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축구에선 그래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

  • 입력2011-08-23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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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의 치욕(恥辱)’이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느냐만 한국축구가 위기를 맞은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축구공은 둥글고, 승패가 반드시 실력에 좌우되는 건 아니다. 볼 점유율이 압도적인 팀이 상대방의 역습 한 방에 무너지기도 한다. 그것이 축구의 묘미(妙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한일전에서 나타난 한국축구의 현실은 그렇게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당장 9월 초부터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이 시작된다. 한국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 레바논 등 중동국가와 한 조(B조)에 묶였다.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은 2011년 7월 현재 한국(28위)이 쿠웨이트(95위), UAE(109위), 레바논(159위)에 비해 월등히 높다. 역대 전적을 보면 쿠웨이트와는 8승3무8패로 호각을 이루고 있지만 2004년 이후는 3연승(10골 무실점) 했다. UAE와는 9승5무2패, 레바논과는 5승1무로 한 수 위의 전력이다. 객관적 전력으로 보면 5개 조에서 각각 상위 2개 팀이 최종예선에 오르는 3차 예선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중동원정 경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한국축구가 홈 앤드 어웨이 리그에서 최소한 조 2위야 못하겠는가.

    문제는 최종예선이다. 최종예선은 3차 예선을 통과한 10개 팀이 다섯 팀씩 두 조로 나뉘는데, 각조 1위와 2위 네 팀이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고 3위 팀끼리는 플레이오프를 거쳐 이긴 팀이 남미 예선 5위 팀과 마지막 한 장의 티켓을 놓고 겨뤄야 한다. 그동안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축구는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조 추첨에서 늘 톱시드를 받아왔다. 그 덕에 일본과 호주 등 막강한 상대를 같은 조에서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FIFA가 아시아축구연맹(AFC)에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조 추첨을 세계랭킹에 근거를 두고 하도록 권고했고, AFC는 FIFA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최근의 세계랭킹을 보면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이 16위로 가장 높고 호주가 23위로 그 다음이다. 한국은 28위로 세 번째. FIFA의 권고대로라면 최종예선 두 개조의 톱시드가 일본과 호주에 돌아간다. 한국이 일본 또는 호주와 같은 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중동의 강호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그리고 최근 전력이 부쩍 좋아진 카타르나 우즈베키스탄 등이 들어온다면 조 2위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자칫하면 7회 연속 오르던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을 수도 있다.

    물론 미리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의 ‘뻥 축구’에서 세밀한 패스와 빠른 속도를 기본으로 한 ‘조광래 축구’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도 없다. 조 감독은 한일전 참패가 “브라질 월드컵 3차 예선을 앞두고 좋은 보약이 됐다”고 했으니 과연 그렇게 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조 감독이 원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FC 같은 패싱게임은 개인전술, 즉 개인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어설프게 흉내 내려다가는 오히려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되기 십상이다.

    이번 한일전의 경우 스페인 같은 패싱게임을 보여준 팀은 일본이었다. 지난해 남아공 월드컵에서 기세를 올리던 독일이 스페인의 패싱플레이를 쫓아다니다가 제풀에 지쳐 패한 것처럼 한국은 일본의 빠르고 정밀한 패스에 끌려 다니다가 맥없이 무너졌다. 조 감독은 경기 전 “일본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했다”고 했지만 엔도 야스히토-혼다 게이스케- 하세베로 짜인 일본의 미드필더 조합은 여유 있게 한국진영을 농락했다. 한국 최고의 미드필더라는 기성용-이용래-김정우 조합은 남의 안방까지 들어와 활개 치는 그들을 제대로 혼내지 못했다. 새로운 중앙수비수인 이정수-이재성 조합도 한국 수비진 뒷공간으로 파고드는 일본의 날카로운 패스를 차단하지 못했다. 조 감독은 왼쪽 수비수 김영권이 발목을 다치고 교체멤버로 들어갔던 박원재마저 부상으로 나오면서 수비의 균형이 삽시간에 허물어졌고, 그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고 말했다.



    이청용(볼턴), 지동원(선덜랜드), 손흥민(함부르크SV) 등 주요 공격수들이 빠진 것도 패인이 됐다. 특히 붙박이 오른쪽 측면공격수인 이청용의 결장은 치명적이었다. 구자철(볼프스부르크)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나 ‘블루 드래곤’의 빈자리를 메우지는 못했다. 아직 이적할 팀을 확정하지 못한 원톱 공격수 박주영(AS모나코)은 경기감각을 잃어버렸고, 왼쪽 측면에 투입된 이근호(감바 오사카)는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역할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수 기용은 전적으로 감독의 권한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결과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기면 조용하고, 지면 시끄러워지는 법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40년 넘게 축구를 사랑해온 필자의 눈으로 볼 때 이번 한일전의 선수 기용은 실패였다. 전반 내내 오른쪽의 구자철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후반에는 구자철을 중앙으로 보내고 볼 컨트롤 좋고 발 빠른 남태희(발랑시엔)에게 오른쪽 측면 공격을 맡겼어야 한다. 구자철은 지난해 아시안컵에서 처진 스트라이커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 않았던가. 피로로 몸이 무거웠던 기성용(셀틱)을 빼고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던 김정우(상주)를 그 자리로 내렸어야 했다. 김정우가 국내 K리그에서는 골잡이일지 몰라도 국제경기에서는 원래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가 제격이다. 197㎝의 장신 공격수 김신욱(울산)은 분명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공격자원이기는 하지만 그의 머리를 겨냥한 높고 느린 크로스로 골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른쪽 수비수 차두리(셀틱)는 당당한 체구로 상대 공격수를 위압하고 빠른 스피드로 측면 공격을 지원하지만 종종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또 상대방 오른쪽 측면을 돌파하고도 크로스가 시원찮아 활약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상대팀에 따라 차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측면 수비수를 찾아야 한다.

