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大學問國(대학문국)의 꿈과 지식의 統攝(통섭)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 입력2011-10-19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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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원도 없고 땅도 좁은 우리나라가 살길은 교육에 대한 투자뿐이다. 주어진 숙제만 잘해선 발전이 없다. 출제를 할 줄 아는 인재, 학문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나 영화 ‘아바타’를 만든 제임스 캐머런 같은. 미래학자들에 따르면 지금의 대학생들은 평생 직업을 네댓 번 바꿔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좋은 글쓰기이고 그 바탕은 폭넓은 독서다. 최재천 교수의 강연은 9월26일 오후 7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편집자>
    大學問國(대학문국)의 꿈과 지식의 統攝(통섭)
    반갑습니다. 대한민국처럼 공부 열심히 하는 나라는 없는 거 같아요. 어제 아침엔 제가 또 무슨 조찬강연을 새벽같이 했어야 했습니다. 뭐 새벽에도 공부하고 밤에도 공부하고 무슨 나라가 이렇습니까? 미국에서 예전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 지금 대학교수 하는데 제가 조찬강연 뭐 이런 걸 하러 다닌다고 하면 “도대체 그 나라는 무슨 나라냐?” 절보고 그럽니다. 오늘 저는 조금 딱딱한 얘기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참 우리 시대에 꼭 이렇게 하면 좋겠다 싶은 아주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년에 대통령을 새로 뽑아야 하는데, 다음 대통령은 정치하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무조건 복지 대통령이라네요. 어느 분이 가장 국민의 가슴에 와 닿는 복지 얘기를 하느냐에 따라 결정 날 거라고 하시는데, 저는 복지도 참 중요하지만 다음 대통령이 교육 대통령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좀 합니다. 최상의 복지가 결국은 교육일 거니까요. 그런 차원에서 오늘 저 나름대로 준비한 걸 드려보겠습니다.

    제가 한 10여 년 전에는 EBS TV에 6개월 동안 계속 일주일에 한 번씩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살기가 좀 불편해지더라고요. 어딜 가도 자꾸 사람들이 알아봐서, 나쁜 짓을 도대체 할 수가 없어 TV 출연은 되도록 안 하려고 도망 다니면서 삽니다. 그런데 뭐 어떻게 하다보면 1년에 한 번 정도 불려나가는데요, 작년에 KBS ‘일류로 가는 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그야말로 몇 번을 찾아와서 부탁하기에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어서 응낙했습니다.

    한 4시간 녹화하더라고요. 그런데 금요일 밤 12시에 방송이 되니 누가 이걸 보겠습니까? 그런데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그날 제 강의가 나가는 날 저쪽 방송국에서는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중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 게 뭐 장사가 될 리가 없는 거죠. 다행히 이상화 선수가 뛴 건 아니었습니다. 조금 재미없는 경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저라도 그 시간에 TV를 본다면 올림픽 중계를 보지 제 강연을 보겠습니까? 아유, 괜한 짓을 했구나.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분이 보셨더라고요. 제가 TV에서 강연을 하고 그토록 많은 분으로부터 전화나 e메일을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줄잡아 한 30~40명한테서 e메일이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학생들한테서 많이 받았고요. 그리고 우리나라 IT업계의 대표주자로 그 유명한 ‘황의 법칙’이라는 걸 만들어내신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님. 지금 지식경제부 연구재단을 운영하고 계신데 그분이 전화를 하셨어요. 평소 저희가 서로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얘기를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전화를 하시더니 그동안 참 만나고 싶었는데 건수가 없어서 못 만났다. 그런데 내 강의를 들었노라. 이제는 기어코 만나야 되겠다. 한번 찾아갈 테니까 만나달라. 그래서 아유, 황송하다고. 어서 오시라고 그랬더니 한 10분 만에 들어오시더라고요. 근처에 오셔서 전화를 하신 거예요. 친구는 대개 학창시절에 사귀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나이에 친구가 됐습니다. 아주 의기투합이 잘되더군요. 그래서 지금도 1년에 한두 번 만나 이런저런 세상 얘기를 합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G20 정상회의를 유치해서 한 적이 있죠? 그때 광화문 지하광장에서 매일같이 30분 정도 특별강연을 했습니다. KBS에서 그때 했던 강연 중에 5개를 추려 방영했습니다. 그래서 작년엔 제가 TV 강연을 두 번이나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강연에서 제가 했던 얘기를 오늘 조금 반복해보렵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기적

    우리 인간이 수의 개념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동물이잖아요, 다른 동물들은 숫자를 잘 모르니까. 2010년은 사실 우리 국민한테 참 의미가 큰 해였습니다. 100년 전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우리 민족이 고난을 많이 겪었지만 실제로 나라를 빼앗겨본 건 처음이었잖아요. 정말 치욕적인 일을 당한 거고. 나라를 되찾아서 좀 살아볼까 했더니 6·25전쟁이 발발해서―지구상에 인류가 치른 전쟁 중에 가장 참혹하다는 전쟁을 겪고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죠.

