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2014

5장 내란(內亂)

  • 입력2010-11-18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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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김정일은 박성훈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개성으로 향하던 820전차군단을 세운다. 개성은 한국군 105전차사단이 장악하고 있다. 포로로 잡은 북한군 중위 윤미옥을 이용해 북한군의 검문망을 빠져나간 이동일 부대는 황해남도 신천에서 양곡창고를 턴 노농적위대 대원들을 포섭한다. 송아현은 이동일과 밤에 공원에서 섹스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몸을 떠는데…. <편집자>
    2014

    일러스트 · 박용인

    황해남도 신천은 교통의 요지다. 내륙 중심부에 박혀서 동서남북으로 뚫린 대로(大路)가 북으로는 사리원·평양, 남으로는 태탄, 동쪽은 해주, 서쪽은 용연으로 뻗어 있다.

    2014년 7월25일 금요일 14시00분, 개전 3시간10분25초 경과.

    신천시 남부 산업지구의 보위대 지구대 앞에는 50여 명의 남녀가 모여 있다.

    “자, 들으시오.”

    하면서 지구대 현관 계단에 올라선 전석규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한 줄로 서서 장부에 서명을 하고 무기를 지급받으시오. 그리고 바로 뒷마당에 다시 모입니다.”

    그러자 남녀는 말없이 일렬로 선다. 배급에 익숙한 터라 곧 하나씩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를 가는 게야?”

    하고 줄에 섰던 박길수가 물었으므로 전석규는 머리를 저었다.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협동창고 마당에서 대기하라는 거요.”

    “영민이가 어젯밤부터 열이 더 나는데.”

    했지만 박길수는 뒤에서 미는 바람에 옆으로 지나갔다. 이웃집에 사는 터라 전석규는 박길수 사정을 안다. 열세 살짜리 아들 영민이 열흘 전부터 기동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병원에 데려가보지도 못했지만 영양실조가 근원이다. 먹이기만 잘하면 병이 낫는다. 다른 쪽 문으로 AK-47 소총과 탄창을 받아 쥔 남녀가 빠져나오고 있다. 모두 노농적위대원이다. 17세에서 60세 사이의 남녀 중 현역과 교도대에 편성된 병력을 제외한 예비군 병력인 것이다.

    7월25일 14시05분, 개전 3시간15분25초 경과. 오산의 연합사 전시사령부 벙커 안.

    합참의장 장세윤이 무전기를 귀에 붙이고 있다가 버럭 소리쳤다.

    “차 소장, 나다! 합참의장이다!”

    이제야 105전차사단장 차봉호 소장과 통화 연결이 된 것이다. 장세윤이 서두르듯 말을 잇는다.

    “대기하라. 알았나! 곧 대통령님께서 김정일과 협상을 하실 테니까 말이다!”

    한마디씩 장세윤이 소리치듯 말했을 때 차봉호가 물었다.

    “저놈들이 발포하기 전까진 쏘지 말란 말씀입니까?”

    “미쳤냐? 그렇게는 못한다. 기다려!”

    하고 무전기를 귀에서 뗀 장세윤이 주위에 둘러선 장군들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시선을 마주쳐주지 않는다.

    그 시간에 산본장의 지하 상황실에서 대통령 박성훈이 전화기를 귀에 붙이고 있다. 상대는 평양 주석궁 지하 벙커에 자리 잡은 김정일. 박성훈이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위원장님, 820전차군단을 세워야 전면전을 막습니다. 앞으로 20분 남았습니다.”

    김정일은 대답하지 않았고 박성훈이 말을 잇는다.

    “지금 선제공격을 한 북한 군부 강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위원장뿐이십니다.”

    “….”

    “20분 후면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질 것이고 남북한의 전면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준비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위원장님.”

    “알겠습니다.”

    마침내 갈라진 목소리로 김정일이 말했다. 그 순간 박성훈 주위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긴장했고 다시 김정일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곧 연락을 드리지요.”

    7월25일 14시10분, 개전 3시간20분25초 경과.

    개울가의 바위에 등을 붙이고 앉은 이동일에게 조한철 중위가 다가왔다 조한철의 손에는 지도가 쥐어져 있다.

    “중대장님, 저 도로를 타면 신천이 나옵니다.”

    조한철이 개울 옆쪽 언덕을 눈으로 가리켰다. 자갈투성이의 황무지 100m쯤을 건너면 도로가 나오는 것이다.

    “길에는 군용트럭만 다니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전시에 차량통제가 잘되는 것 같습니다.”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은 조한철의 시선이 이동일의 옆에 앉은 윤미옥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이동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대대본부와도 통신이 단절되었다. 무전기는 있었지만 서로 보내지도 받지도 않는 것이다. 임시 정전을 합의한 상태여서 아군을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없는데다 그렇다고 투항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다.

    46명은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다. 조한철의 시선을 받은 이동일이 윤미옥을 보았다.

    “북상할 수 있는 샛길은 없나?”

    이동일이 묻자 주위의 시선이 모두 모아졌다. 127부대를 떠나 북상한 지 30분이 지났다. 그때 윤미옥이 입을 열었다.

    “목적지는 어디세요?”

    “북쪽.”

    이동일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조금이라도 더 북쪽으로 들어갈 거다.”

    7월25일 14시30분, 개전 3시간40분25초 경과.

    신천시 남부 산업지구 협동창고 앞마당에 모인 노농적위대원은 52명, 제각기 AK-47 자동보총과 30발들이 탄창 4개, 수류탄 두 발씩을 받아 든 대원들이 창고 그늘에 둘씩 셋씩 모여 쭈그리고 앉았다. 마당 건너편이 산업도로였는데 길만 닦아놓았지 가동되는 공장은 하나도 없어서 차량 통행이 있을 리 없다. 신천시로 통하는 국도는 왼쪽으로 2㎞쯤 떨어져 있는 터라 이곳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전시방어 계획을 작성한 공산당 고위간부 놈들은 이 산업지구가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을 줄로 예상한 것 같다. 이 빈 지역에 쓸데없이 노농적위대원을 방어병력으로 파견한 것을 보면 그렇다.

    “이봐, 전 대위, 남조선군이 남해, 옹진을 싹 쓸어버렸다면서?”

    하고 옆에 앉은 박길수가 낮게 물었으므로 전석규는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쉬, 형님, 그 말 어디서 들었소?”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여.”

    눈을 치켜뜬 박길수가 말을 잇는다.

    “서해안 포대는 남조선군 미사일 공격을 받아 전멸했고 해군 함대도 씨가 말랐다는군. 그래서 허겁지겁 휴전 요청을 해서 지금 옹진에 있는 남조선군한테 총 한방 못 쏜다고 했어.”

    “누, 누가?”

    “내가 삐라 주웠어. 나뿐만이 아냐. 저 사람들 중에서 아마 대여섯 명은 삐라 갖고 있을겨.”

    “으음.”

    전석규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남조선에서 날린 삐라는 전석규도 주워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미화 1달러 지폐가 삐라에 붙어 있어 달러만 빼내고 삐라는 버렸는데, 두 번째 주웠을 때는 읽어보았다. 이곳 황해남도 주민 중 열에 셋은 삐라를 주웠을 것이고 그 내용을 모르는 주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영민이가 곧 죽을 것 같어.”

    쪼그리고 앉은 박길수가 화제를 바꾼다. 두 무릎을 양팔로 감싸 안은 박길수의 몸은 그야말로 작은 옥수수자루만 했다.

    “그놈한테 쌀밥 사흘만 배부르게 먹이면 나을 거여.”

    헛소리처럼 말했던 박길수가 정정했다.

    “아니, 하루 세 끼만, 아니, 두 끼만 멕여도 내가 원이 없겠다.”

    전석규가 우두커니 앞쪽 마당을 본 채 입을 다물었다. 올해 55세인 박길수는 위로 아들 둘을 어려서 잃고 남은 자식이 영민이 하나뿐이다. 위의 아들들도 열 살이 되기 전에 모두 영양실조로 죽었는데 자식을 굶겨 죽인 부모의 마음은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휴전을 하다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다시 박길수가 혼잣소리로 말했지만 말끝이 떨렸다.

