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죽어야 사는 스턴트우먼 조주현

“‘넌 줄 전혀 몰랐어’가 최고의 찬사, 늙어서 더 못 뛸 때까지 액션 하겠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1-01-20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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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는다. 20층 빌딩에서 떨어지든, 열길 물속에 빠지든.
    •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에 맞부딪혀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달린다.
    • 죽어도 죽지 않는 게 주인공이라면, 한국 여성 액션의 주인공은 조주현이다.
    • 스턴트우먼 경력 18년차. 수천수만 번을 뛰어내리고 얻어맞아왔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 있다.
    죽어야 사는 스턴트우먼 조주현
    내내 ‘착한 언니’ 같던 눈매가 매섭게 변한다. 머리 질끈 동여매더니 ‘이얍!’ 날아오른다. 날렵한 오른발이 미트 중앙에 정확하게 꽂히자, 건장한 남자 후배가 비틀 뒤로 밀려났다. “역시!” 바라보던 양길영(44) 무술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저 사람이 김태희이고, 전지현이에요.”

    기자를 바라보며 웃는 두 눈에는 ‘그럴 만하지 않으냐’는 말이 담겨 있다.

    양 감독은 영화 ‘올드보이’ ‘바람의 파이터’로 유명한 우리나라 최고의 무술감독이다. 지금 막 그의 앞에서 날아차기를 선보인 조주현(43)씨는 양 감독 액션의 중추. 특히 여성 액션을 구현할 때 그의 존재감은 ‘김태희’와 ‘전지현’을 합친 것보다 크다.

    “흔히 ‘다찌마와리’라고 하죠. 격투 액션을 저만큼 소화하는 배우가 없어요. 와이어 액션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이고, 검술 말타기 총기 액션 못하는 게 없습니다. 최고 강점은 유연성인데, 부드러움과 파워가 만나니까 언제나 그럴듯한 그림이 나와요.”



    과찬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드라마 속 화려한 여성 액션은 대부분 그의 몸에서 나왔다.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기억하는가. 화천회의 비밀저택에서 벌어진 현란한 전투 장면. 어둠을 가르고 날아올라 상대의 쇄골을 정확히 가격하던 명품 ‘니킥’의 주인공이 조주현이다. 현란한 칼솜씨를 보여준 ‘다모’의 하지원, 하늘을 날아다니던 ‘중천’의 김태희, 남자 범인을 한 방에 제압하던 ‘투캅스3’의 권민중도 모두 조주현이다. 조씨의 ‘시그니처 액션’은 180도 뒷차기. 한 다리를 축으로 세우고 몸을 반으로 꺾어 뒷다리로 상대의 안면을 후려치는 발차기는 대한민국에서 오직 그만이 해낼 수 있다.

    “아우, 1절만 해요. 귀 간지러워서 더는 못 들어주겠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차기에 몰두하던 조씨가 기자 쪽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다시 돌아왔다. ‘큰언니’ 눈빛.

    조씨는 1994년 무술 연기에 입문한 우리나라 스턴트계의 중견 배우다. 그 사이 여자 후배 여럿이 이쪽을 기웃거렸지만,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갔다. 새로 일을 시작하는 20대 후배들에게 그는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든 ‘대선배’이자 일에 대해 다정하게 조언해주는 ‘큰언니’다.

    스턴트업계의 ‘큰언니’

    죽어야 사는 스턴트우먼 조주현
    최근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인기를 끌면서 스턴트우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조씨는 이런 주위의 호기심이 “생소하고 놀랍다”고 했다.

    “우리 일이라는 게 드러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액션 한참 하다가도 카메라가 가까이 오면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는 게 몸에 뱄어요. ‘어머, 그걸 대역이 한 거예요? 저는 진짜 배우가 한 건 줄 알았어요’ 하는 말이 최고의 찬사죠.”

    그런데 갑자기 “OOO씨가 한 건 줄 알았는데, 실은 조주현씨가 한 거라면서요?”하는 질문이 쏟아지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일반 연기자는 일반 연기자의 역할이 있고 스턴트 배우는 또 그들만의 역할이 있다. 위험한 장면을 티 안 나게 대신 해주는 게 우리의 할 일”이라고 했다.

    ▼ 그래도 일껏 고생스럽게 촬영했는데 찬사가 다른 사람한테 쏟아지면 억울하지 않나요?

