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배고파 죽겠는데 세상은 다이어트만 권하네요”

‘진보 지향하는 고달픈 생활인’ 40대 23명 심층 인터뷰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1-10-18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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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마트한 안철수에 호감, “투표까지는 더 지켜봐야”
    • 진보 지향하지만 생활인…‘네거티브 보팅’ 선호 현상
    • ‘사오정’ 눈치에, 전셋값·사교육비 최고…‘노후 불안’이 가정불화로
    • 외로움에 샤워기 틀고 혼자 울어…“나이 든 40대 인정해야”
    • 가부장적 아버지와 비교하면 한숨…‘불륜’ 일탈행동 불러
    • ‘87년 체제’에 대한 의무감, 다음 세대에 넘겨줄 시스템 고민
    “배고파 죽겠는데 세상은 다이어트만 권하네요”
    “먹고살기 바쁜데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발은 현실에 붙어있지만, 머리는 이상에 붙어있으니 갈등할 수밖에요.”

    10월7일 오후 서울 당주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엄모(48·연구원)씨는 대한민국 40대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끊임없는 갈등’이라고 했다. 중·고교 다닐 때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박 터지게’ 공부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담배연기 마시듯 최루탄 연기 마셔가며 ‘박 터지게’ 데모했지만, 다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자신에게 “소 왓(So What)?”이라고 물으면 처진 배만큼 처량하단다.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는 그가 애처롭다고 느낄 때쯤, 동석한 임모(48·기업인)씨가 엄씨에게 술잔을 건네며 한마디 던진다.

    “우리는 집에서도 갈등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아버지 월급날이면 어머니는 돼지고기에 소주 한잔 올렸고, 형과 동생은 아버지께 존경의 눈빛을 마구 쏘아댔거든요. 집에서 식사시간은 곧 아버지 식사시간이었고요. 그런데 제가 옛날 아버지 나이가 되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애들 식사시간 지나면 밥 먹기 어려워요. 그래도 애들 공부시키면서 집 한 칸 마련해보려는데, 회사에서는 ‘사오정’이라고 눈치 주죠, 집에선 더 벌어오라고 하죠.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왜 자꾸 다이어트만 하라는 건지…. 샤워기 틀어놓고 울었다는 친구 얘기가 이해된다니까요.”

    어느 사회나 그 사회를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허리는 있게 마련이다. 한국 사회에선 40대가 그 역할을 한다. 한국의 40대는 820만여 명. 전체 인구의 17.1%를 차지한다. 대학 학번으로 치면 82학번에서 91학번 사이(1963~1972년 출생자)다.



    “배고파 죽겠는데 세상은 다이어트만 권하네요”
    그들은 어릴 적 새마을운동 노래가 들리면 빗자루를 들고 집 앞을 쓸었고, 한 반에 60명이 넘는 교실에서 공부했으며, 대학 때는 수업보다는 데모하는 날이 더 많았다. 40대 중후반이 직접 민주화 시위를 이끌고 동참했다면, 40대 초중반은 선배들의 민주화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의 위업을 이어가려 했다. 그리고 40대는 ‘한국적 상황’을 극복하면서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런 그들이 이제 또 다른 역할을 자처한다.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한국 정치구도를 흔들었던 ‘안철수 신드롬’. 안철수(49)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시장 불출마를 선언하며 신드롬은 막을 내렸지만, 그 충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돌풍의 중심 역시 40대다. 민주화 시위를 목숨 걸고 이끌며 4반세기 이어진 ‘87년 체제’를 만들었던 그들이, 지금은 다시 새로운 정치질서를 갈망하고 있다. 아직도 목이 마른 걸까.

    기자는 이 문제에 천착하면서, 2011년을 살아가는 40대 23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9월28일부터 10월7일까지 진행된 인터뷰는 주로 퇴근 이후 저녁시간에 개별, 혹은 6명 집단 형태로 이뤄졌다. 그들은 회사원, 정당인, 자영업자, 교수, 사업가, 탤런트 등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지만, 혼란스럽고 치열했던 20대를 보냈고, 20대보다 더 치열한 40대를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이제는 그 치열함을 내려놓고도 싶지만, 사회는 여전히 치열함을 강요한다며 허탈해했다.

