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필 잭슨 LA레이커스 감독

NBA 최다 우승에 빛나는 스타선수 조련가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1-08-19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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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의 감독 생활 동안 11번 우승, 해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미국 프로농구(NBA) 플레이오프 진출, 통산 승률 7할, 플레이오프 승률은 6할8푼8리로 사상 최고, 역대 최단기간 1000승 돌파, 정규리그에서 단 한 번도 승률이 5할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음….

    과연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성적일까. 하지만 이 기록은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최근 은퇴를 발표한 필 잭슨 LA 레이커스 감독이다. 미국 프로농구(NBA)의 전설로 불리는 그는 양 손가락에 다 낄 수도 없는 무려 11개의 우승 반지를 보유해 NBA 최다 우승 감독이란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1989년부터 감독직을 수행해온 잭슨 감독은 시카고 불스 사령탑 시절 특유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삼각 공격)’ 전술을 통해 6번이나 챔피언(1991~93년, 1996~98년) 자리에 올랐다. LA 레이커스로 팀을 옮긴 후에도 5개의 우승 반지(2000~02년, 2009~10년)를 수집했다.

    NBA 역사에서 한 팀이 3시즌 이상을 연속 우승한 사례는 총 5번이다. 이중 절반이 넘는 3번을 잭슨이 만들어냈다. 하지만 보스턴 셀틱스와 미네소타 레이커스가 이룬 3연패는 NBA 전체 팀이 10팀이 안 되던 시절에 달성한 것이다. 즉 지금처럼 NBA 소속 팀이 20개 이상으로 늘어난 1960년대 이후 한 팀이 3연속 이상 우승한 사례는 잭슨 휘하의 시카고 불스와 LA 레이커스뿐이다. 그의 진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잭슨 감독의 이런 업적을 자신의 능력만으로 올린 성과가 아니라고 폄하한다. 실제 그는 시카고 불스 감독 시절 ‘농구 황제’마이클 조던을 포함해 스코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호레이스 그랜트 등의 슈퍼스타와 함께 했다. LA 레이커스에서도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 등을 선수로 두고 있었다. 잭슨 감독의 전매특허 작전으로 알려진 ‘트라이앵글 오펜스’ 역시 오랜 파트너였던 텍스 윈터 코치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좋은 선수와 강력한 전술만으로 11회의 우승을 차지한 건 아니다. 슈퍼스타와 함께 했음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감독이 한둘이 아닌 게 현실이다. 잭슨이 가진 강력한 무기는 뛰어난 용병술이었다.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스코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샤킬 오닐 등 과거 잭슨 감독이 지도했던 선수들은 실력이 뛰어났지만 그만큼 강한 개성과 자존심을 지닌 선수들이었다. 감독이 통제하기 힘들었고 성깔도 만만치 않았다. 잭슨 감독은 이 콧대 높은 스타들에게 신기에 가까운 용병술을 발휘해 11번이나 NBA의 정상에 올라섰다.

    심리전에 능해 ‘젠 마스터(Zen master, 禪師)’로도 불렸던 잭슨 감독은 선(禪)과 같은 동양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운동 외에 요가·명상·독서를 권유해 팀워크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즉 잭슨의 농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략과 전술이 아닌 심리다. 선수들의 심리와 성격 파악에 뛰어나고 그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선수들을 지도해 경기력을 최상으로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잭슨을 거친 수많은 스타 선수 중 유독 그와 많이 다퉜던 코비 브라이언트도 “잭슨 감독이 다른 감독과 다른 점은 용병술이다. 그가 있어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고 칭찬한 바 있다.

    필 잭슨은 누구인가

    필 잭슨은 1945년 9월17일 미국에서 가장 조용하고 한적한 곳인 몬태나 주의 디어로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순복음 신앙에 심취한 사람들이었다. 잭슨의 부모는 잭슨과 다른 3명의 자녀를 종교적 규율에 따라 엄격하게 길렀다. TV 시청이나 춤추기 등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고 주말에는 반드시 교회에 가야 했다. 잭슨은 고등학생 때 처음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대학에 가서야 춤을 출 수 있었다. 어릴 적 그의 꿈 역시 목사였다.