    “그게 제 직업인 걸요. 전 일반 연기자가 인터뷰에서 ‘스스로 다 했다’고 말해도 이해해요. 내가 대신한 걸 본인이 알고, 내가 알고, 스태프가 아니까요. 일반 배우의 연기는 대중이 평가하지만, 우리 연기는 감독과 스태프 그리고 동료들이 평가합니다. 그들이 ‘잘했다’고 박수쳐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말하는 태도가 시원시원하다.

    죽어야 사는 스턴트우먼 조주현

    조주현씨의 ‘다찌마와리’ 액션은 호쾌하고 힘이 넘친다.

    드라마를 계기로 스턴트우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그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그런 거 하면 무섭지 않나요?” 역시 대답은 시원스레 나온다. “당연히 무섭죠.” 씨익 웃는 얼굴이 장난꾸러기 같다.

    “저도 사람이잖아요. 야생마 타고 내리막길로 질주하는 장면 같은 거 찍는 날은 아침부터 바짝 긴장해요. 하지만 위험한 장면이 아니라면 저를 왜 쓰겠어요. 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다는 거, 알면서 이 일을 택한 건 나거든요. ‘위험해 보여서 못 하겠어요’ 하려면 얼른 그만두고 딴 일 해야죠.”

    미니스커트 입고 자빠지기

    조씨는 2009년 드라마 ‘자명고’를 촬영하다 왼쪽 무릎 인대가 끊어져 수술을 받았다. 두 달에 걸친 치료와 재활 끝에 복귀한 첫날, 그는 다시 3층 높이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감독님한테 ‘저 두 달 만이에요. 박스 좀 많이 깔아주세요’ 하고는 그대로 뛰었어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 좀 아찔하긴 해도, 뛰어내리는 연기는 힘들지 않다. 남자들과 뒤엉켜 치고받는 ‘다찌마와리’도 재미있다. 그가 어렵다고 느끼는 건 오히려 미니스커트 입고 ‘자빠지는’ 쪽. 특히 스쿠터 같은 걸 타고가다 넘어지는 액션은 꽤 아파서 달갑지 않다.

    “스턴트 연기를 할 때는 여자 연기자랑 똑같은 옷을 입잖아요. 대부분 타이트하고 노출도 많아서 무릎보호대 같은 장비를 하기 어려워요. 맨몸으로 길바닥에 나동그라져야 하니 여기저기 많이 다치죠.”

    이런 연기를 한 번에 깔끔히 마치면 굉장히 뿌듯한 이유다. 계단 위에서 구르는 연기도 마찬가지다. 조씨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액션 연기가 뭐냐”는 질문에 ‘계단 구르기’라고 답했다.

    “여주인공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이 많잖아요. 그런 걸 촬영할 때 보통은 일반 연기자를 먼저 찍어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찍은 뒤 저한테 ‘저 위치에 저대로 떨어져달라’ 하는 거죠. 처음에는 ‘내가 구르는 것부터 촬영한 뒤 떨어진 모습대로 여주인공을 쓰러지게 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는데, 현장이 제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잖아요. 상황에 적응하다 보니 이젠 계단 길이와 각도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와요. 실컷 구른 뒤 눈을 떠보면 감독님이 얘기한 그 자리에 딱 그 모습으로 떨어져 있죠.”

    “그럴 때 내가 참 기특하다”며 자랑스러운 듯 웃는 모습을 보니 ‘속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특하고 뿌듯하기에 앞서 일단 아프지 않은가.

    “한 번도 안 굴러보셨죠? 아프긴 한데 의외로 할 만해요. 시작만 잘 하면 몸이 저절로 굴러가거든요.”

    그는 스턴트 연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재미있으니까”라고 답했다.

    “남은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을 일상적으로 경험하잖아요. 스턴트 배우가 아니면 어떻게 헬기에서 떨어지고, 온몸에 불을 붙이겠어요. 교통사고도 얼마나 다양하게 당해봤는지…. 8차선 도로, 시골길…, 아주 버라이어티해요.”

