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 하종대│동아일보 사회부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1-04-21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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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3월5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후진타오 국가주석(앞줄 가운데)과 원자바오 총리(오른쪽)가 참석한 가운데 개막됐다.

    중국의 차세대 지도부, 즉 제5세대 지도부의 선두 경쟁은 기본적으로 쌍두마차 구도다. 시진핑(習近平·58)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국가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56) 국무원 부총리가 1년 뒤에는 각각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를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는 당 권력서열상 각각 1, 3위지만 총리의 실질적인 권력은 권력 2위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을 능가한다. 현재 두 사람은 중국 최고지도부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 가운데 유일한 50대 인사다. 중국의 차세대 지도부의 핵심은 이들 2명일 것이라는 예상은 중국에서 이미 일반화한 지 오래다.

    이들 5세대가 퇴진하는 2022년엔 제6세대 지도부가 등장한다. 5세대가 1950년대 출생자인 데 비해 6세대는 1960년대 출생자들이다. 5세대 지도부 선두경쟁이 쌍두마차 구도라면 6세대 지도부 경쟁은 삼두마차 구도다. 이번에 소개할 인사는 이들 세 명이다.

    삼두마차 선두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역시 후춘화(胡春華·48)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당 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이다. ‘리틀 후진타오(胡錦濤)’로 불리는 그는 소수민족이 사는 가난한 오지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성실함과 노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쳐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최연소 기록 제조기’이기도 하다. 중국 정계에서는 덩샤오핑(鄧小平)이 후진타오를 최고지도자로 낙점했듯, 장쩌민(江澤民)은 시진핑을 낙점했고, 후진타오는 후춘화를 낙점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격대낙점(隔代落點) 전통이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음으로 쑨정차이(孫政才·48) 지린(吉林)성 당 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이 있다. ‘중국 옥수수 밀식(密植)재배의 대가’로 불리는 그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에 베이징(北京) 지역 옥수수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무려 두 배 이상 끌어올림으로써 중국의 식량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와 함께 주목할 인사는 저우창(周强·51) 후난(湖南)성 당 서기 겸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이다. 삼두마차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1960년대 출생자 가운데 첫 성장이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현재 중국 중앙지도부의 부장 또는 지방지도부의 성장급 가운데 제6세대 인사는 네 명이 더 있다. 장칭웨이(張慶偉·50) 중국상용항공기유한공사 이사장과 루하오(陸昊·44)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 누얼 바이커리(努爾 白克力·50) 신장(新疆)위구르족 자치구 주석, 쑤수린(蘇樹林·49) 푸젠(福建)성 대리성장이다.

    이들 7명 가운데 저우창 후난성 서기와 장칭웨이 중국상용항공기유한공사 이사장은 약 9년 전인 2002년 가을부터 장관급(부장급) 이상 직책을 맡을 수 있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었다. 또 후춘화 네이멍구 자치구 서기와 쑨정차이 지린성 서기는 제17차 당 대회가 열린 2007년 가을 당 중앙위원에 당선됐다. 반면 누얼 바이커리 신장위구르 자치구 주석과 쑤수린 푸젠성 대리성장은 2007년 가을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당선됐다. 루하오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는 최연소 부장급 인사지만 아직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2010년 현재 1960년대에 출생한 제6세대 지도부 인사 중 차관급(부부장급) 이상 인사는 100여 명이다. 이들은 제20차 당 대회가 열리는 2022년 가을부터 중국을 본격적으로 이끌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두 지방으로 하방되는 등 큰 시련을 겪었던 제5세대 지도부 인사와는 달리, 이들은 모두 덩샤오핑의 집권 이후 부활한 대학입시와 개혁개방의 혜택을 집중적으로 받은 세대다. 따라서 이들은 열 살 가까이 많은 제5세대 지도부 인사와 함께 대학을 다닌 경우가 적지 않다. 전 세대인 5세대 지도부와 달리 보다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전체적으로는 공청단 인사가 많다. 제6세대 선두주자 7명 가운데 저우창과 후춘화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역임했고 루하오는 현재 이 직책을 맡고 있다.

    ▼ 후·춘·화

    6세대 최선두 ‘리틀 후진타오’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6세대의 선두로 나선 리틀 후진타오(胡錦濤)’로 불리는 후춘화는 2010년 1월 네이멍구 자치구의 당 서기와 자치구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됐다. 2006년 11월 중국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취임한 뒤 2008년 4월 허베이(河北)성 부서기와 대리성장, 2009년 9월 허베이성 성장에 이은 초고속 승진이다.

