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나를 인식하라 그리고 바꿔라 조금만!”

정서적 과부하 상태 ‘제2 청소년기’ 인정해야

  • 손석한│정신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com

    입력2011-10-18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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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인식하라 그리고 바꿔라 조금만!”
    40대가 바뀌었다. 그들은 1987년 민주화 항쟁 당시 젊고 피 끓는 학생의 신분으로 역사의 대변혁에 참여했고, 마침내 세상을 바꾸었다.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이뤄냈던 것이다. 주인공 의식이 그들에게 자연스레 심어졌고, 이어지는 시대 역시 그들을 빠르게 주역으로 등장시켰다. ‘386세대’ 정치인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고,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사회는 활기차게 흘렀고, 젊은 사람들의 입김이 거세어졌으며, 대한민국의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2011년 현재, 그들은 40대가 되어서 더욱 강해졌어야 하지만 오히려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사는 것이 더 팍팍해지고, 자녀교육에 등이 휘고, 노후 대비에 불안해하면서도 실제로 준비를 하지 못하는 무기력감에 싸여 있다. 심하게 말하면, 지금 당장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리고 언제쯤 나의 사회·경제적 능력이 종지부를 찍을지 불안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국제화 또는 글로벌화가 가속되면서 우리나라 경제는 미국이나 유럽의 기침 소리에도 몸살을 앓고 있고, 성장이 둔화된 채 고용 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빈부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기에, 사실 개인의 삶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같은 경제·사회적 요인이 각 개인의 정신건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40대의 심리 상태를 한마디로 규정짓는 단어는 ‘불만족’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과 자신 밖의 세계에 대한 불만족을 갖고 있다. 자신 밖의 세계란 바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다. 직장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포함한다. 그들이 20대에 꿈꿨던 세상을 이제 본격적으로 이루기 위한 주체는 바로 40대 자신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주인공이 아니다. 그저 들러리를 설 뿐이다. 386세대 정치인들이 국회에 입성할 때 그들은 박수를 쳤다. 기꺼이 들러리를 원했고, 조력자와 지지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학창 시절에 그들을 대표했던 학생회 간부였거나 또는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섰던 학우였기에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인 권력을 탐했고, 기성 정치인처럼 빠르게 노회해졌으며, 정치적 운신에 급급했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연연하는 모습이었다. 열정과 순수함이 사라진 그들에게 많은 학우는 실망했다. 그러나 대안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20대들에게 다시 한 번 대규모 항쟁을 일으키라고 할 열정도 사라지고 있다.

    능동성은 수동성으로, 행동은 말로, 승리감은 패배감으로, 자신감은 열등감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그래서 불만족이다. 심리적 불만족은 자연스레 불안정성으로 표현된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등장이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그들의 불만족이 응집되어 거대한 풍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잠깐 들뜬 채 거품은 곧 꺼졌다. 앞으로 ‘제2의 안철수’가 나타나면 그 거품은 금세 커지리라. 그러나 얼마나 지속될지는 장담 못한다. 그들의 불안정성은 분노와 좌절, 공격성과 적개심, 우울과 불안, 투사(남 또는 세상을 탓하기), 자기비하 등의 증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40대는 어른이다. 생물학적으로는 그렇다. 정신적 독립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심리학적으로도 어른이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젊은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잠시 생각해야 대답할 수 있다. 20년 전의 40대는 젊은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40대는 젊은 사람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어른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젊은이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평균 수명이 늘면서 노인인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안철수 신드롬’은 불만족 응집된 풍선

    그러나 사회적으로 젊은 사람 취급받는 40대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주역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에너지와 열정은 30대에게 뒤지고, 참신성과 아이디어는 20대에게 뒤지며, 노련미와 안정감은 50대에게 뒤지는 것이 40대의 현실 아닌가. 그러니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샌드위치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열심히 배우고 활용하려고 하는 40대는 분명히 20년 전의 40대와는 다르다. 20년 전의 40대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예전에 이미 습득한 지식과 정보, 그리고 기술을 활용해서 얼마든지 잘살았고,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했다. 그러나 지금의 40대는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서 마치 고교생 또는 대학생 시절 학문과 기술을 연마한 것처럼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한다. 결국 사회적 리더나 회사 중역, 때로는 학생과 같은 다중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제 나이가 좀 들었구나. 나도 늙었어. 쉬면서 여유를 찾자”라고 말하다가도, “어휴, 할 일이 태산인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교차한다.

