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호

재벌개혁 의지 있긴 한 건가

  • 입력2011-07-20 16: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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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일이다. 2005년 5월16일,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相生)협력 대책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였다. 노 대통령은 이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가는 대책도 시장에서 이뤄져야지 정부가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얼마 전 일이다. 2011년 5월16일, 이명박 대통령은 “대기업 문화가, 총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지속적인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 문화를 굳힐 수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유망 중소 기업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연 간담회 자리였다. 이 대통령은 덧붙여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실적 위주로 하는데, 실적 위주는 남의 희생을 유발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더하고 뺄 것 없는 6년의 시차(時差)다. 두 장면만 놓고 보면 ‘진보좌파’ 대통령은 시장(재벌)에 굴복한 것 같고, ‘보수우파’ 대통령은 불공정한 시장(재벌총수)을 다잡으려는 기세 같다. 언뜻 보아 양자(兩者)가 뒤바뀐 것 같잖은가.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노무현 정부는 ‘허약한 좌파’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던 노 대통령의 발언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도 우회전을 해야 하는 참여정부의 한계를 토로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우파 시장주의자들은 ‘노무현의 투항’을 의심했다. 그들은 권력을 시장에 더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고, 규제는 풀수록 좋고, 세금은 줄일수록 좋다고 합창했다. 1990년대 이래(1989년 소련연방 붕괴가 그 흐름을 가속화했다) 세계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가 그들의 합창을 지원했다.

    이명박 정부는 ‘강력한 우파’로 출범했다(선거에서 500만 표 차이로 승리한 사실만으로도 강력한 우파라는 수사는 무리가 아니다). ‘기업 프렌들리’를 앞세워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했다. 법인세율을 낮춰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높이고 투자와 고용을 늘려 경제를 성장시키겠다고 했다.



    2008년 미국발(發) 경제위기가 덮쳤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는 자본의 탐욕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시장(만능)주의가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재벌에 의존하지 않는 위기 극복의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경제성장을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국 경제 현실에서 CEO 출신 대통령이라고 달리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는가. 고환율, 저금리, 감세로 재벌(수출대기업)을 밀어줄 수밖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성공이었다. 어쨌든 세계에서 가장 먼저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는 MB의 경제성적표를 “낙제점수를 면한 정도”(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라고 하는 것은 너무 박한 평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재벌이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득 및 자산의 양극화가 급속히 심화되었다. 박승 중앙대 명예교수(전 한은 총재)에 따르면 2010년 상위 10%가 국내 총자산의 47%를 차지한 반면 하위 50%는 9%만을 소유했을 뿐이다. 중산층의 비중은 2005년 57.5%에서 2010년 49.9%로 하락하고, 저소득층은 18.1%에서 23.0%로 증가했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이 청와대로 부르면 늘 투자 및 고용 확대와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약속했지만 대체로 ‘하기 좋고 듣기 좋은 말’에 그쳤다. 그 자신 재벌오너를 모셨던 대통령이 그걸 모를 리 있겠는가. 재벌로서야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데다 국내 인건비가 해외(저개발 국가) 인건비에 비해 비싼 터에 무턱대고 투자와 고용을 늘릴 수는 없지 않으냐고 항변할 수 있고, 실제가 그렇다. 시장 원리에 따르면 잘못이 아니다. 우파 성장주의자들은 이런 재벌의 논리를 옹호해왔다. 분배를 위해서라도 지속적인 성장이 전제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뤄내는 성장이냐, 누구를 위한 성장이냐는 물음에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입증되지 않은 낙수(落水) 효과를 내세웠을 뿐이다. 그들은 재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 반(反)기업 정서를 키운다며 좌파로 몰아붙였다. 경제민주화(헌법 제119조 2항)를 말하면 사회주의 하겠다는 거냐며 공격했다.

    우파정권과 재벌 간 밀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15일, 이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새로운 화두로 내세우면서 대· 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을 강조하면서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의도와는 달리 공정사회론이 정치사회적 어젠다로 확장되면서 재벌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듯했다. 그러나 4·27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고 집행부가 신주류로 교체되면서 잠복했던 갈등이 폭발했다. 황우여 신임대표가 ‘반값 등록금’ 얘기를 꺼내고, 신주류와 소장파를 중심으로 법인세·소득세 추가감세 철회 움직임을 보이자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포퓰리즘성 감세 철회에 반대 목소리를 내겠다”며 정면 반발했다. 허 회장은 “반값 등록금과 같은 정책들은 면밀한 검토 없이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라며 여당 집행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여야가 전경련· 경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에게 국회청문회 출석을 요구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터져 나온 한나라당 몇몇 의원의 재벌 비판 발언을 정리해보자. 야당의 비판이야 그러려니 한다 해도 보수우파의 정치적 대변자인 한나라당 내 목소리는 향후 한국사회의 변화와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을 터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성장은 기업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관세 및 수입제한 조치, 고환율·저금리 정책 등 시장원리에 반한다고 볼 수 있는 각종 특혜와 정부의 보호정책에도 의존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비정규직 차별해소나 중·대기업 동반성장, 추가감세 철회 등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정책엔 모든 것을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기업의 이런 행태는 자신들은 올라섰으니 뒷사람들은 따라오지 말라는 전형적인 ‘사다리 걷어차기’이다. 지나친 대기업 독식과 양극화는 자본주의 성장의 걸림돌이며, 대기업들은 사회적 책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이주영 정책위의장)

