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 김규만 한의사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살다가 물고기 밥으로 사라지고 싶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1-01-20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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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은 곳에 올라가고, 깊은 물로 뛰어들고, 멀리까지 질주할 때 가슴이 뛴다.
    • 숨이 턱 끝까지 닿는 고지대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요트의 돛을 올릴 때 살아 있다는 느낌에 짜릿해진다.
    • 한 번뿐인 인생, 대충 살기는 싫다.
    • 가진 것 다 불사르며 뜨겁게 살다, 떠나야 하는 순간 빈 몸으로 사라질 테다.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 김규만 한의사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밀스러운 거사를 꾸미곤 했다. 황량한 자연에 나를 내팽개치는 것이다. … 이런 苦行(고행)의 과정이 아프긴 하지만 나를 高揚(고양)케 하였다. 나는 … 마조히즘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한의사 김규만(53)씨가 2006년 티베트 자전거 여행 동반자를 구하며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이다. 해발 5000m가 넘는 세계의 지붕. 고산증세로 외지인은 제대로 걷기도 힘든 그 땅을 김씨는 MTB(산악자전거)로 횡단했다. 희박한 산소가 폐, 심장, 허벅지 근육을 괴롭혀 호흡은 거칠어지고 페달은 헛돌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계속 달렸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고행’에 스스로를 ‘내팽개쳐왔다’지 않은가. 파키스탄 카라코룸 하이웨이(Karakorum Highway),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인도 라다크…. 거칠고 황량한 세계 곳곳도 일찍이 그의 MTB 아래로 흘러갔다. 한겨울의 에베레스트산을 오르고, 독도를 요트로 다녀오기도 했다. 마라톤·울트라마라톤·트라이애슬론은 수시로 완주한다. 취미는 요트세일링, 행글라이딩, 급류카약, 산악스키…. 겨울에는 빙벽을 타고, 여름엔 암벽에 오른다. 내 몸을 엔진으로 삼지 않는 탈것이 싫어 지금껏 차는 한 대도 사지 않았다.

    강추위로 한강이 얼어붙은 1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검은색 MTB를 탄 채 인터뷰 장소로 나왔다. 밸러클라버(눈만 빼고 머리와 얼굴, 목 전체를 가려주는 모자)를 벗자 발그레 상기된 얼굴이 드러났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이렇게 바람 부는 날 자전거를 타면 힘들지 않나요?

    “좀 춥긴 하지만 모자 쓰고 옷 잘 입으면 괜찮아요.”

    그는 아침 바람을 뚫고 막 산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주말에는 으레 MTB 산행을 한다. 여유가 있으면 한강으로 요트를 타러 가거나 상암동 하늘공원에서 마라톤 훈련을 하기도 한다.

    ▼ 일주일 내내 일하고 주말에는 또 그렇게 다니시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에요. 나한테 무슨 성격 결함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하하하. 소리 내 웃는다. 스스로 ‘마조히스트’ 같다고까지 한 사람에게 더 말해 뭐 하겠는가. 특이한 건 외모만으로는 그가 못 말리는 익스트림 스포츠광이라는 걸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울뚝불뚝 근육이 솟은 체격이 아니라, 겉보기엔 백면서생 한의사 같다. 자전거를 타고 나오지 않았다면 그가 화려한 경력의 ‘김규만’이라는 걸 아마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제가 변변치 못해서 그래요. 못생긴데다 키도 작고…. 옛날에는 콤플렉스가 심했어요. 몸 이렇지, 성격 급해서 말 더듬지…. 뭐 하나 봐줄 게 있어야 말이죠.”

    그런 뜻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데,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나는 부족하다’고 먼저 깔고 시작하는 게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인 듯했다. 정미소 집 9남매 중 일곱째 아들,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자식으로 태어난 게 콤플렉스의 시작이었다. 위에서 눌리고 아래서 치받히며 10대부터 20대 초중반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자학(自虐)으로 보냈다. “격정적인 성격에 야심만 커서 현실과 이상 사이 괴리감을 술로 채워 넣었다. … 너무 못난 나를 생각할 때면 가슴속 깊이 꺼이꺼이 울음이 튀어나왔다.” 그가 직접 쓴 청춘 시절의 기억이다. 군 제대 후 뒤늦게 진학한 한의대에서 요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지금도 이렇게 방황하며 살았을 게다.

