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미국과 30년 맞짱 뜬 ‘사막의 풍운아’는 왜 흔들리나

‘리비안 마키아벨리’ 카다피와 그 가족들

  • 이웅현 | 정치학 박사·국제정치칼럼니스트 zvezda@korea.ac.kr

    입력2011-04-21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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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30년 맞짱 뜬 ‘사막의 풍운아’는 왜 흔들리나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4월10일 수도 트리폴리의 요새 바브 알아지지아에 등장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1973년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탐파’는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풍자하는 기사를 실었다. 분노한 카다피는 ‘라 스탐파’ 소유회사인 ‘피아트’를 사들이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유대인 편집장 아리고 레비를 해고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피아트의 회장 조반니 아넬리는 레비를 두둔하고 나섰고, 카다피는 이탈리아인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3년 뒤, 아넬리는 피아트의 새로운 사업파트너로 카다피를 영입한다고 발표했다. 리비아 외환은행이 4억달러가 넘는 돈을 투자하면서 세계 5위의 자동차회사 피아트의 지분 10%를 사들였던 것이다. 4억달러라는 돈은 당시 이탈리아의 재정적자 4분의 1을 메울 수 있는 큰 액수였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이탈리아인들이 카다피의 조롱거리가 된 셈이었다. 아리고 레비가 그 후 어찌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월급쟁이 편집장으로서는 카다피의 집요함과 피아트 지분 10%의 ‘위력’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으리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리비아를 식민통치했던 이탈리아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지만,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은 카다피의 돈 앞에 언제든지 무릎 꿇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탈리아인들이 사랑한 카다피의 이 돈을 미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1969년 9월 쿠데타로 집권하자마자 카다피는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인의 자존심을 부추기면서 리비아국립석유회사를 설립해 미국 메이저 석유회사들에 유전사용료 인상을 요구했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배럴당 1달러였던 로열티를 배럴당 2.2달러로 무려 120%나 끌어올렸다. 당시 매일 100만배럴씩 원유를 생산하던 리비아의 외환보유액(290억달러)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수위로 올라서자 다른 산유국들도 앞 다투어 카다피의 선례를 따랐다. 미국이 북아프리카의 말 많은 지도자를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카다피에 의해 축출된 리비아의 전 국왕 이드리스는 메이저 석유회사들에게 매우 관대한 조건을 제공했고, 미국의 석유회사들은 리비아를 ‘우리의 진정한 낙원’이라고 불렀었다.

    오일달러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미국 언론들은 “1980년대가 되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들이 제너럴 모터스(GM)를 사들이고, 쿠웨이트의 자금이 미국 전역에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이름의 모텔을 건설할 것이며, 아부다비의 무슬림들이 컬럼비아 픽처스나 MGM 같은 영화사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며 경계론을 펼쳤다. 특히 반미노선을 견지하던 리비아와 이라크를 미국의 대(對)유럽 정책에 사사건건 엇박자를 놓던 프랑스로부터 핵무기를 구입할 가능성이 가장 큰 국가로 지목하기도 했다.