    사실 ‘최연소 기록’은 그의 장기 가운데 하나다. 1990년 2월 만 27세도 안 된 나이에 부청장급인 공청단 시짱(西藏)자치구 부서기에 올랐다. 1992년엔 만 29세에 청장급인 시짱자치구 공청단 서기, 1997년 12월엔 34세의 나이로 부부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임명됐다. 모두 직급상 최연소 기록이었다. 2006년 11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임명됐을 때도 최연소 부장(장관)급이었다.

    후 성장이 태어난 후베이(湖北)성 우펑(五峰)현은 평균 해발고도 1500m의 산악지역으로 주변이 모두 투자(土家)족의 소수민족 자치구역이다. 오지 중의 오지로 외부와는 사실상 단절돼 사는 지역이다. 그 역시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무신은커녕 헝겊신도 없어 짚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 각각 4㎞와 6.5㎞ 떨어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해져 닳은 짚신만 한 무더기다. 그의 발바닥엔 당시 동전 두께의 굳은살이 항상 박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궁벽한 생활은 그를 좌절시키기는커녕 그의 의지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어줬다. 학교 성적 역시 항상 단연 1위였다. 대학입시가 부활한 지 3년째이던 1979년 여름 그는 우펑현 수석으로 베이징대 중문과에 합격했다. 우펑현에서 베이징대 입학생이 처음 배출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학비는 물론 베이징에 올라갈 여비조차 없었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학 입학 직전 여름 방학 내내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강모래를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한 달 넘게 한 막노동으로 그가 번 돈은 100위안. 당시로서는 매우 큰돈이었다.

    공사판에서 번 돈과 아버지가 친인척에게서 꾼 돈으로 겨우 학비와 여비를 마련해 베이징에 올라왔다. 16세의 어린 나이였던 그는 학교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하지만 성적은 항상 수위를 유지해 졸업할 때 ‘우수졸업생’ 상장을 받았다.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탁월한 성적 때문에 당초 그는 베이징에 남을 수 있었다. 실제로 갈 자리도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벽촌오지인 티베트 근무를 자원했다. 1978년 7월18일 졸업식에서 그는 다른 동료 졸업생 2명과 함께 티베트로 가는 소회를 발표했다. 자신이 티베트를 선택한 이유에 관한 설명이었다.

    “중국은 여러 민족이 사는 국가입니다.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은 전 국토의 60%에 달합니다. 제 고향도 소수민족 자치지역입니다. 만약에 개혁개방과 현대화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면 나 역시 현재 외부와 격리된 산간오지에서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족의 현대화는 중화민족의 현대화도 아니요, 중국의 현대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1983년 8월 티베트에 도착한 그는 공청단 시짱자치구위원회 조직부 간부를 시작으로 시짱청년보와 시짱호텔 근무를 거쳐 시짱자치구의 지방과 중앙에서 무려 19년을 근무했다. 보통 중앙의 요직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오지 근무 경력을 이용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19년간 티베트의 7개 지급(地級)시 가운데 6개를 현장 시찰했고, 티베트의 75개 현·시 가운데 50개를 누비고 다녔다.

    해발고도 3500~5000m에 이르는 시짱자치구 가운데서도 가장 오지는 바로 중국에서 유일하게 자동차도로가 없는 모퉈(墨脫) 현이다. 하지만 그는 한번 갔다 오는 데만 15일이 걸리는 이곳을 끝내 직접 방문해 현지인들의 생활을 직접 살펴봤다. 사람들은 그를 ‘완전한 티베트인’이라고 불렀다. 혈통만 한족이지 티베트어에 능통하고 티베트 춤을 잘 추며 칭커(靑·#53886;)주로 불리는 티베트 술도 잘 마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지에서 처박혀 살던 그는 2006년 말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발탁되면서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이러한 초고속 승진의 배경에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후원이 있었다. 후 주석과 그의 인연은 후 주석이 1988년 시짱자치구 서기로 옮기면서부터다. 후 주석은 당시 시짱자치구 공청단 부서기이던 그를 눈여겨봤고 침착하고 총명하면서도 일처리 능력이 뛰어난 그를 점찍어뒀다.