    짜릿함에 눈뜨다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 김규만 한의사

    제주국제철인대회 완주 기념 메달을 보여주는 김규만 원장.

    ▼ 처음 한 스포츠가 요트였어요?

    “네. 스물일곱 살에 대학 요트부에 들어갔어요.”

    어린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이발소 그림, 잔잔한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돛단배의 환상을 좇아서였다. 지리멸렬한 삶이 못마땅할 때면, 그는 종종 돛단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떠나는 꿈을 꿨다. 대학에 요트부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가장 먼저 그 추억이 떠올랐다.

    “직접 세일링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내가 너무 잘 하는 거예요.”

    윈드서핑에도 재능이 있었다. 하루 만에 독학으로 타는 법을 익혔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건,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여세를 모아 산악회에도 가입했다. 세상에, 산행도 몸에 맞았다. 그는 체격이 왜소했을 뿐, 힘은 좋았다. 겁도 없었다. 한창 세상이 재미있어질 무렵, 친구가 학교에 타고 온 MTB가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오르막에서 페달을 밟을 때 느껴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오르가슴’, 내리막에서 바람을 가르며 질주할 때 느껴지는 짜릿한 ‘내리가슴’. 이건 그냥 자전거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였다. 새로운 자극과 모험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심장을 터지게 만드는 건 뭐든 배웠다. 행글라이딩 동아리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다니고, 눈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마운틴 스키도 탔다. 고산 등반에도 뛰어들었다.

    1991년 대학 졸업 후 한의원에 월급의사로 갓 취직했을 무렵, 산악회 선후배들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한 동계 원정팀을 꾸렸다. 언제 또 올지 모를 기회라는 생각에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후회는 안 했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함으로써 그는 처음으로 제 능력을 발견하고, 한계를 만나고, 극복할 용기를 얻었다. 몸을 괴롭힐수록 마음은 평화로워진다는 걸 알았다.

    “에베레스트에선 8000m 위까지 잘 올라갔는데 정상을 못 밟았어요. 제가 정상 공격팀이었으면 성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봤죠. 가서 알았는데, 제가 고소 적응 능력이 워낙 좋더라고요. 고산 등반 경험이 많은 사람들보다 짐도 잘 들고, 이동 속도도 더 빨랐어요. 여기서 두세 달만 지내면 셰르파하고 똑같아지겠구나 싶었죠.”

    등정에는 실패했지만 “나 정도 폐활량이면 고산지대에서 MTB도 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은 건 수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말라야 산맥의 고대 왕국 라다크를 MTB로 횡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홀로 북인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다. 끝없이 이어지는 해발 3000~4000m 언덕 앞에서 좌절하기 전까지는.

    고소 마니아

    “등산이랑 MTB 라이딩은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해발 5000m 지대는 산소량이 지상의 50%밖에 안 돼요. 숨이 턱턱 막히니 속도는 느려지고, 계획한 일정에 맞추려면 달이 뜬 뒤에도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하고…. 내가 뭐 하자고 이 짓을 시작했나 싶어 혼자서 이를 갈았어요.”

    체력과 정신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해발 5600m 타그랑라 고개를 넘을 때는 환각 상태에까지 빠졌다. 하루 100㎞씩 약 1000㎞의 길을 달리는 동안 얼굴은 시커멓게 변하고, 코밑과 입술이 다 터졌으며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 그래도 참 좋더라, 이런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죠?

    “고통이 극에 달하면 희열이 돼요. 한번 그걸 느끼면 못 잊지요. 한의사가 알고 보면 참 답답한 직업입니다. 야간 진료, 주말 진료 다 하다 보면 매일매일 쳇바퀴 도는 데서 벗어나지를 못하거든요. 뻔한 일상에서 재미있게 일탈할 방법이 있어야 돼요. 나를 끝까지 몰아붙이는 거, 정말 정신이 번쩍 나는 일이지요.”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 김규만 한의사

    커다란 범선이 놓여 있는 김규만 원장의 진료실. 그는 늘 미지의 세계를 동경한다.

