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호

미녀총리‘잉락 친나왓’의 등장과 태국정치

선거는 이겼지만, 태국을 통치할 수 있을까?

  • 정호재│동아일보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1-07-22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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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3일 치러진 태국의 총선은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이 이끄는 ‘프어타이(Peua Thai)당’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전체 500석 가운데 단독정부 수립이 가능한 263석을 싹쓸이한 것이다. 이로써 올해 44살의 미녀 정치신인 잉락은 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총리 자리(제28대)를 예약했다.

    잉락은 탁신 전 총리의 막냇동생이다. 이제까지 그 어떤 공직 경험도 없던 그는 선거가 치러지기 불과 두 달 전 ‘히든카드’로 선거에 투입됐고, 단기간에 국민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조기 총선이 확정된 5월 초 프어타이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호각세였음을 감안하면 잉락의 등장은 분명 충격적 반전카드였다.

    반면 지난 3년 가까이 정권을 유지했던 민주당 소속의 아피싯웨차치와(47) 전 총리는 충격적 대패 속에 당의 미래를 재설계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일단 군부와 민주당 모두 선거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정권이양은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태국의 정치혼란은 이번 선거 결과로 종언을 고한 것일까?

    “선거에서 승리한 자는 통치할 수 없고, 통치하는 자는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The election winners can‘t rule and the rulers can‘t elections)”(그램 도벨 오스트레일리아 언론인).

    선거가 끝난 직후 호주의 유명 언론인은 태국의 정치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2006년 9월 태국에서 19번째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만 5년 가까이 지속된 권력 공백에 대한 촌철살인의 정리인 셈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자’는 말 그대로 탁신과 ‘레드셔츠’로 대표되는 친(親)탁신계 정치세력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친탁신파는 지난 10년간 치러진 5번의 선거에서 ‘5연승’이라는 기적적 성과를 일궈냈다. 이전까지 군인과 관료 혹은 지방실력가들이 좌지우지했던 태국 정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군부쿠데타와 사법쿠데타로 인해 집권여당인 ‘타이락타이(TRT)’와 ‘국민의 힘(PPP)’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수장인 탁신 역시 탈세혐의로 재산을 압류당하고 여권까지 잃은 채 두바이에서 망명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통치하는 자’는 군부와 민주당을 지칭한다. 선거에서 5번 모두 패배했지만 군부와 왕당파(옐로셔츠)의 확고한 지지 속에 2회, 탁신이 실각한 이후 도합 3년에 걸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쿠데타 감행 이후 치러진 2007년 선거보다 더 치밀하게 권력기관을 활용해 친탁신 세력을 무력화하고, 민주당을 현대적 대중정당으로 변신시켜 정당성 확보를 시도했으나 또 한 번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민주주의의 최전선?

    우리에겐 ‘관광지’일 뿐이지만, 태국, 즉 타일랜드(Thailand)는 면적 51.4만㎢(한반도 2.2배) 인구 약 7000만명, 1인당 국민소득 약 8000달러를 기록 중인 동남아의 강국이다. 특히 푸미폰 국왕을 중심으로 한 안정된 정치체제, 오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다양한 역사유적, 물건 값 싸고 활기찬 방콕 시내 그리고 천혜의 자연조건까지 갖춘 태국은 그 자체로 상당히 ‘호감’이 가는 나라다. 그런데 2007년부터 2010년까지의 정치현실은 이 같은 상식을 무참히 깨뜨렸다. 도심 한복판에서 사제폭탄이 터지고, 국제공항과 총리공관이 무장 시위대에 점거됐으며, 외신기자까지 총에 맞아 죽어나간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국가가 된 것이다. 2010년 4월에만 무려 100여 명의 시위대가 사망했고 건물 수십 채가 불에 타는 무정부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우리가 태국의 미덕을 논할 때 흔히 언급했던 “쿠데타조차 피를 부르지 않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지 못한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다”는 식의 전설 같은 미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이번 총선의 결과는 태국 사회가 드디어 21세기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티티난 퐁수티락 태국 출라롱콘 대학 교수).

    우리가 태국의 정치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60여 년 가까이 반공(反共) 친미(親美)를 중심으로 이어온 태국의 왕정체제의 밝은 면만이 지나치게 미화되면서 발생한 한계”라고 지적한다. 1945년 체제가 성립된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수평적 권력 교체가 이뤄지지 않은 채 내부 갈등, 특히 빈부 갈등이 누적돼왔다는 얘기다.

