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강릉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 오세영| 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입력2010-12-22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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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11월25일 오후 6시, 경기도 안양 인근 수리산.

    해가 짧은데다 산속이다 보니 일몰시각까지 30분이나 남았지만 주위를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그렇게 어둠이 깔린 수리산을 특전사 1개 중대가 소리를 죽이며 수색하고 있었다. 특전사는 일반 보병과 편제를 달리하기에 1개 중대라고 해도 병력은 겨우 10명을 상회한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 침투한 북한 공작원 3명이 군의 포위망을 뚫고 어느새 안양까지 북상했다. 더 이상 북상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대간첩작전본부는 정예 특전사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다.

    선두에 선 선임하사가 뭔가 이상을 감지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며 정지 신호를 보냈다.

    “뭡니까?”



    중대장이 자세를 낮추며 다가왔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선임하사가 낙엽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용케도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공작원의 발자국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 않소?”

    중대장은 신중했다.

    “발자국이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 2~3인이 빠른 속도로 뛰어간 흔적입니다. 이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마당입니다. 등산객일 리 없습니다. 북한 공작원이라고 봐야 합니다.”

    선임하사는 당장 쫓아가자고 했지만 중대장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상대는 북한의 최정예로 꼽히는 정찰국 소속의 공작원들이다. 섣불리 행동하다 포위망이 뚫리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꾸물대면 꼬리를 놓친다. 상부에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할 것인가. 아니면 중대 독단으로 추격할 것인가. 잠시 고심하던 중대장은 쫓아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담배촌 쪽으로 빠져나가려 할 텐데, 병력을 반으로 나누겠소. 내가 추격할 테니 선임하사는 대원들을 인솔하고 담배촌에 먼저 가서 매복하고 있으시오!”

    “알겠습니다.”

    선임하사는 대원 중에서 6명을 지목하더니 앞장을 섰다. 대원들은 M16 소총을 꼭 쥔 채 선임하사의 뒤를 따랐다.

    출동할 때 잔뜩 긴장했던 특전사 대원들은 막상 교전이 임박하자 평정을 되찾았다. 상대가 정찰국 소속의 공작원이라고 해도 대한민국 특전사가 그들을 제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대원들은 부지런히 선임하사의 뒤를 따랐다.

    “너! 너! 저기! 그리고 너! 너는 저기!”

    선임하사가 매복지점을 정해주자 대원들은 신속하게 매복에 들어갔다. 선임하사의 예측이 틀리지 않다면 곧 북한 공작원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전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인기척이었다. 대원들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추격하던 중대원들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지원병력에게 위치를 알리기 위해 쏘아 올린 신호탄은 공교롭게도 매복 대원들 앞에 떨어졌고 가뭄으로 바짝 마른 나뭇잎에 불이 옮겨 붙었다.

    “불이다!”

    갑작스러운 산불로 매복 대원들은 허둥댔고 그 사이에 북한 공작원은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긴급 출동한 특전사는 북한 공작원을 체포 혹은 사살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한 달 넘게 활보하다 월북

    1978년 11월4일 광천읍 학성리 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정찰국 소속 공작원 3인은 인근의 군사시설을 탐지하던 중 나무를 주우러 산에 올라온 부근 주민들에게 발각되자 그들을 살해하고 북상, 도주했다. 군은 즉각 비상경계망을 펼쳤지만 북한 공작원들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들은 홍성과 예산, 그리고 온양과 천안을 거치며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여러 명이 피살됐다.

    긴급 출동한 군은 안양 수리산에 이어 부평, 김포에서도 공작원들과 마주쳤지만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여러 차례 포위망을 빠져나간 공작원들은 김포군 운양리 천현부락 뒷산에서 북에서 내려온 안내원을 만나 12월4일 자정 무렵 감암포에서 강을 건너 무사히 북으로 귀환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지역사단과 서부전선에 주둔한 해병부대, 특전사와 전투경찰, 그리고 예비군까지 총동원돼 한 달 이상 충청도부터 군사분계선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공작원들은 보란 듯 포위망을 벗어나 월북한 것이다.

    공작원 3명이 무려 한 달이 넘도록 충청도와 수도권 일대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다 다시 북으로 돌아간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1968년에 청와대와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간첩이 남파됐을 때도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귀환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때는 휴전선에서 가까운 곳이거나 험한 산악지대여서 이번과 경우가 달랐다.

    공작원들을 놓친 데는 군의 예상이 틀린 것도 큰 몫을 했다. 낮에는 비트를 파고 숨어 있다가 밤에 산골짜기를 타고 도주할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북한 공작원들은 환한 대낮에 대로로 이동한 것이다. 도주하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일지에 의해 공작원들은 평택에서 병점까지 기차로 이동했고 관악산 입구 매점에서 빵을 사 먹은 사실이 밝혀졌다. 완전히 허를 찌른 행동이었다.