    잭슨이 농구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몬태나 주와 인접한 노스다코타 주의 윌리스턴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그는 농구, 축구, 야구, 육상 등 다양한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2m가 넘는 신장이 뒷받침이 됐다.

    잭슨은 고등학교 시절 학교를 방문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스카우터 빌 피치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농구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빌 피치는 노스다코다 주립대 감독에게 잭슨을 유망주라고 추천했고, 덕분에 잭슨은 쉽게 대학에 입학해 심리학, 종교학, 철학을 전공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언젠가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농구 선수 필 잭슨이 NBA에 첫발을 들인 시기는 대학을 졸업한 1967년이다. 그는 그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뉴욕 닉스로부터 2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잭슨은 결코 뛰어난 공격 능력을 가진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부족한 자신의 공격 능력을 영리한 플레이와 뛰어난 수비 능력으로 채우며 팀의 핵심 벤치 선수로 맹활약했다.

    당시 잭슨은 능력보다 외모로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히피를 떠올리게 하는 장발과 콧수염, 유난히 큰 키와 넓은 어깨가 팬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잭슨의 별명은 ‘헤드 앤드 숄더(Head and Shoulders·머리와 어깨)’였다.

    심리전의 대가

    잭슨이 농구 지도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 건 1969~70년 시즌이다. 부상과 연이은 수술로 코트 위에 나설 수 없었던 잭슨은 벤치에서 임시 보조 코치로 활약하며 코치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 뉴욕 닉스의 레드 홀즈맨 감독은 상대팀 전력 분석을 위해 잭슨을 다른 지역으로 파견하는 등 적극 활용했다. 홀즈맨 감독은 “농구에 대한 잭슨의 이해도와 안목이 매우 뛰어나다”고 호평한 바 있다. 그해 잭슨은 보조 코치 겸 전력 분석가로 뉴욕 닉스의 우승에 일조했다. 1973년에도 다시 우승의 영광을 누렸다. 잭슨은 1979~80년 시즌 뉴저지 네츠에서 선수와 코치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플레잉 코치로 활동했다. 이 시즌을 마친 잭슨은 선수 생활을 완전히 마감했다. 이후 뉴저지 네츠의 보조 코치로 정식 고용돼 지도자로서 새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듬해 뉴저지 감독으로 부임한 브라운 감독은 “실력이 없다”며 잭슨을 코치직에서 해임했다. 당시까지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던 잭슨은 더 이상 NBA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결국 그는 1982년 NBA 하위리그인 중국프로농구(CBA)의 알바니 패트룬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2년 뒤인 1984년 알바니 패트룬스에서 감독으로서 생애 첫 우승을 맛본다. 당시 그는 시즌 중에는 패트룬스의 감독으로 활동하고, 비시즌에는 푸에르토리코 등지에서 코치로 활약하며 지도자 경험을 쌓았다. 자랄 때 접한 엄격한 기독교 문화와 중국에서 접한 불교, 선 등의 동양 문화는 그를 심리전의 대가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87년 잭슨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NBA 인기 팀인 시카고 불스의 보조 코치로 임명되어 NBA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시카고 불스 구단은 1989년 시카고가 플레이오프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패하자 덕 콜린스 감독을 해고하고 잭슨을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잭슨의 나이는 42세였다.