    “끝장을 봐야 할 것 아닌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이 지옥이 끝장날 것 아닌가 말이여?”

    같은 시각, 신촌 서교동의 세양오피스텔 1201호실에는 세 사내가 소파에 둘러앉아 있다. 앞쪽에 TV는 켜놓았지만 음 소거를 했기 때문에 특집방송을 하는 앵커는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대고 있다. 다만 밑의 자막이 자주 바뀌면서 시선을 모으고 있다.

    “강화도, 연평군에서 보낸 대북 삐라가 황해북도에까지 도달.”

    방금 자막으로 뜬 내용이다. 그때 안쪽 상석에 앉은 60대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수십 번 평양 사람들한테 이야기했어요. 전쟁 일어나면 우리가 손해라고, 그런데 이 꼴이 된 거야.”

    그가 말한 우리란 자신과 북한 당국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공식 정당인 노동민족당 대표 이정식이었고 현역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이정식의 말이 이어졌다.

    “만일 이대로 통일이 된다면 우린 북한 주민들한테 맞아 죽습니다. 그러니 해외로 탈출하든지 그것이 힘들면 경찰서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것이 사는 길이요.”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어요.”

    그렇게 말한 50대 후반의 사내는 자주실천연대의 회장 박응모, 이번 계엄령 상황에서 이정식과 함께 반역혐의자 명단에 포함되어 수배된 인물이다. 박응모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밀어붙여서 보안법 사이로도 빠져나갔지만 북쪽이 무너지면 우린 한국법 아래서 죽습니다. 경찰서로 도망가는 건 호랑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거나 같아요.”

    “맞습니다.”

    그중 가장 연하인 40대 후반의 사내가 눈동자를 쉴 새 없이 굴리면서 말했다. 운동권 출신인 그는 이정식의 보좌관 서병만이다. 서병만이 둘을 번갈아 보면서 말을 잇는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도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모두 탈출한다고 서두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이럴 수가.”

    눈을 치켜뜬 이정식이 탄식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겨우 네 시간도 안 되었는데 이렇게 된단 말인가?”

    “처음부터 우리가 밀리니까 기세가 꺾인 겁니다.”

    박응모가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이정식은 아직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 듯 말을 잇는다.

    “그래도 그렇지. 그 아끼던 핵은 어따 두고 이 꼴이란 말이.”

    “그랬다간 이미 북쪽 땅은 없어졌어요.”

    서병만이 불쑥 그렇게 대답을 했는데 지금까지 이런 말투를 쓴 적이 없다. 이정식의 시선을 받은 서병만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씻고 말했다.

    “오판한 겁니다. 또 겁주면 이번에도 굽실대겠거니 했다가 된통 당한 것이지요. 이젠 다 글렀습니다.”

    “이봐, 그만해.”

    하고 박응모가 말을 막았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30평형 원룸 오피스텔이라 셋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모두 얼굴이 굳어 있다.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을 때 박응모가 속삭이듯 말했다.

    “대답하지 마,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해.”

    이 오피스텔은 박응모가 철저하게 위장해 구입해놓은 것으로 오늘 처음 들어온 것이다. 발각될 리가 없다. 그때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놀라 숨도 멈추고 있던 이정식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내들을 보았다. 그 중에는 군복 차림의 사내도 둘이나 있다.

    “자, 이정식씨, 박응모씨, 갑시다.”

    그중 나이든 사내가 굵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서병만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아, 서형, 수고했습니다.”

    이정식은 서병만이 등을 돌리고 있어서 사내의 웃는 얼굴만 보았다.

    7월25일 14시50분, 개전 4시간00분25초 경과.

    제55호위대 벙커 안. 대좌 하나가 다가와 김경식의 옆에 섰다.

    “잠깐 밖에서.”

    대좌가 짧게 말하자 김경식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휘둘러본다. 벙커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4군단장 우장선이 국방위원장 측으로 돌아서서 강동포병단을 시켜 이곳에 위협폭격을 한 것이다. 이제 북한 군부는 국방위원장파와 그 반대파로 양분되었다. 반대파란 강경파, 즉 이번 전쟁을 끝까지 밀어붙이자는 파다. 상황실에 모인 10여 명의 군단장급 지휘관, 그중에는 김정일이 파견한 무력부 부부장 겸 호위대장 심철 상장도 있었지만 이제 어쩔 수 없이 강경파가 되었다. 빠져나갈 수도 없겠지만 나간다고 해도 김정일의 성격상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승부를 내는 것이 낫다. 상황실 벙커를 나온 김경식이 대좌를 따라 복도 끝 쪽 벙커로 다가간다. 벙커 앞에는 군관 둘이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김경식을 보더니 잠자코 철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혼자 들어선 김경식은 안쪽 소파에서 일어서는 두 사내를 보았다. 둘 다 신사복 차림이었는데 어색했다. 그때 다가선 김경식에게 50대의 나이 든 사내가 말했다. 중국어다. 말이 끝났을 때 30대 사내가 통역했다.

    “이번에 4군단장 우장선이 위원장에게 붙었지만 1군단, 8군단, 10·11·9군단은 이미 우리 측과 합류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사내가 군단 번호를 잊어먹지 않으려 수첩에다 적은 것을 꼼꼼히 읽었다. 심호흡을 한 50대가 잠깐 김경식을 보았다. 비대한 체격에 붉은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져 있다. 사내는 중국 대사관의 무관 황방산, 지금 중국 군부의 연락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황방산이 말을 이었다.

    “평양 주변의 평방사, 호위총국, 그리고 3군단만 위원장한테 충성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중립이요.”

    그 말을 들은 김경식은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이쪽은 세력이 비등한 것이다. 특히 조·중 국경에 배치된 4개 군단, 즉 8·10·11·9군단이 모두 반 김정일 군이 되었고 이곳 전열지대의 4·2·5·1 4개 군단에서 1·2군단이 아군, 4군단만이 김정일군이며 5군단은 중립이다. 머리를 끄덕인 김경식이 입을 열었다.

    “이 상황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불리할 것 같소, 아예 2군단을 북상시켜 주석궁을 깨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러자 황방산이 머리를 끄덕였지만 말은 다르다.

    “그것도 고려했지만 마지막 방법이요. 우리는 위원장이 상황을 판단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오는 것을 최상의 방법으로 칩니다.”

    “그 다음의 차선책은?”

    “위원장의 유고.”

    짧게 말한 황방산의 말을 통역은 진땀을 흘리면서 통역한다. 엄청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경식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인민군 간의 전쟁은 맨 나중이군.”

    “그렇습니다. 그땐 위원장이 중국 측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개입하게 되는 것이지요.”

    위원장뿐 아니라 반란군이 요청을 해도 중국군이 개입할 명분이 있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동맹 간으로 국난시에는 자동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 이윽고 김경식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좋습니다. 강동포병군단의 포격으로 내가 흥분한 것 같습니다. 조금 기다리지요.”

    그 시간에 송아현은 방송실 옆 대기실의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중이다. 그러나 음소거를 해놓아서 그림만 나올 뿐 방안은 조용하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킨 송아현의 얼굴에 문득 웃음이 떠올랐다. 이제는 혼자여서 온 얼굴을 펴고 거침없이 웃는다.

    이번에는 차 안이다. 때는 지난 봄, 토요일 외박을 나온 이동일이 차를 가지고 나와서 둘은 원주 근처의 치악산 국립공원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인데다 날씨까지 좋아서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 반이다.

    “여기서 자자.”

    숲 속의 공터에 차를 세운 이동일이 말했으므로 송아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일차선 일방통행 길이었고 마침 길가의 공터로 들어와 안성맞춤이긴 했다. 그러나 사방이 숲인데다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아서 으스스했다.

    “아우, 싫어. 여관이라도 찾아 가.”

    “숲 속에서 섹스하는 것도 괜찮잖아?”

    “이 남자는 머릿속에 섹스밖에 안 들었나봐, 이제 말끝마다 섹스야.”

    “지가 더 밝히면서.”

    “내가 언제?”

