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감옥 가거나 유배되거나

  • 입력2011-03-25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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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박원순<br>●1956년 경남 창녕 출생<br>●경기고, 서울대 법대 중퇴, 영국 LSE 디플로마<br>●대구지검 검사,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br>●‘세기의 재판’‘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나눔’ 등

    현재를 사는 것도 버겁다

    내 수첩은 늘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조찬 약속에서부터 저녁 늦게까지 거의 30분이나 한 시간 단위로 약속이 잡혀 있다. 밤 9시나 10시는 돼야 내 책상에 비로소 앉을 수 있다. 그때 나는 밀린 e메일을 정리하고 자료를 챙기고 내일 일정을 검토한다. 그리고 밤늦게 집에 가거나 아니면 그냥 사무실에서 잠깐 새우잠을 자고 그 다음 조찬에 나간다.

    그러니 나는 내 남은 인생을 생각하거나 이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럴 여유도, 사치도 부리기가 힘들다. 하루하루, 아니 한 달 후의 미래를 생각하기 쉽지 않다.

    감옥 또는 유배

    그런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내기가 참 힘들다. 강제로 쉬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나의 일상에서 해방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뭔가 사건이 벌어져 도저히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말이다.



    그 강제적인 조치란 두 가지다. 바로 감옥 가거나 유배되는 것이다. 나는 과거 학생 시절 시위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잠깐 감옥을 간 적이 있다. 그 당시 4개월의 짧은 투옥생활 중에서도 나는 수백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내 나이 또래의 어린 소년수들과 소통하고 친밀해져 세상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다. 감옥은 사실 거의 강제적인 휴식과 학습을 위한 완벽한 공간이다. 이후 나는 감옥을 문득문득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감옥을 가기란 참 힘들다. 세상이 그만큼 좋아진 것이다.

    그 다음 방법은 조선시대처럼 유배를 당하는 것이다.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참 부러워했다. 다산 선생은 유배를 가서 수많은 저술을 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어쩌면 다산 선생이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그 주옥같은 시대의 개혁서들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 나라에는 유배제도가 없다.

    과로사가 나의 꿈

    언젠가 내가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를 할 때 연초 전체 간사회의에서 나는 과로사가 꿈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주변 어르신들 중에서 병원에서 수년간 고통을 겪으며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친지들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경우를 흔히 보았다. 나는 그때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다. 참으로 건강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삶의 현장에서 결연하게 쓰러져 누구에게도 누가 되지 않게 가고 싶었다. 사실 요즘 건배사 구호 가운데 ‘구구팔팔이삼사’(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안에 죽는다는 뜻)가 유행이지 않은가.

    삶의 기록

    그러나 혹시 나에게 이 바쁜 일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내게도 시간의 여유가 조금 생긴다면 나는 내가 경험하고 목격한 시대와 사건, 내 삶의 궤적을 정리하고 가고 싶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기나긴 삶의 체험과 독특한 경험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나 역시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굴곡과 좌절, 전환과 변화를 경험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살았던 시대, 내가 맞닥뜨렸던 사건도 적지 않아 언젠가는 그런 것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혀왔다.

    나는 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책을 쓰라고 권유해왔다. 기억은 쉬 사라진다. 그 체험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정리해 다음 세대, 다음 사람에게 넘겨줄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제한적이고 불명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표돼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그 한계와 잘못조차 시정되고 또 그 다음 세대와 사람에게 하나의 지표가 되고 발자국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앞에 걸어갔던 선배 세대의 기록을 발자국 삼아, 등대 삼아 진전해온 것이 아닌가.

    활동과 기록의 간격

    나는 1970년대 학생운동가에서,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다시 1990년대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가로, 그 다음 2000년대에는 아름다운재단·아름다운가게·희망제작소 일로 숨 가쁘게 활동해왔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교유하고 인연을 맺었다. 수많은 사건을 목격하고 대응하고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름대로 메모하고 글 쓰고 책을 내왔다. 나는 해마다 책을 몇 권씩 내서 지금은 20여 권이나 된다.

    인권변호사 시절의 기록만 해도 ‘국가보안법 연구’ 3권, ‘야만시대의 기록’ 3권, ‘인권변론사’등 모두 8권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 모든 것을 기록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아직도 검찰이나 법원에 관한 이야기, 법치주의에 관한 내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그뿐인가. 참여연대 시절만 해도 나는 ‘반부패정책’ ‘세상은 꿈꾸는 사람의 것이다’ 등 몇 권의 책을 냈지만 여전히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이 많다. 아름다운재단이나 아름다운가게와 관련해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나눔’등의 책을 냈지만 내가 내고 싶은 것에는 훨씬 못 미친다.

    사실 나는 끊임없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면서 언젠가는 책을 내야지 하는 것이 수십 권이 넘는다. 그러나 늘 나의 삶은 바쁘고 정신이 없다. 끝없는 시대적 요구가 나를 밀고 당겨 나는 생각하고 있는 집필의 주제를 도저히 실천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해본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면 역시 감옥을 가거나 유배를 가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떻게 하면 나는 감옥을 가거나 유배를 갈 수 있을까. 좋은 생각이 있으면 연락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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