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술과 문학은 한 몸이여”

한국 문단 5대 구라, 개 물어뜯은 천승세, 대선배 뺨 때린 최영미…

  • 이소리│시인·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총무 lsr21@naver.com

    입력2011-05-19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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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과 문학은 한 몸이여”

    문인들과 술자리를 갖는 시인 고은 (오른쪽).

    한국 문단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인들이 벌이는 술판. 그 술판에서 있었던 배꼽을 잡는 이야기 가운데 천승세 소설가와 박몽구 시인 이야기를 빼놓으면 멀쩡한 이가 하나 빠진 것처럼 꽤 서운하다. 여기에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뽀뽀로 뽀뽀뽀~ 찌찌리 찌찌찌~’를 기막히게 잘 부르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강형철(숭의여대 교수), 500cc 호프 잔을 들고 길거리와 지하철 안에서 마시며 이야기하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전기철(숭의여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천승세 소설가와 박몽구 시인 이야기부터 입 호미로 슬슬 긁어보자. 그해가 몇 년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5·18 행사를 마치고 광주에 있는 한 여관에서 문인들이 밤새 술을 나눠 마시며 남북 이야기, 꼴사나운 정치 이야기, 허리 휘게 하는 경제 이야기,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였을 것이다.

    천승세 소설가, 김준태 시인, 곽재구 시인 등 10여 명이 맥주를 나눠 마시며 입에 거품을 물고 세상타령을 하고 있을 때. 저만치 떨어져 조용히 앉아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던 박몽구 시인이 소변이 마려운지 일어서서 화장실에 갔다. 그 사이 천 소설가가 밤새도록 이어지는 술에 은근하게 취하고, 몸이 약간 피곤했던지 여관 방 한 귀퉁이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은근슬쩍 드러누웠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박 시인이 천 소설가가 보이지 않자 한마디 툭 내뱉었다.

    “승세 자나?” 했다가 무릎 꿇은 박몽구

    “어이! 승세 자나?”



    그때였다. 천 소설가가 즉각 박 시인 말에 안티를 걸었다.

    “어이! 승세 안 자고 여기 누워 있네.”

    “서…선생님! 죄송합니다.”

    “뭐라? 승세 자냐구? 예끼 이 못된 놈 같으니라고. 당장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지 못해.”

    하동 천승세 소설가는 1939년 목포 출생이고, 박몽구 시인은 1956년 광주 송정리 출생으로 나이 차가 무려 17살이나 났다.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점례와 소’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온 천 소설가는 말 그대로 문단에서 어르신에 속했고, 1977년 ‘대화’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박 시인은 등단에서도 무려 19년이나 차이가 났다.

    박 시인은 그날 술도 마시지 못한 채 밤새도록 천 소설가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웃지 못할 일을 겪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1987년 9월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거듭난 뒤 시인 김명수 초대 사무국장에 이어 사무국장을 맡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다시 ‘한국작가회의’로 그 이름이 바뀐 뒤 부이사장을 맡았던 강형철 시인. 그가 술이 얼큰하게 오르면 부르는 ‘뽀뽀로 뽀뽀뽀~ 찌찌리 찌찌찌~’는 문단에서 ‘9도 뽀찌타령’으로 인기가 아주 높았다. 9도 뽀찌타령은 각 지역 특징을 살리면서도 풍자와 익살로 문인들 배꼽을 잡게 만드는, 시쳇말로 하면 ‘잡놈이 부르는 색타령’이라 할 수 있다.

    ‘뽀뽀로 뽀뽀뽀~ 찌찌리 찌찌찌~’로 강원도부터 시작되는 9도 뽀찌타령은 강원도 ‘비탈’, 함경도 ‘아바이 순대’, 평안도 ‘감자’, 서울 ‘깍쟁이’, 경기도 ‘갯벌’, 충청도 ‘멍청’ 혹은 ‘인삼’, 전라도 ‘굴비’ 혹은 ‘고매’(고구마), 경상도 ‘문디’로, 강형철 시인은 타령마다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가며 기가 막히게 불렀다.