    조씨가 처음부터 스턴트 연기를 했던 건 아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에어로빅 시범단에서 활동하다 우연히 캐스팅된 첫 작품은 아동 영화 ‘용호의 권’이었다. 이 영화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액션 연기를 하자 ‘긴급구조 119’ 등의 프로그램에서 재연배우 제안이 왔다. 얼굴이 드러나는 일반 연기자 생활을 잠시 했지만, 배우로 성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사고 장면 촬영 등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몸 연기’를 본 관계자들이 스턴트 배우 쪽을 권했다. 그렇게 대역 연기의 길에 접어들었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스턴트우먼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때라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여자 배우의 대역 연기는 대부분 몸집 작은 스턴트맨이 할 때라 일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연기만으로는 1년에 100만원 벌기도 힘들어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낮에는 체조 연습과 태권도 권투 합기도 등 액션 연기를 위한 운동으로 몸을 만들고, 밤이면 레스토랑 호프집에서 서빙을 했다.

    “삯바느질도 했어요. 커다란 플레어스커트 치맛단을 꿰매면 1400원을 줬죠. 그걸 들고 갔다가 공장 사장이 ‘시다(보조) 일 한번 해보라’고 해서 한동안 다림질 엄청 했어요.”

    그렇게 기다리다 한 번씩 나가게 되는 현장에서도 스턴트 배우라고 홀대받기 일쑤였다. 1994년 ‘긴급구조 119’ 프로그램에서 패러글라이딩 타다 고압선에 걸린 사고 피해자를 연기했던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감독은 그를 고압선에 매달아놓고 한참이나 다른 장면만 찍고 있었다. 온몸을 졸라매는 와이어를 착용한 채 5시간 가까이 매달려 있으니 온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고 숨 쉬기도 어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제 울음소리를 들은 음향감독님이 저기 저 아가씨 운다고 좀 내려주라고 해서 간신히 바닥에 내려왔어요. 잠시 쉬고 마음 추스른 뒤 다시 매달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촬영했죠.”

    ‘다모’ 인기의 주역

    ▼ 그런데 계속 스턴트 배우를 하신 이유가 뭔가요?

    “사람이 좋아서요. 어려울수록 끈끈한 게 있잖아요. 같이 운동하고 촬영하는 스턴트 팀 사람들이 다 좋았죠. 여자는 저 하나니까 많이들 챙겨주시기도 했고요. 아직 젊을 때니까 마음속으로 계속 ‘조금만 더 해보자’ ‘조금만 더 해보자’ 생각했던 거 같아요.”

    1998년 ‘투캅스 3’를 찍으면서 비로소 ‘기다려온’ 보람을 느꼈다. 여형사가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그는 그동안 갈고 닦은 액션 연기를 제대로 선보이며 난생 처음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배우’가 됐다. 조금씩 여배우 대역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 드라마 ‘다모’를 만났다.

    조씨는 ‘다모’를 “9개월 촬영 기간 내내 행복했던 작품”이라고 했다. 그전까지는 어느 현장에 가나 액션 장면 하나 찍고 나면 쓸모없어지는 소모품 같은 대접을 받았다. 하루 전날 전화해서 ‘몇 시까지 나오라’고 통보한 뒤, 현장에 가면 다짜고짜 ‘여기서 뛰어주세요’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트리스 한 장 놓아주지 않은 채 방조제에서 맨바닥으로 뛰어내리라면서 “그러면 다친다”는 조씨에게 “이 정도도 못하는 게 스턴트우먼이냐”고 오히려 힐난하는 감독도 만났다.

    ‘다모’ 현장은 전혀 달랐다. 주인공 하지원의 대역을 맡은 조씨는 그곳에서 ‘또 다른 주연’이었다. ‘다모’를 찍으며 그는 전체 스토리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 액션 연기를 하게 됐고, 현장 스태프들과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맺게 됐다. 장대 같은 빗속에서 칼싸움을 하고, 말등에 앉아 들판을 질주하는 등 힘든 장면이 많았지만, 스태프들의 존중과 격려가 있어 힘들지 않았다. 촬영이 끝난 뒤 있었던 ‘다모 폐인’을 위한 파티에서 주연배우 김민준은 “좋은 드라마가 나온 데는 스턴트 배우들의 공이 크다. 그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인사해 그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우리 불쌍하지 않아요”

    “‘다모’를 하다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어요. 하지만 수술 전날까지 보호대를 찬 채 촬영하고,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복귀했죠. 제가 없는 동안 다른 스턴트맨이 대역을 했는데 아무래도 그림이 잘 안 나왔나 봐요. 감독님이 ‘힘들겠지만 주현씨가 와주면 좋겠다’고 할 때 곤란한 마음 한편으로 참 기뻤어요. ‘다모’는 저한테도 정말 의미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하고 싶었고요.”

