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김정은 사진에 담긴 은밀한 진실

‘북한의 괴벨스’ 김기남 <노동당 비서>, 이미지 조작술로 3대를 받들다

  • 변영욱│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cut@donga.com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1-01-20 1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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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연출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은 권력자의 로망일 것이다.
    • 북한 지도부의 PI(President Identity) 정치 막전막후.
    김정은 사진에 담긴 은밀한 진실

    김정은의 클로즈업 사진은 북한 사진기자가 찍은 게 아니다. 2010년 10월9일 중국 정치인과 동행 방북한 중국 신화통신 사진기자가 촬영해 외부에 제공한 것이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목한 김정은의 생일로 알려진 1월8일 오후 8시25분부터 1시간 동안 북한 조선중앙TV가 김정일·김정은 세습의 정통성을 강조한 ‘위대한 영장을 모시어’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를 방송했다.

    북한은 사진, 영화, TV 같은 이미지(image)를 통치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도구로 이용해왔다. 조선중앙TV는 기록영화에서 김정은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메모, 편지를 공개했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연출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은 권력자의 로망일 것이다. 북한은 옛 소련의 스탈린 개인숭배를 창조적으로 모방했다. 북한 언론이 보도한 최고 지도자 이미지는 정치적으로 계산·연출해 촬영된 것이다.

    “앞으로 지난해 9월 당대표자회 이전의 김정은 활동사진을 공개하고, 후계자 초상화가 노동당, 정부기관, 군대, 서서히 가정집에도 걸릴 것이다. 개인숭배는 국가 시스템에 경직성을 가져온다.”(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북한 지도자 사진은 크다. 화면 중앙에 주인공이 서 있고,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주인공과 함께 등장하지 못한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나면 지도자의 핏줄도 사진에서 사라진다.



    구겨진 노동신문 1면

    2008년 김정일이 건강 악화로 고생했을 때도 선전당국은 민첩했다. 철저한 계산, 연출하에 촬영한 사진을 대내외로 배포했다. 건강 악화 이후 김정일 사진은 과거보다 밝다. 사진 촬영 때 대형 조명을 사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신문을 도배하다시피 많은 사진을 게재해 건재함을 강조한다.

    김정은 후계자 설(說)은 2009년 상반기부터 나돌았으나 북한은 김정은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일본 언론이 한국의 40대 남자와 북한 제철소 간부 얼굴을 김정은이라고 잘못 보도한 일도 있다. 오보 행진이 한동안 이어질 뻔했으나 북한은 2010년 가을 김정은 얼굴을 정치공작 벌이듯 전격적으로 공개한다.

    북한은 지난해 9월 44년 만에 당대표자회를 열고, 김정은 얼굴을 9월30일 노동신문 1면을 통해 주민에게 알렸다. 외부 세계에 김정은 사진을 공개한 것은 같은 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서다.

    김정은 얼굴 공개는 김일성 후계자이던 김정일 얼굴 공개보다 그 속도가 빠르고, 파격적이다. 김정일 얼굴은 1980년 10월11일자 노동신문 2면에 실린‘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 주석단’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주민에게 알려졌다. 제6차 당대회에서 공식 후계자로 선포된 직후의 일로,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6년간 그의 얼굴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북한에서 44년 만에 열린 당대표자회는 지도자 건강이 악화한 시기에 열린 만큼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은 거의 반세기 만에 당대표자회를 열면서 외부 취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북한에 주재하는 중국 국영언론 신화통신 카메라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김정은 사진에 담긴 은밀한 진실

    TV아사히가 2009년 6월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은의 최근 사진이라고 공개한 얼굴 사진(왼쪽). 인터넷 다음에서 한 카페를 운영하는 카페지기의 사진과 똑같은 것으로 드러났다(위). 마이니치신문은 2010년 4월20일 “조선중앙통신이 유력한 후계자 후보인 김정은의 최근 사진을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보당국은 사진 속 인물이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 김광남 기사장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김정은 사진에 담긴 은밀한 진실

    노동신문 2009년 11월30일자. 김정일-김정은 세습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미지 폭증이다. 하루치 신문에 1~2장에 불과하던 ‘1호 사진’의 수가 40장이 넘기도 한다.