    탈출경로가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문책이 뒤따랐고, 해당부대는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문책을 당한 부대 중에는 지휘관 이하 부대원 전원이 삭발을 하고 매일 10㎞를 구보하며 복수를 다짐한 곳도 있었다.

    wag the dog

    산업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군부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도 걷히기 시작했다. 한국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동안 북한은 세습을 마무리지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김정일의 후계자 승계는 속도를 더했다. 김정일은 1990년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되면서 사실상 세습을 완성했다. 김일성은 노동당 총비서와 국가주석 자리만 차지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국과 세습을 달성한 북한. 그런데 사회주의의 패배는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세기 내내 지속되던 이데올로기 대립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자유진영이 이기고 공산진영이 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해 저절로 붕괴할 것이라 했는데, 그전에 사회주의가 먼저 무너져버린 것이다. 자본주의도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사회주의의 허구성에 비해서는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소련은 해체됐고 공산권 국가들은 개혁과 개방을 서둘렀다. 개혁과 개방만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지만 북한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 식’을 내세우며 폐쇄를 고집했다. 섣불리 문을 열었다가는 체제가 붕괴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동독이 맥없이 서독에 흡수통일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본 터였다.

    이대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체제를 유지할 수는 없을까. 자연히 비대칭전력이 북한 지도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비대칭전력은 불리한 전세를 한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무기다. 그리고 비대칭무기의 대표는 핵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면 동북아의 안보는 근본부터 흔들리게 된다.

    영변의 핵시설에서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면서 한반도에 다시 위기가 몰려왔다. 북한은 원자로임을 들어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미국은 여차하면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할 기세였다. 북한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자 노릇을 하면서 고비를 넘겼고,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됐다. 그러나 큰 기대를 모은 남북 정상회담은 1994년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급서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서 흐지부지 넘어간 북한 핵은 두고두고 후환을 낳게 된다.

    그 무렵 북한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홍수와 냉해로 곡물 수확이 크게 줄어들면서 주민들은 배를 곯아야 했고, 그동안 석유와 가스를 외상으로 대주던 러시아가 현금 결제를 요구하면서 연료도 모자라게 됐다. 공장은 멈춰 섰고, 전등이 꺼진 거리는 암흑 세상으로 변했다. 춥고 배고픈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인민들의 입에서 ‘그래도 수령님 시절이 좋았는데…’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과연 김정일은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세습이 이뤄져도 김정일이 신격화한 김일성을 대신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내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밖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의미로 ‘왜그 더 도그(wag the dog)’이라고 한다. 1996년으로 넘어오면서 북한의 상황이 그러했다. 정보당국은 긴장해서 북한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350t 상어급, 잠항하다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잠수함 침투 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야산에서 군인들이 도피 중인 무장간첩을 수색하고 있다.

    1996년 9월13일, 함경남도 낙원군 퇴조 해군기지.

    승용차가 어둠이 깔린 기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해상처장 김동원 대좌가 김대식 상장을 맞이했다. 출정에 앞서 공작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정찰국장 김대식 상장이 기지를 찾은 것이다. 김대식 상장은 도열한 침투요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를 나와서 한국군의 특전사령관에 해당하는 정찰국장이 된 특이한 경력을 지녔다. 인민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대남 강경파 김격식 대장이 그의 사촌이다.

    “출전 채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함장 정영구 중좌가 굳은 얼굴로 결의를 다졌다.

    “목숨을 걸고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수호하겠습니다.”

    안내조장 유림 소좌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잠수함 승조원 22명과 차례로 악수를 나눈 김대식 상장은 마지막에 도열한 세 사람의 정찰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들은 소속이 달라 함장은 물론 해상처장도 이들의 정확한 신상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조장은 소좌이고 2명의 조원은 대위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귀관들의 무운을 빌겠다.”

    김대식 상장이 정찰조 세 사람의 손을 힘껏 잡았다. 승조원들과 악수할 때와는 달리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기필코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정찰조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승선!”

    함장 정영구 중좌의 명이 떨어지자 22명의 승조원과 3인의 정찰조는 신속하게 잠수함에 승선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김동원 대좌가 김대식 상장에게 경례를 하고 마지막으로 승선했다. 이미 두 차례나 잠수함 공작을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는 김동원 대좌는 자신이 있었다. 22명의 승조원과 3인의 정찰조를 태운 상어급 잠수함은 서서히 퇴조항을 빠져나갔다. 시계는 1996년 9월14일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전에는 모선에서 분리된 반잠수정을 이용해 해안침투를 시도하던 북한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침투수단을 잠수함으로 바꿨다. 그쪽이 불순한 일기에 안전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해안경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순한 일기가 휠씬 큰 장애였다. 침투에 동원하는 두 종류의 잠수함 중 80t짜리 유고급은 노동당 3호청사 작전부에서 직접 운용하고, 350t짜리 상어급은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에서 지원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승조원과 정찰조는 서로 소속이 달랐다.