    바락 목소리를 높였을 때 이동일이 차 문을 열었다. 밤의 찬 공기가 몰려들면서 숲 냄새가 맡아졌다. 짙고 강한데다 맵기까지 한 풀냄새, 흙냄새, 그리고 시린 것 같은 대기.

    “아아. 좋다.”

    어깨를 부풀리며 한껏 공기를 들이켠 이동일이 차 밖으로 나갔으므로 송아현도 문을 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밤하늘의 별이 흔들리며 떠 있었다.

    “아, 추워.”

    별로 춥지 않았지만 어깨를 웅크린 송아현이 팔짱을 끼었을 때 이동일이 점퍼를 벗어 상반신을 감싸주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허리를 감아 안고 입술을 붙여왔다. 숲 속의 키스는 신선했다.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대기의 정기(精氣)가 이동일의 혀를 통해 다 빨려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이동일이 입을 떼더니 가쁜 숨을 고르고 나서 말했다.

    “사랑해, 아현아.”

    그 순간 송아현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을 쳤다. 왜 그런지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도 아니다. 이동일한테서도 여러 번 듣고 해주었던 송아현이다. 다음 순간 송아현은 대답 대신 이동일의 바지 혁띠를 풀었다. 이동일이 송아현의 스커트를 치켜 올리더니 곧 팬티를 끌어 내렸다. 송아현이 다리 하나를 들어 팬티 벗기는 것을 도우면서 헐떡이며 말했다.

    “사랑해.”

    맑은 대기 속에 울리는 제 목소리를 들으면서 송아현은 다시 감동했다.

    7월25일 14시55분, 개전 4시간05분25초 경과.

    “통행증.”

    하고 손을 내밀었던 군관이 윤미옥을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동무, 이 차엔 왜 타고 계시오?”

    “우리 부대 트럭이 고장이 나서 교도여단 수송대 트럭을 빌려 탔지요.”

    “그렇군.”

    군관의 시선이 적재함과 뒤쪽 트럭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40여 명의 인민군 병사가 타고 있는 것이다. 그때 이동일이 통행증을 내밀었다. 교도여단 이명철 상위가 갖고 있던 통행증이다. 통행증을 살핀 군관이 눈으로 적재함과 뒤쪽 트럭을 가리키며 물었다.

    “병력 이동입니까?”

    “그렇소.”

    소좌 계급장의 이동일이 짧게 대답했을 때 운전병 사이에 끼어 앉은 윤미옥이 웃음 띤 얼굴로 재촉했다.

    “동무, 도중에 펑크가 나서 늦었어요. 서둘러주세요.”

    머리를 끄덕인 군관이 이동일에게 통행증을 건네주더니 뒤쪽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차단봉 올리라우!”

    “형님, 가보시오.”

    창고 구석으로 박길수를 데려간 전석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점검 나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형님은 영민이한테 가보시오.”

    “괜찮겠나?”

    얼굴은 반가운 기색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목소리는 걱정으로 떨렸다. 전시에 방어진지 이탈은 탈영이나 같다. 즉결처분이다. 전석규가 심호흡을 하고나서 말했다.

    “명색이 내가 지구대 방어대장 아뇨? 저녁 8시에 배급차 나올 때까지만 형님이 돌아와주시오.”

    “아, 그럼, 그때까진 충분히 돌아와, 내가 영민이 어떤가 보고만 올 테니까.”

    박길수의 처 유옥선은 양식 구한다고 3년 전에 강을 넘어간 후에 연락이 끊겼다. 강이란 압록강을 말한다. 누구 말을 들으면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평양 아래쪽에서 검문에 걸려 총살당했다고도 하고 누구는 중국땅 통화 근처 농가에서 중국놈하고 사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주위를 살핀 박길수가 창고 뒤쪽 야산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전석규는 그 뒷모습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석규의 형편이 나은 것도 아니다. 인민군 대위로 제대했지만 인민학교 교사를 7년 하고나서 학교가 폐교되자 군 의료원의 사무원으로 6년을 지나다가 실직을 한 지 4년째 된다. 아직 52세로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겉으로는 60이 넘어 보인다. 자식은 남매를 두었는데 딸은다섯 살 때 독버섯을 잘못 먹어 죽었고 열 살짜리 아들 운석이와 아내 심선희까지 세 식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이윽고 몸을 돌린 전석규가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으이구, 저 형님 말대로 이 지옥이 어떻게 되건 간에 끝장이 나면 좋으련만.”

    인민군이 밀고 내려가 쌀이 남아돌아서 돼지한테 먹인다는 남조선의 물자를 몽땅 가로채도 좋은 것이다. 이대로는 살기 싫다.

    7월25일 15시 정각, 개전 4시간10분25초 경과.

    주석궁의 지하 벙커 안. 거대한 상황판을 등지고 앉은 김정일이 테이블 건너편에 선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평방사 사령관 전백준 차수. 7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건장한 체격이다. 전백준이 입을 열었다.

    “위원장 동지, 김경식과 김형기는 서로 경쟁관계였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이런 식으로 물을 수 있는 인간은 북조선 땅에 서너 명뿐일 것이다. 긴장한 주위의 모든 시선이 모여졌다. 김정일이 시선만 보내고 있었으므로 전백준이 말을 잇는다.

    “그것은 그놈들이 친중파라는 것입니다.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중 동맹을 강조하셨고 특히 군사적 교류를 권장까지 하셨기 때문에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전백준이 말을 그쳤을 때 김정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반란군이 기댈 곳은 중국 군부란 말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위원장 동지.”

    “나도 소문을 들었어. 북조선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중국군을 끌어들이면 나는 제거되거나 망명시켜놓고 북조선을 중국의 조선성으로 만든다는 소문을.”

    김정일이 거침없이 말했을 때 상황실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정일이 머리를 돌려 장방형 테이블의 끝 쪽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았다. 젊다. 바로 김정일의 후계자로 알려진 김정은, 그러나 이번 전쟁이 발발한 후부터는 전혀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저 위원장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김정은과 시선을 마주친 김정일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러더니 말을 잇는다.

    “남조선과 미군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계획을 모를 리가 없지, 그리고 또.”

    이제는 김정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그것을 안 내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도 반역자들은 생각하고 있어야 될 거요.”

    소파에 등을 붙인 김정일이 긴 숨을 뱉는다.

    “인간은 욕심을 버리면 머리가 맑아지는 법이지.”

    오대현이 박성훈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15시05분(개전 4시간15분25초)이었다. 개성공단 관리청장실 안에서 오대현은 행정부장 서기수, 그리고 북한측 관리부장 진성회와 둘러앉아 회의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예, 대통령님.”

    긴장한 오대현이 서서 전화를 받는다. 앉아서 받아도 예의에 어긋난 점은 없겠지만 진성회 앞이어서 일부러 그런 점도 있다. 진성회는 김정일의 지시사항을 말할 때 부동자세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 박성훈이 물었다.

    “공단 상황은 어떻습니까?”

    “예, 생산은 중지된 상태지만 모두 공장에서 대기 상태로 있습니다. 대통령님.”

    한 시간 전에 인터넷을 통해 통일부로 보고한 상황이다. 머리를 든 오대현이 창밖을 보았다. 이곳에서는 제105전차사단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박성훈이 물었다.

    “북한 측 근로자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곳에서는 북한 주민들을 바로 옆에서 접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 그것이.”

    입안의 침을 삼킨 오대현이 말을 이었다.

    “평온합니다. 대통령님.”

    박성훈은 잠자코 있었으므로 오대현이 말을 잇는다.

    “휴게실이나 식당에 모여 있는데 한국 측과의 갈등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 근로자 내부의 갈등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실과 식당에 놓인 TV는 모두 꺼놓았다. 북한 당국의 지시를 받은 진성회가 각 공장의 근로 감독관에게 통보를 했기 때문이다. 개전이 된 지 10분도 안되었을 때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4만명의 근로자는 현 상황을 모른다. 물론 한국 측 관계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따로 모여 TV를 본다. 그때 다시 박성훈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오 청장, 현 상황에서 옹진군의 남해 지역과 개성공단이 우리의 최전선이요. 그것을 명심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예, 대통령님.”