    해발 2000~4000m 지대에 사는 라다크 사람들을 만난 일도 잊지 못한다. 김씨는 라이딩 하다 민가가 나오면 잠시 페달링을 멈추고 들어가 아픈 사람을 찾곤 했다. 한두 명 비뚤어진 뼈를 바로 잡아주고 침을 놓아주면 금세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빨리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건 요통, 각통, 슬통 같은 각종 통증 치료. 그에 따르면 몸의 중심인 골반이 틀어져 생긴 이런 통증은 ‘차고 치고 맞추는’ 치료로 금세 고칠 수 있다.

    “이 치료법이 겉모습은 굉장히 폭력적이에요. 틀어진 뼈를 발로 막 차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죠. 그런데 그렇게 한 5분만 바로잡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효과가 나타납니다. 골반이 똑바로 자리 잡으면 척추가 바로 서고, 상체 하체 몸 전체의 균형이 잡히거든요.”

    방법은 ‘단순 무지’하지만 효과는 ‘지존’이라는 뜻에서 그는 이 치료법에 ‘단무지 교정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고산지대 사람들을 만나면 건강유지를 위한 보행법으로 ‘올리브 워킹’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바르게 걷기만 해도 관절 통증이 줄어들고 건강이 개선된다. 중요한 것은 어깨와 골반을 반대 방향으로 교차 회전시키면서 걷는 것. 올리브(all+live)라는 이름은 몸의 오장육부를 모두 살려준다는 의미에서 붙였다. 이 ‘트위스트 워킹’의 첫 단계는 척추를 축으로 삼아 어깨와 골반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반동시키며 걷는 것이다. 이때 몸속 장기들이 좌우로 수축과 확장을 반복해 신진대사가 원활해진다. 두 번째 단계는 상하로 쿵쿵거리며 걷거나 가볍게 뛰는 것이다. 이때 몸통 속 장기가 함께 흔들리면서 장기간 소통이 더욱 활발해진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체액이나 병리적인 담, 비계, 노폐물이 빠져나와 질병이 치료되고 체중이 줄어든다고 한다.

    올리브, 단무지

    극한 지역 여행을 통해 오지에 사는 이들에게 올리브, 단무지의 효과를 알려온 김씨는 1993년 동료 한의사들과 함께 의료 봉사 모임 ‘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KOMSTA)’을 만들고 초대 단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의료 봉사 활동도 하고 있다. KOMSTA는 1993년부터 지난해까지 101번의 해외 의료 봉사를 했다. 김씨도 여건이 될 때마다 참여했다.

    더불어 1년에 한 번씩은 보름씩 병원 문을 걸어 잠그고 극한의 세계로 뛰어든다. 예의 ‘마조히스트’ 발언이 나온 1800㎞ 티베트 종주,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타클라마칸 사막 종단에서 얻은 감동은 라다크에서의 그것에 부족하지 않다. 1300㎞ 여정 동안 힌두쿠시 산맥, 쿤룬 산맥, 카라코룸 산맥, 히말라야 산맥 등 4개의 거대 산맥을 지나야 하는 카라코룸 하이웨이(Karakorum Highway) 횡단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그 고생을 했던 라다크에도 5년 뒤에 다시 갔어요. 첫 라이딩 때보다 더 긴 거리를 코스로 정해 달리고 왔죠. 고산지대 MTB 라이딩은 마약 같아요. 자꾸 더 큰 자극을 찾게 되니까요.”

    여러 차례의 라이딩을 통해 그가 배운 건 해발 4000m 이상 고도에선 어차피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 자전거 안장에서 오래 버티게 하는 힘은 꾸준한 페달질과 규칙적인 숨고르기뿐이라는 것이다. 심장이 터질 듯 괴로울 때는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난 것은 모두 그리워만 진다”는 푸슈킨의 시를 읊는다. 정말 그랬다. 어려움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고 나면 괴로움조차 그리워졌다.