    동남아시아 정치를 논할 때, 흔히 태국에 대해 ‘정치학의 박물관’, 혹은 ‘전시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그만큼 정치가 복잡하다는 얘기다. 실제 태국에는 ‘사회주의’ ‘군사독재’ ‘총독제’ ‘의회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왕정’체제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11년 현재 동남아시아의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은 치열하다. 미얀마(구 버마)에서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중심으로 60년 이상 지속된 군부독재와 민주주의의 동거를 위한 협상이 벌어지고 있고, 가장 선진화됐다는 말레이시아조차 50년 이어진 집권여당 UNMO에 대한 공정 선거 요구 시위로 거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가운데 태국이 동남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전선으로 떠올랐다. 농민과 도시빈민들은 ‘레드셔츠’를 입고 1인1표제에 입각한 헌법의 준수를 요구하고 나섰고 방콕의 중산층과 왕당파는 ‘옐로셔츠’를 걸치고 왕에 대한 충성을 소리 높여 외쳤다. 태국은 동남아 국가 가운데 최초로 외부에서 주어진 힘이 아닌 내부의 요구에 의해 정치체제의 수평적 이동을 눈앞에 둔 셈이다. 이런 갈등의 한복판에 ‘탁신 친나왓’이라는 태국 제1의 부자 정치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아이러니에 가깝다.

    탁신/잉락 친나왓은 누구인가

    “모든 정치세력은 서로 만나야 하며 프어타이도 오늘 이 자리에 ‘복수’가 아닌 태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국민들은 여전히 제 오빠와 그가 과거에 시행했던 정책들을 생각하고 있고, 많은 분이 아직도 우리 가족에 대한 자비심을 갖고 있습니다.”(5월16일 프어타이 당의 총리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잉락 친나왓)

    그간 태국 정치에서는 ‘복수(復?)’란 표현이 횡행할 정도로 ‘레드’와 ‘옐로’의 대립이 절정에 달했다. 이번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군부의 재쿠데타’ 가능성이 피어오르고 양측이 또 한 번의 거리투쟁을 알게 모르게 준비한 것도 지난 3년의 경험이 너무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락 친나왓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국가화합에 도움이 될 것이다”는 표현으로 순식간에 화두를 ‘화합’으로 돌리는 패러다임 전환을 이뤄냈다. 여당 후보인 아피싯 후보와의 언쟁도 삼간 채 철저하게 대중에게 불교식 인사와 겸손한 표정으로 일관한 것이다. 미인대회 출신의 잉락은 기대에 200% 부응하면서 스타 정치인의 탄생을 알렸다.

    선거에서 승리한 잉락 친나왓은 탁신 친나왓(62) 전 총리의 막냇동생이다. 형제가 9명이나 되는 이 집안은 태국 북부의 치앙마이에서 ‘친나왓(Shinna- watra)’이란 브랜드로 일찍부터 섬유산업에 진출해 부를 축적한 화교집안이다. 이후 ‘탁신’이란 걸출한 경찰 출신 사업가를 배출하면서 1990년대 이후에는 태국 최대의 재벌로 성장했다.

    야심가 스타일의 탁신과 달리 잉락은 치앙마이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1991년 미국 켄터키 주립대학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큰오빠의 총리 등극 이후에는 주로 친코퍼레이션이나 SC Asset 등 ‘패밀리 비즈니스’의 관리인으로 활약했다. 잉락은 동지들의 잇단 배신에 몸서리친 탁신이 2007년 이후 형제들을 프어타이당의 전면에 내세울 때 방콕과 중부지구 책임자를 잠시 맡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의 일천한 정치경력을 이유로 들며 “잉락은 탁신의 아바타에 불과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잉락은 선거유세 과정에서 “나를 통해 오빠에 대한 지지를 보여달라”고 호소하는 등 오빠의 그늘에 많은 부분 의존했다. 그의 승리는 탁신이라는 브랜드가 여전히 태국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태국정치 전문가인 앤드루 워커 호주국립대(ANU) 교수는 “잉락이 탁신의 대중적 정책에 호응을 보이는 농촌 빈곤층을 결집시킴으로써 프어타이당의 단합을 이끌어냈다”고 분석했다.

