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자아를 찾는 여성, 마녀가 되다

메두사 vs 메데이아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12-21 17: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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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성의 지배에 길들지 않는 여인들

    자아를 찾는 여성, 마녀가 되다

    콜키스의 국보 황금양피를 얻기 위해 용을 잠재우는 이아손. 실제로는 이아손과 사랑에 빠진 메데이아가 용을 잠재우고 이아손을 돕는다.

    남성의 가장 흔한 불평 중의 하나. “도대체 여자들이 원하는 게 뭐야?” 꾸밈없는 솔직함이 여성의 매력이 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수많은 여성은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 에둘러 말하고, 넘겨짚고, 온갖 완곡어법을 동원하는 것은 여성의 주특기다. 프랑스의 여성학자 엘렌 식수는 말한다. 할 수 있다, 원한다, 말한다, 즐긴다! 이런 식의 모든 ‘향유’는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여성에게 투표권도 발언권도 상속권도 없던 시대에,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고 싶어한 여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원하는 것을 원한다 말하고, 싫은 것은 단호히 거부했던 여성의 삶은 평탄했을까.

    조국을 배신하고 남편을 도왔다가 남편이 배신하자 자식까지 죽인 것으로 알려진 ‘희대의 악녀’ 메데이아, 눈만 쳐다봐도 모든 사람을 돌로 만들 수 있었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악한’ 존재 메두사. 팜 파탈의 대명사이자 악녀나 요부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 두 여성은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나 신들의 사랑을 받았던 다른 여성들 못지않게 매력만점인 아름다운 여성들이었다. 메두사가 아직 ‘인간’이었을 때 그녀는 너무 많은 남성의 구애를 받아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고, 포세이돈과의 ‘세기의 로맨스’로 미네르바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메데이아는 주술과 마술을 총괄하는 강력한 여신 헤카테를 숭배하는 마법사로 명성을 떨쳤다. 단지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미녀와는 차원이 다른 독자적인 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두 여인. 그들은 어떻게 위협적인 마녀, 음란한 요부, 위험한 팜 파탈의 대명사로 굳어지게 되었을까.

    너는 왜 이방인에 대한 사랑에 불타고 있는가? 왜 이방인과의 결혼을 꿈꾸고 있는가? 이 땅에도 사랑할 만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오비디우스, 이윤기 옮김, ‘변신이야기’, 민음사, 284쪽.



    황금양피를 찾으러 콜키스에 온 영웅 이아손에게 첫눈에 반한 메데이아. 그녀는 수많은 구혼자를 물리치고 낯선 이방인 이아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마법사인 메데이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아손은 결코 아르고 원정대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메데이아는 그녀가 가진 모든 마법과 주술의 힘을 동원해 이아손을 돕고, 마침내 함께 조국을 떠난다. 메데이아가 부리는 각종 마술의 효험을 톡톡히 본 이아손은 이번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또 하나의 미션을 아예 대놓고 요구한다.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해달라는 것이다. 메데이아는 군말 없이 온 마음을 다해 제의를 주관하고 마법을 동원해 죽음을 앞둔 시아버지를 무려 40년 전의 젊은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아손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에 권태를 느낀 것일까. 그녀를 배신하고 코린토스의 공주 글라우케와 결혼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누려온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떠나온 메데이아는 광기와 복수심에 가득 차 두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메데이아의 라이프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테네왕 아이게우스 1세와 결혼하기도 했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빼앗긴 왕위를 되찾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그리스의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그녀를 사랑에 눈이 멀어 광기 어린 복수를 자행한 여인으로 그렸지만, 이후 작가들의 수많은 패러디 속에서 메데이아는 주로 ‘남성의 지배에 길들지 않는, 최고로 다루기 힘든 악녀’로 자리 잡는다.