    그 후 민주주의를 확립해보겠다고 참 노력 많이 했죠. 4·19 혁명이 일어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고요. 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0주년이 되는 참 의미 있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이 100년을 좀 정리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 기왕에 우리가 수의 개념을 갖고 있는데 한 세기를 한번 이렇게 되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평소 우리는 기적이라는 걸 믿고 싶어합니다. 더욱이 기독교인이면 기적을 믿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믿지 못하는 기적이 있습니다. 1994년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대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들어오고 싶다면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그래서 한 2년 고민하다가 들어왔습니다. 제가 1970년대 말에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그때 우리나라는 후진국이었습니다. 후진국에서 그 최고의 선진국에 가서 공부한답시고, 어떻게 보면 열등감을 갖고 공부했는데 1994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돌아와 신문을 딱 펴니까 우리나라가 세계 12위 경제대국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불과 반세기 전엔 전쟁으로 완벽하게 쑥대밭이 됐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그저 반세기 남짓한 기간에…. 그럼 다른 나라들은 뒷짐 지고 만날 놀았나요? 매일 낮잠 잤나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제 경제학과 동료들한테 자꾸 윽박지르고 질문했습니다. 이거 우리 정부가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사기 치는 거 아니냐? 그랬더니 그건 아니랍니다. 경제지표 숫자를 들여다보면 우리나라가 정말 경제대국이랍니다. 열 몇 번째 꼽을 수 있는 경제대국이랍니다.

    야~! 이거 참 믿기가 어렵네요. 제가 왜 못 믿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어디 돌아다니면서 곡괭이질 몇 번 하면 시커먼 액체가 콸콸콸콸 쏟아져 나옵니까? 우리 석유 한 방울도 안 납니다. 우리 조상님들이 후손 걱정하셔서 이 다음에 살기 힘들면 꺼내 쓰라고 산야 여기저기에 금궤를 파묻어주셨나요? 아니잖아요? 금년이 팔만대장경을 만든 지 천년이 되는 해랍니다. 팔만대장경 참 대단한 거죠. 그런데 그거 팔아서 뭐 돈 되는 것도 아니고요. 조상님들이 뭐 그렇게 많이 물려주셨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문화를 빼고 경제적인 걸로는 별로 물려받은 게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습니다. 제가 작년에 광화문 지하광장 강의를 준비하면서 인터넷을 뒤지다보니까 이런 사진이 있더라고요. 바로 6·25 때 광화문 일대의 광경입니다. 이토록 완벽하게 폐허가 됐던 나라입니다. 세계지도에서 우리나라를 찾을 줄 아는 세계인이 얼마나 될까요?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들 중에 하나죠. 그것도 모자라 반 토막 내서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자, 이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겁니까? 이걸 절더러 믿으라고요? 전 지금도 안 믿습니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정부니까 뭔가 또 거짓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듭니다.

    온 국민이 교육 전문가

    大學問國(대학문국)의 꿈과 지식의 統攝(통섭)

    세계를 압도적으로 제패한 김연아 선수.

    그런데 믿기로 하죠. 뭐 이만하면 잘사는 것 같아서. 그 근거에 대해서는 제가 좀 압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G20 정상회의를 유치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 거기에 낄 만한 나라가 못 됩니다. 그런데 끼어들어서 작년엔 의장국까지 해먹었습니다. 야, 참 지독한 나라입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나라입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걸 말하기 전에 한번 여쭙니다. 요즘엔 뭐 대단한 사람이다 싶으면 앞에다 ‘국민’ 자를 붙이더라고요. 국민 여동생, 국민 가수, 국민 배우. 제가 그래서 우리나라의 ‘국민 취미’가 뭐냐고 지금 여쭤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분야에서 전문가입니다.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다 의견이 있습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교육부 욕하는 겁니다. 전 국민이 교육부를 욕합니다. 이런! 또 입시제도 바꿨느냐, 뭐 어쨌냐? 도대체 저놈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차라리 교육부가 없으면 이 나라 교육이 제대로 될 것 같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 모든 악조건을 딛고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나라가 세계 십 몇 위 경제대국이 됐다는 겁니다.