    1992년 10월 시짱자치구 서기를 그만두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라간 후 주석은 직접 전화를 걸어 시짱자치구의 공청단 서기에 후춘화를 앉힐 것을 부탁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 후춘화는 그해 12월 공청단 시짱자치구 서기로 발탁됐다. 최근의 초고속 승진도 모두 후 주석과의 인연 덕분이다.

    그는 6세대로 분류되지만 사실 5세대로 분류되는 리커창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나 리위안차오(李源潮) 정치국 위원 겸 중앙조직부 부장과 보시라이(薄熙來) 정치국 위원 겸 충칭(重慶)시 서기와 대학 졸업 및 사회 입문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리위안차오와 보시라이 위원은 각각 77학번이고 리커창 상무위원 역시 78학번으로 79학번인 그와 1, 2년 차이다. 이는 문화대혁명 기간 대학입시가 폐지됐다가 77년부터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릴 때 집안 사정은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과 비슷하고 사회에 입문한 뒤 경력은 후진타오 주석과 매우 흡사하다. 산간 오지인 티베트와 공청단에서 오래 지낸 근무 경력이나 성격도 비슷하다. 후 성장은 “후 주석과 함께 근무한 31개월 동안 총명하고 능력 있는 일처리 솜씨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후진타오의 분신’ ‘리틀 후진타오’로 불리는 그가 2022년 6세대 지도부가 출범할 때 어떤 자리에 오를지 주목된다.

    ▼ 쑨·정·차·이

    옥수수 밀식재배의 대가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2010년 1월 중국 지린성 당 서기 겸 지린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에 선출된 쑨정차이 또한 202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제6세대 선두주자로 손꼽히지만, 행정경험이 짧아서인지 그에 대한 소개 자료는 찾기 힘들다. 심지어 중국 관영 ‘신화왕(新華網)’에서조차 그의 경력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중국에서 ‘쑨 박사’ 하면 여전히 ‘옥수수 밀식재배의 대가’로 통한다. 1980년 라이양(萊陽)농학원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1984년 곧바로 베이징시 농림과학원에 석사 연구생으로 들어갔고, 이 곳에서 중국 옥수수 연구의 거두(巨頭)인 천궈핑(陳國平) 교수를 사사했다. 천 교수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베이징시 옥수수 고문단 단장으로 일하면서 베이징시의 무(畝·약 1마지기) 당 옥수수 수확량을 1979년 229㎏에서 1996년 481.6㎏으로 끌어올렸다. 쑨 부장은 이곳에서 밀생(密生) 옥수수의 생장 과정을 집중 연구했다. 똑같은 면적에 많은 옥수수를 심으면서도 한 그루당 수확량이 줄어들지 않도록 연구한 것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산둥(山東)성 룽청(榮成)시 후산(虎山)진 우룽주이(五龍嘴)촌이다. 산둥성에서도 한국에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그가 어렸을 적 이 지역의 생활수준은 다른 어느 곳 못지않게 열악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숙식하면서 중고교를 다닌 쑨 부장은 주말에 집에 갈 때도 학교에서 모아둔 식량을 짊어지고 갔다 남보다 일찍 돌아오곤 했다. 집에 가면 자기가 먹을 양식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험성적은 항상 상위였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줄곧 학급의 반장을 했다. 당시 체육선생이었던 장수제(張樹皆) 교사는 2007년 초 ‘웨이하이(威海)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공부도 잘했고 어렸지만 어른스러웠으며 친구들과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어린이였다”고 그를 회고했다.

    그는 현재 우룽주이촌에서 유사 이래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1980년 고교 졸업 땐 그를 비롯한 겨우 3, 4명만이 대학에 입학했다. 석사 연구생 시험을 앞두고 그는 일주일 열흘씩 쉰다는 춘제(春節)에도 집에 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공부하는 사람이 혼자여서 너무 추워 외투를 입고도 담요로 몸을 감고 공부했다고 그의 대학동료들은 전했다.