    막둥이처럼 대답부터 했던 오대현은 제 말이 끝난 순간 온몸이 냉장창고 안으로 던져진 느낌을 받는다. 개성공단 안에는 질풍처럼 들이닥친 105전차사단이 북쪽 경계를 막아놓고 있는 것이다. 옹진군의 남해는 해병 7사단이 날아가 덮쳐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대한민국의 국경 경계선으로 정했다는 말이었다. 최전선이 곧 국경선이 아니겠는가? 심호흡을 한 오대현이 다시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7월25일 15시10분, 개전 4시간20분25초 경과.

    “저곳은 통과하기 힘들어요.”

    걸음을 멈춘 윤미옥이 앞쪽에 시선을 던진 채로 말했다. 이동일은 윤미옥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뻗은 길 끝에 검문소처럼 보이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그 앞에는 이미 10여 대의 차량이 멈춰 섰고 차단봉 옆에는 기관총좌가 설치되었다. 검문소 뒤쪽으로 신천시가 보인다. 단층 건물이 대부분이지만 넓다. 멀리 공장의 긴 굴뚝이 대여섯 개 솟아 있었지만 연기는 뿜지 않는다. 그때 윤미옥이 말을 이었다.

    “신천에 4군단 보급대, 군 보위부, 북쪽에는 37교도사단 사령부까지 있어서 검문이 강합니다.”

    이동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차를 버려야만 한다. 언덕에서 내려왔을 때 길가에 세워진 트럭 두 대는 제각기 보닛을 열고 엔진을 고치는 시늉을 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위장에 익숙해서 행동이 자연스럽다. 이동일이 트럭 옆으로 다가서자 조한철, 황찬우 중위가 다가와 섰다. 둘 다 긴장한 표정이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씻은 이동일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트럭을 버리고 도보로 전진한다.”

    그러고는 이동일이 윤미옥에게 물었다.

    “신천으로 들어가는 다른 길이 있나?”

    “산업지구를 통과해서 저쪽 산을 넘는 길이 있습니다.”

    윤미옥이 턱으로 좌측 산줄기를 가리켰다. 산줄기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5㎞ 정도, 이쪽에서 산업지구는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끄덕인 이동일이 지시했다.

    “좋아, 산업지구로, 일렬횡대, 내가 앞장을 서고 황 중위, 조 중위 순서다.”

    그러고는 이동일이 윤미옥을 보았다.

    “윤 중위, 너는 나하고 같이 간다.”

    7월25일 15시15분, 개전 4시간25분25초 경과.

    지프 한 대가 속력을 내어 달려오고 있다. 차가 자주 다니지 않는 길이어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차는 지프 한 대뿐이다. 지프 뒤로 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있다.

    “검열인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오규성이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다. 오규성은 올해로 61세, 노농적위대원 소집 연령이 넘었지만 당에서 해제 통보가 오지 않았다. 그러니 저 혼자 제멋대로 빠졌다간 총살당할 수도 있다. 지프가 창고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는 산업지구 방어대인 노농적위대 병력이 모두 집합해 있었다. 전석규가 부르지 않았어도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대원들이 모여든 것이다. 그러나 지프가 멈추고 먼지 구름이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아앗.”

    맨 앞에 서있던 전석규의 입에서 억눌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뒤쪽에 정렬해 있던 노농적위대원들도 술렁거렸다. 지프 뒷좌석에 박길수가 묶인 채 태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대장 누기야?”

    운전석 옆자리에 탔던 대위가 내리면서 소리쳤다. 정규군 대위다. 이쪽 지역을 맡은 4군단 예하 감찰여단 소속의 대위, 길게 숨을 뱉은 전석규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도열한 적위대원 맨 선두에 서 있었으니 대위의 시선은 소리치기 전부터 이미 전석규에게 향해 있었다.

    “접니다.”

    하고 전석규가 대답하자 대위는 눈을 치켜떴다. 30대 후반쯤 될 것이다. 20년쯤 전에 전석규도 저렇게 대위 계급장을 붙인 채 기고만장했다. 그러다 포탄 탄피를 팔아 나눠 가진 것이 발각되어 군복을 벗었다. 상관들도 다 나눠 먹었기 때문에 전석규가 예편되는 것으로 끝냈던 것이다.

    “저놈이 귀관 소속인가?”

    다가선 대위가 턱으로 지프 위에 생포된 짐승처럼 놓여진 박길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전석규는 어금니를 물었다. 피할 도리가 없다.

    “예, 그렇습니다.”

    “지금은 전시다. 전시에 방어진지 이탈은 즉결처분, 사형이다.”

    날카로운 인상의 대위 입에서는 기관총 발사음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따라서 부대원 앞에서 총살한다. 저놈을 창고 벽에 세워!”

    그러자 병사 둘이 박길수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두 손이 뒤로 묶인 박길수가 비틀거리며 내리더니 머리를 돌려 전석규를 보았다. 그 순간 전석규는 심장이 멈추는 느낌을 받는다. 박길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는 것이다. 그때 박길수가 말했다.

    “마을 입구에서 잡혔기 때문에 영민이를 보지 못했어.”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맨 끝에서도 박길수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박길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놈도 곧 애비 따라서 올 테니까 이젠 걱정이 안 되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려야지.”

    “개소리 닥치게 하고 빨랑 세우라우!”

    대위가 버럭 소리쳤으므로 병사들은 박길수를 창고 벽에 세우고 서둘러 물러났다. 그때 대위가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겨눠 총!”

    병사 둘이 제각기 메고 있던 AK-47을 손에 쥐더니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였다. 다시 대위가 소리쳤다.

    “조준!”

    그 순간이다. 그들과 비스듬하게 뒤쪽에 서 있던 전석규가 어깨에 멘 AK-47을 휘두르듯 낚아채더니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노리쇠를 당겨 장전을 하면서 총구를 겨누었다.

    “타타탓! 탓탓탓탓탓탓!”

    AK-47의 둔탁하면서도 울림이 강한 발사음이 울린 것은 어깨에서 총을 내린 지 2초도 안되었을 때였다. 먼저 총을 겨누고 있던 두 병사가 춤을 추듯 사지를 흔들면서 쓰러졌고 놀라 입만 딱 벌렸던 대위는 머리통이 부서졌다.

    “타탓탓탓탓!”

    다시 지프로 총구를 돌린 전석규가 마지막 남은 운전사를 향해 자동보총을 난사했다. 운전석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던 운전사가 피를 뿜으면서 그대로 넘어졌다. 이제 이쪽으로 몸을 돌린 전석규가 놀라 웅성대는 적위대원을 보았다. 충혈된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전쟁이야! 이놈들은 우릴 잡을 여유도 없다고! 이제 우리가 끝장을 내자!”

    전석규의 목소리가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마당 위에 튀듯이 이어졌다.

    “놈들은 밀리고 있다고! 이제 우리 노농적위대가 숨어서 치면 이놈의 세상 끝나게 될 거야!”

    “나, 나 좀!”

    그때 박길수가 버럭 악을 쓰면서 다가왔으므로 적위대원 두어 명이 달려들어 묶인 팔을 풀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못 산다. 우리가 힘을 합쳐 오월리 양곡 창고부터 털자고! 배부르게 먹고 나서 죽잔 말이야!”

    묶인 팔이 풀린 박길수가 눈을 치켜뜨고 소리치더니 죽은 병사들의 무기를 걷는다. 대위가 찬 권총도 푼다. 그때 오규성이 AK-47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그렇다! 이놈의 세상을 뒤집어엎자! 이렇게 살 바에는 싸우다 죽자!”

    “저기 있다!”

    이미 상황실의 모든 장성이 다 보고 있었는데도 해병사령관 정용우가 소리쳤다. 벽에 붙은 대형 화면에 나타난 물체, 꾸물거리는 벌레처럼 보이지만 길을 따라 일렬횡대로 걷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그 순간 화면이 확대되면서 각도가 비스듬하게 비쳐졌다. 그러자 그것이 일대의 인민군 병사인 것이 드러났다. 어깨에 멘 총도 보인다.

    “저것, 저기 옆에서 네 번째!”