    북한은 9월30일 오후 김정은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외부에 공개하면서 이채로운 사진 1장을 끼워 넣었다. 같은 날 아침 북한 전역에 배달된 노동신문 1면을 촬영한 사진이 그것이다. 선전당국이 노동신문 지면을 사진으로 촬영해 외부에 전송한 것은 이례적이다. 노동신문 1면을 저녁뉴스 시간에 방송화면으로 주민에게 보여주는 게 관례화했지만 이번처럼 지면을 사진으로 찍어 외부에 배포한 예를 찾아보긴 어렵다. 방송화면을 통해 보는 신문 지면보다 사진 형태로 보는 신문 지면이 훨씬 또렷하다. 사진의 형태로 노동신문 1면을 공개한 까닭은 김정은 얼굴을 주민에게 공개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김정은이 후계자라는 게 북한 내부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사실도 강조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사진 속 신문 지면이 구겨져 있고, 촬영 구도가 전문가가 촬영한 것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엉성하다. 이를 미루어 북한 당국이 이 사진의 촬영과 배포를 급하게 결정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후계자 얼굴을 공개한 뒤로 사진 정치가 속력을 내고 있다. 10월10일 노동당 창당 65주년 기념 열병식 때 북한은 외국 언론 취재진 80명을 초청했다. 미국 CNN, 영국 BBC를 비롯한 다수 방송사가 김일성광장에서 수행한 열병식을 생중계했다. 세계 최대 뉴스 통신사 AP, 아랍권 위성방송 알 자지라, 스페인 공영방송 TVE도 현장을 취재했다. 북한은 10월7일경부터 세계 유력 언론사에 “노동당 창건 행사를 취재하고 싶지 않으냐”고 초청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한국 언론은 배제했다. 취재진은 핵심 취재 대상인 김정은 얼굴을 연단 아래에서 망원렌즈를 이용해 촬영해야 했지만, 취재 및 전송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광장 주변에 인터넷 회선이 깔린 프레스센터를 설치했다.

    북한 언론은 김정일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찍지 않는다. 김정은 사진도 이런 관행을 따를 것으로 여겨진다. 북한 기자는 한국 기자가 대통령을 찍을 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김정일을 촬영하지만 얼굴을 당겨 찍지 않는다. 북한 매체에 실린 전신사진의 얼굴 부분을 확대하면 화면이 깨져 안면의 세세한 변화를 읽기 어렵다. 사진을 통해 김정일 건강을 점검하려는 관찰자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한국 언론이 보도하는 김정일 얼굴 사진이 다른 나라 지도자의 그것과 비교해 깔끔하게 보이지는 않는 것은 클로즈업하지 않은 사진에서 얼굴만 편집·사용해 해상도가 낮아서다.

    그렇다면 한국 언론에 실린 말끔한 얼굴의 김정은 사진은 누가 촬영한 걸까. 북한 노동당 창당 65주년 기념대회 전날인 10월9일 열린 경축 중앙보도대회 때 중국대표로 북한을 방문한 저우융캉(周永康)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김정은과 만났다. 이때 신화통신 사진기자 1명에게 촬영을 허용했다. 이 사진기자가 세계의 관심을 끄는 젊은 후계자의 얼굴을 촬영해 공개한 것이 말끔한 김정은 얼굴 사진이다. 김정은의 피부 상태와 시계 종류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해상도가 높다. 외국 언론에 김정은 얼굴의 상세 노출을 허용한 것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김정은의 존재를 베일 뒤에 숨길 수도,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당 창당 65주년 기념대회를 북한 전역에 생중계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한다. 조선중앙TV는 이날 오전 9시30분부터 1시간48분간 기념대회를 생중계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 방송은 2000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도 녹화한 필름을 편집해 시차를 두고 주민에게 공개했다. 김정은이 처음으로 등장한 대중 행사를 주민에게 생중계했다는 사실은 후계자 문제를 정공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며, 지도부가 후계 문제와 관련해 나름의 자신감을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

    김정은 사진에 담긴 은밀한 진실

    1980년 10월19일자 노동신문 1면과 2010년 9월30일자 노동신문 1면이 복사한 듯 닮아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사이에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자리 잡았고, 김정일-김정은 부자 사이에는 리영호 총참모장이 앉아 있다. 중요한 사람이 사진 왼쪽에 서거나 앉는 사회주의 사진의 관행에서 볼 때 특이한 점이 있다. 김정은의 위치가 김일성의 자리와 오버랩하는 것이다.



    김일성 위치에 앉은 김정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기술자들은 이미지 조작을 통해 김일성 카리스마를 김정은에게 덧씌우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김정은이 입은 옷 색깔은 김정일보다는 김일성의 그것과 가깝다. 헤어스타일, 분위기도 그렇다. 정부 당국자는 “조선중앙TV가 김일성의 청년 시절 활동 장면을 담은 영상을 되풀이해 방송하면서 주민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기념사진에서 아들 김정일의 위치는 김일성의 왼쪽, 즉 사진에서는 오른쪽이었다. 북한의 가정, 사무실에 걸린 부자 초상화도 왼쪽이 김일성이다. 중요한 사람이 화면 왼쪽에 등장하는 사회주의 촬영 관습에 충실한 것이다. 김정일과 김정은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김정은이 사진의 왼쪽, 즉 김정일 오른쪽에 앉거나 선다. 김정일의 위치는 고정돼 있는데 사진 왼쪽 인물이 김일성에서 김정은으로 바뀐 셈이다.