    그가 옥수수 대가로 클 수 있었던 데는 대학시절 지도교수의 엄한 질책이 큰 밑거름이 됐다. 라이양농학원 재학 시절 밀 품종실험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실험 밭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몰라도 분필이 없어진 것. 이미 실험 밭은 밀을 심느라 모두 갈아엎은 상태였다. 보통 교수 같으면 대부분 그냥 넘어가는 게 예사였다.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하지만 그의 지도교수는 달랐다. 분필이 밀의 발아와 생장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러면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분필을 찾아 꺼내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진땀을 흘리며 실험 밭 흙을 뒤집은 끝에 결국 분필을 찾아냈다. 그가 학술적으로 옥수수 재배에 조예가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 이외에도 지도교수의 이런 엄격한 과학적 학문 연구의 태도가 그에게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서 이뤄진 것이라는 게 그와 10년간 함께 공부하고 연구한 동료 교수의 전언이다.

    최근 발간된 우룽주이촌의 촌지(村誌)는 “보검의 칼날은 스스로 날카롭게 연마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고 매화의 향기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만 하는 것”이라며 “쑨 부장의 성공은 지난한 땀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촌의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적었다.

    성실하고도 치밀하며 질박한 그의 연구 태도는 곧바로 대학 지도교수들의 신임을 받았다. 베이징시 농림과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년간 영국 유학을 갖다오자마자 농림과학원 작물소 연구소 부주임에 그를 앉혔다. 이어 1993년엔 서른의 나이로 농림과학원 토비(土肥)연구소 소장으로 승진했고 얼마 안 돼 과학원 부원장을 거쳐 당위 부서기에 임명됐다.

    옥수수 연구에만 몰두하던 그에게 1997년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34세이던 그는 농림과학원을 떠나 베이징시 순이(順義)현의 부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대리현장, 현장, 구장을 거쳐 2002년 5월 순이구 당 서기 자격으로 베이징 시 위원회 상무위원에 당선됐다.

    이렇듯 쑨 서기는 중국에서 몇 안 되는 학자 출신 고위 관료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우레같이 맹렬하고 바람처럼 신속하게 일처리를 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현과 구의 경험만 가진 관리로서 2006년 12월 중국 농업의 최고 책임자인 농업부장에 기용된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가 식량 증산을 독려하고 중국 농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과감한 모험’으로 받아들여졌다. 옥수수 증산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라는 점에서 식량 증산을 획기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볼 수는 있지만, 행정을 맡아본 경험이 지금까지 농업부장에 임명된 사람 가운데 가장 짧다는 점에서 모험이었던 셈이다.

    쑨 서기는 농업부장에 취임하자마자 ▲식량 생산 제고 ▲농민 수입 증대 ▲농업 자주기술 혁신 ▲농산품 안전 확보 ▲농업 서비스 강화 ▲농촌 개혁개방 심화 ▲동물 질병 방역 강화 ▲농민 실질 문제 해결 등 8대 목표를 제시하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식량 생산량 증가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005년엔 전년보다 1455만t 늘었지만 2006년엔 1309만t, 2007년엔 350만t으로 증가분이 줄었다. 농업이 주력인 중국의 1차 산업의 연간 성장률 역시 2~6%로 매년 10% 이상의 고속성장을 계속하는 2, 3차 산업과 크게 차이가 있다. 하지만 3년간의 그의 농업부장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행정 전문가로 10년간 외도하다 다시 자신의 전공 분야로 돌아와 중국의 농업개혁이라는 지난한 임무를 대과(大過) 없이 완수하고 지린성의 최고 책임자로 자리를 옮긴 쑨 부장이 6세대 선두주자 지위를 굳건히 해 11년 뒤에 최고지도부의 핵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저·우·창

    절차 중시하는 6세대 선두주자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6세대 선두 3인방 가운데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저우창 후난성 당 서기 겸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은 2006년 9월 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최연소 성장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당시 중국을 통틀어 1960년대 출생자 가운데 첫 성장이었다. 이어 2010년 4월엔 후난성 당 서기에, 5개월 뒤엔 당 서기 겸 인대 주임에 발탁됐다.

    저우 서기는 후진타오 주석을 수장으로 하는 공청단 출신 가운데서도 핵심 공청단맨이다. 공청단의 최고 수장인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만 무려 8년을 근무했다.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까지 포함하면 무려 11년에 이른다. 단 1년간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지낸 후 주석이나 리커창 상무위원의 5년보다도 재임기간이 길다.

