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큰 도끼로 툭툭 쳐낸 것 같은 역설적 아름다움

  •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koyou33@empas.com

    입력2011-01-20 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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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도끼로 툭툭 쳐낸 것 같은 역설적 아름다움

    초조한 도시<br>이영준 지음, 안그라픽스, 272쪽, 1만8000원

    어느 환경운동가와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원자력발전소…, 그것이 환경을 얼마나 많이 파괴하는지 아세요?”라며 눈을 치켜떴다. 밥상에는 돼지고기볶음, 쇠고기장조림, 달걀프라이, 미역무침, 콩자반 등 여러 반찬이 놓였다. 그는 보기 드문 대식가였다. 덩치도 큼직했다. 밥 두 그릇을 비우며 돼지고기와 쇠고기 반찬을 거의 ‘싹쓸이’했다.

    그는 “현대인의 도시생활 자체가 환경에 대한 재앙 아닙니까?”라고 다그쳤다. 그의 기세에 눌려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숟가락, 젓가락을 놀렸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례를 그가 보여주었다. 그는 아파트 생활을 맹렬히 비판하고 콘크리트 덩어리 도시 구조물을 성토했다. 그러는 그는 문명의 손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황토와 돌로 지은 집에 살고 있을까?

    도시, 공장, 아스팔트 도로, 공항…. 이런 구조물은 현대문명의 상징이다. 이 인공 조형물이 흉물이라느니 하면서 문제점을 꼬집으면 자연주의자, 친(親)환경주의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계룡산 심산유곡에서 나 홀로 수도하거나 파푸아뉴기니 밀림에서 원시생활을 하지 않는 한 도시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누리기가 곤란한 것이 현실이다. 도시 속에서 미학을 추구할 수 없을까.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예로 들어보자. 짓다 만 공장처럼 생긴 건축이다. 철제 배관이 외부에 노출된 형태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흉물이다. 그러나 자꾸 보며 익숙해지면 현대 건축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연 걸작이다. 에펠탑도 그렇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1889년에 지어진 320m 높이의 그 거대한 철탑은 축조 당시엔 반대론자에게서 기괴한 쇳덩어리라는 맹비판을 받았다. 에펠탑이 파리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줄이야 누가 상상했으랴.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자연은 좋은 것, 인공은 나쁜 것’이라는 개념을 주입받는다. 시골에 사는 농어민은 순박하고 서울 사람은 깍쟁이, 도시는 인심이 사나운 곳이라고 배운다. 철골구조물, 시멘트 덩어리 아파트에 거주하면 아토피 피부병에 쉬 걸리고 인성이 메마른다고 지적받는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구 대다수가 도시에 사는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도시생활에 대해 삿대질만 해서는 곤란하다. 아파트가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라지만 농어촌에서조차 논 옆에, 산 가운데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것이 한국의 오늘날이다.



    도시를 조금이나마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볼 수 없을까. 어차피 삶의 대부분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하는 도시인을 위해서라면 도시친화주의가 성립돼야 할 것 아닌가. 이런 상념에 빠져 있던 터에 ‘초조한 도시’라는 책을 발견했다.

    표지부터 눈길을 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의 뒷모습, 하얗게 빛나는 대형 전광판, 불 꺼진 거대한 빌딩 등이 어우러진 심야 도심의 광경이다.

    사진으로 읽는 도시의 인문학

    책날개에 나타난 저자 프로필이 심상찮다. 저자의 직업은 사진비평가, 이미지비평가, 기계비평가,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아트 앤 플레이군 교수 등으로 소개됐다. 하는 일에 대해서는 ‘기계를 관찰하고 비평적으로 해석하고 사진으로 찍고 다양한 지식들과 결합하고, 전시로 꾸미고 책으로 만들며 사람들과 이야깃거리로 삼아 윤택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도시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썼다. ‘사진이론의 상상력’(2006, 눈빛) 등 여러 저서를 냈고 국내외에서 사진전도 여러 차례 기획했다.

    ‘사진으로 읽는 도시의 인문학’이란 부제(副題)도 눈길을 끈다. 책을 훑어보니 간판, 자동차 행렬, 공장, 다리, 송전탑 등 다양한 인공구조물 사진이 수록됐다. 이런 도시의 모습에서 찾은 역설적 아름다움을 저자의 카메라가 포착했다. 여러 사진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평적 성찰이 돋보인다. 글 반(半), 사진 반(半)인 책이다. 앞부분부터 꼼꼼히 살펴보자.

    저자는 서문에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국도극장, 스카라극장이 사적지로 지정되기 전에 건물주에 의해 헐린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사라져가는 건축물을 사진으로라도 남기려 카메라를 들이댄다고 밝혔다. 유서 깊은 건물이 허물어진 이후의 물적, 정신적 공허를 메워주는 의식(儀式)의 하나로 ‘사진 찍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심 건물 벽에 어지럽게 붙은 간판들에 초점을 맞춘 사진은 한국 간판문화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학원, 병원, 식당, 목욕탕, 세탁, 수선, 기원, 독서실, 부동산 중개소 등 온갖 업종의 상호가 현란한 원색 색상과 큼직한 글씨를 뽐낸다. 어떤 빌딩은 간판이 하도 많이 붙어 건물의 본래 형태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큰 글씨, 큰 간판이 존재감을 돋보이게 한다는 전통 관념 탓이란다. 저자는 이를 ‘글씨의 제국’이라고 명명했다.