    우리 이젠 당당한 나라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자랑스러운 국민이 됐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압니다, 저는. 요즈음 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툭하면 우리나라 교육을 치켜세우는지 전 이해를 못 합니다. 그 양반이 그렇게 머리 나쁜 사람이 아닌데 뭔가 뒤끝이 있을 것 같아 영 불안합니다. 별로 좋지도 않은 교육제도 속에서 죽어라 공부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가진 거 아무것도 없고요, 물려받은 것도 없습니다. 정말 빈손으로 오로지 머리에 투자해서, 오로지 사람에 투자해서, 오로지 공부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바둑이도 공부해야 합니다. 참 이상한 민족입니다. 공부라면 치가 떨립니다, 다들. 시험이라면 이가 갈립니다. 그러면서도 어디서 시험 만들어 놓으면 줄서서 시험 보십니다. 역사시험 붙었다고 해서 뭐 세금 감면해줍니까? 월급 올려줍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그 역사시험 준비해서 시험들을 보고 계세요.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전 세계에서 수학책이 팔리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아니, 수학책을 읽는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사요? 어머니들이 사가지고 애들한테 막 그냥 안겨주는 것 아니에요? 당신이 수학 못한 게 한이 돼 내 자식은 수학 좀 잘했으면 좋겠다고. 시험에 한이 맺힌 민족이에요,

    자, 그래서 제가 작년에 KBS에 나와서 ‘대학문국(大學問國)’이라는 참 말도 안 되는 제목을 걸어놓고 강의를 했습니다. 지난 100년을 건국백년(建國百年)이라고 얘기하면 뭐 별로 틀리지 않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나라를 빼앗겼다가 되찾아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제 우리 그럴듯하게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자, 앞으로의 100년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단 나라를 세웠으니까 이제는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기간으로 삼으면 어떨까? 그래서 다음 100년을 저는 안국백년(安國百年)이라고 제 나름대로 한번 정의를 내려봤습니다. 건국 100년의 패러다임과 안국 100년의 패러다임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대한민국을 대학문국으로

    이제부터는 삶의 질이 중요하다, 우리도 정말 사람답게 사는 선진국이 되도록 노력하자.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안국백년입니다. 많은 게 달라져야 합니다. 선진국 좇아가던 짓에서 탈피해서 이제는 우리가 창의적으로 뭔가를 주도하는 노력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럼에도 저는 딱 한 가지는 변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에 투자하는 건 변할 수가 없습니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우리나라 사정이. 뭐 광개토 대통령님이 나오셔서 만주로 우리 땅을 넓혀주시겠습니까? 독도나 안 뺏기면 우린 큰 다행입니다. 뭐 영토 넓어질 이유 별로 없을 거 같고요, 갑자기 석유날 것 같은 생각도 별로 안 드네요. 별로 달라질 게 없습니다, 상황은.

    그렇다면 여전히 대한민국에 주어진 길은 딱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사람에 투자하는, 교육에 투자하는, 학문에 투자하는 것 외에는 할 짓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까? 그래서 전 정부에 자꾸 얘기합니다. 뭘 그렇게 돈을 찢어가지고 이 짓 저 짓 많이 하시느냐고. 그냥 과감하게 교육과 학문에 투자하면 우리는 절대로 굶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히 잘사는 나라가 될 거다. 그래서 제가 대한민국을 대학문국으로 만들어보자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한때 은자(隱者)의 나라였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전 세계 국민이 대한민국을 학자의 나라로 생각합니다. 대사관에서 근무하시는 분이 없기를 바라면서 제가 세 나라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미 학자의 나라,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나라라는 명성을 얻은 나라들입니다. 먼저 독일입니다. 아, 독일 사람들이 뭘 만들어내면 어쩜 그렇게 기가 막힙니까? 인정해야죠. 독일 차, 독일 만년필, 독일 제품 뭐 하나 써보면 정말 잘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은 이스라엘입니다. 아, 어떻게 된 게 세상에 잘난 사람들은 전부 유대인입니까? 어떻게 된 민족이 저렇게 기가 막힙니까?

    최근엔 이 나라가 뜨네요. 인도입니다. 제가 예전에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요. 백인아이들이 수학이나 과학반에 들어와 두리번거리다가 한국 아이나 중국 아이가 많으면 반을 옮깁니다. 그 반에 있다간 걔네들이랑 경쟁해서는 자기네가 A 못 받을 거 같으니까 반 옮깁니다. 요즈음 하버드에 가면요, 한국 아이들 중국 아이들이 반에 들어갔다가 인도 아이 있으면 반 옮깁니다. 인도 아이랑은 경쟁이 안 됩니다. 우리 구구단 외울 때 저 사람들은 19단을 외웁니다. 그냥 한 단계 위입니다. 우리가 IT강국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IT 갖고 장난만 합니다. IT 가지고 게임만 하고 IT 갖고 뭐 뒤지는 것만 열심히 하지 진짜 IT로 돈 버는 사람들, IT 귀재들은 거의 다 인도 사람들입니다. 미국 IT산업 종사자 대부분이 인도 사람입니다. 지금 미국 가보면 인도 사람들 천지입니다.