    기성세대 이름 달고 보수화되는 세대

    “배고파 죽겠는데 세상은 다이어트만 권하네요”

    1987년 6월 민주항쟁 도중 최루탄을 맞아 숨진 고(故) 이한열씨 영결식.

    2011년을 살아가는 40대는 정치에 특히 할 말이 많았다. 이른바 ‘안철수 돌풍’과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그리고 지난해 경기도지사 후보에 이어 올해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못한 민주당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발언 순서를 정해줘야 할 만큼 논쟁이 뜨거웠다. 그들은 대체로 한국 정치에 대해 ‘아직 멀었다’고 평가했고, 상대적으로 기대가 컸던 야당의 무기력을 비판했으며, 함께 학생운동을 한 뒤 ‘젊은 피’로 제도 정치권에 진입한 인사들을 질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기성세대라는 이름으로 보수화돼가는 자신들의 모습이 아직은 어색하지만 제법 익숙해진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직장인 김경렬(46)씨의 말이다.

    “‘안철수 돌풍’은 대안은 아니지만,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거죠. 왜 그렇느냐. 우리가 지지했던 사람들을 보세요. 87년 체제 이후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제도권 정치에 들어갔지만, 결국 지역 연고나 이념적으로 맞는 사람들-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지칭-밑으로 들어가면서 제 역할을 못했다고 봐요. 학생운동을 이끈 사람이 DJ에게 큰절을 하지 않나…. 가끔 국정감사 때 보면 목소리만 크고 피감기관 관계자에게 면박 주는 사람 대부분이 ‘직업 운동권’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스마트한’ 이미지의 안 원장에게 호감을 갖는 거 같아요.”

    “오늘 신문을 보니 서울시장 후보 여론조사에서 박원순 후보가 나경원 후보에게 9.1%P 앞섰다고 나왔어요. 그런데 40대 지지율은 박원순 55.3%, 나경원 32.3%입니다(한국일보 10월3일 여론조사 결과). 23%P 차이예요. 왜냐? 치열하게 살아온 40대가 볼 때는 ‘온실 속 화초’ 같은 나 후보가 탐탁지 않은 거죠. 박 후보도 사실 ‘안철수 지지’로 반짝 효과를 본 사람이잖아요? 무소속으로 나오면서 민주당에 기대는 모습도 좋게 보이지 않고요. 5년만 젊었서도 당연히 박 후보를 지지했을 건데 이젠 신중해졌어요.”(86학번 공무원 최모씨)

    인터뷰이들은 안철수 원장의 비정치, 탈이념 이미지에 환호하지만, 대선후보로서 성장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데 공감했다. ‘안철수 돌풍’은 컴퓨터 보안 회사를 통한 성공신화, 상대적으로 토목·건축 이미지가 강한 이명박 대통령과의 대비, 미래 지향적인 분야의 개척자, 20대와 소통하는 지식 전달자 같은, 신선하고 도덕적인 안 원장 개인의 매력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 호감도가 표로 이어질지에 대해선 15명(65%)이 ‘더 지켜보고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배고파 죽겠는데 세상은 다이어트만 권하네요”

    현재의 40대는 민주화 시위를 이끌며 4반세기에 걸쳐 이어진 ‘87년 체제’를 만들었지만, 정당정치의 효용성은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40대의 신중함은 ‘신동아’의 최근 조사에서도 나타났다. ‘신동아’가 9월30일부터 1주일간 전국의 20~60대 5만명을 대상으로 한 ‘ASTAS(자동 감성단어 이미지분석프로그램)’ 조사 결과, 40대는 안 원장에 대해 가장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령대별로는 100점 만점에, 40대가 71점, 20~30대가 69점, 50~60대가 62점을 줬다. 호감도, 신뢰도, 매력 등 전 분야에서 40대는 안 원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안 원장이 2012년 대선에 출마할 경우, 40대의 현재 호감도가 득표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동아’가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R·R)에 의뢰해 10월6~11일 전국 40대 500명을 대상으로 ‘2012년 대선 지지 후보’ 설문 결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27.5%) △안 원장(19.8%)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8.4%) △손학규 민주당 대표(3.8%)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3.5%) 순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것은 ‘지지 후보가 없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이 26.0%였다는 점. 자세한 조사 결과는 ‘ASTAS 분석’ 기사(106쪽)와 ‘정치성향 분석’기사(114쪽)에 나온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자. 군 제대 후 민주화운동 최전선에서 시위를 이끈 양모씨(82학번)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안 원장을 비교해 설명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40대에게는 이상적인 아이콘이었어요. 떨어질 줄 알면서도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총선에 출마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한길을 간 사람. 인권변호사에 선명성까지 갖춘 그와 유복한 가정에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은 안 원장은 분명 비교됩니다. 만약 안 원장이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과 손잡고 동시에 다른 ‘대체재’가 없는 상황이라면 다시 바람을 일으킬 수는 있을 거예요. 하지만 노 전 대통령처럼 오랫동안 검증된 인물이 아닌 만큼 검증과정은 험난할 겁니다. 아직은 그에게 확신은 없어요.”