    공청단 근무시절 업적도 탁월하다. 그가 제1서기로 재직하는 동안 공청단은 ‘당이 요구하면 공청단은 행동한다(黨有號召 團有行動)’라는 구호 아래 여러 가지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중국 정부가 1999년부터 대대적으로 전개한 서부대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대학생 서부자원 프로그램’부터 창장(長江), 황허(黃河) 등 오염이 심각한 중국의 주요 강들을 살리는 ‘모친하(母親河) 보호 액션’, 그 외에도 박사복무단, 청년문명호, 청년지원자 프로그램 등 국가를 위한 다양한 청년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국제IT청년포럼, 중국타이다(泰達)생물포럼, 해외학술인 귀국창업주(週) 등 많은 국제협력사업을 새로 만들었다.

    이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공청단 산하의 중국청년여행사를 중국 최대의 여행사로 키워낸 것이다. 2006년 현재 이 회사의 총 자산은 33.3억위안(약 4926억원)으로 웬만한 재벌회사와 맞먹는다. 2006년 상반기 영업수익 역시 11.3억위안(약 1672억원)에 순수입만도 3767만위안에 달한다. 2006년 9월 최연소 성장으로 발탁된 것 역시 후 주석의 핵심 인맥인 공청단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이런 그의 탁월한 능력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이다.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그는 후난성장에 임명되자마자 후난 성 내 55개 행정 및 법 집행기관의 권력리스트를 일반에 공개했다. 또 각급 행정기관은 중요 사업이나 정책은 일반에 공개해 조사와 연구, 전문가 포럼을 거치되 반드시 일반인의 참여 속에 결정하도록 지시했다. 이 같은 조치는 누가 행정의 책임자이고 권한을 가진 사람인지를 일반인이 알고 행정 권력을 감독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정부의 행정효율을 제고하며 관리들의 비리를 사전에 막고 모든 행정을 법 절차에 맞게 처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권력의 양광(陽光) 운행’ 운동으로 불리는 이 조치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2007년 4월 후난성 행정절차조례를 개정했다. 주민의 행정 감독과 참여를 법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이처럼 그가 투명하고도 법에 따른 절차를 중시하는 것은 그의 대학 전공이나 사법부에서 근무한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1년간 고향에서 지식청년으로 농사를 짓다 1978년 충칭에 있는 시난(西南)정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까지 7년간 공부한 그는 1985년 사법부에 배치돼 판공청 부주임, 법제사(法制司) 사장 등 10년 남짓 사법부에서 근무했다.

    학창시절 저우창은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의 고교시절 스승인 저우성(周勝) 씨는 “나이는 어렸지만 학업성적은 매우 뛰어났다”며 “특히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서 어문 실력이 출중했다”고 회고했다. 저우 성장의 어머니는 “명절이나 휴일이 돼도 창은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지 않고 책을 읽었다”며 “고향에서 지식청년으로 농사일을 할 때도 항상 머리맡엔 책을 쌓아두고 읽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공부 욕심은 남다르다. 그의 대학 동료인 중국검찰출판사 위안치궈(袁其國) 사장은 “저우창은 취침을 위해 기숙사 불을 끈 뒤에도 회중전등을 켜고 혼자 공부하곤 했다”며 “그래서 친구들이 이를 빗대 ‘낭잉잉쉐(囊螢映雪·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뜻)’라고 얘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고교를 마치고 농촌에서 일하다가 치른 대입시험에 곧바로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같은 습관 때문이었다. 당시 시난정법대의 법학과는 300여 명의 입학생을 선발했는데 저우창은 당시 17세로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문화대혁명(1966~76) 기간 대학에 가지 못했던 청년들이 동시에 몰리면서 만 15, 16세부터 33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합격했던 것이다.

    “격정과 이상이 충만한 시대였다. 모두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었고 사회에 대한 강렬한 책임감을 느꼈다. 사회 밑바닥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절대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우 성장이 지난해 3월 중국의 한 언론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대학시절을 회고하며 남긴 말이다. 그가 대학 석사과정을 졸업할 때 지도교수였던 진핑(金平) 교수는 그에게 기대를 표시하며 “중국은 대국으로 많은 정치가가 필요하지만 절대로 정객이 돼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후난성에 가자마자 그는 1년 만에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둥팅(洞庭)호의 5급수 수질을 3급수로 크게 개선했다. 후난성 경제가 파탄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폐수를 흘려보내는 236개의 제지공장을 문 닫게 하고 234개 공장의 조업을 중단시킨 결과였다.

    1995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탁된 뒤 이러한 정치적 업적을 배경으로 승승장구해온 그가 2022년엔 최고지도부의 핵심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을지 세인의 눈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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