    젊음은 발전과 변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40대 자신에게 적용되는 젊음은 사회적 변화에 의한 강제성을 갖고 있어 심리적 부담이 크다. 이제 쉬면서 여유를 찾기는커녕 점차 커가는 자녀 양육비, 생활비, 주거비, 통신비, 식비 등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로 내몰고 있고, 자녀 교육과 진로에 대한 고민, 부모님의 봉양 또는 사람관계에 대한 고민과 갈등, 노후 걱정, 자녀와의 소통 문제 등 젊은 시절 못지않게 고민거리가 많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 발달을 여덟 단계로 나누었다. △1~5단계는 청소년기까지의 발달에 해당하고, 이후는 성인이 되어서의 발달 과정이다. △6단계는 20~40세까지 사회적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이 주된 발달과제다. 이 시기에 일과 사랑, 생산성 등을 추구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인다. △7단계는 40~65세가 해당되는데, ‘발전이냐 정체냐’의 고비다. 생산성이 더욱 높아져 최고의 성취를 이룸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거나, 자녀 또는 후배들에게 지혜를 가르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정체 또는 후퇴의 삶을 살게 된다. 마지막 △8단계는 65세 이후의 삶을 통합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인생이 충분히 보람 있었다는 느낌을 가진 채 은퇴하고 주어진 남은 삶을 누린다. 그렇지 못하면 회한과 절망의 여생을 살게 된다. 평범한 사람 대부분의 삶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단계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7단계에 접어든 40대들이 자신의 정체성, 가치관, 사회적 신념 등을 형성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면 그들은 ‘제2의 청소년기’를 겪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40대는 혹할 수밖에 없는 심리상태

    불안정성을 안정성으로 바꾸는 힘은 ‘변화’다. 지금 40대는 변화를 강력하게 바라고 있다. 기존 사회 질서와 정치 시스템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정치와 사회적 가치를 갈구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사람의 문제다. 누군가 영웅적인 인물이 등장해서 대중의 힘과 결합할 때 폭발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 40대는 세상의 일에 온통 정신을 기울여서 판단이 혼란스러워지거나 또는 달라질 수 있다. 대한민국 40대의 처지는 불혹이 아니라 미혹(迷惑)이다. 그들을 미혹시키는 사람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희대의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혹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혹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태에 놓여 있다. 외부적인 변화를 통해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나를 안정시킬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부적인 변화를 동시에 시도한다. 그것은 청소년 시기에 흔히 보이는 ‘일탈’이다. 파격적이고 돌출적인 언행은 이제 40대들에게서도 흔하게 보이는 현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40대는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하직원들, 지역사회에서는 이웃 주민들, 가정에서는 배우자와 자녀 또는 부모다. 또한 각종 사회적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소통은 필수적이다. 다른 사람들과 잘 소통하는 능력이야말로 앞으로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보급으로 소통의 집단화 내지는 전파력의 힘을 경험한 적이 있지 않은가. ‘안철수 신드롬’이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될 것이고, 앞으로도 여러 사안에서 대중 간의 수평적 소통에 의해 국가 전체가 뒤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이 40대에게는 신기하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다. 소위 ‘얼리 어댑터(Early Adaptor)’라는 사람들이야 뛰어난 감각 또는 두뇌 덕분에 빠르게 적응하지만, 대다수는 시간 차이를 두고 누군가 전해주는 말을 듣거나 보면서 정보를 얻어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소통의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 낙심한다. 사회적 이슈는 차치하고서라도 고개를 돌려 전통적인 대화 방식이 강력한 소통 수단인 가정에서조차 40대는 설 자리가 점차 줄고 있다. 아버지는 아이들과의 대화를 원하지만, 자녀들의 기피 대상 1호 또는 대화 상대 후순위자다. 직장에서도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윗세대들과 자유로움과 수평적 의사소통을 주장하는 아랫세대들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다. 소통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일진대 소통을 잘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순간 사회적 낙오자라는 식의 자기 낙인을 찍는다.