    하고 다시 정용우가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여졌다.

    “저놈 총! K-5야! 내 부하들이라고!”

    그렇다. 앞에서 네 번째 사내는 어깨에 한국군의 자동소총 K-5를 멨다.

    “맞아! 저놈들 해병이야! 46용사!”

    정용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고 보니 어깨에는 AK-47을 메었지만 앞에 총자세로 된 것은 K-5다. AK-47은 위장용으로 멨다는 증거다. 지금 상황실의 장군들은 한반도 상공에 떠 있는 미군용 위성 US-28의 전송 화면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때 연합사 참모장 해리슨이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영어로 물었지만 모두 알아들었다.

    “이곳입니다.”

    하고 한국군 대령 하나가 한국어로 대답하면서 옆쪽 지도에 붉은색 레이저빔을 쏘았다. 붉은색 레이저가 맞춘 지점은 신천 남동쪽의 산업지구에서 1㎞쯤 떨어진 지점이다. 대령이 붉은 점을 옆쪽으로 이동시키면서 말했다.

    “이곳은 산업지구로 조성되었지만 10여 년 전부터 공장 가동이 끊겨 폐허가 되었습니다.”

    붉은 점이 산업지구 서쪽을 가리켰다.

    “이곳은 근처의 가장 큰 마을로 보위부가 관리하는 양곡 저장소가 있습니다.”

    이제 장군들의 시선이 다시 옆쪽의 위성화면으로 옮겨졌다. 그 사이에 비치는 각도가 조금 틀어졌다. 그러나 화면은 더 확대되어서 머리통이 동전만 했다. 아쉽게도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저기 앞쪽 세 번째가 이동일이 같아.”

    정용우가 아예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열심히 말했다. 표정도 진지하다.

    “내 부관을 모를 리가 있겠어? 저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가 있다고, 저 봐.”

    하고 정용우가 목소리를 높였을 때 화면이 흐려지더니 곧 흰 반점으로 덮였다. 그때 연합사 측 흑인 중령이 말했다.

    “5분 후에 US-32 위성으로 다시 비춰질 것입니다.”

    7월25일 14시15분, 개전 3시간25분25초 경과.

    “꽈앙!”

    갑자기 울리는 폭음에 벙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땅이 흔들리면서 벽에 붙어 있던 상황판 하나가 떨어졌다. 제55호위대의 벙커 안이다.

    “뭐야?”

    김경식이 소리쳐 물었을 때 다시 폭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세 번.

    “꽝! 꽈앙! 꽝!”

    포격이다. 벙커가 포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진동이 더 커지면서 벽에 붙은 전자기기 하나가 요란한 소음을 내면서 쓰러졌고 웅성거리는 소음이 일어났다.

    “이기. 뭐야!”

    김경식이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좋아, 해보자는 말이지? 전 화력으로 서울을 폭격한다!”

    그때 대좌 하나가 서둘러 다가왔다. 손에는 무전기를 쥐었다.

    “사령관 동지, 전화 받으십시오!”

    “누기야!”

    “우장선 대장입니다.”

    순간 김경식이 주춤한 것을 모두가 보았다. 그러나 김경식은 곧 빼앗듯이 무전기를 받아 쥐더니 귀에 붙였다.

    “무신 일이요?”

    우장선은 4군단장이다. 전연지대의 서부 지역을 맡은 정규군 사단장으로 제2군단장인 김경식보다 3년 연상이지만 서열은 낮다. 그때 우장선이 말했다.

    “지금 그 포는 강동포병군단에서 때린 거라우.”

    “무시기?”

    했지만 김경식의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굳어졌다. 강동포병군단은 평양특별시 북쪽 강동군에 위치한 포병군단으로 지대지 미사일만 1000여 기를 보유하고 있다. 제55벙커를 분화구로 만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나 같을 것이다. 우장선이 말을 잇는다.

    “지도자 동지의 지시를 전하갔어. 당장 820 새끼들을 정지시키라우.”

    “이봐, 우장선.”

    “1분 내에 정지시키지 않으면 그 벙커는 구덩이가 돼. 서둘라우.”

    그러고는 통신이 끊겼으므로 김경식이 들고 있던 무전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타타탓! 탓탓! 탓탓탓탓탓!”

    갑자기 들리는 요란한 총성에 이동일은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렸다. 5m쯤 앞쪽을 걷던 김 병장, 박 상병이 길가로 몸을 던지듯이 엎드리는 것이 보인다.

    “타타탓! 탓타타타탓!”

    다시 총성이 울렸는데 10여 정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동일은 풀숲에서 머리를 들고 뒤를 보았다. 이곳은 산업지구를 서쪽으로 돌아 산줄기로 향하는 개울가. 물이 말라서 자갈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군화 밑창도 넘지 못한다. 뒤쪽 오솔길 주위도 멀쩡하다. 서 있는 부하는 없다.

    “꽝! 꽝! 꽝! 타타타탓!”

    그때 총성에 섞여 폭음까지 울렸다. 그러나 이제 그 총격과 폭격은 이쪽을 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해졌다. 바로 왼쪽 등성이 너머에서 울리는 것이다. 이동일의 옆으로 황찬우 중위가 반쯤 허리를 꺾은 채 달려왔다.

    “중대장님, 제가 가보겠습니다.”

    다가온 황찬우가 헐떡이며 말했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같이 가자.”

    배낭을 벗은 이동일이 옆에 엎드려 있는 윤미옥에게 말했다.

    “윤 중위, 일어서!”

    여전히 총성은 울리고 있었지만 조금 뜸해진 것 같다. 이때가 15시25분. 개전 4시간35분25초가 경과되었다.

    “사격중지!”

    전석규가 외치자 짧은 단발 사격음이 서너 번 들리더니 곧 총성이 그쳤다.

    “다 쥑였어.”

    옆쪽에서 몸을 일으키며 오규성이 말했다 오규성은 두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 같았다. 앞쪽 사무실에서 일어난 불길이 더 높아졌다.

    “자, 쌀 한 자루씩만 집어!”

    이쪽저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노농적위대원들에게 전석규가 소리쳤다.

    “식구 먹일 만큼만 들어!”

    그러자 부서진 담장 위에 선 박길수가 따라 소리쳤다.

    “보위대원 무기와 탄약을 모두 집어! 이젠 쌀보다 그놈이 더 필요해!”

    박길수도 딴사람 같다. 50명 가까운 노농적위대원이 일제히 창고로 달려 들어갔다. 그들은 오월리의 보위대 양곡 창고를 기습한 것이다.

    “비켜! 터진다!”

    하고 앞쪽에서 외침이 일어났으므로 모두 납작 엎드렸다.

    “꽈광!”

    그 순간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창고의 철문 한 짝이 떨어졌다.

    “1조는 주위 경계!”

    하고 전석규가 소리쳤지만 모두 창고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바람에 주위는 순식간에 비워졌다. 불에 타던 사무실 안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울렸다. 탄약이 폭발한 것 같다.

    “모두 여섯 쥑였어.”

    옆으로 다가온 박길수가 말했으므로 전석규가 머리를 들었다. 박길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기습을 해서 우린 다친 동무도 없어. 해볼 만하다고.”

    7월25일 15시30분, 개전 4시간40분25초 경과.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이동일이 망원경을 눈에서 떼고는 옆에 엎드린 윤미옥에게 건네주었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반란 같다.”

    짧은 말이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습니다.”

    왼쪽에 엎드린 황찬우가 망원경을 눈에 붙인 채 대답했다. 황찬우의 목소리는 열기에 떠 있었다.

    “내란 같습니다.”

    그때 윤미옥이 망원경을 보면서 말했다.

    “노농적위대원인데요.”

    오히려 윤미옥이 차분한 태도였다.

    “저곳은 보위부에서 관리하는 양곡창고입니다. 경비하던 보위부대 병사들을 다 죽였군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이동일이 물었다.

    “저 사람들하고 합류할 방법이 없겠나?”

    그러자 윤미옥이 망원경을 눈에서 떼고는 힐끗 이동일의 옷차림을 보았다. 이동일은 인민군복 차림이다.