    잠수함은 스노켈(외부 공기를 빨아들여 엔진을 가동, 축전지를 충전하는 시스템)만 수면 위로 올려놓고 남쪽으로 향했다. 북한 영해지만 미국 정찰위성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수중으로 항해하는 중이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스노켈마저 내리고 완전 잠항해야 한다. 한국 해군은 P3C 대잠초계기를 도입하면서 해상감시 능력이 크게 강화됐다. 그렇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동해는 잠수함이 활동하기에 여건이 아주 좋은 바다다. 항구는 수심이 깊어 숨기가 쉽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면서 생기는 수괴는 레이더와 소나를 교란시킨다. 해수의 밀도가 해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탐지능력을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다. 해상침투에서 정말로 두려운 것은 갑자기 악화되는 일기였다.

    파도 뚫고 해변으로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무장간첩의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수색대가 춘천 소양댐 선착장에 군 초소를 설치,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 미국 해군 정보국.

    정보분석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해를 항해 중인 잠수함 프로비던스에서 미세한 음향을 포착했는데 그게 잠수함인지 여부가 확실치 않았다. 로스앤젤레스급 공격잠수함인 프로비던스의 후미에 달린 예인 소나는 500㎞ 떨어진 적 잠수함의 움직임까지 탐지한다. 북한 잠수함이 은밀히 잠항 중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 속단할 수는 없다. 물 속을 항해하는 잠수함의 움직임을 정확히 탐지하는 것은 최고의 탐지 기술을 가진 미국 해군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물고기떼와 수괴가 종종 잠수함으로 오인되곤 한다. 정확한 수문(水紋)을 탐지하려면 북한 퇴조항 입구에 수중 청음망을 설치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예인 소나에 잡히는 신호음이 조금씩 커졌다. 수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분석관은 얼른 수중파 리스트 프로그램을 작동하고 수신되는 음문과 비교해봤다. 사람마다 음성이 다르듯이 잠수함도 각국의 잠수함마다 내는 소리가 다르다. 미국 해군은 여러 종류의 수중 음문 리스트(Underwater Parameter List)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놓고 있었다.

    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확실치는 않지만 상어급으로 추정되는 잠수함이 남쪽으로 항진하는 것 같았다. 분석관은 아무래도 상부에 보고해야겠다고 판단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996년 9월17일 오후 9시, 강릉 안인진리 해안.

    갈수록 파도가 거세졌다. 파고가 2m는 될 것 같은데 이 상태라면 헤엄쳐서 잠수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정찰조장 유림 소좌는 잠수함을 해안 가까이 불러들이기로 하고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퇴조 기지를 출항한 잠수함은 15일 오후 8시에 강릉 안인진리 해상에 당도했고, 안내조 2인과 정찰조 3인은 야음을 틈타 해안에 상륙했다. 강릉 일대의 군사시설과 비행장, 발전소의 위치를 촬영하는 것이 이번 침투의 목적이다. 대한민국 해병대가 유사시에 원산에 상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듯이 북한 해군은 강릉을 상륙 예정지로 정하고 있었다.

    일단 공해상으로 물러갔던 잠수함은 16일 늦은 오후에 정찰조와 안내조를 태우기 위해 다시 해안으로 접근했지만, 파도가 갑자기 세지는 바람에 접선을 포기하고 먼 바다로 돌아가야 했다. 하루를 기다려 17일 늦은 오후에 재차 접근을 시도했지만 파도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잠수함은 무리지만 해변에 다가가기로 했다.

    “육상으로 탈출한다!”

    이 무렵 한국군은 해안 경계에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민 편익을 이유로 해안 철조망이 속속 철거됐고, 경계 부대도 현역 사단에서 예비군이 주축인 동원사단으로 교체됐다. 사실 해안을 철벽같이 경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군을 모두 해안 경계에 투입해도 50m당 초병 1명을 세우게 된다. 그렇게 해본들 침투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북한 공작원들은 그날로 귀환하는 당야공작을 ‘소풍’에 비견하고 있었다.

    물론 군도 문제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육군은 열상관측장비를 배치했고 해군은 초계기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최고의 우군은 험한 날씨. 수시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남에는 우군이 됐고 북에는 최강의 적이 됐다.

    이렇게 파도가 센 날 잠수함을 무리해서 접근시켰다가는 자칫 좌초될 위험이 있다. 더구나 여기는 암초지대다. 해안 70m까지 접근한 함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해상처장을 쳐다봤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고심하던 해상처장이 결단을 내렸다. 상황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정찰조와 안내조를 그냥 놔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

    “부상(浮上)한다. 천천히 후진하라!”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은 스크루를 역회전시키며 천천히 후진했다. 함장 정영구 중좌는 부상해서 후진하는 쪽을 택했다. 그쪽이 암초를 피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면서 잠수함은 심하게 요동쳤다. 함장은 잔뜩 긴장해서 좌우를 살폈지만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암초들을 찾아내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둔탁한 느낌과 함께 잠수함이 그대로 멈춰 섰다. 해안을 50m 남겨놓고 암초에 걸린 것이다. 우려하던 일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앞으로 빼라!”