    제주 출신 현기영 소설가는 강형철 시인이 뽀찌타령을 부르면 은근히 즐기면서도 “그 타령에서 제주도만 빼면 안 되겠느냐?”며 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뽀찌타령 가운데 제주도는 “뽀뽀로 뽀뽀뽀~ 찌찌리 찌찌찌~ 제주도라~ 말 뽀뽀뽀뽀로~ 말 찌찌찌찌리~”였다.

    한국 문단의 ‘5대 구라파’

    “술과 문학은 한 몸이여”

    개를 물어뜯은‘구라’로 유명한 소설가 천승세.

    지금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를 맡고 있는 전기철 시인은 조태일 시인만큼이나 생맥주를 참 좋아했다. 그는 생맥주 집에서 500cc 생맥주를 연거푸 마시다가 술값을 모두 계산하고 술좌석이 파해도 계산대에 서서 잘 나오지 않았다.

    “아가씨! 500cc 맥주잔 이거 얼마에 팔아요?”

    “아니, 왜 그러세요?”

    “이 맥주잔에 생맥주를 가득 채워 집에 가면서 마시려고요.”

    “….”

    전 시인은 술을 마실 때마다 그렇게 생맥주를 가득 채운 500cc 잔을 사서 거리를 걸으면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홀짝홀짝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기를 꽤 즐겼다. 그는 길거리에서나, 지하철 안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거나 ‘저 사람 정신이 약간 나간 거 아냐?’라는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생맥주를 즐겁게 마시며 마구 떠들었다. 그는 지금도 술을 마시다 취하면 나이가 많이 들었든 직책이 높든 낮든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쌍욕을 마구 내뱉기로 아주 유명하다.

    한국 문단에는 문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독자가 웃음꽃을 활짝 피우게 하는 일명 ‘구라파’ 문인이 수두룩하다. ‘한국 문단 5대 구라’라고 하면 시인이자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시인 김지하, 소설가 천승세, 송기숙, 황석영을 꼽을 수 있다.

    시인 백기완이 ‘손바닥만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만주벌판…’으로 시작되는 구라, 시인 김지하가 풀어내는 졸도(?)할 정도로 웃기는 구라, 개를 물어뜯은 소설가 천승세의 구라, 서울역에서 아가씨를 슬슬 꼬드겨 여관으로 직행했다는 소설가 송기숙 구라, 술만 마셨다 하면 ‘18번’으로 통하는 소설가 황석영이 풀어내는 닭과 염소에 얽힌 구라 등이 ‘문단판 구라’를 이끄는 대표주자라 하겠다.

    개를 물어뜯은 천승세 시인

    백기완, 김지하, 송기숙, 황석영 구라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 우선 접어두고, 여기서는 문인들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잘 모르는 소설가 천승세 구라를 풀기로 한다.

    소설가 천승세 구라는 크게 3가지다. 빨치산 이야기와 주먹자랑 이야기, 자기를 보고 자꾸 짖는 개를 물어뜯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빨치산 이야기는 “어린 승세 소년이 조국해방이란 부푼 꿈을 품고 지리산에 들어가 총을 들고 토벌군과 싸우다가 우연하게 어린 여자 빨치산을 만났다. 그 여자 빨치산이 지금 있는 내 마누라다”는 내용으로 거짓말이다.

    이 가운데 가장 재미난 ‘구라’는 개의 목을 물어뜯은 이야기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구라’가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루는 하동 천승세가 서울에서 여러 작가와 함께 소설가 이문구를 만나러 갔다. 하동과 작가들은 그날 이문구의 집에서 해가 저물도록 술을 거나하게 마신 뒤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때 저만치 골목에서 송아지만한 셰퍼드 한 마리가 졸졸 따라오면서 자꾸 짖어댔다.

    그 개를 볼썽사납게 여긴 작가들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자 금세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동도 그 개에게 다가갔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그 개가 하동을 보더니 물어뜯을 듯이 마구 짖었다.

    “아! 하필이면 그놈이 나만 보고 짖지 않겠나. 아마 그놈이 내 험상궂은 인상을 보고 나를 다른 종류의 개인 줄 알았나봐. 그래서 같은 개끼리 붙어보자 싶어서 내가 먼저 달려들어 그 개의 목을 마구 물어뜯어버렸지. 그랬더니 글쎄, 그놈이 깨갱 깨갱….”