    ‘다모’에서 조씨는 말 그대로 환상적인 와이어 액션과 검술을 선보였다. 스턴트맨의 연기와는 또 다른, 여성적인 선과 유려함이 살아 있는 그의 액션 연기는 시청자뿐 아니라 방송 관계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배우 대역은 스턴트우먼이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한때 1년에 한 작품 하기도 어려웠던 그에게 하루에 네 작품이나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죽어야 사는 스턴트우먼 조주현
    ▼ ‘시크릿 가든’을 보면 스턴트우먼이 제대로 된 가방 하나 사기 힘들 만큼 가난하게 사는 걸로 나오잖아요.

    “10여 년 전, 제가 이 일 시작할 때 얘기면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현실에는 안 맞는 설정이죠. 극중에서 무술감독이 주인공을 소개하며 ‘정말 실력 있는 친구’라고 하거든요. 진짜로 그 친구가 실력이 있으면 쏟아지는 일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할 수 있을 거예요. 가방은 마음껏 살 수 있고, 유리창에 테이프 붙여놓은 집에서도 절대 안 살겠죠.”

    조씨의 연 수입은 4000만~5000만원 수준. 일을 많이 할 때는 8000만원까지 벌기도 했다. 70분짜리 드라마 한 회에 출연하면 70만원 정도를 받는다. 액수는 10년 가까이 오르지 않았지만 일이 많아져 소득이 늘었다. CF도 많이 찍었다. 유명 가수가 출연한 한 정수기 광고에서 조씨는 “주방가구를 밟고 한 바퀴 돈 뒤 소파를 건너뛰어 정수기를 잡는” 액션 연기를 했다. 한 카드 광고에서는 말을 탄 채 드넓은 평원을 질주했다. CF 편당 출연료는 300만~500만원선. 실력을 인정받은 뒤 홍콩·대만 등에서 캐스팅 제의가 오기도 했다. 그중 홍콩 영화 ‘미스터 퍼펙트’에서는 청룽(성룡)이 이끄는 유명 무술팀 ‘성가반’과 함께 스턴트 연기를 했다.

    “스턴트맨은 일이 스턴트우먼에 비해 훨씬 많은 반면 경쟁이 치열해서 실력에 따른 부익부빈익빈 차이가 확실해요. 잘하는 친구들은 연봉 1억원 이상을 버는 경우도 있지요.”

    조씨는 스턴트 배우들이 늘 ‘촬영 중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듯 그린 드라마 대사도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시크릿 가든’에서 무술감독은 스턴트우먼 후배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밤늦게 걸려오는 전화를 잘 못 받아. 자정 넘어 걸려오는 전화에 내 첫 마디는 ‘어느 병원이야? 죽었어?’거든.”

    ▼ 그 대목 보고 눈물 흘렸다는 사람이 많아요.

    스턴트맨의 죽음

    “드라마적으로 멋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니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스턴트 연기를 굉장히 위험한 걸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현장에서 수시로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나긴 하지만, 촬영 중 스턴트 배우가 목숨을 잃는 일은 극히 드물어요.”

    조씨는 2007년 세상을 떠난 스턴트맨 지중현씨 얘기를 꺼냈다. 중국에서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촬영하다 세상을 떠난 그는 조씨가 각별히 아끼던 후배다. 중국 가기 이틀 전 집에 불러 닭볶음탕을 해먹이며 ‘잘 다녀오라’ 인사도 했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은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머리가 새하얘진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서 좀 나아졌지만…” 이야기를 꺼내는데 벌써 목이 메는 게 느껴졌다. 발인에 다녀온 뒤부터 한 달 정도는 불만 끄면 지씨의 얼굴이 보였다고 했다.

    “어쨌든 제가 18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가까이에서 겪은 사망 사고는 그게 전부예요. 그런데 그 친구도 스턴트 연기를 하다 잘못된 건 아니었거든요. 촬영 장소로 이동하다 사고를 당했죠.”