    이제 이 나라들 험담 좀 하렵니다. 자, 독일 사람들 조금 무섭잖아요. 저 사람들 또 언제 ‘해까닥’ 할지 약간 걱정됩니다. 조금 삐딱해지면 너무나 무서운 사람들이라서.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은 돈만 밝힌다고 수전노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너무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같이 지내기 조금 힘들더라고요. 내 것도 자기 거고 자기 것도 자기 거고 그렇더라고요. 개념이 없어요. 하여간 좀 인도 사람들하고는 잘 못 지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많이 지나 인도에 몇 번 가서 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제가 오늘 제가 사인을 하면서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써드렸습니다. 그게 제가 늘 믿고 있는 개념인데요, 우리가 서로 몰라서 자꾸 시기하고 미워하는 거 같아요. 상대를 충분히 알고 나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나면 같이 부둥켜안고 웁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을 저도 이제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학자의 나라를 만들면서 이 세 나라보다 더 좋게 만들면 안 될까? 학식도 깊은데다 정직하고 마음까지 따뜻한 그런 나라 한번 만들어보면 안 될까? 도저히 불가능합니까? 전 될 것 같아요. 대한민국 사람들은 한 가지 기가 막힌 게 있습니다. 가르치면 배웁니다. 배워서 합니다. 자꾸 열심히 많은 사람이 얘기하니까 지금 화장장이 모자랄 정도로 거의 다 화장하는 쪽으로 돌아갑니다. 가르침을 받아 머리로 이해하면 가슴으로 옮길 줄 아는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하고 삽니다.

    김연아의 세계 제패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바로 김연아님. 제가 왜 이렇게 존경하느냐? 이 점수를 보세요, 밴쿠버올림픽에서 금메달 딸 때가 아닙니다. 바로 그 전에 있었던 솔트레이크시티 세계선수권대회 첫날 쇼트 프로그램 점수입니다. 한번 보실까요? 2등 미국 아이랑 3등 헝가리 아이의 점수를 보십시오. 58.80, 58.54. 0.26 차이로 2, 3등입니다. 피겨스케이팅은 원래 점수가 이렇죠. 0점 몇 점 차이로 메달 색이 갈리는 게 이 경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김연아 선수 점수를 보세요. 76.28입니다. 거의 18점 차이입니다. 저게 점수입니까? 저건 점수가 아닙니다. 저건 신입니다. 제 생각에 이 떨거지들은 지하실에서 지금 놀고 있고요, 김연아 선수 혼자 옥상에서 즐기고 있는 겁니다.

    제가 TV 보다가, 워낙 눈물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소리 내서 울었습니다. 왜? 우리 역사, 5000년 역사에서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압도적으로 세계를 이겨본 적 있습니까? 죽을힘을 다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아슬아슬하게 몇 번 이겼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번번이 졌고요, 아슬아슬하게 몇 번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압도적으로 이겨본 적은 제 기억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이 너무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우리가 저분 도와드렸습니까? 대한민국이 무슨 피겨스케이팅 강국이었습니까? 혼자 했습니다, 혼자. 혼자 죽을힘을 다해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압도적으로 제패했습니다.

    이걸 학문의 세계에서 한번 해보자는 겁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김연아 선수처럼 한번 해보자는 겁니다. 못할까요? 전 한다고 믿습니다. 제 주변에 지금 저보다 나이 어린 후배교수들 중에 확실하게 밀어주면 노벨상 탈 만한 사람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밀어주지를 못해서 못 타는 겁니다. 정부가 좀 과감하게 연구하는 사람들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지원하면 그게 안 될까요? 전 될 거 같아요.

    왜 우리 정부는 툭하면 사교육과의 전쟁 어쩌고저쩌고 그럽니까? 사교육을 왜 없애려고 해요? 제가 예전에 동굴에 살 때 제 아들놈이 하도 화살을 못 쏘기에 제 친구한테 데리고 가서, 얘 활 쏘는 것 좀 가르쳐주라. 제 친구가 맨입으로 합니까? 그래서 제가 어디서 주어온 딸기 한 바구니를 갖다 바쳤습니다. 좀 가르쳐줘. 사교육은 이런 겁니다. 사교육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육이 우뚝 서면 사교육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교육비를 투자해 아이 다섯 명 놓고 선생님 세 분이 둘러앉아서 가르쳐보십시오. 사교육이 무슨 재주로 경쟁합니까? 사교육은 기가 막히게 말 잘하는 사람 하나 세워 1000명 앉혀놓고 돈 세는 게 사교육이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 세 분이 우리 아이 다섯 명을 가르치면 사교육은 자연히 사그라지는 겁니다. 그냥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렇게 가면 되는 겁니다. 그 돈 얼마면 될까요? 지금처럼 깔짝깔짝 쓰지 말고요, 수십조를 그냥 퍼부으면 우리나라 모든 학교 아주 기가 막히게 잘될 것 같아요. 수십조라는 돈 없습니까? 강바닥에 지금 수십조를 갖다 부었습니다. 저는 강에다 붓지 말고 학교에다 부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살았습니다.