    한편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여인 메두사는 인간으로서 가장 끔찍한 형벌인 ‘신의 증오’를 받았다. 포세이돈을 짝사랑한 아테나의 질투를 받은 것이다. 아테네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던 포세이돈과 메두사의 모습을 발견한 아테나는 진노한다. 메두사는 특히 탐스럽고 아름다운 머릿결로 유명했는데, 아테나는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끔찍한 뱀으로 둔갑시키고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물은 돌이 되도록 하는 저주를 건다. 아테나의 사주를 받은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거울이 달린 방패로 그의 동태를 엿보는 전략으로 메두사를 ‘처치’한다. 아테나는 방패에 메두사의 얼굴을 달아 연적(戀敵)의 얼굴을 적들을 죽이기 위한 ‘무기’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신화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수많은 작품 중 가장 익숙한 메두사의 모습은 바로 목이 잘린 참혹하고 괴기스러운 모습, 절멸해가는 악녀의 비참한 말로다.

    2 찬란한 재능과 아름다움의 대가

    코린트인에게 메데이아는 마치 페스트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 목소리들’(1996)에서 메데이아는 말한다. 그들은 지금 나, 메데이아를 마치 나병환자처럼 피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 주위에 원을 그리고는, 어느 누구도 그 원을 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버림받은 메데이아를 마치 병균 다루듯이 피했다.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영웅 페르세우스의 전투 또한 뭔가 비겁한 데가 있지 않은가. 메두사의 눈과 혹시라도 마주칠까 벌벌 떠는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처치하는 장면은 통쾌하기보다는 ‘영웅의 카리스마’에 어울리지 않는 사술(邪術)처럼 보인다. 그녀를 정면으로 무찌르지도, 혹은 깜짝 반전을 일으켜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고, 오직 그녀의 눈길을 ‘성공적으로 회피함’으로써 승리하다니. 그리스 신화에는 그토록 많은 영웅이 존재하지만, 메두사의 저주를 깨는 진정한(?) 구원의 남성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괴물’이나 ‘마녀’로 규정되는 메두사와 메데이아는 남성중심주의 신화의 껍질을 벗으면 단지 ‘여자’일 뿐이었다. 그녀들이 ‘애초에’ 저지른 유일한 죄(?)는, 단지 ‘여성’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메데이아는 남성의 접근을 물리치고 뗏장을 떠서 문밖에다 두 기(基)의 제단을 쌓았다. 오른쪽 제단은 헤카테 여신에게 바치는 제단, 왼쪽 제단은 유벤타(헤라클레스의 아내) 여신에게 바치는 제단이었다. …… 메데이아가 불 위에 올린 가마솥에서는 약초즙이 흰 거품을 내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메데이아는 여기에다 하이모니아 계곡에서 거두어온 약초의 뿌리와 종자와 꽃과 즙을 넣고, 또 극동에서 가져온 돌, 오케아노스의 파도에 씻긴 자갈, 보름 밤에 내린 이슬, 부엉이 고기와 날개,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 믿어지던 이리의 내장을 넣었다. …… 미개한 나라에서 온 공주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백 가지의 약재를 더 넣었다. …… 메데이아는 칼을 뽑아 노인의 목을 따고는 늙은 피를 깡그리 뽑아내고 칼로 딴 자리와 입으로 약을 부어넣었다. 늙은 이아손은 입으로, 메데이아가 열개(裂開)한 목의 상처로 이 약을 마셨다. 약이 들어간 지 오래지 않아 그의 하얗던 수염이 그 흰 빛을 잃더니 곧 검어지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해서 그는 40년 전의 자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오비디우스, 이윤기 옮김, ‘변신이야기 1’, 민음사, 295~297쪽.

