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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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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누비는 포드사 제작 승합차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지금은 1920년대의 마지막 해. 작년부터 경성(京城)에 버스도 생겼다. 한 노선에 10대로 시작했는데 1년 반 사이에 10개 노선에 50대가 성황리에 운행하고 있다. 미국 포드사에서 제작한 8인승 승합차가 주종이다. 서양식 제복을 입은 운전수가 가차 없이 경적을 울려대며 장안 곳곳을 누비고, 곱지만 도도한 처녀 차장(車掌)이 찻삯을 받고 승하차를 안내한다. 전차보다 4할이나 비싼 요금을 내면서 승객들은 가끔 승무원에게 혼도 난다. 그래도 좋은지 목적지를 지나도 내리지 않고 바깥 구경에 넋이 나간 사람도 있다. 상류층을 겨냥한 택시도 300대 규모가 되었다.

한 시절의 영화를 대변하는 대저택의 적막한 문간에서 한림은 여러 상념에 잠시 아득했다. 솟을대문은 한때 최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나 차츰 2품 아래 신분으로 확산되어 내려가 양반가의 일반적인 상징물처럼 되어갔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4품까지 만이었다. 5품 이하 관료는 두 짝의 널판으로 된 그저 그런 평대문을 써야 했다. 갑오년의 경장(甲午更張) 전까지의 얘기다. 1894년 일본식 개혁의 회오리바람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자 중인계층에서 평대문을 헐고 솟을대문을 설치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어떤 양반들은 줏대 없이 살기 싫다며 대대로 내려오던 솟을대문을 스스로 헐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육중한 대문 한쪽이 삐걱 소리도 없이 열렸다. 청지기의 안내를 받아 한림은 행랑마당을 들어 중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른편으로 난 또 하나의 중문 틈새로 안마당과 안채가 시야에 들어온다. 안마당가로 연못도 보인다. 중문을 통과해 사랑채 마당에 들어섰다. 아흔아홉 칸 집(九十九間家)이다. 복덕방 말로는 집터가 1000평이 넘을 것이라 했다. 조선조에 궁궐과 공공기관이 아닌 주택으로서는 최대 규모다. 이 집의 주인은 한때 임금 아래 최고위직에 있었다.

문지방 너머 어둑한 골마루를 따라 대여섯 걸음을 옮겼다. 마루는 왼쪽으로 꺾어지면서 넓어진다. 사랑 대청이다. 40년쯤밖에 되지 않은 집이지만 한때 사랑방 손님은 말 그대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중에는 이완용(李完用)을 위시해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당시의 조정 대신(大臣)들도 있었다.



사랑방과 마루 사이, 밝은 창호의 영창문(映窓門)이 열렸다. 방 아랫목에 병풍을 등지고 앉은 어두운 잔영(殘影) 같은 몸체가 보인다.

동남향한 보료에 노인은 앉아 있다.

“왜 나를 찾아왔소.”

담뱃대를 물고 사방침(四方枕)에 기대앉았는데 얼굴의 살은 빠지고 은실 같은 백발이 성성하다.



을사년(乙巳年· 1905년) 보호조약 체결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있으면서 그 조약 체결에 최후까지 반대하다가 결국은 죄를 입고 물러선 한규설(韓圭卨)씨라 하면 조선근세사를 읽은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그의 행적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월은 긴 것 같으면서도 짧아서 어제 같은 그날이 벌써 25년.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지내겠습니까. 더욱 해가 바뀌니 때를 잃은 늙은 정치가의 음울한 흉중이 한층 더 회한에 싸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써둔 것이 며칠 전이다. 신년호 특집 기사의 하나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되는 내일 오후, 1930년 1월1일자 석간신문이 나온다. 신년호는 16면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평소의 배가 되는 지면에 여러 기획 기사가 며칠째 미리 준비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경술국치(庚戌國恥) 20주년을 맞아 병합(倂合)에 이르기까지 격랑의 세월을 되돌아보는 시리즈물이다. 그 첫 회를 한림이 맡았다. 새해의 첫 3일치 신문은 16면, 16면, 12면으로 증면(增面) 결정되었다. 거기 담길 기사의 절반가량을 늦어도 오늘 안으로는 만들어놓아야 한다. 내일은 또 내일의 기사가 있으니까.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자주독립의 의지를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이었던 독립문은 1897년 11월20일 준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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