    요즈음도 문단에서 술판이 벌어지면 가끔 하동이 개 목을 물어뜯은 이야기가 은근슬쩍 떠돈다. 나는 그때마다 그 이야기가 혹 천승세 소설가가 쓴 ‘황구의 비명’이란 소설의 뿌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새색시’ 신경림, 도종환

    “술과 문학은 한 몸이여”

    ‘뽀찌타령’을 잘 부른 시인 강형철.

    한국 문단이 이처럼 ‘구라’와 술로만 얼룩져 있는 것은 아니다.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아주 점잖은 문인도 꽤 많다. 시인 신경림, 김용택, 도종환, 안도현은 술을 마셔도 새색시처럼 말수가 적은 편에 속한다.

    시인 고정희, 소설가 윤정모, 이경자, 유시춘은 1980년대 허리춤께부터 2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우리 문단에서 ‘누님’으로 통하는 여성 문인이다. 이 가운데 1991년 6월9일, 안타깝게도 불혹의 나이에 지리산에 취재를 갔다가 급류에 휩쓸려 세상을 훌쩍 떠나버린 시인 고정희, ‘절반의 실패’를 쓴 작가 이경자, 그리고 작가 윤정모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월 15만원이란 활동비를 받으며 총무간사 일을 하고 있던 나를 특별히 아꼈다.

    하루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구속 문인 석방을 위한 문학의 밤’이란 행사가 끝난 뒤 세 분을 모시고 서울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맥주를 나눠 마실 때였다. 그때 소설가 이경자는 우이동에 살고 있었고, 나는 노원구 중계동에 살고 있었다.

    “소리야! 저년들하고 너무 가까이 놀지 마라. 우린 강북에 있는 북한산 주변에서 같이 사는 이웃사촌이잖아. 자! 저년들이 주는 술 받지 말고 내가 주는 술만 받아 마셔.”(이경자)

    “저년이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소리를 독차지하려고 하네. 소리야! 저년 말 듣지 말고 우리 고향 사람끼리 같이 놀자. 됐나? 됐다.”(윤정모)

    민족 현실과 분단, 사회 대립과 갈등을 소재로 다루는 소설가 윤정모는 1946년 경주 바깥인 나원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고, 나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저년들이 그래도 소설가라고 소리를 주인공 삼아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네. 소리야! 소설 쓰는 저런 년들하고 같이 놀지 마. 우리는 시인이잖아. 시인이 시인들끼리 놀아야지, 왜 소설 따위나 쓰는 저런 년들하고 놀아.”(고정희)

    “….”

    여성 문인들 가운데 소설가 박완서(1931~2010), 이남희, 시인 차정미, 신동원 등은 술을 손님 다루듯이 귀하게 여겼다. 여성 문인들 가운데 시인 최영미는 꽤 성깔 있는 여자다. 술을 마시다가 자신에게 누군가 해코지를 하거나 은근슬쩍 손을 잡는 등 이상한 수작(?)을 부리면 그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톡톡 튀었다.

    하루는 탑골공원 옆에 있는 주점 ‘탑골(대표 한복희)’에서 시인 고은, 이시영, 정희성, 김사인, 강형철, 이재무, 박철, 소설가 황석영, 김성동, 송기원 등 수많은 문인과 문학행사를 마치고 맥주를 나눠 마실 때였다. 탑골은 그때 문인들이 하루를 건너뛰면 서운하게 여길 정도로 자주 들락거렸던 술집이다.

    소설가 송기원이 그때 창작과비평(창비)으로 갓 등단한 최영미 등 여러 문인과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다가 은근슬쩍 시인 최영미 뺨에 입술을 댔던 모양이었다.

    “철썩!”

    “어어어~ 쟤가 ‘천하의 송기원’한테 왜 저래?”

    대선배 뺨 때린 새내기 최영미

    새내기 시인 최영미가 이를 참지 못하고 소설가 송기원 뺨을 세게 후려친 뒤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설가 송기원은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96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면의 밤에’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회복기의 노래’, ‘중앙일보’에 소설 ‘다시 월문리에서’가 당선된 유명한 작가였다. 시인 최영미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2년 창비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신출내기였다. 그랬으니, 문인들 입이 절로 벌어질 수밖에.