    해외파는 분명 검증된 최고의 선수들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소속팀의 베스트는 아니다.

    경기에는 뛰지 못하고 벤치만 달구어서야 경기감각이 살아 있기 어렵다. 소속팀 경기에서 뛰어 피곤한 몸으로 장시간 비행을 하면 컨디션이 좋을 수 없다. 이번 한일전에서 전자는 구자철이었고, 후자는 기성용이었다. 경기 당일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는 선수가 베스트 일레븐이 되어야 한다. 해외파니까 무조건 베스트멤버로 쓴다면 국내 K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은 대표팀 명단에 이름만 올려놓는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해외파의 결장 및 부진에 덧붙여 국내에서의 경기조작 파문으로 핵심 수비수인 홍정호(제주)를 쓸 수 없는 등 이래저래 악재가 쌓인 결과가 한일전 참패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일본축구가 아무리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섰다고 해도 한국축구가 세 골이나 먹고 영패를 당할 만큼 약체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이제 일본축구가 한국축구에 한 발 앞서 있다는 점은 FIFA 랭킹에서 보듯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을 내 것으로 만들고, 상대에게 빼앗기지 않게 간수하고, 정확하게 이어주는 것이야말로 축구의 기본기다. 볼 키핑과 컨트롤, 패스가 제대로 돼야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다. 슈팅 능력은 공격수와 수비수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볼 키핑, 컨트롤, 패스는 공격수든 수비수든 공통으로 익혀야 할 기본기다. 기본기가 먼저이고 투지와 정신력은 그 다음이다. 한국축구는 그동안 투지와 정신력으로 일본축구를 꺾어왔다. 그러나 축구기술에서 밀리면서 일본에만은 질 수 없다는, 비장한 정신력으로 언제까지 상대를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축구는 기본기에서 일본에 뒤진다. 포지션별로 최고 선수들로 구성된 국가대표 팀이건만 여전히 엉뚱한 패스 미스를 남발한다. 볼을 키핑하기 위한 첫 터치부터 부드럽지 못하다 보니 패스의 질이 떨어진다. 특히 수비에서 공격으로 내주는 패스가 상대에게 잘리면서 곧바로 실점 위기를 맞는다. 불필요하게 공을 몰다가 빼앗겨 스스로 공격의 맥을 끊고 상대의 역습을 자초한다. 좌우 측면에서 올리는 크로스도 대체로 높이와 속도가 맞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열 번의 슈팅에서 골문을 향한 유효슈팅은 한두 개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한국축구는 수십 번의 슈팅을 하면서도 골을 넣지 못하다가 상대방이 날린 단 한 번의 슈팅에 골을 먹고 패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맨땅에서 볼을 차야 하는 질 낮은 축구 인프라에, 초중고에서부터 무조건 상대 팀을 이기고 봐야 한다며 체력과 투지를 우선시하는 일선 지도자들에게서 기술축구가 나올 리 없었다.

    축구에선 그래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
    全津雨

    1949년 서울 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저서 :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축구의 인프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유소년 클럽축구가 활성화되면서 어린 꿈나무들의 축구기술 수준도 높아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본기가 부족하다. 16강에서 스페인과 연장전 끝에 승부차기 7대 6으로 분패한 20세 이하(U-20)월드컵 선수들은 모두 ‘월드컵 키드(2002년 월드컵을 보고 자란 선수들)’로 그전에 비한다면 훨씬 나아진 환경에서 축구를 배웠을 터다. 그러나 이들 중 김경중과 백성동, 김영욱 등 네다섯을 제외하고는 볼 키핑, 컨트롤, 패스 등이 매끄럽지 못했다. 수비에서 공격으로 이어지는 패스의 질이나 슈팅은 여전히 선배 세대의 그것들처럼 거칠고 부정확했다. 1승2패로 16강에 턱걸이한 뒤 우승후보 중 하나인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몰고 간 정신력과 투지는 높이 사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청소년 축구가 세계적 수준이 됐다고 자찬(自讚)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기본기가 떨어지는 축구로는 세계무대에서 분패할 수는 있어도 낙승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축구에서는 내일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정치에서는 좀처럼 미래의 희망을 찾기 어렵다. 품격과 도덕성, 상식과 균형감각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새로운 정치 리더십의 출현은 정녕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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