    아이폰과 ‘아바타’

    大學問國(대학문국)의 꿈과 지식의 統攝(통섭)

    아이폰으로 세계를 뒤흔든 스티브 잡스.

    자, 우리나라 차들 볼까요? 참 자랑스러워요. 잘 만들잖아요. 모양도 참 예쁘고. 세계적인 평가기관들이 다 최고급이라고 평가해주네요. 무슨 얘기입니까? 자동차를 잘 만들어보라는 숙제를 내주면, 우리나라가 이제 그런 숙제는 제법 잘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술 다 배워서 동원하고 디자인 쫙 뽑고 해서 자동차 제법 잘 만듭니다. 그런데 숙제는 잘하는데 왜 아직 출제는 못 할까요? 출제란 우리가 먼저 문제를 내고 남들로 하여금 우리를 따라오게 하는 겁니다. 아니, 우리 LG, 삼성도 이런 기계 다 만드는데 왜 가끔 가다 청바지 입은 이 친구(스티브 잡스)가―이제 은퇴했습니다만―가끔 뭘 하나 새로 만들어가지고 쓱 갖고 나와서 이렇게 한번 흔들면 전 세계가 자지러집니까? 그러고 난 다음에야 우리 삼성과 LG는 비슷하게 생긴 거 만들어가지고 구시렁거립니다. 속도는 우리가 더 빠르고 뭐 어쩌고저쩌고 암만 그래봐야 전혀 안 먹힙니다.

    제가 전화가 하도 낡아서 3개월 전에 새로 샀습니다. 이 시대에 스마트폰을 안 산다는 건 좀 지나친 복고풍인 거 같아 아이폰, 갤럭시, 옵티머스 중에서 어떤 게 좋은지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저희 연구원 5명이 다 아이폰을 쓰더라고요. 아, 선생님 아이폰이죠. 다른 게 폰입니까? 이 5명은 자기 폰을 다 꺼내놨는데 전부 아이폰 들고 앉아 제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그냥 포교만 해요. 알고 보니까 이것들이 다 사이비종교 집단에 완전히 홀린 사람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항거 차원에서 갤럭시를 샀습니다.

    이 양반(스티브 잡스)이 뭐라고 너스레를 떠느냐 하면 자기는 아이폰에 인문학을 담았답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섞어서 아이폰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래? 어디 들어 있나? 암만 봐도 저는 모르겠어요. 제 생각에 우리가 저 친구한테 속은 거 같아요. 저 친구한테 홀린 겁니다. 아이폰이 다르면 뭐가 그렇게 기가 막히게 다르겠어요? 그런데 하여간 저 양반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우리가 지금 그냥 놀아나고 있습니다.

    자, 이 영화 보셨습니까? ‘아바타’라는 영화. 한 2년 전에 나왔나요? 이 영화를 실제로 만든 컴퓨터그래픽 디자이너들 중에는 한국 사람이 여럿 있었답니다. 무슨 얘기냐?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이렇게 이렇게 만들어달라고 하면 그 밑에서 만들어서 건네줬다는 겁니다. 그런 걸 하청업 한다고 얘기합니다. 하청 받아서 하는 일은 우리가 제법 합니다. 하라는 일은 제법 해요. 그런데 이런 걸 우리가 구상해내지 못한다는 거죠. 이런 영화, 누가 구상합니까? 에이, 컴퓨터만 잘하면 저거 그리는 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 스토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겁니다. 이걸 누가 어떻게 만들어내는 겁니까? 컴퓨터만 잘하면 되냐? 과학기술만 알면 되냐? 아닙니다. 인문학을 알아야 합니다. 신화를 꿰뚫어야 하고요. 저도 이 영화 봤는데, 이 영화 제 분야더군요. 생태영화입니다. 별 볼일 없는 학문인 생태학도 알아야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겁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제가 무슨 얘기를 드리는 겁니까? 학문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마구 넘나들 수 있는 그런 인재들이 지금 세상을 이끌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와 제임스 캐머런 같은 이런 인재들 말입니다. 자, 질문 드립니다. 국민소득 2만달러의 덫에 걸려서 우리가 못 빠져나온 지 몇 년이 됩니까? 가끔 연말에 환율 때문에 2만달러가 조금 넘었다는 그런 치사한 신문기사가 기억나네요. 2만달러 근처를 맴돈 게 거의 10년이 됩니다. 제 생각에 전 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열심히 일하는 국민입니다. 거기다가 아이큐 테스트하면 대한민국, 전 세계에서 2등, 1등 막 이렇게 합니다. 자, 머리도 제일 좋아, 일도 제일 열심히 해. 그런데 왜 우린 요 모양 요 꼴입니까? 2만달러면 물론 잘사는 겁니다. 우리보다 못사는 민족 숱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걸로 만족하자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4만달러 가고 5만달러 가고 싶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전 몇 년 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혹시 숙제만 무지하게 열심히 하고 기껏해야 하청업만 해서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게 2만달러가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10년째 이걸 못 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자꾸 답답해지더라고요. 이 굴레를 못 벗어나는 건가?

