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김원곤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어학시험 · 누드사진집 · 소녀와 여행… 일탈의 미학

  • 입력2011-03-25 16: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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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곤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김원곤<br>●1954년 경남 마산 출생<br>●경남고, 서울대 의대 박사<br>●대한흉부외과학회 총무, 現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br>●‘Dr.미니어처의 아는 만큼 맛있는 술’외

    버킷 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영화에서처럼 실제 절박한 상황이 눈앞에 닥치지 않는다면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 사항의 나열에 그치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시절에 이런 리스트를 만든다고 상상해보면 애절한 마지막 소망보다는 웅대한 인생의 목표들이 먼저 떠오르게 마련일 것이다. 나이가 웬만큼 든 경우에도 요즈음 같은 장수 시대에는 실생활의 끈을 놓고 자신의 결심을 선뜻 실천에 옮기기는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생의 어느 순간에 이런 종류의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은 지난 삶을 의미 있게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여정을 더 가치 있게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부탁받은 버킷 리스트 작성은 개인적으로 사뭇 은근한 흥분감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버킷 리스트는 일종의 긍정적 일탈에 관한 목록으로도 볼 수 있다. 만일 과학자가 죽기 전에 반드시 노벨상을 받아야 하겠다든지, 아니면 어떤 정치가가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다라고 한다면 이는 야심 찬 개인적 목표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버킷 리스트의 범주에 넣기는 힘들다.

    일탈이라고는 하나 사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일상에서 벗어나 유쾌하게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있을 것이다. 다만 직장과 가정의 틀을 벗어날 용기와 확신이 없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에 관심이 있었다. 다만 성격 때문인지 현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일탈은 늘 두려웠다. 그래서 ‘현실을 떠나지 않으면서 낭만을 추구한다’는 언뜻 그럴듯하지만 다소 치기 어린 생각에 오랫동안 사로잡혀왔다. 이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하되 공부만을 하지는 않는다’는 엉뚱한 소신 아래 운동과 각종 서클 활동에 열중하다 롤러코스터 같은 성적의 부침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런 성격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든 교수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아 지금은 어느 정도 외부에도 알려진 각종 취미생활과 여가 활동으로 이어졌다. 전형적인 임상 흉부외과의사로 활동하다 불현듯 연구에 전념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려 10년 이상 임상 업무를 접고 오로지 연구만 한 적이 있던 것도 이런 나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일찌감치 일탈의 미학에 심취하다보니 정작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쉽지 않은 느낌이 있다. 영어를 제외한 4개 외국어 공부에 발을 잘못 들여놓아 매일매일 신물이 나도록 고생하고 있고, 같은 나이 또래로는 웬만큼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운동에도 빠졌다. 세상의 모든 술을 섭렵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미니어처 술 수집가로서 홈페이지까지 운영하며, 또 여느 술 전문가 못지않게 관련 글도 쓰고 있다. 영화 감상과 역사 공부를 겸한 여행 역시 오랫동안 빼놓을 수 없는 여가 활동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차이일 뿐 만일 영화에서처럼 길어야 1년 정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찌 죽기 전에 반드시 이루고 싶은 추가 일탈의 아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나의 버킷 리스트에 수록된 4가지 항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 공부하고 있는 4개 외국어 즉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의 고급 어학능력 자격시험에 도전해 모두 합격한다. 시험을 통한 학습 동기의 고취는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된 효율적인 공부 방법이다. 또 지난 기간 해왔던 공부 방법의 지속에 따른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그리고 실제 어학 능력에 대해 궁금해 하는 주변사람들에게 복잡한 설명 없이도 보여줄 것이 생기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시도인 셈이다. 다만 지난 수십 년간 시험 문제를 내기만 했지 시험을 쳐본 적은 없는 입장에서 과연 바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조심스럽다. 게다가 어떤 구체적인 의무감 없이 진행되는 도전이기 때문에 정신적 해이가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붙어도 그만, 떨어져도 그만인 객관적 상황 속에서 사서 하는 고생의 약속을 버킷 리스트 공표를 통해 애써 구속받고 싶다.

    김원곤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둘째, 누드사진집을 만든다. 2년 전에 우연한 일이 동기가 되어 웃통을 벗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어떻게 하다 한 일간지에 소개되면서 일약 몸짱 교수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런데 실제 운동만큼 나의 생활을 오랫동안 지배한 것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럭비를 한답시고 으쓱댔으며, 의대 시절 방학 때는 보디빌딩에 유도 그리고 태권도까지 무려 3개의 도장을 돌아다니며 운동에 빠져 사범대 체육과에 가라는 주위의 농담 섞인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 그리고 전공의 시절에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장거리 달리기에 나서 지금도 서울대병원에서 당시 양재동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의 새벽 왕복 달리기는 사실의 진위에 관계없이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제는 누드사진집을 한번 내고 싶다. 물론 요즈음 유행하는 연예계 스타들의 전문 작품집에는 비견조차 할 수 없겠지만, 나름대로 이를 계기로 몸을 더 열심히 가꾸어도 보고 가능하다면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도 싶다. 그리고 출판된 사진집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비매품으로 은밀히 돌릴 예정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이름이 누드집이 아닌가.^^

    셋째, 술집에서 일주일간이라도 근무해본다. 술은 오랫동안 나의 친구였다. 술의 특성이 그러한 까닭도 있겠지만 가까이 한 기간이 오래된 만큼 희로애락의 기복이 어찌 만만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는 “알코올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로부터 얻었다”라는 윈스턴 처칠의 입장에 서고 싶다. 사실 그간 단순히 술을 즐겨 마시는 것을 떠나 술에 관한 많은 글을 쓰고 책까지 출간했다. 앞으로도 한두 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다. 이런 나로서는 술집에서 직접 한번 바텐더로 근무해보는 것은 하나의 낭만이다. 물론 직업으로서의 바텐더는 자신도 없고 나의 영역도 아니다. 다만 언젠가 어떤 형식으로든 짧게라도 꿈을 이룰 것이다. 술집 벽은 모아둔 미니어처 술병으로 장식하고 스코틀랜드식 남성용 치마(타탄으로 만든 킬트)라도 앞에 두르고 손님들과 환담을 나누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나를 설레게 한다. 손님들과의 이야기는 천일야화같이 은근해도 좋고 간혹 인생철학을 담은 고담준론이라도 무방할 것이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여행을 할 것이다. 이 항목은 실제 영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영화에서 모건 프리먼은 잭 니콜슨이 쓴 리스트에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라는 항목을 보고 비웃으며 묻는다. “이런 소녀를 어떻게 만난다는 것이냐?” 그러자 잭 니콜슨은 무도회에서 프러포즈하겠다고 말한다. 일견 무모한 계획처럼 보였던 이 소원은 영화 종반부에서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던 예쁜 어린 손녀와 입맞춤을 하는 장면으로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나는 한걸음 나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녀와 여행을 떠나고 싶다. 바닷가 파도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손녀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예쁜 조개를 손에 잡고 나에게 달려오는 손녀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손자와의 여행도 이에 못지않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앞의 4가지 항목과는 달리 마지막 소원은 영화에서처럼 1년 내의 기간으로는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아직 결혼조차 하지 않은 두 아들을 둔 입장에서 바닷가에서 뛰어노는 손자, 손녀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형국이 아니겠는가. 버킷 리스트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을 주실 것을 하늘에 빌며 일상을 겸허하게 대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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