    至高以至孤而至苦已

    ‘고통의 극한에서 오는 희열’을 체험하기 위해 꼭 해외에 나가야 하는 건 아니다. 김씨가 꼽는 생애 가장 고통스러웠던 도전은 오히려 한국에서 이뤄졌다. 신세기를 앞둔 2000년 12월31일 열린 마라톤 대회 완주 도전이다.

    “그때까지 달리기를 해본 적이 없었어요. 대학 가서 요트 타다가 이거저거 배우기 시작한 거니까 뛰어볼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세기말을 기념할 만한 세리머니로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 마라톤을 고른 거예요. 해발 5000m 지역에서 MTB 타고, 허구한 날 윈드서핑과 고산등반을 하는 몸인데 겨우 달리기쯤 못하랴 하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아니었다. 세상에 마라톤처럼 힘든 운동은 없었다. 20㎞ 지점까지는 그럭저럭 뛰었다. 반환점을 돌고부터 온몸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극한에 도전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미쳤지. 이 짓을 또 왜 하나’ 스스로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30㎞ 지점부터는 아예 다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특히 ‘권총 한 자루, 수류탄 두 개’에 비상이 걸렸다.

    “그날 체감 온도가 영하 15℃였어요. 맞바람을 맞으며 달리는데, 권총이랑 수류탄이 금방이라도 동파될 것같이 아픈 겁니다. 도로 한복판에서 택시를 잡아탈 수도 없고, 한강에 뛰어들 수도 없고…. 정말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은 처음입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5시간8분에 걸친 완주 이후 사흘간 그는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 익스트림 스포츠 도전 사상 가장 참혹한 후유증이었다.

    ▼ 그동안 다치거나 사고를 당한 적이 없었나요?

    “10년 전쯤 헬멧을 안 쓰고 북한산 탕춘대 쪽으로 MTB 라이딩을 갔다가 다운힐 코스에서 어이없이 넘어져 다친 적이 있어요.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몇 바늘 꿰맸죠. 하지만 그건 정말 사고였고, 마라톤 후유증은 내 몸이 도저히 견디지 못해 생긴 거니까 전혀 다르죠.”

    너무 힘들어서 한동안 “마라톤은 다시는 안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슬금슬금 솟아나는 고통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는 ‘아편쟁이’처럼, 그는 울트라 마라톤과 트라이애슬론으로 관심을 뻗어나갔다. 이미 몇 차례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했고, 매년 겨울 제주도에서 열리는 트라이애슬론 경기에는 빠지지 않고 참가한다. 수영(3.83㎞), 사이클(180㎞), 마라톤(42.195㎞)을 완주한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철인(iron man) 메달’이 그의 진료실에 줄줄이 걸려 있다.

    ▼ 매번 같은 코스를 뛰는 건 지루하지 않으세요.

    “제주도 대회는 워낙 코스가 좋아요. 또 철인대회라는 게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거니까 지루할 틈이 없죠. 컨디션에 따라, 그때 상황에 따라 늘 변수가 생겨요. 2008년엔 너울이 심해서 수영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코스를 마치고 유난히 찬물을 많이 마셨지요. 그런데 자전거를 타러 가는 도중에 갑자기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겁니다. 말로만 듣던 저나트륨혈증이었어요. 소금 구할 곳이 없어서 맥주 한 캔을 억지로 마시고 몸을 추슬렀지요.”

    물론 그 상태로 사이클은 완주했고, 그는 또 한 번 철인 메달을 받았다. 김씨의 좌우명은 지고이지고이지고이(至高以至孤而至苦已). 지독한 외로움과 지독한 괴로움이 있어야 지극히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김씨의 한의원에 마주 앉았다. 지금껏 해온 도전과 성취 가운데 스스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뭘지 궁금했다. 고산 등반, 고지 라이딩, 요트 세일링, 트라이애슬론, 생애 최초 마라톤 도전에서의 완주 기록….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오고간 ‘극한 도전’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차 없이 사는 것”을 꼽았다.