    함장이 허둥대며 전진을 명령했다. 그러나 엔진을 최대로 가동시켜도 잠수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암초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함내에 침묵이 흘렀다. 날이 밝으면 잠수함은 눈에 띌 것이다. 해상처장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7일 2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지체할 수 없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잠수함을 포기하고 육상으로 탈출한다.”

    해상처장은 기밀서류 소각을 명했다.

    생사를 건 추격전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무장간첩 수색에 나선 군인들이 1996년 9월20일 강릉시 강동면 한 야산에서 지도를 보며 소탕작전을 숙의하고 있다.

    1996년 9월18일 새벽 1시17분, 안인진리 해안 경계초소.

    파도가 허연 입을 벌리고 쉴 새 없이 밀려오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해수욕객들로 붐비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해변은 어느새 썰렁한 바닷가로 변해 있었다. 이런 날은 야간 근무가 더욱 지루하다. 초병은 아직 한참 남은 교대 시간을 원망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저게 뭘까. 해안가에서 불빛이 보였다. 이렇게 파도가 센 날 밤에 누가 저곳에…? 혹시 배가 염려된 어부가 자다가 달려 나온 것일까. 한참을 지켜보던 초병은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때가 1시35분경. 비슷한 시각에 안인진리 해안도로를 운행하던 택시기사가 수상한 자들이 해안을 서성이고 있다고 경찰서에 신고했다.

    그만하면 발견과 신고는 신속하게 이뤄진 편이다. 그렇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 현장 정찰을 실시한 것까지는 좋은데,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면서 상부 보고가 지체된 것이다. 대간첩작전을 총괄하는 합동참모본분에 보고가 들어온 시각은 오전 4시15분. 합동참모본부는 오전 5시를 기해 강원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발령했는데, 그때는 잠수함 승조원들이 이미 산속으로 도주한 다음이었다.

    초기 대응은 늦었지만 이후의 조치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합동신문조가 현장으로 급파되어 상황 분석에 나섰고, 예상 도주로에 따라 저지선이 신속하게 펼쳐졌다. 예상 도주로는 1968년에 울진·삼척, 그리고 1978년에 광천으로 남파된 무장간첩들의 복귀로를 분석해서 작성했다.

    반면에 북한 공작원들은 이전에 남파된 적이 있는 공작원들로부터 탈출로를 교육받고 있었다. 북한 공작원들은 평안남도 평원군 어파리에 있는 북한 정찰국 남파공작원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그곳 교관들은 남파 경험이 있는 공작원들로 구성돼 있었다. 교관들 중에는 여러 차례 남파된 사람들도 있는데, 교도대지도국 군단장 임태영 중장은 무려 27번이나 남파돼 공화국 이중영웅이 된 사람이다.

    검증받은 탈출로를 따라 필사의 탈출에 들어간 북한 공작원과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대간첩작전본부. 쫓고 쫓기는 생사의 추격전이 1996년 9월에 강원도 강릉 일대에서 벌어졌다.

    승조원 11명 자결

    1996년 9월18일 오후 4시, 강릉시 연곡면 청학산.

    잠수함을 탈출한 공작원 12명이 숨을 헐떡이며 청학산 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저게 노인봉, 그리고 저쪽이 매봉인 것 같습니다.”

    지형지물을 파악하던 부처장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잠수함을 포기하고 상륙한 지 6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이미 제1차 저지선을 돌파하고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있었다. 이대로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면 휴전선에 이르지만, 승조원들의 얼굴에서 희망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찰조와는 달리 정식으로 침투공작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그들은 이미 탈진한 상태였고 무장도 변변히 갖추지 못했다. 1차 저지선은 용케 빠져나왔지만 계속해서 저지선을 돌파할 자신은 없었다. 수색대는 이미 바로 뒤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정찰조는 빠져나갔을까요?”

    함장이 물었지만 해안처장인들 알 턱이 없었다. 미리 상륙한 정찰조와 안내조 5명 외에도 상륙해서 도주하는 과정에서 8명이 흩어졌는데 그들의 생사도 궁금했다.

    헬기 소리가 나자 승조원들이 일제히 몸을 숨겼다. 벌써 발각된 것일까. 헬기 여러 대가 날아오더니 능선에 병력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달아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갖가지 상황에 대비해 여러 종류의 훈련을 받은 그들이지만 걸어서 북으로 복귀하는 경우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해상처장이 비장한 얼굴로 승조원들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죽음으로써 장군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내가 앞장설 테니 모두 뒤를 따르라.”

    말을 마친 해상처장이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댔다. 일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해상처장이 쓰러졌다. 승조원들 모두 울먹이며 무릎을 꿇고 앉자 함장 정영구 중좌가 그들의 머리에 총을 대고 차례로 방아쇠를 당겼다. 승조원들은 ‘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고 마지막으로 함장만 남았다.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결하려던 정영구 중좌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산속을 향해 내달렸다.

    승조원 11명이 탈출을 포기하고 청학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즈음 그들과 떨어져서 혼자 산속을 헤매던 이광수 상위가 생포되면서 비로소 공작원들의 소속과 규모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총인원은 25명. 1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명이 생포됐다.

