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뮬란 vs 박씨부인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1-01-21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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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뮬란.
    • 너는 아버지 갑옷을 훔쳐 입고
    • 집에서 몰래 도망쳐 나와
    • 군인 행세를 했다. 지휘관을 속이고
    • 황군의 명예를 파괴했다.
    • 그리고 나의 궁전까지 파괴했다….
    •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했구나.
    • -애니메이션 ‘뮬란’ 중에서
    1 환영받지 못하는 신붓감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여자가 가문을 빛낼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멋진 상대 만나 시집가는 길뿐! ”

    애니메이션 ‘뮬란’의 한 대목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허용하지 않던 시절, ‘바람직한 신붓감’의 마지노선을 통과하지 못한 여성 앞에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중국과 한국의 옛이야기, ‘목란사(木蘭辭)’와 ‘박씨부인전’에는 ‘신붓감 콘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 여인들의 파란만장한 라이프스토리가 펼쳐져 있다. ‘목란사’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여인네들은 노래한다.

    “남자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여자는 집에서 자식을 낳고! ”

    그런 시대에 살았던 소녀 파뮬란(花木蘭)은 도깨비보다 더 무섭다는 중매쟁이에게 퇴짜를 맞고 아예 맞선 자리에 나가지도 못한 채 집안 망신을 시키는 천덕꾸러기가 된다. 뮬란은 우아하고 조신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의 말괄량이 기질을 숨기지 못한다. 우리의 박씨부인은 어떤가. 그녀는 좋은 가문에 태어나 일단 시집을 가기는 했으나 ‘추한 외모’로 남편에게 푸대접을 받는다. 남편 이시백은 ‘외모보다는 재주와 인덕을 보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따르려 하지만, 막상 그녀의 천하박색을 마주하니 도저히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시백이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박씨 방에 들어가니 눈이 절로 감기고 얼굴을 본즉 기절할지라. 아무리 마음을 강잉(强仍)하자 한들 그 괴물을 보고 어찌 감동하리오.

    -‘박씨부인전’ 중에서

    파뮬란과 박씨부인은 ‘좌절된 여성성’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그녀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는데 바로 ‘전쟁’이다. 철부지 말괄량이 소녀 파뮬란은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의 갑옷을 몰래 훔쳐 입고 남장을 한 채 전쟁터로 나가 공을 세워 금의환향한다. 박씨부인의 영웅서사는 더욱 놀라운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병자호란이라는 조선 역사상 최고의 치욕적인 패배를 설욕하는 환상 속의 영웅으로 거듭난다. 적장 용골대의 동생(가상인물)을 죽이고 병조판서인 남편이 무사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최고의 참모진 역할을 수행한 것. 게다가 천하의 추녀였던 박씨부인은 절세가인의 미녀로 변신해 남편을 ‘유혹’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한다.

    파뮬란과 박씨부인은 동양의 옛이야기에 나오는 전형적인 희생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다. 원작 ‘목란사’에서 파뮬란은 무려 12년 동안이나 남장을 하고 전쟁터를 전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여자임을 알아내지 못했다. (애니메이션 ‘뮬란’은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이야기 중간 그녀가 여성임이 밝혀져 군대에서 축출당하는 내용을 넣었다.) 파뮬란의 극적 변신이 ‘남장’이었다면 박씨부인의 극적 변신은 ‘천하박색’에서 ‘천하일색’으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닌, 그러나 누가 봐도 못생겨서 핍박받은 여인 박씨부인의 일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다. 박씨부인은 인현왕후 같은 요조숙녀가 아니고 성춘향처럼 드라마틱한 신분상승의 주인공도 아니다. 그렇다고 ‘심청전’의 뺑덕어멈이나 ‘콩쥐팥쥐’의 팥쥐 엄마 같은 악녀-추녀 계열도 아니다. 박씨부인은 ‘청순가련형 미인’이나 ‘극악무도한 추녀형’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녀가 추녀로 위장하고 있었던 이유가 걸작인데, 남편의 글공부와 출세에 방해가 될까봐 자신의 미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박씨부인은 “내가 그동안 박색으로 지낸 것은 남편이 공부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고 선언한다.

