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아이들의 인생 마라톤에서 든든한 동반자가 돼주고 싶다”

소년범들에게 감사 편지 받는 ‘촌놈 검사’ 이상대

  • 박은경│신동아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1-01-21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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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자신을 ‘촌놈 검사’라고 부른다. 열 살이 된 뒤에야 전깃불을 처음 봤을 만큼
    • 첩첩산중 ‘깡촌’에서 자랐으니 ‘촌놈’ 맞다. 인정 많고 따뜻한 성정도 꼭 ‘촌놈’이다.
    • 검사로 일하는 10여 년 동안, 범죄자들로부터 수십 통의 ‘감사 편지’를 받은
    • 독특한 검사, 소년범들 사이에서 ‘맘 좋은 아저씨’로 통하는 이상대 검사를 만났다.
    “아이들의 인생 마라톤에서 든든한 동반자가 돼주고 싶다”
    저에게 검사라는 신분은 정말 두렵고 꺼려지는 존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사님은 피해자나 피의자 모두를 따듯한 마음으로 생각해주시고 항상 최선을 다해주셨습니다. 검사님의 책을 읽고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살아가기보다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정말 꿋꿋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사님의 편지로 인해 저 자신에 대해, 그리고 저와 가족들의 앞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현실일수록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엇을 성취하게 되면 그 보람은 더 크고 또한 아름다울 거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검찰청에 가야 하는 상황이 정말 무섭고 겁도 났는데, 진심으로 검사님께서 저를 걱정해주시고 제 얘기를 들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너무 감사하고 편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 행복하다는 검사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저도 언젠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살 수 있겠죠.”

    이상대(45) 검사의 ‘행복 편지함’에 담긴 사연은 50통쯤 된다. 검사 생활 16년 동안 민원인과 소년범에게 받은 ‘감사의 글’만 모아놓은 곳이다. 범죄자가 변호사 아닌 검사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편지들이 하나하나 각별히 소중한 이유다.

    “검사님, 감사합니다”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들의 절대 다수는 25세 이하 소년범. 이 검사는 검사 생활 5년차 때부터 일주일에 한 명씩 소년범을 상담해왔다. 청소년 범죄 사건을 수사하면서, 어려운 환경이 이들을 범죄의 유혹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잖아요. 누군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면 이들의 삶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사가 아닌 인생 선배로 아이들을 만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죠.”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기 위해 열린사이버대학에서 상담심리학도 배웠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렇게 만나온 소년범이 500명에 달한다. 그들 중 요즘 가장 스스럼없이 만나는 이들은 서울 고봉중·고등학교(서울소년원) 학생 5명. 지난해 9월 대전고검에서 법제처로 파견됐을 때 학교 측에 요청해 소개받았다.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매달 한두 번씩 만나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전과가 여러 개 있는 누범(累犯)입니다. 청소년이 범죄를 저지르면 처음 한두 차례는 기소유예를 해주기 때문이지요. 제가 만나는 아이들도 아마 여러 번 범죄를 저질렀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 내용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소년원에 묻지도 않았어요. 선입관을 갖기 싫어서였지요. 아이들을 만나서도 전과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습니다. 검사가 아닌 형으로, 아저씨로 다가가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가 아는 건 아이들의 범죄 경력이 아닌, 진솔한 맨얼굴이다. 이 검사를 ‘동네 아저씨’처럼 따르는 열아홉 살 재영이(가명)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그가 어린 시절 이혼한 어머니는 아들을 고모 집에 맡겨놓은 뒤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밖으로 돌며 친구들과 어울리다 범죄의 길에 빠져든 재영이는 이 검사를 만난 뒤 “내가 먼저 어머니를 자주 찾아갔어야 했는데 그동안 10번도 가지 않았다. 돌아보니 죄송하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건 정말 외롭고 슬픈 인생일 거다. 앞으로는 어머니께 잘해야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꿈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컴퓨터 관련 공부를 하는 것이다.

    “소년원에 있는 컴퓨터는 사양이 낮아서 워드 작업과 파워포인트 정도만 할 수 있대요. 재영이가 원하는 전문 기술을 배울 수가 없죠. 또 다른 아이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역시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이 검사는 벌써부터 아이들이 소년원을 나온 뒤를 걱정한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환경은 범죄로 빠져들게 했던 과거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아이들을 25세까지 지켜봐줄 생각이다. 이 검사의 바람은 소년원에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이 마련되는 것. 아이들이 입소할 때부터 전문 자원봉사자가 옆에서 지켜보고 상담해주며, 그들이 사회에 나와 자립할 때까지 몇 년간 같은 지원을 계속하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한다고 했다.

    “인생은 길단다”

    “아이들의 인생 마라톤에서 든든한 동반자가 돼주고 싶다”

    이 검사는 지난해 10월 그동안 후원해온 소년범 3명과 함께 마라톤 10㎞ 구간을 완주했다.

    “제가 만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스무 살 전후예요. 그런데도 저를 만나면 늘 반갑게 달려오지요. 사람의 정이 그립구나 하는 걸 느낄 때마다 안쓰럽습니다. 이 아이들은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아요. 꼭 제가 아니라도 누군가 이런 역할을 해줘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이 검사는 지난해 10월, 이 아이들 중 세 명과 함께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열린 단축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아이들은 이 검사가 사준 새 운동화를 신고 난생 처음 10㎞를 완주했다.