    19일로 넘어가면서 전과가 이어졌다. 오전 10시15분 강릉시 강동면 단막골 망덕고개에서 특공연대가 3명을 사살한 데 이어 오후 4시10분에는 긴급 출동한 특전사가 칠성산에서 도주하는 승조원 3인을 사살했다. 비슷한 시각에 철벽부대가 강동면 산성우리에서 1명을 더 사살했는데 그는 조원들과 헤어진 정찰조장으로 밝혀졌다. 미리 상륙해 있던 정찰조와 안내조는 잠수함이 좌초된 것을 알고 도주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조장은 조원들과 헤어져 단독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작전이 계속되면서 속속 전과가 보고됐다. 어차피 잠수함 승조원들과 안내조는 북으로 복귀할 능력이 없다. 문제는 남은 정찰조 2인. 그들은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도주할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대간첩작전본부는 특전사에 그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아군 피해도 속출

    1996년 9월21일 오전 9시, 강릉시 칠성산 부근 982고지.

    헬기에서 로프가 내려지면서 특전사 대원들이 익숙한 솜씨로 로프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섰다.

    “빨리 움직여!”

    선임담당관 장기용(가명) 상사가 대원들을 독려했다. 공작원들이 칠성산 쪽으로 도주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긴급출동한 길이다. 현지까지 남은 공작원들은 안내조장과 안내원, 함장과 기관장, 그리고 문제의 정찰조 2인이다.

    레펠링을 끝낸 특전사 대원들이 신속하게 전투대형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헬기로 정상으로 이동해서 밑으로 훑고 내려가는 수색은 효과가 큰 만큼 위험도 따른다.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른다. 상대가 북한 정찰조라면 더욱 경계해야 한다. 출동한 특전사는 바로 18년 전 안양 수리산에서 북한 공작원을 눈앞에서 놓친 그 부대.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끝에 마침내 명예회복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982고지에서 목격된 공작원들이 정찰조라고 확신했다. 두 번의 패배는 없다. 장 상사는 대원들을 3인 1조로 편성하고 수색에 들어갔다.

    예측이 틀리지 않다면 정찰조는 이 부근에 비트를 파고 어두워질 때까지 꼼짝 않고 은신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측이 너무 정확했던 것일까. 예상보다 빨리 교전이 벌어졌다. 982고지 9부 능선에 이른 특전사는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정찰조 2명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거리는 불과 7~8m.

    “엎드려!”

    장기용 상사는 고함을 지르며 얼른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뒤따르던 대원도 재빨리 피할 곳을 찾아 자세를 낮췄다. 그런데 후미에 섰던 대원이 마땅한 엄폐물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총격전이 이어졌고 중대장이 지원병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정찰조는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중사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최초의 아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이다.

    안양에 이어 또 한 차례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대원들은 이를 갈았다. 1978년에 북으로 복귀한 공작원들이 정찰국의 교관으로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잠수함을 타고 내려온 정찰조는 그들이 양성한 공작원들일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장기용 상사는 비장한 낯빛으로 대원들을 독려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전과는 이어졌다. 22일 새벽 1시20분 칠성산에서 공작원 1명을 사살했는데 안내조로 확인됐다. 그리고 새벽 6시45분에 칠성산에서 함장 정영구 중좌가 사살됐다. 남은 공작원은 안내조장 유림 소좌와 기관장 마일춘, 그리고 정찰조 2인. 장기용 상사는 상황판을 응시하며 정찰조의 예상 도주로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그 사이에 노도부대와 화랑부대에서도 전사자가 발생했다. 수색전이 계속되면서 아군의 피해도 점점 늘고 있었다.

    北 잠수함 뜨자 로버트 김 체포

    9월24일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 포트마이어 미 육군 장교클럽.

    워싱턴 DC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장교클럽에 미군 고위 장교들과 워싱턴 주재 각국 무관들이 속속 도착했다. 한국대사관 무관부에서 국군의 날을 기념해서 스탠딩 뷔페 형식의 파티를 연 것. 파티는 미국인들에겐 생활의 일부다. 참석자들에게는 교류와 정보 교환의 장이기도 하다.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파티는 무르익어갔다.

    그때 파티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색의 남자 셋이 빠른 걸음으로 한국 무관들과 담소를 나누던 초로의 신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이 신사에게 자동차 접촉사고 신고가 들어왔다며 잠깐 밖에서 얘기하자고 했다. 신사는 의아해 하며 그들과 함께 나갔고, 이를 지켜보던 해군 무관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FBI입니다. 로버트 김, 당신을 국가기밀유출 혐의로 체포하겠소.”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 해군 정보국 컴퓨터 전문가로 근무하던 로버트 김은 그렇게 파티 현장에서 FBI 수사관들에게 연행됐다. 로버트 김은 조국의 뒤떨어진 첩보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북한과 관련이 있는 정보를 한국 해군 무관에게 여러 차례 넘겨준 적이 있었다.