    신부의 용모를 본즉, 곰보에 더러운 때가 줄줄이 맺혀 얽은 구멍에 가득하여, 눈은 달팽이 구멍 같고, 코는 심산궁곡에 험한 바위 같고, 이마는 너무 벗어져 태상노군(太上老君) 이마 같고, 키는 팔척장신이요, 팔은 늘어지고 한쪽 다리는 절룩이니, 그 외모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러라.

    - ‘박씨부인전’중에서

    2 여성성 은폐, 그녀들의 투쟁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박씨부인전’을 각색한 마당놀이 ‘박씨전’

    파뮬란은 좋은 혼처에 당당히 내놓기 어려운 말괄량이 근성 때문에 부모님의 골칫거리가 되고, 결코 에로틱한 대상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박씨부인의 외모에 남편 이시백은 기가 질린다. 파뮬란도, 박씨부인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여성성을 은폐하기로 한다. 파뮬란은 아버지 대신 군인이 되고, 박씨부인은 신통력을 발휘해 제갈량 뺨치는 지모와 홍길동 맞짱 뜨는 도술로 전쟁 영웅이 된다.

    황제께서 군사를 부른다오

    명부에 아버지의 이름도 끼어 있소.

    아버지에게는 장남이 없고,

    뮬란은 오라비가 없구나.

    나는 시장에서 말과 안장을 사서,

    그들 따라 아버님 대신 싸움터에 나가겠소.