    감독이 된 잭슨은 보조 코치 시절 자신과 같이 보조 코치로 활동했던 텍스 윈터(87)를 중용했다. 윈터는 바로 그 유명한 ‘트라이앵글 오펜스(삼각 공격)’의 창시자다. 윈터가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가지고 불스에 온 시기는 1985년이었다. 하지만 시카고 불스라는 팀이 이 전술의 가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적절하게 활용하기 시작한 시점은 잭슨이 감독에 오른 1989년이었다.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3명의 선수가 삼각형을 이뤄 좋은 슛 기회를 노리는 공격 방식이다. 또는 다섯 명의 선수가 두 개의 삼각형을 만들 수도 있다. 공격수들이 이 공격 방식에 익숙해지면 상대 수비는 이를 막아내기가 매우 힘들다. 한 선수가 앞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 나머지 두 명이 선두 선수를 보조하면서 공을 주고받아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전술의 또 다른 장점은 전체의 호흡을 맞춘다는 점이다. 이 공격법은 특정 슈터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어떤 공격수건 공간 확보가 잘된 선수가 슛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스타 선수가 아니더라도 시스템의 움직임에 따라 슛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스타가 아닌 선수가 슛을 많이 던지면 눈총을 받는 게 보통인데 이 전술에서는 그렇지 않다.

    잘만 활용하면 스타 선수는 겸양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고, 스타 선수가 아닌 선수는 자신감과 적극성을 기를 수 있다. 즉 팀워크가 약한 팀에서는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일단 팀워크가 다져진 팀에서는 이 전술을 통해 선수들의 단결력이 더 강해지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된다.

    이 공격법은 단순히 공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트라이앵글 오펜스 전술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공격수들이 이기심부터 버려야 한다. 모든 공격자가 득점 지역 내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모두가 패스와 득점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팀 동료와 협력하는 공격을 하다 보면 수비에서의 협동심도 자연히 길러진다. 이는 선수들로 하여금 내가 맡은 상대팀 선수는 오직 1명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수비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한다.

    당시 시카고는 마이클 조던과 스코티 피펜이라는 리그 최고의 콤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득점력이 떨어졌다. 5명의 선수 중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는 공격력이 극히 부족했다. 게다가 당시 NBA 동부 지구의 최강자였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마이클 조던만을 봉쇄하는 ‘조던 룰’ 전략으로 시카고의 앞길을 번번이 가로막았다. 디트로이트를 꺾지 않고서는 우승은 절대 불가능했다.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힘

    잭슨 감독은 디트로이트를 꺾기 위해 팀이 더 효율적인 공격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통해 실현됐다. 잭슨이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에 시카고 불스는 동부 지구 결승에서 7차전 끝에 디트로이트에 또 한 번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1년 플레이오프에서 디트로이트를 4전 전승으로 물리쳤다. NBA 파이널에 진출해서는 서부 지구의 강자 LA 레이커스마저 꺾으며 구단 역사상 첫 우승을 일궈내는 데 성공했다. 잭슨 감독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도입이 우승으로 향하는 해답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이후 시카고 불스의 행보는 워낙 유명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시카고 불스는 1991년부터 1993년,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두 번의 3연패를 기록하며 명실상부한 1990년대 최고의 팀이자 NBA 최고의 왕조로 군림했다. 한 팀이 3회 이상 연속 우승을 기록한 건 1966년 보스턴 셀틱스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첫 3연패를 달성했을 때부터 잭슨의 능력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잭슨을 폄하하는 측은 마이클 조던, 스코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라는 3명의 스타 선수가 있으면 누가 감독이어도 우승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우승을 견인한 전술인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창시자가 잭슨이 아닌 윈터라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잭슨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면이 있다. 텍스 윈터는 캔자스주립대 감독 시절에 만든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들고 1972년 휴스턴 로케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윈터는 당시 지역방어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던 NBA에서 이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휴스턴 로케츠의 감독으로 재직하는 2시즌 동안 윈터가 올린 성적은 고작 51승78패였다.

    로드맨의 영입과 두 번째 3연패

    즉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분명 잭슨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존재했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이 전술의 창시자조차 이를 잭슨만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앨런 아이버슨, 찰스 바클리, 칼 말론 같은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한 감독이나 팀도 단 한 번의 NBA 우승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잭슨의 성공을 단순히 선수 덕, 전술 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993년 팀의 핵심 선수인 마이클 조던이 아버지를 잃으면서 시카고 불스 왕조에도 문제가 생겼다. 조던의 아버지인 제임스 조던은 1993년 7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두 명의 십대에게 피살됐다. 이 일로 마이클 조던은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아버지를 잃기 전부터 도박으로 경력 관리에 문제가 있었던 조던은 급기야 은퇴를 선언했다.