    로버트 김이 그동안 한국 무관에게 전달한 정보들은 북한의 정세와 지원 식량의 배급 실태, 탈북 현황 등으로 극비로 분류될 사안은 아니었다. 상대국이 영국이나 캐나다라면 얼마든지 미국 정부 차원에서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의 정보들이었다. 더욱이 로버트 김은 정보 제공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에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떠나온 고국에 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일인데, 그의 ‘법적 고국’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로버트 김은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유를 잃고 살게 된다.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해 미국이 지나칠 만큼 신경을 곤두세운 데는 불편하던 당시 한미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민족은 이념보다 우선한다’는 말로 취임사를 장식한 김영삼 대통령은 낭만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북한을 포용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한미공조에 틈이 벌어진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핵 위기 이후로 낭만적 민족주의를 포기했지만 한번 금이 간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때 북한에서 잠수함이 내려온 것이다. 당시 퇴조항을 출항한 잠수함은 2척. 1척이 다시 귀항한 것까지는 한국 정보당국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1척은 어디로 갔을까. 일단 외해로 빠져나가면 추적이 힘들다. 디젤 엔진의 열기를 감지하려면 정찰위성이 있어야 하고, 엔진 음문을 탐지하려면 특수 소나 장치를 부착한 공격형 잠수함이 있어야 하는데 둘 다 한국군에는 요원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미 해군 정보부는 상어급 북한 잠수함이 강릉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한국에 통보하지 않은 것일까. 로버트 김이 그와 관련이 있을까.

    이와 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어느 나라나 정보탐지 능력은 극비사항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기밀유지를 위해서는 우방국의 안보도 희생시키는 게 그쪽의 법칙이다.

    진작부터 로버트 김을 감시하고 있던 FBI는 강릉에 잠수함이 출현하자 주저없이 로버트 김을 체포했다. 그는 불운한 시기에 주목받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현실감이 결여된 정책 때문에 순수한 애국심이 억울한 대가를 치르게 된 셈이다.

    최덕근 영사 피살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1996년 10월5일 최덕근 영사의 유해가 든 관이 태극기에 싸여 빈소에서 영구차로 옮겨지기 전 유족들이 관을 부여안으며 울부짖고 있다.

    9월28일에 성산면 보광리에서 안내조장 유림 소좌가 일출부대에 의해 사살되면서 잠수함 공작원 색출작전은 1단계를 마감했다. 북한은 방송을 통해 잠수함은 조류에 밀려 표류한 것이며 공작원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천배백배 보복할 것임을 천명했다.

    정찰조를 제외한 전원이 이미 사살되고 체포된 마당이다. 군 지휘부는 수색전에 동원된 부대들을 복귀시켰다. 그러면서 대간첩작전본부 지휘관도 군사령관에서 군단장으로 하향조정됐다. 언제까지 대간첩작전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북한이 저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휴전선에서 제한적 도발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찰조는 이미 제3 저지선까지 돌파했을 것으로 예상됐고 수색에 동원된 병력은 대폭 축소됐다. 이제부터는 포위와 매복 대신 추격에 주력해야 한다. 합동신문조는 정보 수집에 매달렸고 특전사는 출동태세를 완비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도 1978년처럼 공작원을 북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특전사 대원들은 이번만은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출동명령을 대기했다.

    10월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한이 호언하던 천배백배 보복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10월이면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다. 오후 6시밖에 안 됐지만 거리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최덕근 영사는 퇴근 걸음을 재촉했다. 완성하지 못한 보고서를 아파트에 돌아가서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공작관인 최덕근 영사는 최근 북한의 나진·선봉지구 및 중국의 훈춘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 하산을 다녀왔다.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북한은 적극적으로 마약 밀수에 매달리고 있었다. 최 영사는 마약을 조사하던 중에 북한이 위조 달러 제조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지로 달려간 것이다. 위조지폐 제조는 마약 밀조와 차원이 다르다. 국가의 안보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범죄다. 미국 정보당국은 진폐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정밀 위조지폐, 이른바 슈퍼노트의 출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던 최 영사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웬 남자가 바짝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남자의 손이 더 빨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최 영사는 칼에 찔렸고 아파트 계단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부검 결과 ‘네오스티그민브로마이드’가 검출됐는데 이는 북한 공작원들이 휴대하는 만년필 독침에 사용되는 독물이었다.

    마지막 기회

    도대체 정찰조 2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9월21일 칠성산에서 특전사의 추격을 뿌리친 정찰조는 그 후로 종적이 묘연했다. 이미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귀환한 것일까. 북한에서 조용한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리무중이던 정찰조의 행방은 10월8일 오대산 재미재에서 파악됐다. 정찰조가 우연히 마주친 민간인 3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것이다. 오대산에서 종적을 감춘 지 8일 만의 일이다. 일단 월북하지 못한 것이 확인됐으니 아직 기회는 있다. 특전사는 더 상세한 정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출동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10월16일에 두 번째 정보가 들어왔다. 정찰조가 인제군 군축교 부근 도로에서 민간인에게 목격된 것이다. 군이 긴급 출동해서 도강을 저지하고 나섰지만 정찰조의 대응이 더 빨랐다. 차단을 예상하고 남쪽으로 우회해 신남리를 거쳐 양구대교 부근에서 강을 건넌 것이다. 정찰조는 그 와중에서도 군축교와 3군단 사령부를 촬영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두 사람의 정찰조는 거듭되는 포위 속에서도 여전히 북으로의 복귀를 자신하고 있었다.