    그들은 1987년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고, 현재의 대통령중심제와 정당정치 시스템을 만든 주역이지만 그 효용성에 대해선 대체로 실망스러워했다.

    “우리나라 정당은 운영체계(OS)와 프로세스가 잘못된 컴퓨터 같아요. 좋은 인물이나 정책도 프로세싱을 거치면 불량품이 되어 나오거든요. 한국의 보수당, 한나라당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고 고리타분하고, 진보당이라는 민주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만들어놓고 발목 잡고 있잖아요. 40대들은 심정적으로 진보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생활인이기도 해요. 회사에서는 글로벌 경쟁 환경에 맞추는데, 반미(反美)를 옹호하는 듯한 당에 선뜻 표를 던질 수 없더라고요. 그러니 주로 ‘네거티브 보팅(Negative Voting)’을 합니다. ‘이 사람이 돼야 한다’고 투표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만 안 됐으면’하는 마음으로 투표하는 거죠.”(88학번 회사원 강모씨)

    “지금의 50대 선배들은 당시에는 ‘넥타이 부대’로 한 걸음 비켜서 응원했지만, 정말 우리는 죽기 살기로 뛰어들었어요. 그땐 민주화만 되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군부 인사들도 의회정치로 들어가고, 타도 대상이었던 인물들도 한 자리씩 하더라고요. ‘이 꼴 보려고 데모 했나’ 싶었는데, 운동권 인사들도 결국 양김(YS·DJ)씨의 전투조가 되더군요. 그러니 정당에 대한 기대는 많이 줄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노력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타협하는 체제를 만들었구나’하고 위로해요. 역사 발전의 한 단계? 허탈감?”(85학번 자영업자 최종한씨)

    “40대라고 해서 누구나 앞장서 민주화를 주창한 것은 아니에요. 저는 고향에서 ‘향토장학금’(그는 부모님이 농사지어 보내주는 등록금이라고 했다)을 받고 있었고, 부모님은 절대 데모하러 가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친구들은 데모할 때 저는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하면서 선배, 친구들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이 생겼어요. 그래서 투표할 때면 야당에 투표했어요. 그 부채의식을 덜어내려고요.”(83학번 공무원 배모씨)

    “인증샷 찍고 경선 즐기는 20대 부러워”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자란 40대들은 세상을 볼 때 선과 악의 구도로 선명하게 나누지만, 가끔 유연성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10월3일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참여경선장에서 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현장에 간 이모(44·정당인)씨의 푸념 섞인 말이다.

    “우리는 박영선 후보를 위해 민주당 당원을 (투표장으로) 끌어 모으느라 정신없었는데, 박원순 후보에게 투표하러 온 듯한 20,30대는 완전 축제 분위기였어요. 그들은 조국 서울대 교수와 소설가 공지영씨와 인증샷을 찍고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씨 사인 받는다고 ‘신나는 놀이판’을 벌이더군요. 낯설고 이상했지만, 오히려 저의 한계를 발견했어요. ‘조직을 동원하는 구태의연함에 빠진 나도 이제는 구시대 인물이구나’ 하는. 20, 30대가 부러웠어요.”

    5년 전 경기 성남시에서 치킨점을 개업한 김종윤(45)씨는 고교 졸업 후 전자부품 납품회사에 다니면서 활발한 노동운동을 했지만, 이제 ‘운동’ 보다는 생활에 방점을 둔다고 했다.

    “1987년에는 300원짜리 라면 한 그릇 먹으면서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어요. 어느 날 회사에 노조가 생기면서 직장 선배들과 ‘학습’을 했는데, ‘세계체제론’에 대해 공부했어요. 그때 미국과 부자에 대해 반감을 가진 거 같아요. 그런데 치킨가게를 운영하다보니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지금은 당시 회사 선배들이 가게에 찾아오면 불편해요. 아직도 미국 탓, 강대국 탓하며 사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요.”