    “그날 밤은 모든 것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폭우 속을 뚫고 김사인이가 왔었고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새로 막 시작된 술자리가 새벽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천둥소리 속에 밖에서 누가 희미하게 나무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설연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송기원과 나의 처가 거센 빗줄기 속에서 기세등등 들이닥치고 있었다. ‘복희년 나오라고 그래!’ 바로 그때였다. 나와 송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밖으로 내빼는데, 흰 고무신 신은 발이 비호처럼 빨랐다. 그리고 빗속을 번개처럼 가르며 사라졌다. 복희씨가 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송과 나의 처가 시퍼렇게 걷어붙인 팔을 풀기도 전에 일어난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시영 시 ‘김사인의 흰 고무신’ 모두

    1980년대 허리춤께부터 90년대 끝자락 탑골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 술집에는 시인 김지하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이 들락거렸다. 문인들의 단골술집이었다. 시인 이시영이 시를 남길 정도로 탑골에서 술을 마시다가 일어났던 일도 숱하다. ‘탑골’ 하면 그 시대 그 자리에서 얼굴 벌겋게 술을 마시는 문인들 얼굴이 절로 떠오를 정도다.

    시인 안상학과 고재종이 서로 농민시를 잘 쓴다며 맥주병을 던지며 싸운 일, 시인 이재무가 “죽은 종철이 산 세동을 쫓아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기세등등하게 정치인 장세동을 술좌석에서 쫓아낸 일, 술만 마셨다 하면 옷을 홀랑 벗는 시인 강세환, 술 마시고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시인 박철, 술과 연애하는 시인 이흔복 등.

    “부용산 오 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장미 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오 리 길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모두

    문인들은 탑골에서 술만 잘 마신 것이 아니라 노래도 참 잘 불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노래가 ‘부용산’이다. 부용산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부르는 사람마다 가사가 조금씩 다르고, 가락도 조금씩 다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 ‘황석영 부용산’과 소설가 ‘방영웅 부용산’, 소설가 ‘송영 부용산’이다.

    문인가수로 불리는 시인 박선욱은 술좌석이 벌어질 때마다 문인들이 불러 세워 ‘그리운 금강산’을 주로 불렀다. 나는 소설가 현기영과 시인 이시영이 좋아하는 ‘한라산’을 자주 불렀다. 그밖에 시인 강형철, 박철, 이흔복 등이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불렀다.

    술과 문학, 문인과 술. 시인 신경림은 원고료를 받는 날마다 문인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던 일이 시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회고한다. 그렇다면 ‘태백산맥’을 쓴 소설가 조정래는 술을 어떻게 대했을까.

    1990년대, 내가 한길사에서 일할 때 소설가 조정래와 시인 김초혜를 가끔 만났다. 조정래는 사실 술을 많이 마시는 문인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한길사 김언호 대표와 문학평론가 임헌영 등과 저녁식사를 할 때 아내 김초혜 시인과 함께 술을 몇 잔 마신 뒤 스스로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닌지를 아내에게 꼭 확인을 시키곤 했다.

    “여보! 내가 앞에서 걸어갈 테니까 비틀거리는 건지 아닌지 좀 봐줘.”

    소설가 조정래가 마치 훈련병처럼 차렷 자세를 한 채 앞으로 씩씩하게 걸으면 시인 김초혜는 손짓으로 취했다 안 취했다 표시를 했다. 나는 그때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명색이 ‘태백산맥’이란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쓴 큰 작가가 아내 앞에서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걷는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뺨 몇 대 맞고 말 트는 게 낫지 않은가”

    “어이~ 김준태 시인! 나 요즈음 이시영 시인과 말 트기로 했네. 김 시인도 나랑 나이가 같으니, 오늘부터 말 트기로 하세나.”

    “….”

    “왜 그러는가? 내 말이 불편한가?”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문인들이 벌이는 술판에서는 별의별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똥지게’ 등 우리 민중의 삶을 시로 잘 녹여냈던 심호택(1947~2010·원광대 불문학과 교수) 시인과 김준태 시인 사이에도 재미난 일화가 있다.