    고독한 풍운아

    실제로 1970년대 카다피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오일달러를 리비아에 전혀 필요가 없는 미라지 전투폭격기 114대를 도입하는 데(2억달러) 쓰거나, 이집트와 시리아 등 주변 국가들에 매년 각각 1억달러와 5000만달러씩 지원하는 데 썼다. 누가 보아도 타깃은 이스라엘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게릴라조직으로 낙인찍혀 있던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리비아는 테러조직을 지원하는 국가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반미, 반이스라엘 노선을 견지하는 무슬림 조직이라면 미국 내 운동단체라도 ‘통 큰’ 카다피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카다피의 무기는 자신의 입과 돈이었다. 넘쳐나는 열정으로 아랍인의 단결을 호소하던 카다피의 연설시간은 보통 5시간. 사이가 좋던 시절의 이집트 카이로방송은 카다피 연설을 그대로 중계하곤 했다(2010년 유엔총회에서 장시간 연설을 한 카다피에 대해 서방언론은 빈정댔지만, 그의 장광설은 새파랗게 젊은 시절부터 트레이드마크였다). 제국주의적 질서를 종식시키려는 그의 열정은 서방에서는 ‘테러리즘 수괴의 광분’으로 비쳤다.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이집트, 수단, 시리아, 말타, 부르키나파소, 차드,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심지어 중국과의 연방국가 수립까지 시도하는 카다피의 광폭행보를 이해할 방법은 없었다. 영국의 테러리즘 전문가인 폴 윌리엄슨의 표현을 빌리면 “노벨 테러리즘상이 있다면, 가장 강력한 수상후보는 (당연히) 카다피”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열정과 야망 그리고 오일달러를 가지고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지속적으로 동맹국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어린 시절 카다피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집트의 나세르(1918~70)는 정상으로서 그와 상면한 자리에서 “젊은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나세르 사후에는 이집트도 리비아와 거리를 두었다. 나세르의 후임 사다트가 친미노선을 택했기 때문이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은 미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카다피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자”로 규정하고, 공공연하게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리비아 국영 텔레비전은 레이건이 할리우드 배우시절 원숭이와 함께 주인공을 맡아 출연한 영화를 방영하면서 레이건을 조롱했다. 2003년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을 때 카다피는 “레이건은 이미 1986년 리비아 공격을 지시할 때부터 미쳐 있었다”며 비웃었다.

    레이건과 카다피의 ‘OK목장의 결투’는 1980년대 양국관계를 규정지었다. 결국 1986년 4월 서베를린의 한 디스코텍 폭발로 미군 1명과 미국인 23명을 포함한 2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과 지중해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과 해군은 이른바 ‘엘도라도 계곡’ 작전에 돌입해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미국은 리비아인 36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리비아 당국은 “사망자가 100명, 부상자가 2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사망자 가운데 16개월 된 카다피의 양녀 ‘한나’가 포함돼 있었고, 6남 사이프 알-아랍(당시 4세)과 7남 카미스(3세)는 2000파운드급 폭탄의 폭발 압력으로 부상했다(사이프 알 아랍은 2011년 반군이 봉기하자 리비아 정부군 병력의 한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카미스는 이미 리비아군 정예 ‘카미스 여단’을 이끌고 있었다. 사이프는 반군에 투항했다).

    미국 정부는 ‘예기치 않게’ 카다피가 사망했다는 성명까지 준비했지만, 텐트를 전전하며 금욕생활을 하던 카다피는 목숨을 건졌다.

    ‘신상털기’ ‘독재자 때리기’ 그리고 데자뷰

    2년 뒤인 1988년 승객 270여 명을 싣고 뉴욕으로 날아가던 팬암 103호기가 스코틀랜드의 로커비 상공에서 폭파돼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착지인 슈투트가르트에서 적재된 도시바 라디오-카세트 플레이어에 장착된 폭탄이 폭발했던 것이다. 1991년 11월에 가서야 미·영·불 합동조사단은 명백한 증거 없이 카다피 연루 의혹을 제기했다. 미국의 용의자 인도 요구에 대해 카다피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유엔과 미국의 경제제재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자 카다피는 이 시기부터 미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서방국가들의 정부와 매스미디어는 비호감 독재정권에 대해서 묘한 팀플레이를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2011년 초 알제리에서 시작된 이른바 재스민혁명이 리비아에서도 불을 댕기자 영국이 자국 내 카다피 일가 재산을 동결 조치한 것을 계기로 카다피 가족과 측근들의 부패와 비리에 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카다피 가족에 대한 ‘신상털기’가 시작된 것이다. 1970년대 청년기의 카다피와 성형수술 의혹을 받은 현재의 추악한 얼굴의 카다피 사진을 대조해 비추면서 ‘한물가도 이미 오래전에 한물갔어야 할’ 독재자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는 보도도 이어졌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직전까지 미국 언론의 사담 후세인 ‘털기’도 그랬었다.