    40대는 할 일이 많다. 사회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하고, 경제적으로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아이들도 잘 키워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벌어야 한다. 어디 그뿐이랴. 남성들은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물론 여성들은 좋은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긴장과 사회적 언행으로 무장한 채 지내다가 집에 와서는 이완과 휴식 대신에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자녀 양육과 교육에 관한 감독과 책임이다. 예전 우리 부모님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셨건만, 어제와 오늘 무슨 과목의 어떤 내용을 얼마만큼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으셨다. 공부를 하게끔 감독할지언정 그 내용에서만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실제로 자녀 공부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40대 어머니들은 자녀의 학습 내용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려고 하고, 하나하나 코치하려고 한다. 어머니들보다는 덜하지만 아버지 중 상당수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어디 마음만으로 되랴. 시간과 관심, 그리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직장에서의 노력만으로도 벅찬데, 집에서의 노력 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 늘 불안하기 때문에 자녀를 다그치게 되고, 이 때문에 자녀와의 관계가 더욱 나빠져 골칫거리로 떠오른다.

    불안하면서 경쟁심이 생겨…정서 과부하

    여기에 더욱 새로운 과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창의성과 새로움에 대한 것들이다.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해서 쌓아놓은 지식은 작은 이동식저장장치(USB)의 일부 공간에 저장되어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내용으로 축소되었다. 눈뜨고 나면 언론은 “이제 곧 새로운 미디어와 과학의 시대가 열리므로 빨리 적응하세요”라고 얘기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심지어 회식을 할 때도 “지식보다는 지혜를 만들어냅시다”라고 서로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어떤 사람들은 재미있게 놀다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저절로 샘솟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말을 따라서 놀다 보면, 아마 조만간 레저비나 유흥비로 가산을 탕진하기 십상이다. 돈을 쓰지 않고 마음으로 재미를 느끼면서 놀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 실제로는 쉽지 않다. 한마디로 기존의 익숙했던 사고, 행동, 학습 방식을 바꾸어나가야만 할 것 같은데, 머리가 굳었는지 아니면 나쁜지 잘 되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불안하다. 내가 뒤처지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경쟁심리가 발동한다. 불안한 가운데서 경쟁심이 생겨나니 그 결과 좌절, 분노, 공포, 질시, 미움, 우울 등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를 잇는다. 정서적 과부하 상태다.

    40대는 노마드(nomad·유목민)가 돼가고 있다.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자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다. 노마드는 불안하지만 한편으론 흥분된다. 노마드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창조뿐만 아니라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창조적 행위에 능통한 것은 아니기에 주어진 여러 갈래의 영역 중에서 적절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을 근거로 선택할지 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감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불안하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가? 40대는 계속 노마드로 흘러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정착할 수 있는 것인가? 새로운 세상의 도래, 국제 정세, 국내 경제 상황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준비할 수 있는 해법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나(self)’를 인식함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흥미와 관심이 있고, 어떤 분야나 영역에 소질이 있고 적성이 맞는지, 주로 어떠한 감정 상태에 놓여 있는지, 어떠한 유형의 사람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스트레스 상황에서 주로 피하는 쪽인지 맞서 싸우는 쪽인지,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인지 독립적인지, 유혹에 흔들리는지 아닌지, 욕심이 많은지 아닌지, 경쟁적인지 아닌지 등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성찰하라. 그래서 살펴본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그러고 난 다음에는 적응을 위한 자기 계발과 변화에 나서라. 그러나 절대 무리하지 말라. 다 바꾸려고 하지 말라. 조금만 바꿔라. 다 바꾸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위험하다.

    지금의 40대는 정신발달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제2의 청소년기’에 해당한다. 일탈과 질풍노도라는 제1의 청소년기는 다들 경험했으므로 이제부터는 ‘통찰’과 ‘적응적 변화’를 하면서 제2의 청소년기를 받아들이라. 노마드로 계속 살 수는 없다. 결국 다시 정착해야 한다. 더욱 발전되고 행복한 사회 건설은 여전히 40대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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