    - ‘목란사’ 중에서

    아버지를 끔찍이 위하는 효심말고는 별다른 특기가 없던 파뮬란에 비해 박씨부인의 재주는 ‘그녀가 아직 추녀였을 때’도 신출귀몰한 것이었다. 하룻밤 만에 시아버지의 조복(朝服)을 만들어 모두를 놀라게 하고, 명마(名馬)를 알아보고 싼값에 사서 비싸게 파는 재테크 기술도 출중했으며, 백옥연적으로 남편 이시백을 과거에 장원급제시키는가 하면 피화당(避禍堂)을 짓고 나무를 심어 앞으로 다가올 변란에 철저히 대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씨의 재능은 오직 시아버지만이 알아줄 뿐 남편과 시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집안사람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남편 이시백은 박씨가 드디어 허물을 벗고 절세미녀로 거듭나자 이제 와서 부인이 좋아 죽겠다며 뒤늦은 상사병을 앓는다. 서시나 양귀비도 저리 가라 할 만한, 경국지색의 미모로 탈바꿈한 박씨부인을 대하는 모든 사람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진다. 박씨부인의 추한 외모를 묘사하는 대목만큼이나 그녀의 되찾은 미모를 묘사하는 대목도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측면이 있다. 박씨부인의 캐릭터 자체가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미모에 울고 웃는 세태를 통쾌하게 풍자한 것인지도 모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과 중국 옛이야기 ‘목란사’ 사이에는 사실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통해 변화한 여성상, 근대 이전과 이후의 여성 롤 모델의 변화, 서양과 동양의 여성상의 차이도 추론해낼 수 있지 않을까. 중국 전설의 판본 중에서는 뮬란이 여성임을 알게 된 중국 황제가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고 하는 내용이 담긴 판본(‘목란전(木蘭傳)’)도 있다. 이 판본에서 뮬란은 황제의 요구를 ‘신하는 임금의 첩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며 자결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원작 ‘목란사’가 ‘영웅신화’의 비장미보다는 남장조차 불사해야 했던 파뮬란의 비극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인어공주조차 살려내 왕자와 기어이 결혼시키는 해피엔딩 제조공장 디즈니는 뮬란이 자신이 선택한 사랑인 리샹과 행복한 결말을 이루는 것을 암시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또한 애니메이션 ‘뮬란’의 초반부에 보이는, 중매를 통한 뮬란의 결혼에 얽힌 에피소드는 원작 ‘목란사’에는 없다. 전통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람직한 여성상’에 저항하는 파뮬란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결과인 셈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강조되는 ‘여성의 자아정체성’ 문제는 사실 원작 ‘목란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옛이야기 속 파뮬란은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낭만적 사랑, 혼란 속에서도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자아정체성, 자기만의 개성으로 성취하는 자아실현 같은 근대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디즈니가 아닌 중국에서 만든 영화 ‘뮬란’은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서도 ‘국가를 위해’ 그와 헤어지는 비극적인 스토리를 보여준다. ‘내 사랑’과 ‘나의 꿈’을 내 손으로 반드시 찾는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식 서구적 개인주의는 중국 영화 ‘뮬란’에서 좀처럼 발 디딜 틈이 없는 것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뮬란을 ‘중국의 전통’과 거리가 먼 인물, 나아가 중국의 전통과 결별하는 파격적 인물, 좀 더 미국화하고 서구화한 현대여성의 롤 모델로 그려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그린 파뮬란이 중매쟁이를 만나러 가기 전에 입던 복장과 화장은 중국적이라기보다는 일본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고, 흉노족의 피부를 지나치게 어둡게 처리하고 흉노족 적장의 모습을 괴물처럼 묘사한 것은 인종주의적인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이렇듯 파뮬란은 디즈니를 통해 재해석됨으로써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 미국 사회의 가치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파뮬란은 ‘개인보다 국가가 중요한 현대 중국’에서도, ‘동양의 전통보다는 서구의 합리주의가 중요한 미국’에서도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박씨부인의 삶에도 간난신고를 통한 궁극적 승리만이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남편 이시백은 그녀가 추녀였을 때는 부인으로서 대접을 전혀 해주지 않았고, 그녀가 미녀로 변신하자 그제야 환호작약하며 그녀에게 ‘넘치는 애정’을 보여주었기에, 그는 참으로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부인의 배포에 어울릴 만한 위대한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박씨부인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공간은 ‘피화당’이다. ‘남한산성’의 처절한 패배와 굴욕의 외교사를 환상적으로 전복하는 공간이 바로 박씨부인의 은신처이자 베이스캠프, 피화당이기 때문이다. 박씨부인과 그녀의 시종 계화는 병자호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용골대의 동생 용휼대를 처치하고, 전란으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사리고 있는 조정대신들에게 낭보를 전한다. 박씨부인의 시종 계화가 청나라 장수를 처치하는 장면에서는 ‘패배한 역사’를 ‘환상의 서사’로 전복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청나라 장수 용휼대는 박씨부인 시종 계화의 손에 죽기 전에 장탄식을 내뱉는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만리타국에 큰 공을 바라고 왔다가 오늘 조그마한 계집 손에 죽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

    계화는 웃으며 대꾸한다.

    “불쌍하고 가련하다. 세상에 장부라 이름하고 나 같은 여자를 당치 못하니, 네 왕 놈이 하늘의 뜻을 모르고 예의지국을 침범코자 하여 너 같은 어린애를 보냈거니와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으니 바삐 목을 늘이어 내 칼을 받으라.”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왕은 청나라 장수에게 머리를 조아려 치욕적인 항복을 했지만, ‘박씨부인전’에서는 ‘피화당’이라는 여인의 은신처에서 적장의 머리가 싹둑 잘리는 ‘상상의 쾌거’가 이루어진다.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남장을 하고 참전한) 진짜 이유는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볼 때면, 뭔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 애니메이션 ‘뮬란’ 중에서

    3 평범함으로 귀환하는 현대적 영웅의 탄생

    싸울 때 입던 옷을 벗어놓고 옛 치마를 입는다. 창 앞에서 곱게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한다. 문을 나서 전우들을 보니 전우들은 하나같이 크게 놀란다. 십이 년을 함께 다녔건만 목란이 여자인 줄은 몰랐도다.