    1991년 제1차 미국-이라크 전쟁 이후 2003년까지 카다피를 제치고 미국의 목표물로 부상한 것은 사담 후세인이었다. 혐의는 카다피가 받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대량살상무기 제조와 테러리스트 지원 의혹. 사실상 증거로 입증되지 않은 ‘문죄(問罪)’에 대한 사담 후세인의 항변은 1980년대 카다피의 경우처럼 영어로는 거의 전달되지 않았다.

    1995년 8월의 뉴욕판 ‘타임’은 ‘사담스 패밀리 이탈하다’라는 제하에 영화 ‘아담스 패밀리’를 연상케 하는 후세인 가족사진을 크게 실었다. 이라크의 최고권력자 일가를 그로테스크한 귀신가족에 절묘하게 투영시킨 ‘걸작’이었다. 기사 내용은 사담 후세인의 두 사위 후세인 카멜과 사담 카멜이 요르단으로 망명했고, 미국 정보기관이 이들로부터 사담 후세인 일가 주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지만, 그 내용보다는 그 사진 한 장의 파괴력이 컸다. 후세인 일가는 일견 코믹하고 시대착오적인 ‘무서운 가족’으로 전락했다.

    1990년대 이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냉전 이후 세계적인 평화무드와 민주화에 걸맞지 않은 ‘독재자’였다. 그리고 그는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맥없이 무너졌다. 이라크의 권력자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상대할 경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점에서는 카다피가 한 수 위였다.

    마키아벨리의 차남

    2002년 8월 카다피는 테러지원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리비아의 이미지를 전환하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 세이프 알-이슬람을 국제무대에 내세웠다. 젊은 시절의 카다피를 쏙 빼닮은 30세의 이 건축학도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자선을 위한 카다피국제재단’의 자금과 자신이 그린 작품 37점을 들고 베를린, 파리, 런던, 로마를 돌았다. 베두인 텐트를 설치해 무료전시회를 연 것이다. 전시된 그림 가운데는 1986년 미국의 트리폴리 폭격 당시 떨어진 포탄의 파편을 박은 ‘도전’이라는 작품도 있었지만, 서방세계는 이 젊은 청년에게서 달라진 카다피의 태도와 잠재적 후계자 가능성을 보았다. 영국의 런던정경대(LSE·카다피의 검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최근 리비아 내전 중 밝혀진 바로 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코스를 밟을 예정이라는 점도 호감을 샀다. 세이프는 2008년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 침공 준비로 여념이 없을 때, 카다피는 이탈리아의 총리 베를루스코니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에게 전해주시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처럼 되고 싶지는 않소.”

    팬암 103기 폭파사건의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금 27억달러를 지불하는 대신 자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테러 주도 여부를 떠나 미국과 유엔의 제재로 300억달러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던 리비아로서는 사실상 남는 장사였던 셈이다. 이탈리아인들로부터 배운 ‘마키아벨리안 테크닉’이었다.

    같은 해 12월 카다피는 대량살상무기 개발계획을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의정서에 서명하는 것은 물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이 선언으로 그가 잃은 것이 ‘체면’ 말고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얻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카다피는 국제사회의 ‘이단아’에서 일거에 ‘위대한 정치인’으로 격상돼 국제사회의 상찬을 한 몸에 받았다. 사담 후세인이 마구간의 짐승처럼 체포되는 동안, 카다피는 하루아침에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안정의 기반’으로 변신했다. 미국의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리비아로 복귀했고, 카다피는 유엔 안보리에 참석해 한 달 동안 의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42년이라는 세월은 철두철미한 마키아벨리스트에게도 버거운 것인 듯하다.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30년 동안 피를 말리는 ‘대결’을 거듭해온 ‘사막의 풍운아’도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자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로렌초 디 메디치에게 이렇게 훈수했다. “통치자는 피치자의 사랑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언정 절대로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카다피 패밀리

