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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②

위스키 증류소 세운 조지 워싱턴

위스키稅 부과로 ‘위스키반란’…대통령으로서 직접 군 지휘해 제압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위스키 증류소 세운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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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증류소 세운 조지 워싱턴

마운트 버넌에 있는 조지 워싱턴 생가 지하실 모습.

이상이 조지 워싱턴의 간단한 이력이다. 생전에 미국 건국에 대한 그의 영향이 컸던 만큼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부터 핵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에 이르기까지 그를 기리는 흔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군사, 정치적 인물 조지 워싱턴이 위스키라는 술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개척지 주민을 자극한 위스키稅

조지 워싱턴과 위스키와의 첫 번째 인연은 역사적으로 ‘위스키반란(Whiskey Rebellion)’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여진 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1789년 미 연방헌법에 의해 조지 워싱턴을 수반으로 한 첫 연방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초대 재무장관에 취임한다. 그는 건국 초기에 연방정부가 떠안은 막대한 빚을 해결하기 위한 세원(稅源) 확보에 고심했다. 수입관세는 이미 충분히 높다고 생각한 그는 내수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하고, 그 첫 대상으로 미국 국내에서 증류되고 있는 위스키를 선택했다. 해밀턴은 위스키에 대한 세금이 일종의 사치세로 조세 저항이 가장 작을 것으로 판단했고, 실제 위스키 세금을 ‘악행세(sin tax)’의 하나로 생각하는 일부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도 있었다.

그러나 1791년 정식으로 법제화된 위스키세는 곧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신생 미국의 서쪽 개척지를 이루고 있던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거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의 농부들은 소규모 위스키 증류소를 운용하면서 부수입을 올렸다. 위스키 증류는 무거운 곡물을 산맥을 넘어 동부로 운반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수익성도 높았다. 게다가 현금이 귀했던 개척지의 사정상 위스키는 거의 현금과도 같은 구실을 했기 때문에 현지 농부들은 위스키세를 사치세라기보다는 일종의 소득세로 간주했다. 동시에 새롭게 제정된 위스키세가 동부의 대규모 위스키제조업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위스키세는 생산량에 따르거나 고정세율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게 돼 있었는데, 동부의 대규모 증류업자들은 고정세율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개척지의 업자들에 비해 훨씬 적은 세금을 내게 됐다. 동부의 증류업자 대부분은 신설 위스키세에 찬성 입장을 보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당시 서쪽 개척자들은 연방정부에 불만이 많았다는 점이다. 개척지에서 인디언과 벌이는 전투 상황도 여의치 않아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미시시피 강 운항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대처가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스키세 부과는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듯이 서쪽 개척지 거주민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위스키세 발표 이후 서부 펜실베이니아 주를 중심으로 한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개척지 거주민들은 여러 차례 집회를 열어 위스키세에 저항했다. 이런 와중에 1791년 9월 주민들이 위스키세 세금징수원을 타르와 새털로 덮어씌운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영장을 들고 간 관리마저 같은 수모에 채찍질마저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개척지 거주민들은 한편으로는 위스키세의 철폐를 위해 행정적으로도 노력했다. 그 결과 1772년 5월에는 세금 감액을 주 내용으로 한 수정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지만 서부 거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금징수원 저택 공격한 위스키반란

사태가 갈수록 꼬여가면서 서부 거주민들 집회는 점점 과격파가 주도하게 됐고, 사태를 걱정한 정부에서는 해밀턴 재무장관 등 강경파의 건의에 따라 1792년 9월15일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으로 세금 저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정부 성명에 관계없이 위스키세에 대한 저항은 계속됐다. 저항은 특히 서부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격렬하게 나타났는데 존 네빌이라는 지역 세금징수관의 허수아비를 불태우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한 세금징수관을 총으로 위협해 직책을 그만두게 만들기도 했다.

위스키반란은 1794년 정점에 다다랐다. 그해 5월 연방보안관 데이비드 레녹스는 위스키세를 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장을 전달하기 위해 서부 펜실베이니아로 향했다. 지역 세금징수관 존 네빌의 안내로 영장 전달은 7월까지 큰 사고 없이 진행됐다. 그러던 중 7월16일 피츠버그에서 남쪽으로 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네빌의 농장을 총으로 무장한 과격파 용병들이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이들의 수는 600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지역 유지이자 재력가인 네빌의 집은 사전에 요새화돼 있어 쉽게 진입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근에서 온 10명의 미국 연방군까지 합세해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쌍방 간 총격전이 벌어지고 소수의 희생자도 발생했다. 이 중 반군 지도자인 맥팔레인(Major James McFarlane)의 죽음은 위스키반란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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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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