    - ‘목란사’ 중에서

    현대인의 눈에 비친 파뮬란과 박씨부인은 페미니즘을 수호하는 열혈 여전사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녀들이 싸워야 했던 진짜 적은 바로 ‘가족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그녀들은 ‘여성의 권리를 찾는다’는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눈앞에 닥친 가족들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스스로 버렸다.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남편의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전쟁에서 세운 자신의 승리를 남편에게 돌리는 박씨부인. 그녀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녀들이 진짜 싸우고 싶은 대상은 그녀들의 파란만장한 운명 자체가 아니었을까. 못생겼다고 해서, 여자라고 해서,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대접받지 못하는 자신의 쓸쓸한 삶과 투쟁을 벌인 것이 아닐까.

    쌀 한 톨이 저울을 기울게 할 수 있듯, 용사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승패를 가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오.

    -애니메이션 ‘뮬란’ 중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중국 고대 장편 서사시 ‘목란사’를 각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타 영웅들과 달리 파뮬란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백설공주처럼 태어날 때부터 공주인 것도 아니었고,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결혼하는 해피엔딩의 주인공도 아니다. 파뮬란은 중국 농촌은 물론 조선이나 일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다. 박씨부인 또한 거창한 목표 때문에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박씨부인에게는 국가에 대한 올곧은 충성이나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되고 싶은 욕망이 들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뮬란과 박씨부인이 현대 사회의 여성들에게도 친숙한 캐릭터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현대 사회가 ‘평범성’ 속에서 영웅성을 이끌어내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타고난 출신성분이나 비범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용기는 모든 사람의 평범성 안에 숨겨진 비범함이니.

    파뮬란과 박씨부인은 진정한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논쟁 속에서 언제든 호출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녀들은 ‘여성적 행복’과는 거리가 먼 ‘전쟁 영웅’의 삶을 통해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영웅으로 금의환향한 후 애니메이션 속 파뮬란은 낭만적 사랑을 선택했고, 영화 속 파뮬란은 베틀 앞으로 돌아와 ‘효녀’로서의 본래 역할로 귀환했으며, 옛이야기 속 파뮬란은 무사히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하거나 또 다른 판본에서는 황제의 첩실이 될 것을 요구받고 자결하기까지 한다. 박씨부인은 어떤가. 그녀는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그녀의 공로는 남편 이시백에게 돌아갔으며 그녀는 ‘충렬부인’에 봉해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녀들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에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투사가 되어 몸으로 전란을 이겨낸다. 피화당은 박씨 부인의 승리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여성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박씨부인은 전쟁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여성들’을 자신의 은신처 피화당에 숨겨준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러한 환상의 서사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큰 위험에 처하는 존재가 바로 여성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들은 목숨뿐 아니라 항시적으로 정절을 위협받았고, 청나라 군사의 ‘손길’만 닿아도 그것은 ‘몸을 더럽힌’ 증거가 되던 시대였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와도 ‘화냥년’ 소리를 들어가며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그녀들은 임금조차 벌벌 떨게 만들었던 청나라 장수도 물리치고, 모자란 남편도 기꺼이 받아주는 여장부 박씨 부인의 환상적 승리담 속에서 애틋한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박씨부인전’에는 박씨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조선 여인네들의 뼈아픈 삶의 흔적이 담겨 있다. 박씨부인은 남성을 제압하는 여전사가 아니라 자신처럼 아프고 자신처럼 슬픈 여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현실에 없는 구원자가 아니었을까. 파뮬란이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용기를 심어주듯이.

    오랑캐 장수들이 장안의 재물과 부인들을 잡아갈 새 잡혀가는 부인네들이 박씨를 향해 울며 슬프다, 우리는 이제 가면 생사를 모를지니, 언제 고국산천을 다시 볼까 하며 대성통곡했다.

    - ‘박씨부인전’ 중에서

    하지만 전 제 마음속의 진심을 온 세상에 알릴 거예요. 그리고 진실된 저 자체로서 사랑받을 거예요. 날 바라보는 저 소녀는 누굴까. 날 계속 바라보는 저 소녀. 왜 나의 모습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사람의 모습일까. 내가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해야 하나. 언제쯤 내 마음 속의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을까. 나에겐 언젠가는 자유롭게 날아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 애니메이션 ‘뮬란’ 주제가 ‘Reflection’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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