    조던이 팀을 떠나자 모든 언론과 농구계 인사들은 조던을 잃은 시카고 불스를 과소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94년 시즌, 시카고 불스는 NBA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우승 후보로 군림할 만한 성적을 냈다. 진짜 시련은 1994년에 찾아왔다. 호레이스 그랜트마저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팀의 주연인 마이클 조던도 없고, ‘주연 같은 조연’이었던 호레이스 그랜트까지 이적하자 스코티 피펜 하나만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크게 흔들리던 시카고 불스는 1995년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면서 재정비 기회를 잡았다. 이때 잭슨은 대단한 모험에 뛰어들었다. NBA 어느 팀에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던 당시 최고의 악동이자, 팀 내 핵심 선수인 스코티 피펜과 극도의 갈등 관계에 있던 데니스 로드맨을 시카고 불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심리학을 전공한 만큼 잭슨은 자신이 로드맨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잭슨은 조던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로드맨의 리바운드 능력이 팀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조던-피펜-로드맨은 환상적인 팀워크를 선보이며 눈부신 성과를 이뤄냈다. 3명이 합작해 한 경기에서 50점 이상을 득점하는 일도 잦았다. 이 3명은 현재까지 NBA 역대 최고의 삼각편대로 불린다.

    이를 바탕으로 시카고 불스는 재기에 성공했다. 1995~96년 시즌 시카고 불스는 정규 시즌에서 72승10패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역대 최고 승률 기록을 경신했다. 이 시즌 플레이오프 성적까지 합친 시카고의 성적은 무려 87승13패였다. 역시 역대 최고 승률 기록이었다. 잭슨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96~97년 시즌 중 열린 NBA 출범 50주년 행사에서 NBA의 명장들인 레드 아우어바흐, 팻 라일리 등과 함께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10인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시카고 불스는 1995~96년 시즌부터 1997~98년 시즌까지 다시 한 번 3연속 우승에 성공하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 잭슨의 리더십에 대한 논란도 수그러들었다.

    특히 영입 당시 많은 우려를 낳았던 데니스 로드맨은 이 기간 NBA 최고의 리바운드 능력을 보여줬다. 코트의 악동은 순식간에 영웅으로 변했다. 앙숙이던 스코티 피펜과도 잘 지냈다. 피펜은 한 인터뷰에서 “조던이 득점을 하고, 로드맨이 리바운드를 하면, 나는 그 나머지를 하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세 사람의 역량이 팀 내에서 얼마나 잘 어우러졌는지를 증명하는 발언이다.

    LA 레이커스와 밀레니엄 왕조

    시카고 불스의 1998년 우승 직후 NBA는 역사상 두 번째 파업에 돌입했다. 임금 문제를 둘러싼 선수 노조와 각 구단의 입장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양측은 당시 무려 7개월 동안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1998~99년 시즌에는 불과 50경기만이 치러졌다. 직장 폐쇄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이미 30대 후반으로 접어든 마이클 조던은 2번째 은퇴를 선언했다. 조던 외에도 숀 켐프 등 베테랑 스타플레이어들이 코트를 떠났다.

    1999년 1월 잭슨 감독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은퇴를 선언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는 LA 레이커스와 5년 계약을 맺으며 감독직에 복귀한다. LA 레이커스 구단주가 그를 영입한 이유는 시카고 불스에서 슈퍼스타를 다루는 능력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당시 LA 레이커스에는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슈퍼스타 듀오가 있었다.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는 개성이 매우 강한 선수들이었고 서로 잘 어울리지 못했다.