    국민이 그저 매일같이 숙제만 하고 하청업만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숙제만 해주십시오. 그게 돕는 일입니다. 그냥 묵묵히 숙제 해주십시오. 그렇지만 이젠 우리나라에도 군데군데, 스티브 잡스나 제임스 캐머런같이 학문을 넘나드는 그런 인재들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분들 덕에 우리가 5만달러, 6만달러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자,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면 안 됩니까? 대한민국의 인문학자들은 왜 가끔 그렇게 징징거립니까? 배고파 못살겠다, 인문학의 위기다. 아, 위기를 과감히 깨고 나오셔야죠. 제 생각에 인문학은 늘 그랬습니다. 인문학은 언제나 배고픈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자연과학이 황폐화시킨 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자연과학, 그런 적 없습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만나야 합니다. 20세기까지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따로 놀았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두 학문이 자꾸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학문 발달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이쯤해서 혹시 조는 분이 계실까봐 제가 가져온 돌발퀴즈입니다. 이 네 분의 공통점을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아리스토텔레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 선생님, 연암 박지원 선생님. 제가 한 2년 전 우리나라 대표 기업 삼성전자에 가서도 이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삼성전자 전무님이 마이크를 턱 받으시더니, “아! 다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그 옆에 계신 분은 “다 남자입니다.” 제가 원하는 답은, 어느 한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던 분들이라는 거죠. 만능인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활동하던 때는 그게 가능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지식이 대단했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분이 막 여기저기 막 팠어요. 파면 대충 바닥이 보였습니다.

    大學問國(대학문국)의 꿈과 지식의 統攝(통섭)

    학문의 통섭을 강조하는 최재천 교수.

    정약용 선생 집안에서 오셨으면 절 용서하십시오. 정약용 선생님이 정조 임금님을 도와서 저 수원에 화성 축조하셨죠. 그때가 세계적으로 신도시 붐이 불었던 시기랍니다.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는 워싱턴 DC가 만들어지고 러시아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고 있었답니다. 한국에는 이제 정조 임금님이 그런 세계적인 흐름을 간파하신 거죠. 그래서 정약용 선생님 불러다가 야, 신도시 개발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자, 정약용 선생님이 정조 임금님한테 뭐라 그랬답니까? 상감마마, 제가 MIT에 가서 토목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오겠나이다. 그리고 뭐 지으셨습니까?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중국 가서 집 짓는 법에 관한 책 한 번 보고 오셨겠죠. 그 정도만 하셨어도 그 당시에는 조선 팔도에서 최고의 토목공학자 노릇을 하신 겁니다. 정약용 선생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지금 우리 곁에 오시면 과연 다산이 되실까요? 전 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학문의 담을 낮춰야

    저분들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우리는 적어도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쳤습니다. 참으로 멋진 두 세기였습니다. 과학의 발달 덕택에 우리 인간이 지금 축적해놓은 지식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식의 총량을 한번 가늠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합니다. 한 개인이 여러 학문 분야를 통달한다? 불가능합니다. 예전에는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 좁고 깊게 파고들어가는 일을 하는 겁니다. 이게 뭡니까? 전공입니다. 우리 대학 다니면서 다 전공과목이라는 걸 배웁니다. 한 우물을 파는 겁니다. 여러 개를 할 수가 없으니까 하나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한 우물만 파라고 했죠. 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아주 골치 아팠습니다. 부모님한테도 선생님한테도 늘 야단맞았어요. 야, 그렇게 오지랖이 넓어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냐? 전 변한 게 없어요. 그런데 세월이 변해 요즘은 저처럼 오지랖이 넓은 사람도 필요하다고, 그래서 제가 그 오지랖 자랑하러 오늘 이렇게 온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공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자기 우물 하나 확실하게 팔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도 팔 줄 모르면서 아무데나 기웃거려라? 그런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하나만 팔 줄 알면 되는 게 아니라 이제는 한 우물 확실하게 파면서 옆 우물 파는 사람들이랑 함께 팔 수 있는 그런 소양을 갖추어야 된다는 겁니다. 두루두루 여러 분야에 소양을 갖춘 그런 인재를 지금 사회가 원하고 있고 특히 제 생각에 대한민국은 정말 그런 인재가 필요합니다.