    위 장면은 메데이아가 남편 이아손의 부탁으로 시아버지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장면이다. 메데이아가 홀로 당당히 제의를 주관하고 마법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반지의 제왕’의 건달프나, ‘해리 포터’의 마법사들보다 훨씬 멋지고 카리스마 넘친다. 그 순간 그녀는 남자의 사랑 따위에 의존할 필요 없는 완전히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는 이아손의 배신에는 아무런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메데이아의 ‘사악함’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의 좌절된 여성성은 배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성의 히스테리, ‘비이성’과 ‘광기’의 대명사가 된다. 메데이아에게는 ‘헨젤과 그레텔’이나 ‘인어공주’의 마녀가 보여주는 주술적 능력, ‘백설공주’의 계모나 ‘신데렐라’의 계모가 실현하는 잔혹한 모성의 원형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이아손과 감정적이고 과거에 사로잡히며 격정적인 메데이아의 대립. 이런 식의 신화 해석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가부장 중심의 시선이 담겨 있다. 사실 메데이아는 이중, 삼중의 차별을 받고 있었다. 조국을 배반한 인간, ‘여성’이라는 핸디캡. 그녀는 ‘그리스인’이 아닌 ‘야만인’이라는 인종차별까지 받는다. 나아가 마법의 힘을 이용할 줄 안다는 것, 남편의 ‘배신’을 인내하지 못하고 감히(?) 남편에게 복수하려 했다는 것까지.

    그녀의 모든 충동이 단지 ‘파괴’를 향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열정과 충동을 감싸 안아주는 사랑이 있었다면, 그녀는 마법사로서의 연금술사적인 재능을 마음껏 뽐내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아손의 배신 이전 메데이아는 전사의 용맹성과 마법사의 재능으로 빛났다. 메데이아는 ‘여걸’과 ‘샤먼’의 권능으로 가득 찬 캐릭터였다.

    이아손: 나를 포기해라, 당신은 나의 삶의 재앙이야! …… 당신이 빼앗아갔던 것을 다시 내게 돌려주시오. 나 이아손에게 돌려다오. 사악한 여인이여!

    메데이아: 당신은 이아손으로 돌아가길 원하는가? 여기 있소! 그를 가져라! 그러나 누가 나 메데이아에게 줄 것인가? 누가 나를 되돌려줄 것인가!

    -프란츠 그릴파처, ‘황금모피(Das goldene Vliess)’ 중에서

    메데이아를 재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메데이아의 원초적인 마성을 그 자체로 긍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프리드리히 클링거의 ‘카우카소스에서의 메데이아’는 메데이아의 마력을 빼앗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그녀를 마녀에서 인간으로 길들이고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살하는 그녀의 모습을 숭고하게 묘사해 전 생애를 ‘부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자살을 통해 속죄 받는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어떤 망설임이나 죄의식 없이 폭주하던 메데이아의 캐릭터와는 아주 상반된다. 잃어버린 이아손의 정체성은 그가 메데이아를 버림으로써 쟁취될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메데이아 자신, 그녀 자신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살 수 있는 세계, 이 시대가 어딘가에 있을까.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이 대답이다.”(크리스타 볼프, ‘메데이아, 목소리들’ 중에서) 그녀가 가고 수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 ‘마녀’들을 위한 자리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메두사의 신화 속에 암시된 것이 ‘어머니의 생식기’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갑옷에 메두사의 머리를 달고 온 아테나는 나중에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여자가 되었다. 어느 남자든 그녀를 보기만 해도 성적인 모든 욕구가 다 사라졌던 것이다.

    -프로이트,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열린책들, 1996, 381쪽.

    프로이트는 남자들이 여성의 성기 앞에서 ‘거세(去勢) 콤플렉스’를 느낀다고 주장하면서 메두사야말로 남성의 성적 욕망 자체를 마비시키는 두려운 존재라고 말한다. 메두사를 ‘본래의’ 아름다운 존재로 그린 화가나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너무 끔찍하고 잔인해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메두사 그림들. 그러나 메두사의 ‘진심’은 어쩌면 페르세우스에게 살해당한 후 피투성이로 잘린 그녀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천마(天馬) 페가수스를 가장 닮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끝까지 풀지 못하고 신의 증오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메두사는 밤하늘의 별자리 페가수스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메두사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살인자 페르세우스다.

    메두사는 한때 아름답기로 소문난 처녀였답니다. 수많은 구혼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니까요. 다른 부분도 아름다웠지만 그중에서도 머리카락은 특히 아름다웠던 모양이지요? 나는 이 시절에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다의 지배자(해신 포세이돈)가 이 메두사를 미네르바 여신의 신전으로 데려가 사랑을 했다는 이야기를 합디다. 이 유피테르의 따님(미네르바)으로서는 방패로 얼굴을 가려야 할 만큼 무안당하셨던 거지요. 그래서 미네르바 여신은 이 죄 값을 물어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버리신 것이지요. 요즈음도 여신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이 뱀을 흉갑에다 달고 다니시면서, 적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으신답니다.

