)’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각종 행사와 접견 등으로 근무시간에 업무를 처리할 여유가 없었던 그는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했다. 그러다 보니 한밤중에 전화로 부하를 찾는 일이 많았다. 전화를 못 받은 간부에겐 불호령이 떨어졌다. 밤 11시 이전에 잠을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하는 간부에게는 “업무가 너무 적어 그렇게 일찍 자느냐”며 일을 추가로 떠안겼다. 당연히 아랫사람에게 인기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업무 행태는 국무원 상무부장으로 영전한 뒤에도 계속됐다.

    랴오닝성장 시절엔 업무에 간섭하는 원스전(聞世震) 당 서기에게 “나는 장쩌민과 주룽지(朱鎔基)가 임명했으니 당신은 당무나 보라”며 행정업무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화가 난 원 서기가 중앙에 올라와 “나를 자르든지 보시라이를 내쫓든지 하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그가 2004년 랴오닝성장을 마치고 중앙으로 올라올 때 환송연에는 서기는 물론 부서기조차 불참해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중국에는 벼슬길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남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고 남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걸어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이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가 양 극단으로 나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패 척결’의 속내는?

    1993년 다롄시장 때 홍콩의 한 기자는 그에게 “다롄시장에 임명된 게 아버지 덕분 아닌가요?”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오늘의 자신이 있게 된 데는 아버지의 후광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생산력 발전을 중시하는 덩샤오핑과 의견을 같이하는 바람에 문화대혁명 기간 중 주자파로 몰려 5년간 노동학습반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린 과거를 털어놓으며 시련도 겪었다고 토로했다. 그 시련 때문에 자유와 민주, 인간의 존엄성과 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도 강조했다. 그렇지만 중화권 언론은 그가 태자당으로서 부친의 엄청난 후원을 받았으면서도 이는 과소평가하고 문혁 때의 박해만 과장해 선전하고 있다며 비판한다.

    2007년 초 부친이 99세로 세상을 뜬 뒤로는 부친의 영향력도 미미해진 듯하다. 그가 2004년 상무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많은 정치 분석가는 그를 차기 총리감으로 꼽았다. 상무부는 중국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기 위해 2003년 대외경제무역부와 국가경제무역위원회를 합쳐 신설한 부서로, 주요 경제발전 계획 수립과 대외경제 교섭을 담당하기에 차기 총리직의 실습 부서로서는 안성맞춤이기 때문.

    하지만 제17차 당 대회 이후 인사에서 왕양 광둥성 서기보다도 뒤처진 보시라이는 충칭시 서기로 취임한 이후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부패 척결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중국 인민 사이에서는 그가 ‘대륙의 포청천’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와 정치 분석가들은 그가 부패 척결을 기치로 차세대 지도부 경쟁에서 다시 선두를 탈환하기 위해 권토중래를 꿈꾸며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인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같은 산시(山西)지역 혁명가 집안의 리단위(李丹宇)다. 하지만 결혼 초부터 티격태격 싸우다 결국 4년여 뒤 이혼소송 끝에 갈라섰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리왕즈(李望知)는 서른이 넘었다. 그는 베이징대 법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유학했다. 원래 이름은 부친의 성을 딴 보왕즈(薄望知)였으나 전처 리단위가 이혼 후 자신의 성으로 바꿔버렸다.

    현재의 아내인 구카이라이(谷開來)는 1974년부터 사귀기 시작해 결혼에 골인했다. 두 사람이 사귀면서 첫 번째 아내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첫 부인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구카이라이와 사귀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 1987년생인 아들 보과과(薄瓜瓜)는 영국 옥스퍼드대에 유학 중이다. 아버지를 닮아 외모가 준수한 아들은 지난해 ‘영국 10대 걸출 중국 청년’에 꼽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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