    한국 아파트, 성냥갑 아니다

    서울 금천구청 옥상에 올라서면 벽산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 아파트 대부분은 서향 또는 북향으로 지어졌다. 아파트 뒤편인 남쪽엔 호암산이 있어 남향으로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날씨가 맑을 때 이 아파트단지를 촬영했다. 저자의 눈에는 이 아파트가 ‘동양화에서 큰 도끼로 툭툭 쳐낸 것 같은 기법인 대부벽준(大斧劈?)으로 그린 바위같이 굵직한 양감의 바위덩어리들처럼 하나의 장벽을 이룬 것’으로 비친다. 아파트가 대리(代理) 자연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음미한 다음 사진을 보니 하늘로 솟은 아파트들에서 묘한 절제미가 느껴진다. 교회 건물의 꼭대기에 세워진 십자가 숫자가 6개인 것으로 보아 기독교 선교 활동이 왕성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아파트는 성냥갑처럼 똑같아 답답하다”는 외국인들의 혹평도 있지만, 저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는 “잘 관찰해보면 어떤 아파트도 획일적이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어떤 아파트든 약간씩 다른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고,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 삶의 흔적들이 묻어나와 동과 동 사이, 세대와 세대 사이에 미묘한 차이들이 생긴다”고 강조한다.

    교도소 구경을 해보셨는지? 이런 질문을 던지면 상대방은 화를 낼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런 반응 아니겠는가. 이 책엔 안양교도소 건물 사진이 수록됐다. 사진으로 교도소를 들여다보는 셈이다. 안양교도소는 번화가인 호계사거리 옆에 있다. 호젓한 교외에 자리 잡은 여느 교도소와는 다르다. 그렇다 보니 안양교도소의 담은 매우 높다. 재소자들이 담을 넘어 탈출하기는 불가능한 듯하다. 안양교도소의 진귀한 전경(全景) 사진에서는 운동장에서 재소자들이 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수감시설들은 파랑, 검정 지붕을 가진 여러 채로 구성됐다.

    저자는 북한산 사진을 찍으려 산이 잘 보이는 지점을 골라 다녔다. 북한산이 보이는 숱한 건물에도 올라갔다. 그 결실인 여러 사진이 수록됐다. 북한산 앞에 건물이 즐비한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북한산의 결정적인 모습은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산은 멀리 배경으로 물러서고 그 앞에 줄지어 치솟은 아파트가 주인공처럼 찍힌 사진들이다. 청소년 시절에 정릉에 살았던 저자는 정릉을 한국의 체르마트라고 부른다. 체르마트는 알프스 산록의 소도시로 마테호른 봉에 오르는 등산객들이 묵고 가는 곳이다.

    변전소 사진을 구경하기도 쉽지 않으리라. 변전소는 국가의 주요 시설이기는 하지만 일반인의 관심대상에서는 멀어졌다. 저자는 카메라를 들고 나서 변전소 내부를 샅샅이 찍었다. 얽히고설킨 철(鐵)구조물, 그 사이로 열매처럼 달린 세라믹 재질의 애자(·#53163;子)들이 밀림을 연상케 한다. 저자는 이 복잡한 변전소 시설을 ‘복잡계’라고 불렀다. 그는 “복잡계로 보는 것은 어쩌면 이 시설의 구조와 체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의 무지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콘크리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다. ‘삭막함’이 콘크리트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환하면서 ‘삭막미(美)’라는 말로 명명했다. 콘크리트의 굳건함, 무게감, 부피감, 표면의 질감, 구조에서 오는 아름다움 등을 열거했다. 수백 톤 무게를 지탱하며 오랜 세월을 버티는 콘크리트 교각(橋脚)은 장엄하고 영웅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 “수십 미터 높이의 수직성과 두텁고 무거운 양감의 콘크리트 교각은 파르테논 신전의 돌기둥이 가진 장엄함을 능가하고도 남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거대 구조물은 ‘현대의 신전’이라는 것.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일본의 사진작가 시바타 도시오, 미야모토 류지 등은 주로 콘크리트 구조물을 오브제로 다룬다.

    이 책에 수록된 한강의 여러 다리 사진은 새삼 콘크리트의 ‘삭막미’를 일깨운다. 구조역학적으로 정교하게 축조된 시멘트 덩어리들이 강에서 수직 상승한 자태에서 바벨탑을 세우려는 인간 욕망이 읽힌다. 일반인은 다리 밑 교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지만 사진가의 눈에는 의미와 감각이 충만한 곳이란다. 사진가의 눈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저자의 다음 글에서 확인해보자.

    콘크리트 기둥들도 자세히 보면 매우 섬세한 부피감과 질감, 공간감을 연출해 내고 있다. 그런 모습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그냥 물질 자체의 상태가 아니라 일종의 연기(演技)이기 때문이다. 사람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도 연기한다. 그것은 질감과 양감, 나아가 세월의 흔적을 통해 시간감까지 보여주는 매우 풍부한 연기이다. 나는 그 연기의 관객일 뿐이다.

    이 책을 훑고 나면 도시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경험하리라. 도시에서 아름다움과 온기를 느끼며 숨 쉴 공간을 찾을 수 있으리라. ‘초조한 도시’에서 ‘푸근하고 여유 있는 도시’를 발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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