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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분석

미국과 30년 맞짱 뜬 ‘사막의 풍운아’는 왜 흔들리나

‘리비안 마키아벨리’ 카다피와 그 가족들

  • 이웅현 | 정치학 박사·국제정치칼럼니스트 zvezda@korea.ac.kr

미국과 30년 맞짱 뜬 ‘사막의 풍운아’는 왜 흔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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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80년대 카다피의 무기는 자신의 입과 돈이었다. 넘쳐나는 열정으로 아랍인의 단결을 호소하던 카다피의 연설시간은 보통 5시간. 사이가 좋던 시절의 이집트 카이로방송은 카다피 연설을 그대로 중계하곤 했다(2010년 유엔총회에서 장시간 연설을 한 카다피에 대해 서방언론은 빈정댔지만, 그의 장광설은 새파랗게 젊은 시절부터 트레이드마크였다). 제국주의적 질서를 종식시키려는 그의 열정은 서방에서는 ‘테러리즘 수괴의 광분’으로 비쳤다.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이집트, 수단, 시리아, 말타, 부르키나파소, 차드,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심지어 중국과의 연방국가 수립까지 시도하는 카다피의 광폭행보를 이해할 방법은 없었다. 영국의 테러리즘 전문가인 폴 윌리엄슨의 표현을 빌리면 “노벨 테러리즘상이 있다면, 가장 강력한 수상후보는 (당연히) 카다피”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열정과 야망 그리고 오일달러를 가지고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지속적으로 동맹국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어린 시절 카다피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집트의 나세르(1918~70)는 정상으로서 그와 상면한 자리에서 “젊은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나세르 사후에는 이집트도 리비아와 거리를 두었다. 나세르의 후임 사다트가 친미노선을 택했기 때문이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은 미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카다피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자”로 규정하고, 공공연하게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리비아 국영 텔레비전은 레이건이 할리우드 배우시절 원숭이와 함께 주인공을 맡아 출연한 영화를 방영하면서 레이건을 조롱했다. 2003년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을 때 카다피는 “레이건은 이미 1986년 리비아 공격을 지시할 때부터 미쳐 있었다”며 비웃었다.

레이건과 카다피의 ‘OK목장의 결투’는 1980년대 양국관계를 규정지었다. 결국 1986년 4월 서베를린의 한 디스코텍 폭발로 미군 1명과 미국인 23명을 포함한 2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과 지중해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과 해군은 이른바 ‘엘도라도 계곡’ 작전에 돌입해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미국은 리비아인 36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리비아 당국은 “사망자가 100명, 부상자가 2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사망자 가운데 16개월 된 카다피의 양녀 ‘한나’가 포함돼 있었고, 6남 사이프 알-아랍(당시 4세)과 7남 카미스(3세)는 2000파운드급 폭탄의 폭발 압력으로 부상했다(사이프 알 아랍은 2011년 반군이 봉기하자 리비아 정부군 병력의 한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카미스는 이미 리비아군 정예 ‘카미스 여단’을 이끌고 있었다. 사이프는 반군에 투항했다).

미국 정부는 ‘예기치 않게’ 카다피가 사망했다는 성명까지 준비했지만, 텐트를 전전하며 금욕생활을 하던 카다피는 목숨을 건졌다.



‘신상털기’ ‘독재자 때리기’ 그리고 데자뷰

2년 뒤인 1988년 승객 270여 명을 싣고 뉴욕으로 날아가던 팬암 103호기가 스코틀랜드의 로커비 상공에서 폭파돼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착지인 슈투트가르트에서 적재된 도시바 라디오-카세트 플레이어에 장착된 폭탄이 폭발했던 것이다. 1991년 11월에 가서야 미·영·불 합동조사단은 명백한 증거 없이 카다피 연루 의혹을 제기했다. 미국의 용의자 인도 요구에 대해 카다피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유엔과 미국의 경제제재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자 카다피는 이 시기부터 미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서방국가들의 정부와 매스미디어는 비호감 독재정권에 대해서 묘한 팀플레이를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2011년 초 알제리에서 시작된 이른바 재스민혁명이 리비아에서도 불을 댕기자 영국이 자국 내 카다피 일가 재산을 동결 조치한 것을 계기로 카다피 가족과 측근들의 부패와 비리에 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카다피 가족에 대한 ‘신상털기’가 시작된 것이다. 1970년대 청년기의 카다피와 성형수술 의혹을 받은 현재의 추악한 얼굴의 카다피 사진을 대조해 비추면서 ‘한물가도 이미 오래전에 한물갔어야 할’ 독재자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는 보도도 이어졌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직전까지 미국 언론의 사담 후세인 ‘털기’도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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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현 | 정치학 박사·국제정치칼럼니스트 zvezda@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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