    ‘이단아’ 시절의 카다피는 리비아인에게 사랑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위대한 정치가’가 되는 순간 카다피는 더 이상 리비아 국민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제사회에 복귀함과 동시에 리비아인들은 자기 나라와 세계 사이에 엄청나게 벌어진 거리를 인식하며 ‘군주’에 대한 증오심을 쌓아왔는지도 모른다. 알제리와 이집트의 민주혁명은 단지 기폭제일 뿐이었다. 자국 문을 활짝 열어 국제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후진성을 자각한 국민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변종 ‘고르바초프 딜레마’에 카다피는 봉착한 것이다.

    리비아와 같이 전통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여전히 가부장적 권위에 발언권이 있다. 게다가 카다피는 국가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스스로 최고지도자로서의 어떤 공식 직함도 갖지 않았다. 지금 그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세력 가운데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가족들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사담 후세인의 가족만큼 ‘털리지 않아’ 확연하게 그릴 수 없는 그의 가족은 두 번째 처 사피야와 7남1녀, 그리고 1970년대부터 국가보안기구의 책임을 맡으며 카다피를보좌해온 동서 압달라 세누씨 정도다. 세누씨는 현재 군 정보기관의 책임자다. 차남 세이프 알-이슬람은 현재 리비아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얼굴을 알리고 있지만, 2002년 작품전시회 당시에는 “정치는 내 삶의 일부이고 나의 환경 그 자체이지만, 정치가나 장관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며 아버지와는 다른 절제된 태도를 보였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된 미국 외교 전문, 그리고 ‘위키피디아’에 산발적으로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카다피의 다른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장남 무함마드는 나서서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고, 리비아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3남 알-사디는 리비아축구연맹 의장이며 이탈리아의 ‘세리에 A’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4남 알-무아타씸은 리비아군 중령으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활동하면서, 2008년 정권안보를 위한 민병대의 창설을 위해 리비아국립석유회사 회장에게 12억달러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 회사는 카다피 패밀리의 자금원으로 알려져 있다. 5남 한니발은 아버지를 보좌하기보다는 유럽 전 지역을 전전하며 사고 치는 것으로 더 유명하다. 카다피의 유일한 딸 아이샤는 사담 후세인의 재판에서 그를 변호한 법률가로 더 알려져 있다. 카다피의 친구인 이디 아민과 결혼했으나 현재 이혼 상태다.

    요염한 금발 간호사

    카다피 패밀리는 트리폴리 남쪽 근교에 위치한 밥 알-아지지아 병영에 주로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다피가 움직일 때는 항상 대동했다는 우크라이나 출신 간호사 할리나 콜로트니츠카야는 미국 외교관들이 ‘요염한 금발(voluptuous blonde)’이라고 보고서에 표현했다고 해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자연스럽게 카다피의 세 번째 처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우크라이나로 귀국한 것으로 보아 후자의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국 외교관들의 인물평가가 옳은 것 같지도 않다. 최근 카다피를 오랫동안 보좌해왔고 리비아 정보기관의 수장을 지낸 외상이자 ‘카다피의 오른팔’ 무사 쿠사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카다피 정권의 기둥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있지만, 집권 기간 42년 동안 가족들을 군과 정보관련 핵심요직에 포진시켰기 때문에, 외부의 무력개입이 없는 한 카다피 정권은 건재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리비아는 오스만 제국(터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국의 지배와 간섭을 받았던 나라다. 외세에 의존하던 왕정을 타파하고 리비아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던 ‘지도자’가 주변 아랍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면, 버티기의 마지막 지렛대는 가족일 것이다. 베두인족의 가부장적 전통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생존과 투쟁에 관한 한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인 ‘리비안 마키아벨리’의 운명은 이미 21세기 중동-아랍 지역의 격변의 가늠자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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