    시사평론가 이종훈 박사(정치학)는 40대의 정치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40대 중후반은 자신들이 만든 87년 체제에 대한 일종의 의무감도 있고, 다음 세대에게 어떤 시스템을 넘겨줄지 고민하죠. 사회가 그들에게 ‘시대적 상징성’을 부여했잖아요? 그만큼 87년 체제는 완결된 체제가 아니라 넘어가는 계기, 잠정적인 체제였기에 40대가 느끼는 불완전함도 커요. 그들은 한국 사회를 이끌어야 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87년 체제의 불완전함을 고치고 가야 할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거죠. 더 늦기 전에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만들어놓자는 심정이지만, 40대는 생활인으로서 고민도 많을 시기이죠.”

    40대의 가장 큰 고민 ‘노후’

    “배고파 죽겠는데 세상은 다이어트만 권하네요”

    10년 전과 비교해 40대의 소득은 67.7% 상승했지만, 주택가격지수는 69.5% 높아졌다.

    이 박사의 말처럼, 40대 인터뷰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한국 정치가 아니라 ‘노후 생활’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생긴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 ‘사오정(45세에 정년퇴직)’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지도 오래다. 은퇴연령이 낮아지면서 40대가 경제활동의 중심에 섰지만, 그 무게는 다른 세대보다 훨씬 육중하다.

    과거에는 40대 때 열심히 벌어 내 집 마련과 자녀교육을 마친 뒤, 50대에 노후를 대비하는 사이클이 보편적이었다. 40대 때 자녀교육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50대 때 늘어난 연봉을 아껴 쓰며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에는 40대 초반부터 ‘이대로 회사에서 살아남아야 하나’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고, 생활하며, 자녀 교육시키며, 집 장만하며, 동시에 노후도 준비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하소연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 앞으로 각각 ‘월백(한 달에 100만원)’ 나가요. 일주일에 2,3회 하는 영어 40만원, 수학 40만원이죠, 학교 특기적성교육으로 피아노, 검도 한두 가지 시키면 사교육비만 기본 200만원입니다. 여기에 집 산다고 대출 받은 2억여 원의 이자만 100만원입니다. 생활은 팍팍해지는데 노후를 따로 준비할 여력이 없죠.”(89학번 회사원 이모씨)

    “1987년에 처음 입사 면접을 보는데 ‘회사와 집에서 급한 일이 동시에 생기면 어디로 달려갈 거냐’고 하더라고요. 저는 ‘회사’라고 했죠. ‘왜냐’고 묻기에 ‘회사가 나를 먹여 살리고, 동시에 가족을 먹여 살리니까 회사가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평생직장’ 개념이었으니 일종의 모범답안을 낸 거죠. 그런데 지금의 모범답안은 ‘집으로 가겠다’입니다. 학원에 애들 태우러 가야죠. 아내에게 혼나요(웃음).”(82학번 기업인 장모씨)

    이러한 40대의 고민은 최근 동아일보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산출한 ‘노후 경제행복지수’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후생활의 예상 만족도를 측정하기 위해 30~60대의 2000년과 2010년 경제수준을 비교했는데, 10년 새 40대의 월평균 지출은 53.2% 늘어나 250만원을 웃돌았다. 40대 월평균 소득은 2000년 223만9635원에서 2010년 375만5544원으로 67.7% 상승했지만, 이 기간 주택가격지수는 69.5% 올랐고, 가계부채는 285% 급증했다. 또 지난해 40대의 자녀양육비 월 지출액은 108만9371원으로 가장 많았다. 10년 사이 소득이 67.7% 늘어나는 동안 자녀양육비는 이보다 더(70.7%) 증가한 것이다. 결국 소득은 늘어도 집값과 사교육비가 더 올라 실제 쓸 수 있는 돈은 오히려 줄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미래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2000년에는 50대의 월평균 소득(234만여 원)이 가장 많았지만, 2010년에는 40대(375만여 원)가 ‘임금피크’ 세대가 됐다. 40대는 소득이 줄어들 일만 남았고, 지금 저축하지 못하면 노후 대비가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최혁민(46)씨는 ‘대출 이자’도 40대의 노후 대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말한다.