    이틀간에 걸친 차단과 매복이 허사로 돌아가자 군은 초조해졌다. 그 상황에서 생포된 이광수는 기자회견에서 정찰조의 북한 귀환을 장담하고 나섰다. 소양강을 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철책선뿐.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장기용 상사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지역대장에게 달려갔다.

    “현장으로 출동하기로 했소.”

    지역대장의 말에 장기용 상사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뒤를 쫓아가서는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정찰조는 틀림없이 소양강을 우회해서 도강할 것이다. 칠성산에서 놓쳤을 때도 그랬다. 그러니 현장으로 출동하는 것보다는 미리 양구대교로 가서 매복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지휘부의 판단은 그렇지 않았다.

    아쉽지만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특전사 대원들은 비장한 각오로 헬리콥터에 올랐다. 아무리 저들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체력이 많이 소진됐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라 경계병들의 눈을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분신과도 같은 K2 소총을 꼭 쥐며 결전의 순간에 대비했다. 이번 출동도 허사로 돌아가면 지역대장에게 특공조 편성을 강력하게 건의할 생각이었다.

    10월22일 양구군 남면 청3리 인근 군부대.

    군부대 촬영을 마친 정찰조 2인은 신속하게 이동했다. 산기슭에 마련해놓은 비트로 빨리 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한다. 정찰조는 쫓기는 중에도 정찰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칠성산에서 특전사와 교전하고 도주한 정찰조 2인은 농가에 잠입해 음식물을 훔치고, 빈집에서 밤을 지내며 북상을 계속했다. 그동안 정찰조가 전혀 발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민과 우연히 만난 것도 여러 번. 그렇지만 정찰조는 당당하게 행동하며 의심을 사지 않았다. 평창에서는 대범하게도 용평스키장의 오락실에 잠입해서 잠을 자기도 했다. 의표를 찌르는 행동이었다.

    절치부심의 기억

    자신을 얻은 정찰조는 대낮에 이동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군축교에서 민간인에게 들킨 것이다. 아무리 한국군으로 위장했어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정찰조는 남쪽으로 우회하는 방법으로 출동군의 허를 찌르며 북상을 계속했고 군부대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비트로 돌아가던 정찰조가 걸음을 멈췄다. 사격장 부근을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운전병과 마주친 것이다. 운전병은 한눈에 그들이 공작원임을 알아보고 기겁을 하고 돌아섰지만 정찰조의 손이 더 빨랐다.

    일단 비트로 돌아온 정찰조는 서둘러 이동에 들어갔다. 운전병을 찾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리 쪽으로 복귀하려던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정찰조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군사분계선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정찰조도 지금이 고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종적을 감췄던 정찰조가 2사단 구역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대간첩작전본부가 즉각 출동했다. 정황으로 봐서 틀림없는 정보 같았다. 그동안 번번이 놓친 이유 중에는 확실치 않은 정보도 큰 몫을 차지했다. 매복 중인 군인을 정찰조로 오인한 신고도 있었고 잡고 보니 무단 이탈병인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허둥대는 사이에 정찰조는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간 것이다.

    그런데 2사단 구역에서 목격된 정찰조의 행방이 다시 묘연해졌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접수된 신고 중에서 10월23일 23시40분 군축교 부근의 외딴집에서 주인을 습격하고 달아난 무리와 다음날 오전 8시30분경 인제읍 부근 산 능선을 타고 급히 달아나다 헬기에 관측된 두 사람이 정찰조일 가능성이 컸다.

    동쪽으로 우회해서 고성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는 의도일까. 그렇지만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그저 도둑일 수도 있고 뒤늦게 버섯을 채취하러 산에 오른 사람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수일 전 부근에서 무장 탈영병이 발생한 것도 골칫거리였다. 대간첩작전본부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기무부대원들을 출동에 동행시키기로 했다.

    장기용 상사는 정찰조가 동쪽으로 우회할 것이라 확신했다. 18년 전에도 이와 흡사한 상황이 있었다. 안양에서 교전을 벌이던 북한 공작원들은 관악산을 우회해 부천을 거쳐 김포반도로 빠져나간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초임 하사 시절에 지휘관을 위시해서 대원 전원이 삭발하고 구보하며 절치부심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치욕을 겪을 수는 없다. 특공조 편성을 상신한 장 상사는 지휘부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기무부대장 전사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1996년 9월22일 오전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칠성산에서 사살된 무장간첩 2명의 유류품이 언론에 공개됐다.

    11월4일 오후 3시, 향로봉 전방진지.