    “동무들을 인민군으로 알 텐데요.”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

    이동일이 똑바로 윤미옥을 보았다. 윤미옥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있다.

    “저 사람들은 이제 아군이야. 합류시키든지 도움을 주기라도 해야 돼.”

    같은 시각, 연합사 상황실 벙커의 대형 화면에 두 무리가 다 드러났다. 언덕 위의 이동일, 그리고 아래쪽 양곡창고 주변의 무리다.

    “식량을 탈취하고 있습니다. 저건 쌀자루입니다.”

    하고 화면을 본 한국군 대령이 소리쳤고 미군 대령은 영어로 떠들었다. 화면에 어깨에 멘 쌀자루가 확대되어 비쳤다. ‘대한민국’이라고 쓴 글자도 보인다.

    “그럼 반란군인가?”

    하고 우드워드 대장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을 때 마침 화면이 땅바닥에 쓰러진 인민군복 차림의 병사 두 명을 비췄다. 쌀자루를 나르는 병사들도 인민군이다.

    “저건 우리 편이야.”

    그때 언덕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 것은 합참의장 장세윤이다. 장세윤이 손을 그대로 둔 채 머리를 돌려 해병사령관 정용우를 보았다.

    “당신 부관이 저기에 있어.”

    “거리는 250m 정도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한국군 대령이 소리쳐 보고했다.

    “지금 그쪽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맛살을 찌푸린 육참총장 조현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을 때 상황실 안으로 대통령 박성훈이 들어섰다. 박성훈은 옆방에서 비상 국무회의를 마치고 온 것이다.

    “뭡니까?”

    화면을 본 박성훈이 물었으므로 장세윤이 헛기침을 했다. 들뜬 표정이다.

    7월25일 15시35분, 개전 4시간45분25초 경과.

    “동무들!”

    갑자기 사내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전석규는 깜짝 놀랐다. 쌀자루를 나르던 노농적위대원 몇 명은 총을 고쳐 쥐고 납작 엎드렸다. 다시 사내 목소리가 들렸다.

    “동무들! 우린 한국군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북상해온 한국군 해병대입니다! 동무들이 양곡 창고를 공격한 것을 보고 다가왔습니다! 우리하고 합류합시다!”

    “저쪽 바위 밑이야!”

    다가선 박길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길수가 눈으로 50m쯤 떨어진 언덕 중간쯤 바위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저 위에서 소리 지르는 것 같아.”

    그때 다시 사내가 소리쳤다.

    “동무들! 우린 인민군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인민군이었다면 벌써 여러분을 공격했을 것 아닙니까? 우린 언덕에서 여러분을 포위한 상태란 말입니다!”

    머리를 든 전석규는 숨을 들이켰다. 언덕 8부 능선 근처에 흩어져 있는 인민군들을 본 것이다. 거리는 100m 정도, 이쪽을 향해 모습을 드러낸 채 손을 흔들고 있는 병사도 있다.

    “포, 포위당했어!”

    그때 오규성이 다가와 말하더니 손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사무실 건너편의 제방이다. 그 제방 위에도 10여 명의 인민군이 엎드려있는 것이다. 전석규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바로 그곳에 숨어 있다가 이 창고를 습격했기 때문이다. 그때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여러분도 우리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같이 행동합시다!”

    “맞아. 저놈 말대로 우릴 공격했다면 우린 전멸했어.”

    박길수가 창고 벽에 붙어 선 채 말했다. 이제 노농적위대 52명은 쌀자루를 팽개친 채 제각기 이곳저곳에 은폐하고 있지만 저쪽에서 다 내려다보일 것이었다.

    “저기, 손을 흔드는데!”

    하면서 누가 소리쳤으므로 모두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쪽을 향했다. 바위 뒤에서 인민군복 차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손을 흔들면서 다시 소리쳤다.

    “여러분! 나는 대한민국 해병대위 이동일입니다. 나는 내 부하들과 함께 이곳까지 전격해온 것입니다!”

    “맞아요!”

    그때 바위 뒤에서 나타난 인민군 하나가 소리쳤다. 여자 목소리다.

    “나는 한국 해병한테 포로로 잡힌 제22사단 172보급대 소속 중위 윤미옥이오! 이사람 말이 사실입니다!”

    7월25일 15시40분, 개전 4시간50분25초 경과.

    “다가간다!”

    이번에는 해병사령관 정용우가 소리쳤다. 화면이 비스듬히 비추었으므로 언덕을 내려가는 무리의 그림자가 길다. 한국군 해병이다. 해병들은 삼면에서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 불타는 건물 근처에 서 있는 무리가 그들을 맞는 형국이다. 정용우가 말을 잇는다.

    “해병들이 반란군을 포섭한 거야!”

    정용우의 번들거리는 눈길이 연합사령관 우드워드를 지나 대통령 박성훈에게로 옮겨졌다. 장세윤은 정용우의 표정이 꼭 칭찬을 기다리는 초등학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심호흡을 박성훈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전쟁은 이제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겠는데.”

    혼잣소리였지만 끝쪽에 서 있던 장교도 다 들었다.

    다가선 이동일이 전석규에게 말했다.

    “이곳에 오래 있는 건 위험합니다. 이동해야 됩니다.”

    “그러려고 했습니다.”

    전석규가 주위에 둘러선 인민군 복장의 병사들을 훑어보며 묻는다. 아직도 얼굴은 굳어 있다.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46명.”

    “후속부대는?”

    “곧 올 겁니다.”

    그래놓고 이번에는 이동일이 노농적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이쪽 병력은?”

    “나까지 52명, 하지만.”

    어깨를 늘어뜨린 전석규가 말을 잇는다.

    “여자 대원은 모두 돌려보낼 작정이요. 집으로 돌아가 제각기 피신해야지.”

    “나머지 대원들은?”

    “나머지는 가족들 데리고 숨어야지, 이젠 집에서 못 삽니다.”

    “우리하고 합류하지 않겠습니까?”

    이동일이 말하자 전석규가 옆에 선 박길수를 보았다. 박길수는 오성규를 보았고 서로 시선들이 부딪쳤다. 그러더니 전석규가 머리를 내젓는다.

    “우린 나이 들어서 동무들하고 같이 움직이긴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이동일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쥐었다. 그리고는 전원 버튼을 누르면서 말을 잇는다.

    “이해합니다.”

    7월25일 15시45분, 개전 4시간55분25초 경과.

    일산 대호식당의 김대호는 숨을 죽이고 TV를 응시했다. 국제방송의 ‘46용사 특집’이다. 화면에 선명하게 오윌리 보위대 창고 주변이 비쳤다. 그때 아나운서가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북한 노농적위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보위부대를 습격해 막사를 불태우고 보위대원을 전멸시킨 후에 양곡을 탈취했습니다.”

    그러고는 화면이 불타는 막사와 쌀자루를 운반하는 남녀 노농적위대원을 비췄다. 그때 60대쯤의 노농적위대원이 화면에 나타났다.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제는 이놈의 세상을 뒤집어야 해. 마침 우리 손에 총이 쥐어졌으니 끝장을 내겠어.”

    노농적위대원이 기를 쓰고 말했을 때 김대호는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그려, 당신들 손으로 맹글어봐.”

    손등으로 눈을 닦은 김대호가 말을 잇는다.

    “그러면 우리도 힘껏 도와줄 테니까 말여.”

    같은 시각. 육참총장 조현호가 작참부장 박진상에게 지시했다.

    “대북 전단을 뿌려! 북한 상공을 저 장면으로 도배하란 말이야!”

    (6장에 계속)

    이원호

    2014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등이 있다.


    “멈췄습니다.”

    화면을 본 육본작참부장 박진상이 소리쳤지만 이미 상황실 안의 지휘부는 다 보았다. 앞쪽 벽에 붙어 있는 대형 화면에는 인공위성 UT-27호기에서 촬영한 북한 지역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비치고 있다. 그때 화면이 클로즈업되면서 도로를 가득 덮은 탱크 대열이 보였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는다. 옆쪽 샛길로 트럭 한 대가 달리는 것이 탱크대가 정지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820전차군단이다.

    “길가로 포진하는군요.”