    -오비디우스, 이윤기 옮김, ‘변신 이야기1’, 민음사, 201쪽.

    3 마녀를 배척하는 사회를 고발하라

    메두사나 메데이아가 처음부터 ‘마녀의 원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들은 다른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처럼 ‘선악을 넘어서’ 꿈틀거리는 욕망의 루트를 따라 움직인 캐릭터들이었고, 중세의 마녀사냥과 근대사회의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여과장치’를 거치며 점차 그 악마성이 강화되었다. 최근 메데이아 신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작품이나 연구가 늘어나고 있고 메두사 캐릭터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메데이아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용기 있고 영리한 존재로 여기며 그녀를 찬양하고 숭배하는 제의를 드리는 곳도 있다. 아폴로니오스 로도스는 메데이아를 마녀가 아니라 이아손을 영웅으로 만든 진정한 조력자로, 남성 영웅들에 전혀 밀리지 않는 총명하고 용맹스러운 여인으로 묘사한다. 메데이아 숭배는 흑해 동쪽에 위치한 콜히스뿐 아니라 코린트에서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메두사와 메데이아는 개성이 오직 ‘남성’에게만 허락된 미덕이던 시절에, 여성은 오직 ‘집단적 삶’의 윤리에 따라야 했던 시대에, 누구보다도 당차게 ‘개인의 선택’을 실천했던 여성이다. 조국이나 신의 사랑보다 자신의 사랑을 선택했던 여인들, 그 선택에 책임지기 위해 세상 끝까지 달려갔던 여인들. 그들의 끔찍한 자아상실과 죽음의 잔해를 딛고 페르세우스와 이아손은 그리스 신화 최고의 영웅이 되었다. 이아손의 모험을 성공시키기 위해 분골쇄신할 때는 그토록 (남성을 위해) 쓸모 있었던 메데이아의 능력이 남성 중심의 사회를 위협하는 잠재적 야만성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메두사의 권능 또한 끝내 페르세우스의 영웅 만들기 신화를 위한 최고의 연료로 사용된다. 오직 남성만이 ‘주체’로 인정받았던 시대에 ‘좋은 여자’란 다음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좋은 여자란 남자가 여자에게서 자기 힘과 자기 욕망을 실감할 수 있도록 꽤 오랫동안 저항하는 여자. 그러나 남자가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위대해지고 더욱 든든해져서 자기 자신에게로의 회귀를 향유할 수 있도록, 너무 지나친 장애 없이, 너무 오래 저항하지 않는 여자라고.

    -엘렌 식수, 박혜영 옮김, ‘메두사의 웃음/ 출구’, 동문선, 2004, 146쪽.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긴 하지만 욕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존재. 남성에게 너무 쉽게 주도권을 빼앗기지는 않되 남성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러니까 남성의 우위를 더욱 ‘흥미롭게’ ‘적당히’ 충족시키는 존재가 될 것. 그것이 ‘여성다운 여성’이 되는 지름길이었다. 엘렌 식수는 말한다. 국가의 업무 안에 그대, 여성의 욕망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고. 남자는 성공을 위해, 사회적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남자에게 여자는 영원한 위협, 반(反)-문명을 표상한다고. 프로이트와 그 후계자들이 지적했듯이, 남성의 운명이란 여성이기를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운명이라고.

    하이너 뮐러의 ‘메데이아’는 여성의 강요된 포지션에서도,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의 위치에서도 살고 싶지 않은 메데이아의 ‘비정체성(정체성 없는 정체성,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정체성)’을 향한 욕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야만인인 나의 이 두 손으로, 나는 인류를 두 조각으로 쪼개고 싶다. 그리고 텅 빈 중앙에 살고 싶다. 나!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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