    철책선까지 10㎞밖에 남지 않았다. 인제와 고성 쪽으로 돌아 산머리곡산에 이른 2인의 정찰조는 비로소 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이 들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 넘는 기간의 도주도 이제 끝이다. 여러 번 남파된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긴 시간을 쫓기다 귀환한 예는 없었다. 북에 돌아가면 틀림없이 영웅이 될 것이다. 10월25일 북에서 지령이 내려왔지만 난수표를 태워버린 바람에 해독하지 못했는데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곧 북으로 복귀할 것이다.

    도주가 40일 넘게 계속됐지만 두 정찰조는 여전히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동안 빈집을 털며 끼니를 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전선 일대는 벌써 겨울이지만 이제 하루만 참으면 된다. 훔친 운동복을 껴입은 정찰조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곳입니다.”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심한 탓일까. 후미 경계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돌아보니 진지 주변 제초작업을 하던 병사가 낫을 들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병사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러나 미처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정찰조의 단검이 날아갔다.

    군단 직할 산악특공연대가 급히 병사가 피살된 용대리 연하동 일대로 급히 출동했다.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3군단 기무부대장이 동행했다. 연하동 일대는 6·25전쟁 전에 북파된 호림부대가 남쪽으로 귀환할 때 경유한 곳인데 이제는 반대로 남파공작대가 이곳을 거쳐 북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새벽 4시28분. 날이 바뀌어 11월5일이 됐다. 현장에 출동해서 탄피를 살핀 기무부대장은 북파 공작원의 소행임을 확신했다. 정황으로 봐서 멀리 달아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병력을 증원해서 일대를 완벽하게 포위해야 한다.

    “공작원 소행이 틀림없어, 즉시 증원을 요청하시오.”

    기무부대장이 특공연대 정보장교에게 지시를 내리는 순간 총성이 울리며 두 사람이 쓰러졌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정찰조가 총을 발사한 것이다.

    아군의 응사가 시작됐고 지프에 거치된 106㎜ 무반동포가 불을 뿜으며 일대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출동병력이 급히 추격에 나섰지만 정찰조는 이미 현장을 빠져나갔다.

    기무사 대령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지면서 수색에 나선 특전사 대원들의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스치고 지나갔다. 군사분계선이 지척이다. 여기서 놓치면….

    장 상사의 손가락이 빨랐다

    날이 밝으면서 수색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부근에서 핏자국이 발견됐다. 정찰조가 106㎜ 무반동포에 부상을 당한 듯했다. 그렇다면 아직 연하동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그렇게 판단하고 골짜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선불 맞은 짐승은 사냥꾼에게 달려든다. 정찰조가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하면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장 상사는 예상 은신 지점을 향해 천천히 접근해 들어갔다. 특공조를 편성할 여유도 없었다. 장 상사는 단독으로 추격에 나서기로 했다.

    복수를 다짐한 것은 특전사 대원만이 아니었다. 정보장교, 병사를 잃은 특공연대원들도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그러면서 묘한 경쟁심이 일고 있었다.

    “…!”

    살기가 전해왔다. 장기용 상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순간 총성이 울렸는데 총탄이 날아간 곳은 반대 방향이었다. 은신해 있던 정찰조가 맞은편에서 접근해오는 수색대를 보고 발사한 것이다. 곧 정찰조와 특공연대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장 상사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다. 정찰조 둘이 예상 지점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장 상사는 숨을 멈추고 조준에 들어갔다. 타깃이 정확하게 조준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상대는 2명이고 특수훈련을 받은 정찰조다.

    살기를 느낀 것일까. 순간 정찰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얼른 총구를 장 상사에게 겨누었다. 그러나 장 상사가 더 빨랐다. 총성이 2발 연속해서 일었고 정찰조 두 사람은 차례로 쓰러졌다. 이것으로 특전사는 18년 전의 빚을 갚았다.

    11월5일 오전 10시30분, 정찰조 2인이 용대리 연하동에서 사살되면서 강릉에 침투한 공작원 25명이 51일 만에 전부 사살 또는 생포되었다.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예비군을 포함해서 무려 160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출동했고 8명이 전사했다. 민간인도 4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도 3명이나 됐고 의무경찰과 예비군도 각각 1명씩 목숨을 잃었다.

    강릉 잠수함 사건은 애초부터 무장간첩 남파를 목적으로 한 침투는 아니었다. 잠수함이 좌초되는 바람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장간첩 남파와 주민 선동은 더 이상 공작수단이 되지 못했다.

    160만 병력의 51일 大추격전 장 상사, 18년 만에 빚을 갚다
    오 세 영

    1954년 충남 홍성 출생

    경희대 사학과 졸업

    1993년 역사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글쓰기 시작

    저서 : ‘만파식적’ ‘화랑서유기’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구텐베르크의 조선’ 외


    이후 남쪽에도 변화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내세우면서 남과 북은 화해 무드로 들어갔고 북한을 보는 국민의 눈도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전쟁의 위험에서 해방된 것일까. 속단은 금물이다. 북핵과 장거리 미사일이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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