    양길영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1992년 차를 몰고 물에 뛰어드는 스턴트 연기를 하다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난 고 정사용씨 등 다섯 명의 스턴트맨을 하나하나 꼽으며 “내가 이렇게 기억하고 셀 수 있는 건 사고가 생각만큼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 스턴트 연기자가 한 200명쯤 돼요. 그중 다섯 명입니다.”

    죽어야 사는 스턴트우먼 조주현

    조주현(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씨와 함께 스턴트 연기를 하는 무토액션스튜디오 식구들.

    2005년 스턴트 연기자들이 모여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무술연기자지부를 출범시킨 뒤 방송 현장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위험한 촬영을 하기 전 스턴트 배우 앞으로 보험을 들어주는 건 필수. 액션 장면을 촬영할 때는 감독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무술감독의 조언을 듣는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예전에는 연출팀에서 딱 그림을 그려놓고 ‘여기서 이렇게 해주세요’ 하는 식이었어요. 지금은 대본을 무술감독에게 미리 보내요. 그 뒤 무술팀의 아이디어를 참고해 촬영 방법을 정하는 겁니다. 만약 뛰어내리는 장면이 필요하면 바닥에 박스를 깔 건지, 와이어를 사용할 건지, CG로 처리할 건지 등에 대해 의논하는 거죠. 현장 상황과 화면 배치 등에 따라 최적의 촬영법이 달라지기 때문에 무술팀에서 동영상 콘티 등을 제작해 감독에게 제안합니다. 그 뒤 촬영에 들어가니까 자연히 예전보다 사고가 줄었죠. 그림도 더 좋아졌고요.”

    무술감독이 아예 액션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까지 해 전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국 영화에서 액션 장면의 비중이 커지고, 무술감독의 위상도 높아지는 건 스턴트 배우들에게 긍정적인 현상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이가 들면 자연히 스턴트계를 떠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젊은이들이 최근엔 ‘감독’을 목표로 삼는다. 스턴트배우가 무술과 더불어 촬영 기술, 편집 기술, CG 등을 배우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조씨는 “나는 감독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미 영화 ‘방과 후 옥상’에 양길영 감독과 함께 무술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몇 편의 영화에서 무술 연출을 맡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느낀 건 “카메라 밖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것보다는 현장에 들어가 직접 뛰는 게 훨씬 좋다”였다고 한다. “몸에 힘 다 빠질 때까지 계속 스턴트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다.

    나는 스턴트우먼이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스턴트 연기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최근 수영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장 친한 친구가 익사한 뒤 물 근처에도 못 갔거든요. 대중목욕탕에도 못 들어갈 정도라 수중 액션은 엄두도 못냈죠. 하지만 스턴트 연기를 평생 하려면 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에는 김춘식 감독의 영화 ‘패는 여자’주연을 맡아 정극 배우로 변신하는 새로운 도전도 했다. 모든 촬영을 마치고 3월 개봉을 앞둔 이 영화는 여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액션 영화. 조씨를 터프한 열혈 형사 역으로 캐스팅한 김 감독은 ‘투캅스 3’ 무술감독 출신이자, 조씨의 남편이기도 하다. ‘투캅스 3’ 촬영 이후 8년을 따라다닌 끝에 결혼에 성공한 김 감독은 “아내여서가 아니라 뛰어난 액션배우여서 조씨를 캐스팅했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진짜 액션을 할 줄 아는 여배우의 노컷 리얼 액션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정작 조씨는 “영화 촬영 내내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며 “액션 연기만 할 수 있는 스턴트 촬영이 훨씬 좋다”고 말한다.

    “남편이 하도 원해서, 제가 주연 하지 않으면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출연한 거예요. 영화를 찍은 뒤부터 사람들이 ‘영화 주인공까지 한 사람이 다시 대역을 하면 되느냐’고 놀리는데 나는 스턴트우먼이죠. 예쁘게 분장하고 대사를 하면서 눈물지을 때보다, 뛰고 구르고 뛰어내릴 때 더 행복해요. 이제는 물속으로도 뛰어들 거니까 오래오래 현장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이제부터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여배우가 계단을 구르고 말을 탄 채 질주하는 장면을 보면 뒷모습 어딘가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것 같다. 하지만 절대 아는 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인 줄 전혀 몰랐어요”가 그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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