    잭슨 감독은 이 까다로운 두 선수를 잘 조율하며 LA 레이커스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두 선수는 최고의 ‘원투펀치’를 구축하며 팀 내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공룡 센터 샤킬 오닐이 경기를 지배했다면, 재간둥이 코비 브라이언트는 승부처에서 어김없이 진가를 발휘했다. 오닐은 안에서, 브라이언트는 밖에서 활약하며 최고의 콤비네이션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LA 레이커스는 1999~2000년 시즌부터 2001~02년 시즌까지 3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잭슨은 명실 공히 최고 감독 반열에 올랐고, 오닐과 브라이언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오닐은 3번 우승하는 동안 챔피언전 MVP를 독식했다. 그야말로 오닐의 전성시대였다. 사람들은 두 선수를 밀레니엄 듀오, LA 레이커스를 밀레니엄 왕조라 불렀다.

    LA 레이커스는 3연패를 달성하면서 엄청난 위용을 뽐냈다. 밀레니엄 왕조의 시작을 알린 1999~2000년 시즌에는 무려 67승을 달성했다. 특히 2000년 2월4일부터 4월16일까지 치른 35경기에서 무려 33승2패(19연승-1패-11연승-1패-3연승)라는 놀라운 기록을 냈다. 이때 우승은 LA 레이커스가 무려 11년 만에 달성한 우승이었다.

    NBA 최다 우승 감독이 되다

    2000~01년 시즌에도 LA 레이커스의 기세는 엄청났다. 1999~2000년 시즌이 정규 시즌에서의 기세가 대단했다면, 2000~01년 시즌에는 플레이오프에서의 위력이 두드러졌다.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1차전을 내줬지만, 이후 내리 4연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서 전무후무한 승률을 올렸다. 2001년의 우승은 플레이오프 역대 최고 승률 우승(15승1패)이었다. LA 레이커스는 2001~02년 시즌에도 챔피언 결정전에서 뉴저지 네츠를 손쉽게 꺾고 대망의 3연패를 달성했다.

    영광 뒤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2001~02년 시즌 직후 오닐은 브라이언트와 팀 내 주도권을 놓고 본격적으로 다투기 시작했다. 잭슨 감독의 용병술로 다루기 힘들 정도로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 둘의 다툼은 칼 말론과 게리 페이튼이 합류하며 사상 최고의 라인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2003~04년 시즌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이런 우수한 전력으로 NBA 챔피언 결정전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패하자 둘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990년대 후반 샤킬 오닐이 LA 레이커스로 막 이적했을 때, 브라이언트는 이제 막 NBA에 데뷔한 고졸 신인이었다. 당시 오닐은 자신이 코비의 큰형이 되겠다고 얘기했지만 정작 코비는 누군가의 어린 동생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이에 오닐은 코비가 자신의 리더십과 경험을 무시한다고 여겼다. 둘의 갈등은 2001~02년 시즌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당시 오닐은 발가락 부상으로 시즌 초반에 결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브라이언트는 오닐의 부상 원인을 그의 불성실한 훈련 태도 때문이라고 언론에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2003~04년 시즌에도 둘의 갈등은 계속됐다. 당시 브라이언트는 무릎 부상으로 시즌 전 트레이닝캠프에 불참했다. 이때 오닐은 “트레이닝캠프에 팀 전체가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으며 브라이언트는 팀에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브라이언트의 무릎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 브라이언트가 더 이타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오닐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으며 오닐이 지나치게 뚱뚱하고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는 선수”라고 얘기했다. 이런 와중에서 발생한 2003~04년 시즌 챔피언 결정전의 패배는 둘의 갈등에 완전히 기름을 부은 사건이었다.