    북한 지도부는 2009년부터 김정일의 현지지도 사진에 김정은의 얼굴을 실수 혹은 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적이 있다. 조선중앙TV는 2009년 4월27일 원산농업대가 새로 지은 온실을 방문한 김정일의 현지지도 사진 다수를 화면에 내보내면서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3남매가 고모부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함께 찍은 사진을 끼워 넣었다. 지도자의 가족사진을 공개했다는 점도 특이하지만, 주목할 부분은 김기남이 등장하는 것이다. 김일성대와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김기남은 1966년 선전부 부부장을 맡은 후 김일성 부자의 우상화와 홍보활동 전문가로 활약했다. 게다가 2010년 5월부터 선전선동부 부장을 겸직하고 있다. 김기남이 선전부 부부장을 맡은 1966년은 김정일이 북한 정치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으며, 북한에서 수령제 사회주의가 본격화한 시점이다. 김정일은 김일성 우상화와 홍보활동을 수행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이미지 조작을 통해 김일성 사진을 활용한 프로파간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도 1967년으로 김정일, 김기남의 활약과 시기가 겹친다. 이즈음부터 ‘1호’(당시엔 김일성)를 제외한 정치인의 얼굴이 신문 1면에서 사라진다.

    우상화 선봉에 선 김기남

    노동신문에 실리는 김일성 사진은 1977년에도 큰 변화를 겪는다. 1977년 1월부터 김일성의 사진과 그의 동정을 다룬 기사는 ‘본사정치보도반’이라는 전담팀이 독점적으로 생산해 배포한다. 이 팀이 만들어내는 사진과 기사는 신문뿐 아니라 방송과 통신이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전한다. 1호의 동정을 효율적으로 알리고,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조작하려는 보도 형태라고 하겠다. 김일성 사진 뒤에 대형 산수화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김기남은 1976년 4월부터 9년간 노동신문의 최고 책임자인 주필을 맡았다.

    1987년 2월 북한은 김정일의 45번째 생일을 앞두고 백두산 밀영을 부각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해 5월 백두산 밀림지역에서 ‘구호나무’를 발견했다고 선전하기 시작했으며, 여름부터는 외국 기자들을 백두산으로 초청했다. 나무들에 김일성과 부인 김정숙의 항일활동, 김정일의 출생을 축하하는 구호가 적혀 있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구호나무는 김정일이 가진 종교 혹은 신화 수준의 상징이다. 항일유격대 전사들이 일제강점기에 나무에 새겼다고 북한이 선전하는 글귀는 이렇다. ‘겨레여 백두산에 백두광명성 솟았다, 백두광명성 삼천리를 비친다.’ 백두광명성은 김정일을 가리킨다.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체라고 주장한 광명성 1,2호는 이름을 이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김기남은 1987년 유명한 구호나무 신화를 조작해낸 인물로 김일성 부자 우상화를 위해 북한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다.”(조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기남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여론 조작, 행사 관리를 통해 김정일 체제 구축에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권력이양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현 시점에서 김기남의 역할과 비중은 현지지도 동행 횟수에서 드러난다. 통일연구원이 펴낸 ‘김정일 현지지도 동향 1994~2009’에 따르면 2009년 현지지도를 가장 많이 수행한 사람이 바로 김기남이다. 김기남이 3대(代)에 걸쳐 ‘북한의 괴벨스’로 활약하는 것이다.

    에펠탑 효과

    옛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초 김일성이 죽으면 북한이 망하리라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은 수개월의 공백을 거친 후 노동신문에서 김일성의 자리를 차지했다. 공백이라는 표현은 노동신문에 김정일 얼굴이 나오지 않은 기간을 가리킨 것이다. 김일성 사후 노동신문엔 김일성 생전 모습과 추모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할 뿐 김정일 얼굴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1995년 1월, 그러니까 김일성 사망 후 6개월이 지난 후 김정일은 군부대를 현지지도하는 영도자로서 비로소 등장한다.

    김정일이 죽으면 북한이 붕괴하리는 주장이 나온다. 북한은 김정은이 김정일의 빈자리를 잘 채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외부에 던지고 있다. 주민에게도 김정은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고 있다.

    ‘에펠탑 효과’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조형물로 에펠탑 건립 계획이 발표되자, 파리의 예술가들은 이 탑의 천박한 이미지에 기겁했고, 시민들은 건립 반대 시위에 나섰다. 고풍스러운 파리를 철골 구조물이 망칠 것이라고 여겨서다. 프랑스 정부는 20년 후 철거하기로 약속하고 건설을 강행했다. 시민들은 에펠탑을 좋든 싫든 눈만 뜨면 봐야 했고 그러다보니 1만5000여 개의 쇳덩어리 조합에 정이 들었다. 그로부터 100년 넘게 지난 지금 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이다. 심리학은 사람이나 대상을 보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호감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단수노출효과(mere exposure effect)라고 가르친다. 북한이 이 이론에 입각해 선전·선동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북한은 김정일 시대를 구축하면서 수용자에게 특정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주면서 그 메시지를 선호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경험을 가졌다. 김기남은 김정일로의 권력 이양 때와 같은 전략을 시도할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은 과거와 달리 압축과 과속으로 진행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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