    “40대 중에는 ‘하우스 푸어’가 특히 많아요. ‘노후 대비’를 위해 집을 사려고 한 세대가 우리가 마지막일 거예요. 2005~06년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할 때는 우리 나잇대 사람들이 내 집 마련에 대한 욕구가 가장 컸던 시절이었어요. 자고 나면 수천만 원씩 오르는 걸 지켜보며 불안해하다가 결국 덜컥 ‘상투’ 잡은 거죠. 이후 세계금융위기 등으로 집값은 곤두박질쳤고 이제는 오를 기미가 없어요. 생활이 더욱 팍팍해지는 거죠.”

    ‘하우스 푸어(House Poor)’는 빚을 내 무리하게 집을 샀다가 대출 원리금 상환에 허덕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추산한 ‘연령별 하우스 푸어 분포’를 봐도 40대가 36만5000가구로 가장 많다. 국토연구원의 주거실태 조사에 따르면, 내 집 마련 평균 소요 연수는 2006년 평균 7.9년이었지만 2010년 말에는 9.01년으로 늘었다.

    탤런트 김모(43)씨는 최근 이슈가 된 무상급식에 40대가 찬성하는 것은 팍팍한 생활 때문만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40대들은 대체로 무상급식에 찬성합니다. 자녀가 대부분 학생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 가계 경제에 큰 보탬은 안 돼요. 그보다는 ‘힘든 40대 가장의 마음을 조금은 알아주는구나’ ‘차츰 복지가 확대되는구나’하는 위안, 즉 희망을 주는 면이 더 크다는 거죠. 반값 등록금에 대해서도 50, 60대는 ‘포퓰리즘’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40대는 희망을 보는 거 같아요.”

    “가난이 창틈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현관문으로 나간다”

    독일 시인 뮐러는 ‘가난이 몰래 집안으로 들어오면 우정은 서둘러 창문으로 달아나버린다’고 했다. 기자가 만난 40대들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가난은 아니지만,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고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사랑은 이미 현관문으로 나갔다’며 씁쓸해했다. 자신은 가족을 위해 살고 있는데, 가족은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40대 가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이유가 컸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아버지와 자신을 비교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우리는 ‘세상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돈다’고 배우고 커왔어요. 대문 앞에서 헛기침 한번 하시면 옷매무새를 고치고 나가 인사를 했어요. 노란 월급봉투와 시장에서 산 치킨 한 마리 들고 오시는 날이면 온 가족이 ‘아비어천가’를 불렀죠. 당시의 40대 아버지는 돈을 많이 못 벌어도 존경받았어요. 다들 못사는 시대이다보니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애들 등하교시키고 와이프 출퇴근 도와줘도 고맙다는 말 듣기 어려워요. TV를 봐도 ‘슈퍼 연하남’이 연상의 여인을 기쁘게 해주는 드라마가 대세잖아요?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보고 자란 우리는 허탈해요. 40대 이혼율이 높은 이유가 다 있다니까요.”

    “배고파 죽겠는데 세상은 다이어트만 권하네요”
    그들은 사교육비와 물가 인상 등으로 아내가 맞벌이에 나서는 가정일수록 가정불화가 심하다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이혼 숙려기간에 있다고 밝힌 조모(46)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제 월급으로 저축을 못하니 아내는 노후가 불안하다며 지난해부터 인터넷 쇼핑몰 전화상담사로 일했어요. 130만원 정도 받나? 원치 않은 맞벌이 부부가 되니 예상치 못한 다툼이 잦았어요. 어느 날 출근하는데 ‘음식물쓰레기 버리고 출근하라’더군요. 한바탕 싸우다보니 결국 아내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옵디다. ‘나도 힘들어. 당신이 많이 벌면 내가 왜 일해’라고. 누굴 탓하겠어요? 사교육비와 집값, 물가가 미쳐 날뛸 때 가장이 된 제 탓이죠.”

    회사 일과 가정 경제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겹치면 자연히 아내와의 잠자리도 멀어지게 마련.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자기 상실감에 빠지기 쉬운 40대라면 더욱 그럴 수도 있겠지만, 23명의 인터뷰이 중 절반 이상(13명)이 ‘공감’하는 걸 보면서 기자는 적잖이 놀랐다. 중견기업 부장으로 일하는 김모(45)씨의 사연은 우리 사회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듯했다.