    필 잭슨 LA레이커스 감독
    성격이 괄괄한 오닐은 LA 레이커스에 자신이나 브라이언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종용했다. 결국 구단은 거액의 잔여 계약이 남은 오닐 대신 더 젊고 몸값이 더 낮은 브라이언트를 택했다

    결국 샤킬 오닐은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되기에 이른다. LA 레이커스는 오닐을 마이애미로 보내는 대가로 브라이언 그랜트, 라마 오덤, 캐런 버틀러를 영입했다. 그리고 2006년 드래프트 1라운드 티켓과 2007년 드래프트 2라운드 티켓까지 받아내며 브라이언트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필 잭슨 감독은 LA 레이커스가 2002~03년 시즌과 2003~04년 시즌에 연이어 우승에 실패하자 2004년 감독직을 사퇴한다. 연이어 우승에 실패한 것도 문제였지만, 오닐이 떠난 팀에서 혼자 황제 노릇을 하던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지간한 스타 선수들을 잘 길들이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코비 브라이언트는 달랐다. 특히 브라이언트는 2003~04년 시즌 도중 강간 혐의로 기소당해 법원을 들락날락하며 팀에 큰 해를 입혔다. 당시 잭슨 감독은 그를 두고 “지도할 수 없는 상태(uncoachable)”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커스 구단은 2005년 6월 다시 그를 감독으로 고용한다. 복귀한 잭슨은 LA 레이커스를 브라이언트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팀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결국 2008~09년 시즌과 2009~10년 시즌 2연속 LA 레이커스의 우승을 달성했다. 2008년 12월 잭슨 감독은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 2009~10년 시즌 우승으로 통산 11회 우승 기록을 세우며 통산 10회 우승의 존 우든 감독을 제치고 NBA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 반지를 차지한 감독이 됐다.

    필 잭슨의 성공이 주는 시사점 분석

    ① 리더는 심리전의 달인이어야 한다

    1994년 시카고 불스는 뉴욕 닉스와 플레이오프에서 격돌했다. 마이클 조던이 첫 번째로 은퇴한 직후여서 시카고 불스는 스코티 피펜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경기 종료를 몇 초 남겨놓지 않은 동점 상황에서 잭슨은 작전 시간을 요청했다. 그는 피펜에게 승패를 결정하는 마지막 골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피펜은 감독의 지시에 화를 내며 코트를 떠나버렸다. 해당 시합에서는 1점 차이로 간신히 이겼지만 피펜의 행동은 큰 문제를 낳았다.

    잭슨 감독은 피펜이 이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리더십에 도전하지 않은 선수라는 걸 잘 알고 꾀를 썼다. 그는 직접 피펜을 꾸짖지 않았다. 대신 고참 선수인 BJ 암스트롱, 빌 카트라이트 등을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피펜에게 노골적 비난을 퍼붓게 했다. 당연히 피펜은 이들과 심각하게 싸웠다. 이때 구경만 하는 척하던 잭슨 감독이 나섰다. 그는 피펜을 달래는 한편 팀 동료 전원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피펜을 타일렀다. 잭슨의 유연한 조치 덕분에 피펜은 팀원들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데니스 로드맨도 마찬가지다. 잭슨은 모든 팀이 거부한 로드맨을 우승을 위해 데려왔다. 당시 팀의 주축인 피펜과 최악의 관계였던 로드맨을 데려온 것은 말 그대로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던, 피펜, 로드맨을 한 팀에서 뛰게 하는 마법을 부리며 72승10패라는 기록적인 시즌을 만들어냈다.

    LA 레이커스로 이적할 때는 각 선수를 위한 책을 선수의 특성에 맞게 가져갔다. 그는 샤킬 오닐에게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배우를 꿈꾸는 릭 폭스에게는 할리우드 감독 엘리아 카잔의 자서전을 선물했다. 이는 그가 한 팀의 감독으로서 선수를 이해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으며,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시사하는 부분이다. 사람을 잘 다루는 잭슨의 마법은 선수에 그치지 않았다. 트라이앵글 오펜스 전술의 창시자인 텍스 윈터 코치는 자신을 고용해준 제리 크라우스를 버리고 잭슨을 따라 LA 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필 잭슨 LA레이커스 감독
    이처럼 그는 각 팀원을 잘 이해하고, 그들을 어떠한 전략으로 이용해야 그들의 역량을 가장 잘 끌어낼 수 있는지 알았다. 선수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기 위해 그가 사용한 또 다른 방법이 바로 젠(Zen)이다. 시카고 불스 시절 그는 시합 전 라커룸에 선수들을 불러 모아 명상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시간은 선수들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또한 잭슨은 경기 동영상 중간에 영화 장면들을 삽입해 선수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영화를 통해 선수들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잭슨은 팀 외부에서의 심리전에도 강한 사람이다. 그는 언론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며, 그의 훌륭한 언론플레이는 상대편의 가슴을 흔든다. 잭슨은 종종 심판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며 욕설을 퍼붓는다. 이 때문에 그가 낸 벌금만 수억원이 넘는다. 그의 언론 플레이는 상대 팀의 비난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자기 팀 선수를 보호하고, 상대팀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작용을 한 것도 사실이다.

