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패배의 밑바닥에서 승리를 길어 올린다

  • 안병찬│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언론인권센터명예이사장 ann-bc@daum.net

    입력2011-10-19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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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리가 위대한 것은 헤비급 타이틀을 세 차례 거머쥐어서가 아니다. 그는 패배에서 승리를 창출할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가진 복서였다. 그가 최정상에 오른 다섯 가지 비결은 모험심, 내면의 장애 극복, 긍정적 사고, 과욕 금기, 패배의 지렛대였다.
    4장/ 세 번의 세계챔피언

    1. 3대 혈전, 3대 패배

    패배의 밑바닥에서 승리를 길어 올린다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이 명분 없이 개입한 베트남전쟁에 반대해 공개적으로 소리를 높인 첫 번째 공인이었다. 유형(流刑)생활을 하는 동안 알리는 대학을 돌며 강의를 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1970년이 되면서 미국 내에 반전 분위기가 확산되고 알리에게 가해지는 탄압은 힘을 잃어갔다. 알리는 아직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권투를 제한적으로 재개하게 됐다.

    1970년 10월26일 알리는 한 상원의원의 주선으로 유형생활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제리 쿼리와 맞붙었다. 대전 장소는 미국 내에서 유일하게 허가 없이 권투를 할 수 있는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였다. 1967년에 조라 폴리를 7회전 케이오(KO)로 이긴 후 3년 반 만에 벌이는 대전이었다.



    이 경기에 이어 12월7일에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오스카 보나비아와 싸워 15회전 티케이오(TKO)로 이겨 북미복싱연맹(NABF)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이 승리 이후 알리는 ‘황소 복서’ 조 프레이저와 맞섰지만 오랜 유배생활 탓에 프로 전향 후 첫 패배를 맛보았다. 그 대신 몇 달 뒤에 알리는 가장 큰 승리를 획득했다. 1971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알리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 하급법원이 3년 반 전에 내린 판결을 만장일치로 뒤집었다.

    “알리의 양심적 징병거부는 종교에 기반을 둔 것이고 진실하다”는 결정이었다. 이로써 알리는 3년 반에 걸친 유배생활과 징역형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또 세계 어느 곳이나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권투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세기의 대결’ 최초의 패배 /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1971년 3월의 첫 주 표지기사에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대결에 ‘황소와 나비의 싸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유형에서 돌아온 알리가 조 프레이저와 벌이는 ‘세기의 대결’을 예고하는 특집이었다.

    3월8일로 잡힌 알리와 프레이저 대전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지금까지 무패의 길을 달려온 두 복서다. 프레이저는 잇달아 26승을 올리고 그중 23회는 상대를 넉 아웃시킨 챔피언이다. 알리는 31승25케이오 무패의 전적을 가진 도전자다.

    타임지는 황소와 나비의 대결을 이렇게 예고했다.

    …‘유배당한 챔피언’은 권투에 신이 들린 사람 같다. 그는 다른 사람과 시합해서 졌기 때문이 아니고 세도를 부리는 ‘복싱조직’의 포고령으로 선수권을 박탈당한 처지였다. 그 사이 알리의 빈자리를 조 프레이저와 지미 엘리스가 다툰 끝에 조 프레이저가 차지했다. 그러므로 프레이저는 진정한 챔피언이 아니다. 알리를 쓰러뜨리지 못한 상태라면 헤비급의 최고수로 인정받을 수 없다. 수백만의 알리 팬이 그렇게 생각했고 알리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

    조 프레이저가 타이틀을 거머쥘 때 알리는 이렇게 소리쳤다.

    “프레이저, 나와 한판 붙자. 프레이저 나와라 지금!”

    마침내 맨해튼 스퀘어 가든에서 알리 대 프레이저 대전을 열기로 결정됐다. 이 15라운드 결정전은 최고봉의 챔피언이 누구인지 가리는 자리가 된다. 그것은 흥행사업(쇼 비즈니스)의 거창한 한판이 될 것이다. 주최 측은 ‘세기의 대결’이라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언론매체들은 맨해튼 스퀘어 가든의 객석 1만9500석이 다섯 시간 만에 다 팔려나가 125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암표상은 표 한 장에 700달러를 부르고 링 앞자리는 150달러를 더 얹어서 받았다고 한다.