    “5년 전 아파트를 샀는데 원금상환은커녕 이자 내기도 벅차요. 중학생 애들도 2명이고요. 그런데 7월부터 제 부서가 분사한다는 얘기가 돌면서 스트레스가 심해졌어요. 우리 부서는 경쟁력이 없어 ‘분사=퇴출’을 의미하거든요. 분사하지 않는 부서로 옮기려고 나름 직장 상사에게 로비도 하고 주말에 출근해 보고서를 냈지만 아직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인지 아내와의 잠자리 시간이 자꾸 짧아졌어요. 요즘은 가끔 치르는 ‘의무방어전’에 출전하기도 어려워요. 아내는 대놓고 ‘(잠자리에서) 동요 1절만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해요. 자녀교육을 위해 존댓말을 쓰는 아내는 짜증이 나는지 이제 반말을 해요. 그래도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지난달부터 ‘프릴리지’를 먹고 있어요.”

    “우리는 섹스리스 부부가 된 지 오래예요. 샤워하고 나는 컴퓨터 앞으로, 아내는 TV 앞으로 향한 지 벌써 5년째예요. 생활에 불편은 없지만 가끔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집에서도 외로우니까요.”(84학번 대학교수 김모씨)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권리

    “배고파 죽겠는데 세상은 다이어트만 권하네요”
    김씨가 말한 프릴리지는 조루치료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약회사 측은 프릴리지는 영어 ‘Privilege’에서 따왔는데, 선거권 같은 기본권을 의미한다고 소개한다. 즉 프릴리지는 ‘누구나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권리의 염원’을 뜻한다. ‘사오정’ 시대에 직장생활을 하며, 사교육비와 주택구입 비용에 가슴 치는 김씨에게서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은 이는 누구일까.

    통계청이 지난 4월 발표한 ‘2010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이혼 건수는 11만6900건. 남성은 40∼44세가 19.8%로 가장 높고, 여성은 35∼39세가 19.6%로 가장 높았다. 평균 이혼연령은 남성은 45.0세, 여성은 41.1세. 이혼 사유별로는 △성격 차이(45.4%) △경제 문제(12%) △배우자 부정(8.6%) 순이었다.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2011년 사법연감’을 보면, 이혼 사유 중 ‘성격차이’와 ‘경제 문제’는 줄어든 반면 ‘배우자 부정’으로 이혼한 비율은 5년 전과 비교해 6.0% 증가해 눈길을 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로서는 마음이 공허해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 머리엔 서리가 내려앉고 ‘아저씨 배’가 돼 있죠. 와이프도 신랑을 친구 취급하죠, 애들은 돈을 잘 벌면 아버님, 못 벌면 노인네라고 하죠. 농담이라고 하지만 은근히 언짢아요. 이때 누군가 나에게 잘해주면 당연히 마음이 혹하죠. 그런 친구가 한둘이 아니에요.”

    하긴 공자는 나이 40이면 불혹(不惑)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평균수명 40~50세 때의 말일 뿐. 요즘 40대는 20대에 이어 가장 고민과 갈등이 많은 ‘미혹(迷惑)’이다.

    김태훈 사랑샘터정신과 원장은 이러한 40대의 심리를 ‘행동화(Acting out)’로 설명한다.

    “회사에서는 긴장하고 가정에서는 스트레스를 받는데,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권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다보면 40대의 분노는 더 커질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는 방어기제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를 스포츠나 예술로 ‘승화’시키면 문제가 없지만 ‘행동화’로 나타날 경우 일탈행동으로 이어져요. 청소년의 일탈행동도 마찬가지죠. 행동한 이후 나타날 부정적인 결과는 고려하지 않고 욕구나 소망을 즉각 만족시키기 위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거죠. 스트레스가 심한데, 누군가 자신을 대접해주고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해준다면 이른바 ‘불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훨씬 높죠.”

    기자는 23명의 인터뷰이를 만나면서 그들은 짐을 내려놓고 정착하려 하기보다는 다시 길을 떠나는 유목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 농경지가 많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 떠나는 그런 유목민. 길 떠나는 그들에게 미국 시인 롱펠로의 시 한 구절은 작은 위안이 될 듯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은이들보다 기회를 덜 가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저녁의 황혼 빛이 사라지면 하늘은 낮에 볼 수 없었던 별들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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