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재스민 혁명, 어디까지 번지나

강대국 이해 얽힌 중앙아시아가 차단벽 될 것

  • 글·게오르기 볼로신| 센트럴아시아코카서스애널리스트 카자흐스탄 주재기자 번역·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입력2011-03-21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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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불과도 같은 혁명의 기세는 과연 유라시아 대륙으로 번지게 될까. 중동 독재정권들의 연속적인 붕괴를 목도한 국제 사회는 불안과 기대가 엇갈리는 시선으로 향후 상황을 가늠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넘어 중국과 북한도 영향을 받게 되리라는 관측이 있는가 하면, 중앙아시아가 방어벽 노릇을 할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찮다. 소련 붕괴로 독립한 이래 권위주의 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상황이 다음 단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 카자흐스탄에서 장기간 체류해온 전문 언론인이 이들 국가의 독재정권 실태와 혁명 가능성을 타진한 글을 영문계간지 ‘글로벌 아시아’ 2011년 봄호에 기고했다. 전문을 번역, 게재한다. <편집자>
    지난 1월 튀니지 시위대가 23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왔던 진 엘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을 한 달간의 시위 끝에 권좌에서 끌어내렸을 때만 해도, 사태가 중동 전체를 뒤덮을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서방세계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이들의 예상을 빗나갔다. 중동 전역에 걸쳐 민중봉기가 확산되면서 예멘, 요르단, 바레인, 알제리, 모로코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향후 닥쳐올 상황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제 이러한 현상은 다른 국가의 비(非)민주 정권에도 심각한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리비아의 유혈사태는 그들의 미래가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가장 압제적인 정권도 하루아침에 심각한 위기에 내몰릴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와중에 서방세계는 이렇다 할 개입에 나서지도 못했고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정확히 예측하지도 못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살펴보면 혁명의 불길이 번져나갈 다음 후보지는 분명 중앙아시아다. 유라시아 대륙 심장부에 위치해 육지로 둘러싸인 이 지역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다섯 개 나라로 구성돼 있다. 일단의 독재자들이 자리 잡은 이들 국가의 야당 세력 사이에서 평화적 혁명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이들은 반독재의 물결이 이제 곧 국경을 넘어 들어와 정권을 몰아낼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러나 중앙아시아가 중동과 흡사한 혁명 열기를 맞게 될 거라고 단언하기에는 너무 많은 차이점이 있다.

    군사적 요충, 에너지 공급처

    혁명이나 쿠데타가 일어나면 그 파장이 이웃국가로 금세 퍼지는 중동과 달리 중앙아시아 지역은 세계 정치무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그렇듯 고립된 위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에 이들 지역이 지닌 의미는 심대하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으로 대표되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국가들에도 안보상 중요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선 미국에 중앙아시아는 자신들의 정치적·군사적 계획을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은 물론 남쪽의 페르시아만까지 통하는 지리적 연결로이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에 있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긴요한 에너지 공급처다. 특히 최근 수년간 러시아가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에너지를 정치적 협상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중요성이 한층 커졌다. 러시아와 중국에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이데올로기와 마약 밀매가 전파될 우려가 있는 통로이자 에너지 안보와 핵 확산 방지에 필수적인 지역이다. 이란, 터키, 인도 등도 이 지역과 관련해 별도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정권 교체나 부패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자주 불거진 것에 반해, 그동안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내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움직임을 끈질기게 차단해왔다. 2005년 무려 2000명의 사망자를 내며 강제 진압된 우즈베키스탄 안디잔의 민중봉기가 대표적이다. 미국과 EU는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과도한 진압을 강력히 비판했지만,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카르시-카나바드의 미 공군기지를 폐쇄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의 대미(對美) 협력을 대폭 축소하는 조치로 응수했다. 이후 우즈베키스탄과의 협력관계를 복원하길 원한 미국은 비판적인 어조를 상당부분 누그러뜨려야 했다.

    당시 EU가 취했던 경제제재 역시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2009년 10월 해제됐고, 2011년 1월 카리모프 대통령의 벨기에 브뤼셀 방문 당시에는 유럽위원회 위원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 직접 환대에 나서야 했다. 이러한 호의적인 태도에 카리모프 대통령은 안디잔 사태 이후 폐쇄됐던 EU 대표부를 수도 타슈켄트에 설치하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행보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가 전통적으로 지역 내 국가에 대한 지원을 통해 현상 유지 정책을 선호해왔음을 감안하면, 이들이 중앙아시아 동맹국의 현재 집권세력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새로운 세력 가운데 후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렇듯 중앙아시아의 민주화 요구는 두 개의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해당 국가 내부의 권력엘리트들이 첫 번째고, 자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를 방조하는 주변 강대국들의 행동방식이 두 번째다. 이 이중의 보호막이 지역 내 독재정권들의 장수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중동 국가들이 내부 세력 갈등과 외부세력 개입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려온 것과는 사뭇 상황이 다르다.