    김준태 시인과 심호택 시인 등 문인들이 5·18 행사를 마치고 허름한 술집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문단에 늦깎이로 나온 심호택 시인이 ‘또래인 이시영 시인과 얼마 전부터 말을 트기로 했다’며 기세 좋게 또래인 김준태 시인에게 말을 트자고 덤벼들었다. 문단에서는 원로급 위치에 있었던 김준태 시인은 ‘엊그제 갓 등단한 새까만 문단 후배’가 그동안 선생님이라 부르다가 갑자기 말을 트자고 하니 기가 막혔다. 김준태 시인은 어이가 없어 한동안 묵묵히 막걸리만 마시며 ‘저 물건을 어찌해야 할꼬?’라는 생각에 잠기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심호택 너 일어나!’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심호택 시인 양 뺨을 그야말로 ‘종 치듯이’(이승철 시인의 표현) 마구 때렸다.

    “술과 문학은 한 몸이여”

    소주를 마시며 강연한 고은.

    심호택 시인은 하도 억울해서 그 술집에서 나와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집이 있는 전주까지 달리며 서울에 사는 이시영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

    “어이~ 시영이 자네! 나 억울해서 정말 못살겠네.”

    “왜 그래?”

    “나, 광주에 가서 김준태 시인에게 말 트자고 하다가 뺨을 수없이 맞아버렸네. 이 일을 어쨌으면 쓰것는가?”

    “잘됐네. 김준태 시인한테 그렇게 뺨 몇 대 맞고 말 트는 게 낫지, 그럼 김준태를 평생 선생님으로 모시려 했는가.”

    “….”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시인 고은과 관련된 술좌석 일화도 수없이 많다. 1990년 내가 갓 결혼을 한 뒤 여러 문인에게 아내를 소개하기 위해 술좌석에 데리고 갔을 때, 고은 시인이 내 아내 뺨을 문질러 아내는 물론 나까지 당황했다. 그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은 2002년 가을, 경남도민일보가 주최한 ‘제1회 청소년문학상’에서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고은 시인이 소주를 마시며 강연을 할 때 일어났다. 포복절도할 일이다.

    시인 고은의 ‘고주부 소주사건’

    문화관광부에서 은관문화훈장까지 받은 고은 시인은 김춘복 경남작가회의 회장 안내로 경남도민일보와 경남작가회의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청소년문학상 심사를 한 뒤 그날 저녁 6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문학과 언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고은 시인과 김춘복 소설가는 청소년문학상 심사를 한 뒤 강연시간을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가 소주를 마셨다.

    고은 시인은 이날 저녁 6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지역 문학예술인과 학생, 주부, 일반인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강연장으로 들어섰다. 고은 시인은 탁자에 올려놓은 생수를 물리고 소주와 김치 한 보시를 시킨 뒤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강연 내내 소주를 마시며 김치 씹는 소리를 그대로 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강연을 계속하다 보니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끝을 흐리는 등 횡설수설했다. 그 때문에 강연시간인 1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독자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가 강연할 때 마시던 소주를 들고 내려와 맨 앞줄에 앉아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던 주부 4∼5명에게 다가가 입을 억지로 벌려 소주를 들이붓는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고은 시인은 강연 뒤 이어진 ‘철부지’ 공연에서도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고, 이미 취한 경남작가회의 회장 김춘복 소설가도 무대에 올랐다. 소설가 김춘복은 공연 주최자인 고승하 작곡가에게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마이크를 빼앗아 ‘가을편지’란 노래를 부르며 고은 시인과 함께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강연을 듣고 있던 주부에게 소주를 먹인 이른바 ‘고주부 소주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고은 시인은 외국에 나가 강연을 하면서도 술 마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였다. ‘술과 문학은 한 몸’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는 요즘도 문인들과 술좌석에 앉으면 소주를 즐겨 마시며 이런 말을 툭툭 내던지곤 한다.

    “요놈, 요놈 요게 참 좋은 것이여.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여. 이게 없었다면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삭막하고 서글펐을꼬.”

    *시인 이소리는 1959년 창원에서 태어나 1980년 월간 ‘씨의 소리’에 ‘개마고원’ ‘13월의 바다’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 9월부터 1990년 2월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총무간사를 맡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학인과 상상을 벗어나는 희한한 술자리를 함께했다. 시집으로 ‘노동의 불꽃으로’ ‘홀로 빛나는 눈동자’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미륵딸’, 편역서 ‘미륵경’, 간추린 막걸리백과사전 ‘막걸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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