    유명한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는 링 앞자리 표를 구하지 못해 ‘라이프’ 잡지의 사진기자 노릇을 해 자리를 잡는다. 권투 열성팬인 영화배우 버트 랭커스터는 방송 해설을 맡아서 관전한다. 주최 측은 관람자가 26개국에서 총 3억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알리는 프레이저를 ‘톰 아저씨’라고 매도했다. 프레이저는 격분해서 달려들었다. 3년 반의 유형생활로 알리는 다리의 힘을 많이 잃어 춤추는 권투를 하지 못했다. 알리는 용감하게 싸웠으나 패했다. 프레이저는 소나기 펀치를 퍼부어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알리에게 난생 처음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대전의 흥행주인 페렌치오는 극장 흥행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복싱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경기가 끝나자 두 선수가 사용한 권투화, 트렁크(남자용 운동 팬츠), 가운, 권투장갑을 경매에 붙여 부수입을 올렸다.

    두 선수는 이 대전에서 250만달러씩을 챙겼다.

    / 두 번째 패배 /

    그 후 1971년 7월부터 1973년 2월 사이 1년7개월 동안 알리는 10번의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조지 추발로, 제리 쿼리, 프로이드 패터슨과 재대전을 벌여 모두 이겼다.

    1973년 3월31일 알리는 해병대원 출신인 켄 노턴과 싸웠으나 12라운드에서 턱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심판 불일치로 두 번째 패배를 안았다. 그러나 반년 후에 열린 2차 대결에서는 켄 노턴을 심판 불일치 판정으로 꺾었다.

    조 프레이저를 상대로 한 2차전은 반년 후에 열렸다. 그때 조 프레이저는 새로 떠오른 철권 복서 조지 포먼에게 넉 아웃을 당해 선수권을 빼앗긴 후였다. 알리는 12회전에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프레이저를 손쉽게 물리쳐 오스카 보나비아에게서 뺏은 북미복싱연맹(NABF) 선수권을 방어했다.

    알리는 역사적인 복싱 경기를 수많이 치렀는데 그 가운데 극적인 대전으로는 세 가지가 꼽힌다.

    첫 번째는 조 프레이저와 처음 맞붙은 ‘세기의 대결(The Fight of the Centry)’이다. 두 번째는 조지 포먼과 대전한 ‘정글의 혈전(The Rumble in the Jungle)’이다. 세 번째는 조 프레이저와 삼판승부의 마지막을 다툰 ‘마닐라의 전율(Thrilla in Manila)’이다.

    조 프레이저와 ‘세기의 대결’에서 지고 2차 대결에서 이긴 후에 알리가 치른 일생일대의 대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글의 혈투(더 럼블 인 더 정글)’이다. 당대에 가장 무서운 상대인 조지 포먼은 양 주먹의 힘과 파괴력에서 당할 상대가 없었다. 그는 켄 노턴과 조 프레이저 두 사람을 한 방씩에 매트 위에 누인 주먹의 소유자였다.

    제1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글의 혈전’은 권투 흥행사(프로모터)인 돈 킹이 자이르의 모부투 대통령과 협상해 미화 1000만달러라는 전대미문의 대전료를 확보하면서 성사됐다.

    알리는 포먼과 대전할 자이르 수도 킨샤사에서 아프리카 대중의 힘을 한데 끌어 모으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알리를 향해 환호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도박사들은 알리가 3대 1로 약세라고 점쳤다.

    알리의 심산은 달랐다. 킨샤사의 더위 때문에 포먼과 싸우면서 자신이 내내 춤추는 권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프타기’ 신기술을 쓰면 포먼이 자기를 몰아치다가 힘이 빠질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 작전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그런 전략으로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의 왕이 되고 아프리카인의 왕이 됐다(제1장 ‘정글의 혈전’, 제5장 ‘알리 현상의 파급’ 참조).