    경찰사관학교 수석 졸업생 출신인 탁신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계와 관계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에서 두 번이나 유학생활을 했으며 텍사스 휴스턴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쌓은 IT사업 경험과 집안의 경찰인맥을 바탕으로 일찍이 정보통신 서비스 사업(IBM 임대업 등)을 시작했고 정관계 인맥을 활용해 1980년대 무선통신(삐삐)과 1990년대 이동통신, 위성통신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994년 태국의 대표적 불교정치인 잠롱 전 방콕 시장의 후원을 등에 업고 정계에 입문해 빠르게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각됐다. 1998년, 탁신은 첨단 마케팅 기법과 현대적 정책을 앞세운 타이락타이당(TRT)을 창당하고 2001년 1월 선거에서 과반에 근접한 득표로 제23대 총리에 올랐다. 집권 초기 탁신은 태국 중산층의 집결지인 방콕에서 압승(37석 중 29석)을 거둘 정도로 이제까지 군부와 관료가 장악해온 태국정계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태국을 현대화하겠다는 ‘CEO총리론’과 경제성장론에 초점을 맞춘 ‘탁신노믹스(Thaksinomics)’로 무장한 탁신이 중산층과 서민의 압도적 지지를 등에 업고 강력한 대중정치와 사회통제정책으로 변신을 꾀한 것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태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 파숙 퐁파이칫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탁신은 이전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재선(장기집권)을 위해 당의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실제 국가기관을 그에 맞춰 움직였다. 1997년에 개정된 헌법을 최대한 활용해 선거에서 계속 승리할 수만 있다면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나 싱가포르의 ‘리콴유’처럼 20년 이상 장기집권이 가능하다고 믿고 행동한 것이다.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기득권과 공생해온 기존의 태국 정치인들과는 벌써 스케일부터가 달랐던 셈이다.

    실제 탁신의 집권 이후 경제는 외환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나 고도성장을 구가했고 탁신은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점차 정책역량을 서민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30바트 의료보험 정책이나 농민 부채 탕감 등의 태국판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실제 탁신 이전 태국의 경제적 불평등은 극심했다.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가 일본과 유럽의 경우 3~4배에 불과하다면, 태국은 13배에 달할 정도였다. 실제 1인당 GDP가 8000달러에 달하지만, 고졸 평균 임금이 4000바트, 우리 돈 16만원에 불과한 것이 당시 태국의 현실이었다. 농민과 서민들이 탁신의 정책을 반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탁신이 내세운 포퓰리즘이 그의 신념인지, 의도된 정치기획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집권 초기의 탁신이 사업가적인 마인드를 발휘해 현대사회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던 태국에 ‘가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성장에 고무된 탁신의 자신감이 불과 5년 만에 ‘독선’으로 이어져 관료 및 보수파와의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는 데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에 시작된 ‘마약과의 전쟁’에서 무고한 농민들까지 마구잡이로 희생시킨 점이나 2005년 태국 남부의 무슬림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 등이 꼽힌다. ‘선진 태국’을 기치로 내건 탁신의 사회통제정책이 과거 군부와 큰 차이가 없다는 점도 지식인들과 중산층을 실망시켰다. 결국 그는 경제회복을 주창한 CEO총리론을 넘어 기존 태국에서 존재하지 않던 ‘대통령(총통)’방식의 통치스타일을 선보임으로써 왕정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포퓰리즘? 왕권과의 대립?

    “지금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는 특권 엘리트 집단에 의한 정치적 음모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궁극에는 태국 국민이 투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습니다.”(2008년 10월22일 탁신의 성명)

    “탁신은 왕정을 폐지하고 대통령제로 변화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2008년 옐로셔츠 성명)