    다시 박진상이 중계하듯 말했다. 전차군단은 도로 옆 야산으로 산개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자욱한 먼지를 내뿜으며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김정일의 말발이 먹힌 것 같군.”

    하고 해병사령관 정용우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모두 들었다. 묵묵히 화면을 응시하던 연합사령관 제임스 우드워드가 참모장 모건 해리슨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105전차사단하고 얼마 거리야?”

    “25㎞, 30분 거립니다. 장군.”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해리슨이 바로 대답하자 우드워드는 어깨를 치켜 올렸다가 내렸다. 다소 과장된 행동이다.

    “이거, 스릴이 있군.”

    대형 화면 아래쪽에 시간이 찍혀 있다. 14시18분25초다.

    7월25일 14시20분, 개전 3시간30분25초 경과.

    황해남도 태탄 북방 2㎞ 지점. 갓길에서 타이어 교체를 마치자 이명철 상위가 버럭 소리쳤다.

    “날래 가자우.”

    제23교도여단 수송대 소속의 이명철은 트럭 두 대를 끌고 신천 북방의 보급기지로 군량을 실으러 가는 중에 펑크가 난 것이다.

    “야, 뭐하나!”

    길가에서 꾸물거리는 병사에게 다시 소리친 이명철이 1번 트럭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길 옆 도랑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일대의 인민군 병사들을 보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앞장선 장교는 중위 계급장을 붙인 여군이다. 그 뒤를 소좌가 따르고 있다.

    “동무, 잠깐만요.”

    하고 중위가 불렀으므로 이명철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오?”

    그때 다가선 중위가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기된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 있다.

    “어디까지 갑니까?”

    대답 대신 중위가 되물었으므로 이명철은 와락 짜증이 났다.

    “신천, 그런데 왜 그러는 거요?”

    쏘아붙인 이명철은 그 순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자신과 부하들이 이들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모두 40, 50명은 된다. 이쪽은 모두 여섯 명, 군 생활 18년째인 이명철은 더운 여름 날씨인데도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교전이 그친 지 두 시간 가까이 되었군.”

    벽시계를 올려다본 김형기가 잇사이로 말했다. 14시22분(개전 3시간32분25초)이다. 개전 1시간35분쯤인 오후 12시24분에 양국 수뇌부의 합의하에 공격이 중지된 것이다.

    의자에 등을 붙인 김형기가 앞에 선 대좌를 보았다. 이곳은 제55호위대의 벙커에서 500m쯤 떨어진 지하 벙커 안이다. 사방이 시멘트벽이고 창문도 없이 철문 하나만 붙어 있는 벙커 안에는 감시역인 대좌와 김형기 둘뿐이다. 그러나 낡아빠진 플라스틱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은 김형기는 의연했다. 오히려 서 있는 대좌가 잡혀온 것처럼 불안한 표정이다. 김형기가 머리를 들고 대좌를 보았다.

    “이보라우, 동무, 이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끝났다우.”

    대좌는 눈만 껌벅였고 김형기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 김씨 세상이 끝난 게지, 전쟁이 일어난 순간부터 말야, 지금 두 시간째 교전은 중지되었지만 수습할 수는 없어.”

    그러고는 김형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그래서 지도자 동지께서는 남조선 놈들한테 엄포만 주면서 전쟁을 일으키진 못했어. 일어난 순간부터 군부가 배신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대좌는 몸을 굳힌 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김형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변화를 일으킨 주인공이 나야. 내가 이번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7월25일 14시25분, 개전 3시간35분25초 경과.

    오산 연합사사령부 지하 벙커 안. 상황 화면을 향하고 앉은 연합사령관 우드워드 대장이 말했다.

    “다 정지했군.”

    둘러앉은 수십 명의 장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 맹렬하게 달려가던 820전차군단이 멈춰 섰고 그전에 815기계화군단이 정지함으로써 전(全) 전선이 현 상태에서 고착되었다. 옹진을 점령한 한국 해병 7사단이 적진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도 건재하다. 그때 연합사 참모장 해리슨이 머리를 들고 누구를 찾는 시늉을 했다. 해리슨이 연합사 부사령관 이성호 대장의 옆쪽에 앉은 해병사령관 정용우와 시선을 맞춘 것은 잠시 후였다.

    “장군, 그 46명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해리슨이 묻자 상황실의 모든 시선이 정용우에게로 모아졌다. 그 말을 들은 우드워드가 말했다.

    “그렇군, 움직이는 건 그놈들뿐이군.”

    “젠장.”

    정용우가 한국어로 투덜거렸지만 해리슨은 알아들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해리슨이 다시 묻는다.

    “장군, 우리가 그놈들 위치를 TV를 통해서나 알아야 되는 거요?”

    그러자 정용우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장군.”

    같은 시간, 소공동 국제신문 건물의 방송실에서 PD가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고 있다. 지친 표정이다. 리시버를 낀 송아현은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 앞쪽 빈 화면을 본다.

    “움직여야 돼.”

    뒤쪽에서 담당 국장 하기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동일의 46용사를 말하는 것이다. 하기호가 말을 잇는다.

    “치고 올라가서 사건을 만드는 거야. 양쪽이 조용해진 이때가 가장 빛이 날 때라고.”

    “이번에 생방되면 시청률은 대번에 60% 이상으로 솟을걸?”

    편집국장 백한섭이 말을 받는다. 송아현이 듣는 터라 목소리는 조금 낮추고 있다. 그때 버튼을 누르다 지친 PD가 머리를 돌려 하기호를 보았다.

    “전원을 꺼놓았는데 좀 있다 할까요?”

    “계속 눌러.”

    하기호가 가차 없이 말했다.

    “손가락 아프면 다른 사람한테 인계해.”

    송아현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이동일의 뜨거운 숨결이 귀에 닿는 것 같다.

    이번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저녁밥만 먹고 바로 식당 근처의 모텔 방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만.”

    송아현이 허리를 뒤로 젖혔지만 이동일이 감아 안고 있는 터라 하반신은 더 밀착되었다. 이동일의 딱딱한 물체가 허벅지를 눌렀고 그 순간 숨이 가빠졌다.

    “천천히.”

    하고 송아현이 말했을 때 이동일은 짧게 웃었다.

    “좋아, 천천히.”

    그러고는 허리를 떼었으므로 송아현이 두 팔을 들어 이동일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동일의 머리가 당겨지면서 곧 입술이 겹쳤다. 입이 열리더니 살구 냄새가 맡아졌다. 이 남자 좀 봐. 이동일의 입 안에 혀를 넣으면서 송아현은 가슴으로 웃는다. 저녁으로 낚지볶음을 먹었는데 어느새 가글을 했네. 혀가 부딪치더니 감겼고 곧 뱀처럼 엉켰다가 풀어졌다. 그 순간 송아현은 허벅지 안쪽으로 두꺼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다. “아우, 나 몰라. 난 너무 많은가봐.”

    “좋아. 10분만 쉬었다 하자.”

    하고 뒤쪽에서 하기호가 말하는 바람에 송아현은 눈을 떴다. 앞쪽 화면은 머릿속처럼 깨끗했다.

    7월25일 14시30분, 개전 3시간40분25초 경과.

    “3㎞쯤 앞에 검문소가 있어요.”

    하고 윤미옥이 말했으므로 이동일이 머리를 돌렸다. 운전을 하고 있던 이용섭 하사도 힐끗 옆에 앉은 윤미옥을 본다. 트럭은 신천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뒤쪽 화물칸에는 4소대와 1소대 혼합 병력 20여 명이, 그리고 뒤를 따르는 트럭에도 1소대와 3소대 혼합병력 20여 명이 탑승하고 있다. 2차선의 좁은 국도여서 옆을 트럭 세 대가 스치고 지났다. 포장은 되었지만 보수가 엉망인 도로 위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운전석 양쪽 옆 창문을 내렸기 때문에 먼지가 거침없이 휩쓸려 들어왔다. 트럭은 수동인데다 에어컨도 없는 구형이다. 윤미옥이 이동일을 똑바로 보았다.

    “돌파하실 건가요?”

    “무장은?”