    이 방대한 지식의 세계에서 혼자서 넓게 파기 시작해보십시오. 평생을 파도 파기는커녕 표면도 한번 다 못 긁어보고 돌아가십니다. 지금 우리 학문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통섭(統攝)입니다. 통섭은 어느 한 개인이 여러 분야를 다 통달하는 게 아니고요. 여러 분야의 여러 전문가가 한데 모여서 문제를 함께 푸는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문제들은 혼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대통령님, 아주 크게 깨달은 바가 있으십니다. 대통령 되시자마자 좀 우쭐한 기분에 미국 가서 부시 아저씨랑 그냥 악수하면서, 쇠고기? 아, 사드리죠, 그러고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촛불 들고 나왔잖아요. 당시만 해도 우리 대통령님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아니, 이게 외교통상의 문제인데 왜 그래? 그런데 촛불 들고 나온 사람들에겐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단순한 통상의 문제가 아닌 걸로 판명된 거죠. 거기엔 사회의 온갖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누가 혼자 풀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회장님이 어느 날 조선호텔 방을 잡아주면서, 너 혼자서 일주일 동안 이거 다 기획해, 그럽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거의 모든 일이 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왜 학교에서는 이렇게 안 가르칩니까? 모든 걸 혼자 하게끔 가르칩니다. 학교 교문만 나가면 여럿이 하게 되는데.

    고등학교 때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외운 기억이 나십니까? 그 시를 쓴 시인이 로버트 프로스트인데요, 그분이 쓴 시 중에 ‘멘딩 월(Mending Wall)’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담을 고치며’ 정도겠죠. 낮은 돌담이 겨울에 무너지면 그걸 이웃 양반이랑 같이 수선하면서 쓰신 시랍니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 참 멋진 말씀입니다. 담이 아예 없으면 이웃이 아닙니다. 한집안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한집안이라고 해서 늘 행복한 게 아닙니다.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왜 물리학이 따로 있고 법학이 따로 있고 공학이 따로 있는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논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학문은 따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담이 너무 높으면 왕래가 불가능합니다. 소통이 안 됩니다. 담을 그냥 이 정도로만 낮춰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생물학 하는 제가 사회학으로 건너오겠다는 겁니다, 가끔. 생물학 하는 제가 가끔 법학으로 오고 싶다는 겁니다. 같이 좀 일하자는 겁니다. 제가 ‘통섭’ 책 우리말 서문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 때 비자 검사 좀 하지 말자. 자격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가 와서 공부하겠다는데. 이젠 좀 활짝 열고 담도 충분히 낮춰주고 학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일의 끝은 글쓰기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마지막 말씀인데요, 제가 한 2, 3년 전에 이걸 깨달았습니다. 혼자 깨닫고는 되게 기뻐했습니다. 대단한 발견이라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보니까 이 세상 모든 일의 종국에는 반드시 글쓰기가 있더라고요. 글쓰기로 모든 게 판가름이 나더라고요. 저처럼 대학교수를 하면 논문을 써야 합니다. 똑같은 데이터 가지고도 누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논문을 썼느냐에 따라서 최고의 저널에 실리느냐 못 실리느냐가 결판납니다. 에이, 난 수학할 건데 수학에 무슨 글쓰기가 필요해? 수학논문은 그냥 공식만 죽 써서 냅니까? 공식과 공식 사이를 말로 이어줘야 되는데요, 설득력이 있어야 됩니다. 작가가 되면 말할 것도 없고요. 회사에 가면 기안을 해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을 기안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원 페이지 프로포절(One Page Proposal)’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안은 한 페이지에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뭔가 사업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데 회장님을 1층에서 만나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7층까지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답니다. 그렇게 ‘쌈빡하게’ 요약하려면 대단한 글쓰기가 필요합니다.

    요즈음 젊은 친구들, 트위터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 트위터 팔로어가 최고로 많답니다. 그분이 뭐가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많겠습니까? 그 짧은 글에도 그분의 글솜씨가 기가 막히니까 사람들이 따르는 겁니다. 나 치킨집 할 건데 무슨 글쓰기가 필요해? 간판은 글쓰기 아닙니까? 그냥 치킨집이 아니라 기발한 제목을 붙이면 사업이 잘됩니다. 모든 게 글쓰기입니다, 끝에 가면. 나는 책은 안 읽는데 글은 잘 쓴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역시 많이 읽은 사람이 잘 씁니다. 결국은 흉내 내는 거니까요, 어디서 오겠습니까? 다 읽은 거에서, 그게 제 안에서 녹았다가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풍부한 책 읽기가 좋은 글쓰기의 전제조건입니다.

