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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리비아사태-포스트 카다피

석유 둘러싼 강대국 이권싸움이 ‘자유 리비아’의 운명 가른다

심층분석 - 카다피 몰락의 숨은 진실

  • 김영미│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gabjini3@hanmail.net

석유 둘러싼 강대국 이권싸움이 ‘자유 리비아’의 운명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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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카다피 대위의 등장

리비아의 역사는 곧 식민의 역사였다. 지중해를 끼고 북아프리카에 자리 잡고 있는 리비아는 원래 베르베르족들이 살던 평화로운 땅이었다. 7세기경 이 땅에 아랍 민족이 들어오면서 베르베르족은 사막으로 밀려나고 베드윈족이 리비아 땅에 살게 됐다. BC 631년부터 약 550년 동안 그리스의 식민지를 시작으로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만터키 제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됐고, 근대에 들어서는 이탈리아에 30년 넘게 혹독한 식민 통치를 받았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반부터 9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군정의 지배를 받다가 1951년에야 리비아라는 이름으로 겨우 독립했다. 기원전부터 식민의 역사였던 이 신생 독립국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독립 직후 즉위한 리비아의 국왕 이드리스는 그저 말뿐인 국왕이었다. 독립은 했지만 열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나세르의 영향력을 봉쇄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리비아에 군사기지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비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1955년 처음으로 리비아 유전 개발이 추진되고 1961년 석유를 수출하게 되면서 리비아는 최빈국에서 석유 수출국으로 변신했다.

리비아 사람들의 생활도 달라졌다. 양떼나 치고 밀농사나 짓던 유목민들이 석유 산업의 노동자가 됐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시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산유국 리비아의 돈은 특정 계층에게만 돌아갔다. 국민은 오일머니를 구경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석유는 있으나 기술과 인프라가 없었던 리비아는 결국 석유를 보고 몰려든 영국과 미국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 간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불만이 점점 끓어올랐다.

그럴 즈음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1967년 6월4일,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대한 응징과 아랍 국가의 공격 기도에 대한 자기 방어를 명분으로 공중 기습공격과 시나이 반도에 대한 대공세를 전개했다. 전쟁은 시리아·요르단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해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요르단 강·서안지구·골란고원 등을 점령했다. 그해 6월6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정전(停戰)결의안을 양측이 수락함으로써 같은 달 9일 정전이 성립됐다. 말 그대로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 것이다.



이 전쟁은 아랍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 편을 들어준 서방 국가 때문에 아랍이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서방 국가들에 대한 불만이 아랍 국가 전역에 들끓었다. 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리비아 노동자와 학생들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침략에 항의해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있던 영국과 미국 기업들의 재산을 공격했다. 석유 산업 노동자들도 이 공격에 적극 나섰다.

젊은 장교들은 은밀히 모여 쿠데타를 기획했다. 서방 국가에 굽실거리는 국왕 이드리스를 몰아내고 이집트의 나세르를 모델로 하는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신병 치료를 위해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객지에서 그대로 퇴위당해 터키로 망명하는 신세가 됐다. 무혈혁명으로 끝난 이 쿠데타를 이끈 지도자가 바로 무하마드 카다피 대위였다. 쿠데타를 일으키던 1969년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에 불과했다.

리비아식 사회주의

1942년, 카다피는 리비아 북부 사르테 사막지대에 있는 한 천막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목인인 베드윈족의 일파인 카다파 부족이다. 카다피는 전통적인 베드윈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사망했고 아버지 역시 이탈리아 항전에 참가한 전사 집안이었다. 어린 카다피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독립정신과 애국심을 키웠고 그의 아버지도 자녀 교육에 열성이었다. 덕분에 카다피는 다른 유목민 아이들처럼 양떼나 치는 아이로 자라는 대신 초등학교를 나오고 고등학교를 거쳐 1963년 벵가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막의 천막에서 자란 가난한 카다피로서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영국의 육군사관학교까지 진학해 집안에서 해외 유학을 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됐다.

카다피는 학창 시절 항상 혁명에 관한 연구를 즐겨 했으며 육사 생도 시절 ‘자주 통일주의 장교단’을 만드는 등 남다른 지도자 자질을 갖춘 총명한 젊은이였다. 그는 철저하게 이슬람적인 청렴결백한 삶을 지향했으며 담배도 술도 하지 않고 코란을 즐겨 읽는 검소한 생활을 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유년 시절을 보냈던 사르테 사막지대를 홀로 찾아가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외국에 순방하더라도 비싼 호텔 대신 베드윈식 천막을 공원에 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군인이 된 뒤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육군 대위 카다피는 1969년 9월1일, 11명의 동료 장교와 함께 수도 트리폴리에서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해 성공했다. 무혈 쿠데타로 사실상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27세의 나이로 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그해 11월에는 잠정 헌법을 공포하고 신생 리비아 공화국의 최고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쿠데타 이후 리비아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1969년 9월1일 리비아 비상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혁명위원장이 되면서 그는 총리와 국방장관과 국가평의회 의장과 국가원수를 모두 겸직하며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가 됐다. 그 후 43년간 그는 세계에서 제일 긴 장기 집권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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