    복잡한 관계망이 독재 보호

    얽히고설킨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중앙아시아와 주변국들 사이에는 두 개의 주요 지역안보기구가 구성돼 있고, 경제통합보다는 군사 분야의 협력이 훨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 의미 있는 사실상 유일한 협력조직은 2010년 6월 시행된 러시아 주도의 관세 연합이지만 그마저 중앙아시아에서는 카자흐스탄만이 가입해 있다. 군사협력의 경우 전통적으로 중립노선을 취해온 투르크메니스탄을 제외하고는 모든 중앙아시아 국가가 어떤 형태로든 지역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러시아가 이끄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와 중국이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는 역외 국가의 군사공격뿐 아니라 테러리즘, 극단주의, 분리주의 등 모든 잠재적 위협요소를 방어하는 체제로 그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기구가 역내 국가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질 경우 어떤 형식으로든 개입해 민주화를 추동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오히려 중앙아시아 국가에 이집트식 위기가 닥칠 경우 CSTO나 SCO가 거꾸로 이를 봉쇄하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기구의 회원국들이 모두 인화성이 엄청난 혁명운동의 불꽃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키르기스스탄에서 벌어진 바키예프 정권 붕괴는 이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리트머스 시험이었다. 수천 명의 소수 우즈벡인이 키르기스스탄 폭도들에 의해 학살당한 남부에서의 폭력사태와 관련해 많은 이가 우려를 표명했지만 CSTO나 SCO 모두 이 사태에 개입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당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남부 키르기스스탄에서 벌어진 인종 간 충돌은 군사개입 위협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이끄는 안보기구가 해당 국가의 소요사태에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2005년 전임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좌에 오른 바키예프의 쿠데타는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이로 인해 키르기스스탄의 대(對)주변국 관계에 특별한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당시의 지배적인 관측과 달리 바키예프는 그리 친미적인 성향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바로 그 바키예프를 몰아낸 지난해 민중봉기 역시 주변국들에 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념적 성향이 아니라 극심한 빈곤 때문에 거리로 나온 국민들은 외교관계가 변화할 정도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유럽 국가들로 구성된 기구도 마찬가지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 가입한 카자흐스탄은 2010년 의장국을 맡을 정도로 활발히 참여하고 있지만, 비슷한 시기 미국과 EU의 직접적인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2012년과 2017년 대통령선거를 건너뛰자는 국가 규모의 캠페인을 진행한 바 있다. 당시 유럽 국가들과 OSCE가 보여준 무관심한 행보는 이들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에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거듭되는 공언은 자신들의 노골적이고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 실리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연막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약한 시민사회의 한계

    더욱이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이 가진 민주주의 경험은 극히 제한적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 독재정권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많은 국민이 다양한 시민운동에 활발히 참여해왔고, 극보수 성향에서 극진보 성향까지 다양한 정당이 존재했다. 여기에 해외 여러 기관의 재정적 지원과 원조를 바탕으로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지도부의 풍부한 학식이 합쳐져 변혁이 피어날 환경이 조성됐던 것이다. 많은 시민이 정치적 염원보다는 사회부조리에 대한 불만 때문에 시위에 참여했다 해도 이들을 조직화하고 교육시킨 것은 분명 민주화 이후 사회상에 대한 자각을 품고 있던 그룹이었다. 중앙아시아에도 민주화를 향한 정치적 동인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거나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현재 각국의 정치상황은 심각하다. 타지키스탄은 극심한 빈곤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지도자들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전 대통령의 추종세력들로 인해 고통 받고 있고, 카리모프 정권의 우즈베키스탄은 2005년 안디잔 대학살 당시 페르가나 계곡에 거주하는 극빈층들의 열망을 가혹하게 짓밟은바 있다.

    상대적으로 덜 폭압적인 편이라는 카자흐스탄에서도 최근 정부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고 있으며, 키르기스스탄은 여전히 혁명 이후의 혼란 정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들 5개국은 모두 권력에 관해 공통의 인식을 갖고 있다. 독재자들이 가신들과 친족들로 이뤄진 울타리 안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 지위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중동에서 진행 중인 혁명의 물결을 지켜본 많은 이가 장기 독재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한계를 넘어서면서 민중봉기가 불가피해진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불가피한 흐름이었다면 짐바브웨의 폭압적인 정권은 왜 붕괴되지 않는 것일까.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자체 통화가 사라졌고 국민은 하루 1달러로 버티고 있지만 무가베 정권은 여전히 건재하다.

    결국 이론의 한계는 명백하다. 수십 년간 독재정권이 유지돼온 나라들 가운데 리비아와 튀니지, 이집트의 체제가 상대적으로 허약했을 뿐이고, 중앙아시아는 이 나라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더욱이 많은 중앙아시아 국가의 통치자들은 혼란을 무기 삼아 위험에 노출된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강고히 하고 있다. 여기에 강대국들 사이의 이해관계 다툼, 평화적 변혁을 이끌어야 할 기층 민중조직의 유약함 등이 결합되어 현상 유지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독재정권 유지가 결국 이들 나라의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과정을 주목한다’는 기조하에 아시아 지역 주요 현안에 관한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들의 공론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웹사이트는 http://globalasia.or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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