    “저는 화석 연료 태우면서 쾌속으로 달리는 것보다 좀 늦을지라도 내 폐와 심장과 근육으로 움직이는 게 훨씬 좋아요. ‘no car but bike(차 대신 자전거)’가 생활신조죠. 이번 생에서는 이런 취향과 편견을 지키면서 살고 싶은데 이게 MTB 타고 고산등반하는 거 못지않게 힘이 듭니다.”

    no car but bike

    평소엔 괜찮다. 자전거로 가기 어려운 곳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고, 급할 때는 차가 있는 주위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 한 번씩, 마치 담배 끊은 뒤의 금단 현상처럼 충동적으로 미칠 듯이 차가 갖고 싶어질 때가 있다. 젊을 때는 아름다운 디자인과 첨단 기능의 차를 보면 마음이 흔들렸다. 나이 들고 철든 지금은 가족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흔든다. 간절하고 처절하게 차를 원하는 아내와 두 아이 얘기다.

    ▼ 가족들이 차를 갖는 것도 반대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아내가 필요하면 자기 차를 갖는 건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운전하기를 원하거든요.”

    ▼ 면허는 있으시군요.

    “네. 몇 번 운전한 적도 있어요. 몇 년 전에 아는 분이 타던 차를 그냥 주셔서 집에 둔 적이 있거든요. 그것 때문에 아주 힘들었어요. 나는 운전하기 싫다고 하고, 아내는 기대하고. 결국은 다시 다른 사람한테 줘버렸어요.”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못하는 일이 ‘남 설득’이라고 했다. 특히 아내와 아이들에게 차 문제를 이해시키는 건 너무 어렵다고 했다. 지금은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기대하며 그저 기다리는 상태다.

    그의 병원 옆에는 작은 창고가 마련돼 있다. 티베트 고산지대를 함께 누빈 명품 MTB와 출퇴근할 때 타고 다니는 또 다른 MTB, 시내 주행용 미니벨로와 접히는 자전거, 그리고 연습용으로 거치대 위에 올려둔 고정식 자전거까지 다섯 대의 자전거가 놓여 있다. 그는 이 발을 이용해 도시를 누빈다.

    ▼ 나중에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만큼 연세가 드시면 그때는 어떻게 하죠?

    “세발자전거를 타야죠. 세발자전거도 못 탈 만큼 늙으면 그만 살고 싶어요. 사람이 지나치게 오래 사는 건 죄짓는 거예요. 옛날 분들은 돌아가실 때가 됐다고 느끼면 스스로 비상을 조금씩 드셨답니다. 스콧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마무리’를 보면 니어링은 단식을 해요. 역시 서서히 죽어가는 방법이죠.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든 죽음을 거부하려 하는데, 나는 그렇게 되기 전에 세상에 흔적 남기지 않고 훌훌 떠나고 싶어요.”

    김씨는 ‘화장도 싫다’고 했다. 멀쩡한 나무를 죽여 내 몸을 태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물고기 밥 나무 밥

    ▼ 그럼 어떻게 사라지죠?

    “가장 좋은 건 수장(水葬)이에요. 참 오랜 시간 동안 수영하고 딩기요트 타고 윈드서핑하고 크루징요트도 타면서 물위에서 잘 놀았어요. 항해하다가 바다에서 죽는다면, 그래서 기꺼이 물고기 밥이 되면 좋겠어요. 바다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렇게 못 하고 땅에서 죽으면 가족들이 수장(樹葬)을 해주길 바라요. 좋은 나무 아래서 그 나무가 자라는 데 도움을 주는 영양분으로 썩어가고 싶어요.”

    그는 포리스트 카터의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내가 죽으면 저기 있는 소나무 옆에 묻어주게. 저 소나무는 많은 씨앗을 퍼뜨려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나를 감싸주었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걸세. 내 몸이면 이 년치 거름 정도는 될 거야.’

    소설 속에서 죽음을 맞는 인디언 할아버지의 유언이다.

    “오래 사는 게 중요한가요. 한순간을 살아도 멋있게, 재밌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다가 떠나야 할 순간 딱 떠나는 게 내 꿈이에요. 올해는 실크로드 자전거 트레킹에 도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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