    독서가 취미라는 분치고 제대로 된 독서 하는 분 별로 못 봤습니다. 왜? 독서를 취미로 하면요, ‘해리포터’ 읽으면 최상급입니다. 독서는 제가 보기에는 취미로 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뭐 취미 독서도 하셔야죠. 심심풀이 땅콩처럼 읽는, 마음을 비우는 차원에서, 그냥 뭐 뜻을 알건 말건. 가끔 연애소설 같은 것도 읽어야 되겠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 독서는 일입니다. 내가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 게 독서입니다. 그냥 취미로 하는 독서만 늘 하실 거면요, 눈 나빠지는데 뭐 하러 책 읽습니까? 책 버리고요. 클럽에 가서 춤추세요. 그게 건강에 더 좋을 거 같아요.

    폭넓은 독서만이 살길

    우리 현대인은 눈이 다 나빠졌습니다. 왜? 우리 눈은 3차원 공간을 보라고 진화한 겁니다. 입체를 보게끔 진화했는데 책이라는 걸 우리가 잘못 발명한 겁니다. 책은 2차원입니다. 평면에다 글씨를 박아놓아 그걸 보려면 눈이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눈이 다 나빠지는 겁니다. 저 지금 컴퓨터 잘하시는 분들이랑 몇 년째 같이 연구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잘하면 제가 엄청난 대박을 칠지도 모릅니다. 입체 물건을 보는 것처럼 눈이 안 나빠지도록 입체 글씨를 만드는 걸 몇 년째 연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개념의 책을 발명해보려고 합니다.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었는데, 아, 잘 읽히네. 에이, 그건 도둑놈 심보죠. 안 읽힙니다. 나노과학 책을 붙들었는데 그게 술술 넘어가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안 읽힙니다. 하여간 겨우 읽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책을 또 한 권 붙들었습니다. 또 씨름했습니다. 세 번째 붙들었습니다. 어? 책장이 넘어갑니다. 어? 읽히네, 조금씩. 그러다 보면 신문에 무슨 나노과학에 대한 기사가 실렸을 때 예전엔 절대로 안 읽었을 텐데 책 두어 권 씨름했다고 읽게 됩니다. 그렇게 4권, 5권 읽다보면 그 분야에 대해 뭔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야에 덤비게 되죠.

    나이가 지긋하신 분한테는 쓸모없는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젊은 분들에게는 꼭 이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 미래 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지금의 대학생들은 평생 직업을 5, 6번 바꿔야 된답니다. 조만간 정년제도는 없어질 거고요, 왜? 정년이 지난 다음에 은퇴한 사람의 숫자가 돈 벌어야 되는 사람의 숫자보다 많아지는 경제구도로는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거죠.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일해야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돈을 조금씩 벌면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30세에 사회 나왔다면 100세까지 일해야 합니다. 70년을 일해야 됩니다. 그런데 70년을 직업 하나로, 대학에서 배운 전공 하나로 버티겠다? 에이, 그건 턱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직업을 적어도 5, 6번 바꾸면서 산답니다.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잘 갖추어서 새로운 공부를 해서 새로운 직업을 얻고, 또 새로운 공부를 해서 새로운 직업을 얻으면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大學問國(대학문국)의 꿈과 지식의 統攝(통섭)
    최재천

    1954년 강원 강릉 출생

    서울대 동물학과 졸업, 하버드대 생물학 석·박사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한국생태학회장

    현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저서: ‘개미제국의 발견’ ‘지식의 통섭’ ‘인간은 왜 늙는가’ ‘과학자의 서재’ 등


    그런데 번번이 새 직업 얻을 때마다 대학에 다시 가서 학위 따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은 독서입니다. 모르는 분야에 대해 기획독서를 해야 되는 겁니다. 사실 대학 4년 다녀봐야 요만큼 알고 직업 택하는 겁니다. 조금 알고 덤벼드는 겁니다. 책 두어 권 읽은 걸로 또 새로운 직업을 얻는 거고요. 그래서 한 10년 고생하면서 살아가고요. 다음 직업 선택할 때 책 두어 권 읽은 사람은 또 덤빕니다. 그런데 읽지 않은 사람은 엄두도 못 내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21세기 고령사회를 살아가는 데 독서보다 중요한 게 없을 것 같습니다. 폭넓게 읽어두십시오. 그래서 새로운 직업에 새로운 일에 늘 도전하면서 사셔야 한다는 얘기를 젊은 분들한테 드립니다. 경청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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