    “한 친구는 뛰면서 쉼 없이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외치더군요. 그걸 보면서 같이 마라톤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인생은 한순간 결정되는 게 아니라, 마라톤처럼 긴 거리를 달려야 하는 거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날 아이들은 이 검사와 더불어 뛰며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었다. 이 검사는 “아이들이 그것을 몸소 느낀 건 큰 수확”이라고 했다. 그는 소년범들을 돕는 것과 동시에 서울시립소년의집(꿈나무마을)에서 생활하는 12세 여자 어린이 두 명도 후원하고 있다. 대부분 미혼모의 자녀인 그곳 아이들은 원장 수녀를 ‘엄마’, 사회복지사를 ‘이모’라고 부르며 자란다.

    “이 아이들은 친부모를 만날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부모 대신 조금이라도 가족의 정을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하지요. 기회 될 때마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데리고 다니며 밥 먹고 이야기도 해요. 이 아이들이 커서 사회에서 잘 설 수 있게 끝까지 돌볼 생각입니다.”

    그가 사회의 어려운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1988년부터. 고려대 법학과 졸업을 앞두고 사법시험 1차 합격에 실패한 뒤 초조하고 울적한 마음에 오토바이를 타다 넘어졌다. 오토바이와 함께 아스팔트 위로 미끄러졌는데 천만다행 큰 부상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혼자 사고를 냈으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고, 별 탈 없이 마무리됐으니까요. 그때 나도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이 검사는 그때부터 시작한 헌혈을 여전히 계속 중이다. 한 달에 한 번 적십자 혈액원을 찾아 성분헌혈을 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 번 고향 충주 마을에 홀로 사는 어머니를 뵈러 가 옆 동네에 사는 10대 여학생 네 명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자매 두 쌍인 이 아이들은, 모두 조손가정에서 살고 있다. 요즘 농촌에는 이 아이들처럼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맡겨진 아이가 적지 않다. 부부가 헤어지면서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나느라 아이들을 늙은 부모 손에 맡기는 것. 조손가정은 대부분 살림이 어렵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 없이 자라는 고통에 빈곤까지, 이중고를 겪는다.

    “앞으로는 부부가 이혼하려면 엄마 아빠 중 어느 쪽이 아이를 돌볼 건지 미리 정하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걸 합의하지 않으면 이혼을 불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이들 역시 간호사, 미용사, 조리사 등 다양한 미래를 꿈꾼다. 이 검사는 아이들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열심히 격려하고 응원할 생각이라고 했다.

    더불어 사는 삶

    “아이들의 인생 마라톤에서 든든한 동반자가 돼주고 싶다”

    10여 년간 소년범과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돌봐온 이상대 검사

    오랜 시간 많은 아이를 돌봐온 이 검사가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친구’는 김동규(30·가명)씨. 그동안 많은 소년범이 “교도소를 나가면 꼭 연락드리겠다” “사회에 나가면 가장 먼저 검사님을 찾아뵙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다짐을 지킨 사람은 김씨뿐이다. 두 사람은 이 검사가 대전지검 근무 시절, 매주 대전교도소로 상담봉사를 나가며 인연을 맺었다. 이후 김씨는 이 검사에게 손으로 쓴 성경 필사본과 편지를 보내왔다.

    “필사본을 주면서 검사님을 생각하며 썼다고 하더군요. 지적장애가 좀 있는 친구인데, 긴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옮기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이후 제가 대전에서 광주고검으로 옮기면서 한동안 못 만났는데, 동규가 출소해 그리로 찾아왔어요. 알고 보니 집이 광주였지요. 이제는 저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지금도 계속 편지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이 검사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절도로 몇 번이나 교도소를 드나들었던 동규가 지금은 고속버스 기사로 일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어 참 고맙다”고 했다. 이런 인연이 있어 그는 종종 “참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는 검사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형사부에 오는 사람들은 한순간 인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 배경이나 원인, 환경 같은 걸 잘 파악하기 위해 얘기를 많이 들어주지요. 가해자와 피해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건도 양쪽 입장을 충분히 듣다보면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어요. 사랑을 나눈다는 건 그런 얘기죠.”

    그는 열 살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충청도 ‘깡촌’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데 검사까지 됐으니 더 바랄 게 없다고 한다. 검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결심한 것도 ‘아름다운 검사’가 되자는 것. 상대가 범죄자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 수 있도록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낸 이 검사의 꿈은 그동안 봉사활동을 하며 만난 수많은 소년소녀가장과 부모 없는 아이들,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꿈을 잃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성장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따뜻한 울타리가 돼주고 싶단다. 한편으로 자식들이 범죄의 길에 발을 디딘 일 때문에 고통 받는 부모들을 만나 아이들이 건전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2008년 제7회 법조봉사대상을 수상한 이 검사는 “앞으로도 소년범들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더불어 자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우며 그들 앞에 놓인 인생의 마라톤을 함께 뛰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사는 동안 열심히 행복과 아름다움을 나누다보면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조금 덜 후회하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제가 꿈꾸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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