    “이 정부 들어와 대기업이 얼마나 잘나가고 있는지는 온 국민이 다 안다. 그런데도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어려운 중소기업·자영업자·서민을 위해 고민하지 않고 자기 기업과 가족만 위한 (대기업 총수의) 이기적 태도가 보수 전체를 위기로 몰고 있다.” (남경필 최고위원)

    “지금 우리나라에서 재벌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한다. 북한의 세습체제를 능가하는 세습지배구조, 조카며느리까지 기업을 확장하는 문어발식 족벌경영, 족벌기업 일감 몰아주기 및 주가 띄우기, 비정규직 양산의 주범인 중소기업 쥐어짜기, 영세자영업자의 영역까지 파고드는 소위 ‘통 큰’ 사업 등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재벌은 서민경제를 파탄내면서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민주화 시기에는 재벌에 대한 각종 규제와 견제가 이루어졌다. 그 후부터 우리는 재벌을 대기업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외환위기 사태 후 신자유주의의 무분별한 도입에 따라 대기업은 몸집을 키우며 어느 새인가 다시 과거의 재벌 이상이 되어 또다시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정부 들어와서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율은 25%에서 22%로 떨어졌고, 또 투자세액공제 등 각종 세제혜택으로 인해 실제 내는 실효세율은 17.0%로 낮은 수준이다. 이와 같은 법인세율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에서 거의 최저수준이다. 경실련 자료에 의하면 이 정부 3년간 15대 대기업의 사내 유보금은 32조2000억원에서 56조9000억원으로 76.4% 증가했다. 지난 10년간 대기업의 고용은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었다. 이런데도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부자는 미워하되 기업은 미워하지 말자’며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장관이 무지한 건지 아니면 친(親)재벌인 건지 알 수가 없다. 재벌을 이대로 두고서 선진국 진입을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재벌개혁 없는 선진화란 불가능한데, 정부는 지금 그런 재벌에 휘둘리고 있다. 정치권이 재벌개혁에 나서야 할 이유다.”(정두언 전 최고위원)

    “감세 철회와 등록금 완화를 부자와 기업을 미워하는 것으로 보는 (박재완 기재부 장관의) 시각 자체가 천박하다. 문구·떡볶이 시장까지 독식하는 대기업의 이익 ·성과 지상주의 행태를 미워하는 것이다.”(정태근 의원)

    물론 모두가 이런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김무성 전 원내대표는 “비굴하고 기회주의적인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포퓰리즘을 막아내지 못하면 한나라당 간판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부적절한 비판(예컨대 북한 세습체제에 빗대는 표현)이나 부정확한 사실관계(전경련 측은 30대 대기업의 고용이 100만명을 넘어섰고,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10만명이나 늘었다고 주장한다)를 근거로 한 일방적 비판은 오히려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미국의 워런 버핏이 재산의 반을 사회에 주자고 했다. 자기들이 돈을 벌게 해준 제도가 안정돼야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은 부자들이 각성을 하고 나선 것인데 우리도 대기업과 부자들이 각성했으면 좋겠다.”

    재벌개혁 의지 있긴 한 건가
    全津雨

    1949년 서울 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 초빙교수

    저서 :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의 말이다. 총수 일가가 회사를 만들면 계열사가 일감을 몰아줘 단박에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게 하는, 그렇게 부(富)를 대물림하는 우리의 천민자본주의 풍토에서 각성이 쉽겠는가. 하지만 ‘재벌 만능주의’는 머잖아 종언을 고할 것이다. 재벌의 불공정한, 부정의한 행태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게 다수 국민의 생각이라면 그것은 포퓰리즘이 아니다. 시대정신이다. 남은 의문은 과연 이 정권에 진정 재벌을 개혁할 의지가 있느냐는 점이다. 당과 정부, 청와대가 서로 엇박자를 낸대서야 재벌개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겠는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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