    ② 스타 선수에 휘둘리지 말고 팀워크를 중시하라

    농구는 팀 스포츠다. 5명 중 어느 한 명만이 잘한다고 승리할 수 있는 운동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실력이 출중하고 주장이 강한 선수들끼리는 충돌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 전략만 좋아서도 성공할 수 없다. 잭슨 이전에 개발됐던 트라이앵글 오펜스 전술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선수 한 명의 역량이 최적의 전술을 만나 서로의 역량이 시너지 효과를 낼 때만 우승이 가능하다. 감독은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고 최상의 전략을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잭슨은 농구가 팀 스포츠라는 점을 언제나 강조했다. 그는 선수들을 훈련시킬 때도 개인 성적보다 선수들 간의 유기적 조화와 협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훈련 계획을 짰다. 시카고 불스 시절에는 항상 “불스 왕조의 비결은 조던이라는 걸출한 선수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선수 개개인이 팀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잭슨은 1989년 시카고 불스 감독으로 취임하자마자 조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의 실력보다 중요한 건 팀 동료의 성적이네. 동료들의 실력이 좋아진다면 우승도 멀지 않을 거야”라고 강조했다. 당시 불스는 조던이라는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5년간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팀의 고참 선수였던 BJ 암스트롱은 “잭슨 감독이 조던 같은 대선수에게도 팀 동료와 함께 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려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 바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가 경계한 건 자만심이었다. 특히 우승 직후를 우려했다. 잭슨은 “승리를 하고 나면 우쭐한 기분에 도취해 현실을 왜곡하는 선수가 많다. 선수나 코치 모두 자신이 승리에 가장 기여했다고 착각한다. 승리를 만든 사람이 우리가 아닌 나라는 오해를 하기 시작하면 해당 팀은 끝장이 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연습에 지각하거나 연습 경기에서 기량이 부족한 선수는 아무리 스타라 해도 가차 없이 주전 명단에서 제외했다.

    그렇지 않아도 훌륭한 선수였던 마이클 조던은 잭슨 감독 휘하에서 더욱 성장했다. 특히 잭슨이 주입시킨 팀워크의 중요성을 아는 슈퍼스타로 거듭났다. 잭슨도 이 점을 인정했다. 1999년 마이클 조던이 두 번째로 은퇴할 때 잭슨은 이런 말을 남긴다.

    “조던은 한 경기당 30득점을 넣는 게 쉬운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팀의 목표와 그의 팀 동료들을 더욱 우수하게 만들기 위해 이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헌신했다. 요즘 수많은 어린 선수가 건방진 태도로 NBA에 들어온다. 그들은 덩크슛 이후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고 상대방 선수를 약 올리거나 화를 내며 경기한다. 하지만 조던은 자신의 멋진 플레이에 우쭐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을 세우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팀 동료를 위해 거기 서 있을 뿐이었다. 이는 용감한 리더의 행동이었다. 조던의 코치가 된다는 건 큰 즐거움이었고 나는 그를 친구로 생각한다. 나는 그랜트 힐,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미래의 선수들이 조던의 품행과 그의 비이기적인 경쟁심(unselfish competitiveness)을 본받길 바란다. 그게 바로 우승 반지보다 더 중요한 그의 유산이다.”



    ●세계적 스포츠 리더 55인의 성공 패스워드(윌리엄 오닐 저, 이서규 역, 지식의 날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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