    따지고 보면 외국인들이 작금의 태국 정세에서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대목은 “부패한 정치인이었던 탁신이 여전히 환영받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2006년 9월의 군사쿠데타의 가장 큰 배경은 탁신의 부패에 있었고 이는 이후 자산조사위원회(일종의 특검)를 통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반면 탁신의 지지세력인 레드셔츠는 “탁신은 집권하기 전부터 부자였다”고 그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2004년 포브스는 탁신의 재산을 미화로 약 14억달러(1조6000억원)라고 추정했다. 문제는 탁신이 총리가 된 이후에 그가 소유한 주요 기업들의 주가가 2.5배 이상 뛰어오를 정도로 친나왓 가문은 총리인 탁신의 노골적인 특혜로 부를 불렸다는 점이다. 2006년 1월, 탁신은 온갖 논란에도 자신이 최대주주로 있는 태국 최대의 이동통신회사 AIS의 지분 49.5%를 싱가포르 국부펀드에 17억달러(약 2조원)에 매각하는 결정을 내린다. 문제는 이 거래에 법률을 교묘하게 활용해 단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농민과 서민들에게 이 같은 대목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동남아 지배구조 자체가 ‘부패’와 ‘특권’으로 점철돼왔기 때문에 탁신은 오히려 청렴한 측에 속한다는 반응도 나왔다. 지난해 시위현장에서 만난 한 치앙마이대 학생은 “우리는 청렴한 총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태국 사회를 변화시킬 정치인을 원했다”며 “군부와 관료들은 그럴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부패’를 넘어서 태국에서 최대 정치 쟁점은 탁신이 과연 왕정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에 모아진다. 방콕의 중산층들이 탁신에 반감을 갖는 이유는 태국 국민의 절대적 신망을 받는 왕실과 탁신이 갈등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군부와 옐로셔츠는 탁신이 군주제에 위협이 된다며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태국의 현대화를 주장한 ‘탁신’과 1945년 체제의 핵심인 왕권과 군부가 정면으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중산층 이상의 국민들도 “왕정 수호를 위해 탁신을 제거하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도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1981년에 총리를 역임한 쁘렘 띤술라논(91) 장군으로 대표되는 왕당파의 거두들은 그동안 왕실을 앞세워 군부의 이익을 유지해왔다. 태국의 상징이자 실질적인 정치세력인 푸미폰 국왕이 건강악화로 인해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왕당파들은 탁신을 기득권층의 미래를 위해 제거해야 할 1순위 정치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탁신은 이를 의식한 듯 2006년 실각한 이후에도 줄기차게 “왕권에 대항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반대로 군부와 왕당파는 탁신에게 부패문제와 더불어 ‘왕실모독죄’를 씌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결국 탁신을 ‘왕정폐지론자에 대통령병 환자’로 포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압승으로 1인1표제가 적용되는 현대 선거제도에서는 ‘포퓰리즘’으로 상징되는 대중정치와 국민의 의회정치 복원에 대한 열망이 사법부의 법리적 판단이나 군부의 미디어 조작보다 우위에 있음을 입증한 셈이 됐다.

    국제전으로 번진 보-혁 대결

    탁신을 둘러싼 갈등, 특히 ‘내셔널리즘’을 내세운 옐로셔츠의 득세는 비단 태국 국내정치에 한정되지 않고 민감한 국제이슈로 비화됐다. 특히 이웃국가인 캄보디아와의 국경 분쟁은 인도차이나 평화까지 위협하는 도화선이 됐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태국과 캄보디아 간의 국경 분쟁, 즉 프레아위히어 사원의 소유권 쟁탈전으로 양측은 교전 끝에 12명이 사망하고 4만명 가까운 주민이 피난을 떠나는 국제적인 분쟁거리가 됐다. 이 사건은 알고 보면 정국 장악을 위한 군부와 옐로셔츠의 노림수가 작용한 사건이었다. 2007년 친탁신계인 ‘국민의 힘’이 집권하던 시절 이웃국가와의 협력을 중시한 솜차이 총리가 프레아위히어 사원의 캄보디아 소유를 묵인하는 정책을 내놓자, 왕당파인 옐로셔츠는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벌이며 태국군부의 집결도구로 이 문제를 활용했다. 프레아위히어 사원을 둘러싼 무력대결은 태국 정치의 보수와 혁신의 대결이 대외정책에 미친 주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이밖에도 서쪽의 미얀마는 군부의 미래에 대한 관심으로, 남쪽인 말레이시아는 태국 남부 무슬림에 대한 탁신의 탄압에 대한 악감정으로 태국을 바라보고 있다. 말 그대로 ‘탁신’은 동남아시아라는 고요한 호수에 떨어진 복잡미묘한 돌멩이인 셈이다.

    태국의 레드셔츠와 옐로셔츠는 지난 5년간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서로에 대해 분명한 것 하나를 알게 됐다. 이미 양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실존 정치세력이며 한쪽이 한쪽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우선 탁신과 레드셔츠는 5번의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왕당파의 협조 없이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됐다. 반면 군부와 옐로셔츠는 60년 넘게 지속한 권력이 기존의 형태로는 존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물론 이런 결론의 바탕에는 보수와 혁신을 대표하는 양 세력이 의회 정치를 지속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전히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현실정치의 특성상 위태롭게 지속되는 왕정체제와 군부가 어떤 대응책을 내놓을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과연 탁신은 태국에 귀국하지 못한 채, 잉락을 통해 태국의 보수파를 아우르는 중도통합 정치를 지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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