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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⑥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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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보드카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국민주가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보드카는 무엇보다도 웬만한 재료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진 나라와 달리 자연 조건이 열악한 러시아로서는 큰 매력이다. 또 가격이 저렴하고, 어떤 자리에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장점 때문에 대중 술로 자리 잡기에 알맞았다. 여기에 보드카를 증류한 후 그 증류액을 여과시킬 때 사용되는 숯의 주원료인 자작나무는 러시아 타이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이다. 이는 위스키나 코냑의 숙성에 쓰이는 오크나무가 없는 러시아로서는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1995년 한 국가 원수가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숙소는 미국 정부의 국빈 전용숙소인 백악관 바로 앞 블레어 하우스였다. 그런데 방문 기간 중인 어느 날 밤 숙소 앞 펜실베이니아 거리를 경비하던 한 비밀경호원 눈에 속옷 차림으로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언뜻 보기에도 취기가 완연한 그는 바로 방문 국가 원수였다. 그는 취한 목소리로 “피자를 사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 밤 또 다른 경호원은 숙소 지하실 근처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자칫 불법 침입자로 오인할 뻔했다.

타국을 공식 방문 중인 국가 원수의 행동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이 기행(奇行)의 주인공은 한때 세계 정치권의 눈부신 각광을 받았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벌어진 이 황당한 사건은 사실 관계를 부인하는 옐친 딸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술에 얽힌 그의 행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무대 올라 지휘봉 빼앗은 옐친

그런데 옐친의 음주에 따른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전해인 1994년 8월 통일 독일을 공식 방문했을 때는 술에 취해 예정에도 없는 연설을 하는가 하면, 급기야 베를린시 야외 광장에서 열린 환영 음악회에서 갑자기 단상에 올라 연주 중인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을 빼앗았다. 연주 음악에 관계없이 술과 흥에 취해 신나게 지휘를 하는 돌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장면은 당시 독일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됐고, 이후 전세계 안방에 전달되면서 주정뱅이 옐친의 인간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후 미국 방문 중 귀국 길에 중간 기착한 아일랜드 샤논공항에서 그의 음주벽이 또다시 세계 매스컴의 주의를 끌게 된다. 샤논공항에서는 당시 아일랜드 총리였던 알버트 레이놀즈와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었다. 이를 위해 공항에는 아일랜드 총리 부부뿐 아니라 수십 명의 양국 고위 관리와 군의장대까지 도열해 옐친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비해기가 도착했다. 그러나 옐친은 끝내 비행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피곤이 겹쳐서 생긴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아일랜드 총리는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결국 솔레그 소스코베츠 당시 러시아 제1 부총리와 30분간 회담을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토록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로서는 전무후무할 정도의 음주 관련 기행으로 구설에 오른 옐친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1931~2007)은 우랄산맥 부근 부트카라는 마을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반 소비에트(anti-Soviet) 소요에 연루된 죄목으로 3년간 중노동형에 처해졌으며, 석방 후에는 한동안 직업 없이 지내다 간신히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베레즈니키의 푸시킨 고등학교를 나온 옐친은 1955년 공업도시 스베르들로프스크에 있는 우랄 기술대학 건축과를 졸업했다. 그 후 오랫동안 건축 일에 종사했다. 정치적으로는 1961년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1976년 스베르들로프스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 서기를 거쳐 198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됐으며, 이때부터 구소련 중앙 집권층과 연결됐다. 1985년 옐친은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 S. Gorbachev·1931~ )의 발탁으로 공산당 정치국(Politburo) 위원과 모스크바 시장(당 제1서기)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개혁 성향과 포퓰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이면서 단번에 모스크바 시민들의 인기를 끈다.

그러나 1987년 당의 개혁의지 부족을 비판하면서 고르바초프 측과 맞서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다. 해고 후 옐친은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심지어 자살 기도까지 한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였다.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옐친은 더욱 급진적 개혁논리를 주장하면서 수구적 자세의 고르바초프를 맹렬히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얻는다. 옐친 반대파들은 그에 대한 역공으로 그의 약점인 술주정에 관한 사례들을 공개하며 공격했지만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소련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옐친은 의회 내에서 공산당 권력독점의 폐기를 주장하는 야당 세력을 이끌었고, 1991년 6월12일 러시아공화국 민주 선거에서 5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당시 소련 대통령이던 고르바초프가 민 니콜라이(Nikolai Ryzhkov·1929~)는 16% 득표에 그쳤다. 이로써 옐친은 압도적 표차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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