    “목제 차단기가 있고 초소에 대여섯 명 정도, 무기는 자동 소총입니다.”

    “검문은 어떻게 받나?”

    “평시에는 군 트럭을 그냥 통과시키지만 지금은….”

    “모른단 말이지?”

    “전시니까요.”

    “네가 검문을 통과시킬 수 있겠나?”

    불쑥 이동일이 묻자 윤미옥이 머리를 돌려 앞쪽을 응시했다. 트럭은 막 산비탈을 꺾어가는 중이어서 속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때 이동일이 윤미옥의 옆얼굴에 대고 말했다.

    “이봐, 중위, 우린 이미 같은 배를 탔어. 네 부대를 같이 빠져나왔을 때부터 말이다.”

    “….”

    “조금 전에 교도여단 수송대원들을 죽여 숨긴 것도 그래. 넌 이미 끌려들었어.”

    “….”

    “인민군에 복귀한다는 꿈을 버리는 게 나을 거다. 넌 돌아가도 살아남지 못해.”

    “동무들과 같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하고 윤미옥이 말했을 때 이동일이 소리쳤다.

    “정지! 차를 세워라!”

    이용섭이 창밖으로 손을 뻗쳐 뒤쪽 트럭에 신호를 보내면서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차 안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그때 이동일이 뒤쪽 화물칸으로 뚫린 창에 대고 소리쳤다.

    “잠시 휴식이다!”

    같은 시각, 오산의 한미연합사 전시사령부 안이 부산해졌다. 그것은 과천 산본장 지하 벙커에 있던 대통령 박성훈이 참모들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전시에 지휘부가 한곳에 몽땅 모여 있는 것이 위험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대통령이 옆에서 군작전을 듣고 보고 돕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상황실 안쪽 테이블에 마주 앉은 박성훈에게 우드워드가 보고한다.

    “중국군이 이미 단둥 북방에 대거 집결해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2개 군단 병력이 북한 땅 안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박성훈이 눈만 껌벅였고 우드워드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 총참모장 김형기와 현재 작전을 지휘하는 제2군사령관 김경식이 중국 군부 실세와 자주 접촉해왔지요.”

    “그렇다면 이번 전쟁의 배후에 중국이 있다는 겁니까?”

    영어에 유창한 박성훈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묻자 우드워드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아직 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대비책은 세워놓았겠지요.”

    그것은 한국 측도 마찬가지다. 남북한 전쟁시에 중국이 개입할 형태는 수십 가지였고 그 대비책도 세워놓았다. 그때 박성훈이 우드워드에게 묻는다.

    “북한이 핵을 사용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해놓고 우드워드가 덧붙였다.

    “지휘관들이 제정신인 상태라면 말씀이죠.”

    그러고는 우드워드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지금도 저 위에 핵 폭격기가 떠 있죠. 만일 북한이 핵 발사구만 연다면 그 순간에 멸망할 테니까요.”

    핵 폭격기는 개전이 되자마자 오키나와의 미 공군기지에서 발진했을 것이었다. 그러고는 현재 한반도 상공에 유령처럼 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군 합참벙커나 연합사 벙커에서 내뱉었던 대화 중에 아주 미미하게 몇 번 나타났을 뿐이지만 모두의 머릿속에 다 입력되어 있다. 북한이 핵을 사용할 기미만 보이면 핵공격을 받을 것이었다. 그것은 북한군도 다 안다. 그러자 박성훈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말한다.

    “이 기회에 김정일씨가 김경식이를 제압해야 될 텐데.”

    우드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 김경식이 4군단장 우장선에게 밀려 820전차군단의 진군을 정지시켰지만 아직 상황은 알 수가 없다.

    “나야.”

    하고 휴대전화 화면에 뜬 송아현이 말했을 때는 14시35분(개전 3시간45분25초)이다. 이동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가에 정지한 트럭의 보닛을 열어 수리하는 것처럼 병사 둘이 엔진을 점검하고 있다. 타이어 주변에 서너 명이 몰려 있었고 나머지 병사들은 길 아래쪽 도랑으로 내려가서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송아현이 서두르듯 묻는다.

    “괜찮아?”

    “응, 그래.”

    이동일이 송아현의 얼굴을 향해 말을 잇는다.

    “아현아, 내가 북진 중이라 여기가 어딘지 밝힐 순 없어. 하지만 그쪽에선 내 발신지를 측정해서 알 수 있을 거야.”

    “지금 정전 상태여서 오빠 동향이 가장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어.”

    “우리 대대는? 남해에 상륙한 우리 사단은 어떻게 되었어?”

    “아직 그대로 있어. 남북한 정상 간의 합의로 공격하지 않고 있어.”

    “그럼 움직이는 건 우리뿐인가?”

    “그런 셈이야.”

    그러자 이동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연락이 끊긴 게 차라리 잘되었다. 적진 깊숙이 박힌 나한테 항복하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진격하라고 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말야.”

    “오빠, 이 방송은 군당국의 허가를 받았어. 군은 나를 통해 오빠한테 지시할 수도 있어.”

    그러자 화면에 비친 이동일이 정색했다.

    “그렇군, 그런데 아직 그런 지시가 없는걸 보면 내가 날뛰도록 놔두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 같다.”

    “이건 편집해 방송될지 몰라.”

    “그렇다면 앞으로는 내가 한 시간 간격으로 너한테 연락하기로 하지. 지금이 몇 시냐?”

    “오후 2시38분.”

    “그럼 오후 3시30분에 내가 연락을 하지.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말야.”

    그러고는 이동일이 얼굴을 펴고 웃는다.

    “그리고 그때는 일방적으로 내 말만 전하는 것으로 하자. 어쩔 수 없이 너를 통해 명령이 전해질지도 모르니깐 말야.”

    “과연 순발력이 있군.”

    화면이 꺼졌을 때 감동한 방송국장 하기호가 소리치듯 말했다.

    “이제 군 명령이 이쪽으로 기어들어올 소지가 조금은 줄어들었어.”

    “이것도 편집해야겠지요?”

    PD가 서두르듯 묻자 하기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이쪽 말은 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만들고 이동일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해.”

    “그렇지.”

    하고 나선 것은 벽에 기대 서 있던 국제신문 편집국장 백한섭이다. 백한섭이 말을 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30년쯤 지났을 때인데 필리핀 숲속에서 발견된 일본군 있었잖아? 일본이 패망할 줄도 모르고 숨어 있었던 놈 말야.”

    모두의 시선을 받은 백한섭이 열변을 토했다.

    “이동일을 그놈으로 만들면 되겠다. 아주 감동적일 거야.”

    그러나 말이 끝났을 때 모두 제각기 머리를 돌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송아현은 옆으로 다가온 PD의 표정을 보고는 심호흡을 했다. PD는 아예 무슨 말인지 못 들은 것 같다.

    “갈게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이동일이 도랑으로 내려갔을 때 윤미옥이 말했다. 군모를 벗은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옆으로 다가선 조한철이 잠자코 윤미옥과 이동일을 번갈아 본다. 덥다. 위쪽 트럭이 만들어준 작은 그늘 밑으로 30여 명의 부하가 모여 앉아 있다. 이동일의 시선을 받은 윤미옥이 말을 잇는다.

    “검문소는 여러 번 지나다녀서 잘 압니다. 통과하는 건 일 없습니다.”

    그러자 조한철이 이동일을 힐끗 보았다.

    “신천이 내 고향입니다. 날 살려준다고 약속해준다면 동행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신천을 통과하고 나서 날 놓아주십시오.”

    이동일이 머리를 돌려 조한철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우릴 끌고 자폭할 작정인지도 모릅니다.”

    조한철이 옆에 선 윤미옥의 옆얼굴을 보면서 말을 잇는다.

    “우리한테 호의를 베풀 이유도 없고요.”

    “살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지.”

    이동일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을 때 조한철이 머리를 기울였다.

    “예, 그런데 별로 겁을 내는 것 같지가 않거든요. 이거 어릴 적부터 세뇌당한 종자인지도 모릅니다.”

    “젠장.”

    눈을 치켜뜬 이동일이 입맛을 다셨다.

    “이러다가 날 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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