    /‘마닐라의 전율’/

    ‘정글의 혈전’을 치른 이후 알리는 척 웨프너, 론 릴, 조 버그너 세 사람과 싸워 통합 선수권을 방어했다. 특히 척 웨프너와의 대전은 영화 ‘록키’의 모태가 된다. 당초 알리가 압도하리라던 예상을 깨고 웨프너는 9라운드에서 알리를 다운시켰을 뿐 아니라 15라운드 41초까지 끈질기게 버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대전을 지켜본 할리우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은 이듬해 집념의 백인 복서가 챔피언이 되는 영화 ‘록키’를 만들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정글의 혈전’을 치르고 13개월이 지났다. 1975년 10월1일, ‘정글의 혈전’으로 이름을 드날린 흥행사 돈 킹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알리와 프레이저의 삼판승부 결승전을 열었다. 이른바 ‘마닐라의 전율’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결이다. 세상의 이목은 마닐라에 쏠리고 사람들은 이 대결이 어떤 싸움보다 흥미진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알리는 프레이저가 한물간 복서라고 여겼다. 그는 예의 거칠고 빠른 입담으로 프레이저를 모욕하고 깎아내리고 헐뜯으며 신경전을 펴서 세상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내가 마닐라에서 고릴라를 잡으면 오싹할 거야, 소름 끼칠 거야, 죽일 거야.”

    굳은 결의로 이 대전에 임한 프레이저는 알리의 선제 공세에 격분했다.

    두 사람의 살벌한 싸움은 섭씨 38도의 더위 속에서 14라운드까지 진행됐다. 알리는 초반에 승세를 보였으나, 중반에 프레이저가 반격을 했고 알리는 ‘정글의 혈전’에 활용한 ‘로프 기대기’로 프레이저의 강공을 피했다. 후반 라운드에서는 알리가 주도권을 잡고 프레이저를 제압해 마지막 15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으나 프레이저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트레이너 에디 퍼치는 프레이저의 두 눈가가 크게 부풀어 올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을 보고 경기를 중단시켰다.

    1976년 4월, 지미 영을 이긴 직후 알리는 일본에서 프로 레슬링 선수 안토니오 이노키와 시범경기를 벌였으나 재미없는 졸전에 그쳐 관중의 빈축을 샀다. 이 경기를 마친 후 알리는 수행원 40여 명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한다(제6장 참조).

    /‘가장 위대한 자’ 폐위되다 /

    1978년 2월15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레온 스핑크스는 알리와의 대전에서 깜짝 놀랄 일을 벌였다. 알리와 싸운 끝에 세 번째의 패배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타임지는 2월27일자에 알리를 다시 표지에 올려 스핑크스와의 대전에서 판정패하는 순간을 이렇게 보도했다.

    “여러분, 심판 불일치 판정이 나왔습니다.”

    링 아나운서 척 헐이 선언하자, 완전한 정적이 잠시 라스베이거스 복싱 홀 위를 뒤덮었다. 무하마드 알리와 레온 스핑크스가 최고의 왕관을 탈환하기 위해 통렬한 주먹세례를 교환하고 15회전의 투쟁이 끝난 순간이다.

    척 헐은 목소리를 높여 집계결과를 발표했다.

    심판 아트 루리: 143 대 142, 알리 우세.

    심판 루 타바트: 145 대 140, 스핑크스 우세.

    심판 해롤드 벅: 144 대 141….”

    잠시 짧은 정적이 지나간 순간 판정이 났다.

    새로운 세계 헤비급 챔피언, 레온 스핑크스!



    판정을 가르는 처음 몇 마디 말을 빼고는 모두 관중의 포효 속에 묻혀버렸다. 알리는 이 세 번째 패배가 자기 권투경력 가운데 가장 뼈아픈 일패라고 여긴다. 타임지는 셰익스피어의 구슬픈 시 한 대목을 인용해서 알리의 침몰에 조사를 보냈다.

    이제 왕들의 죽음에 관한 슬픈 이야기를 말하리라.

    어떤 왕은 폐위당하고 어떤 왕은 전장에서 살해당한다.

    또 어떤 왕은 자기가 폐위한 유령에 시달리며 끝없이 괴로워한다.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중에서

    /‘왕의 부활’/

    무하마드 알리는 프로 권투선수가 된 후 61전 56승(37케이오, 19판정승), 5패(4판정패, 1은퇴)의 통산 전적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클레이라는 본래 이름을 쓰던 때부터 알리로 이름을 바꾼 후로 이어지는 권투 인생의 파란이 실려 있다.

    초반의 젊은 시절에 클레이는 이미 춤추는 복서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무패 기록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들뜬 사람처럼 입담을 쏟아 부으며 소니 리스튼을 캔버스에 눕히고 통합선수권을 빼앗았다.

    그의 초기 경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조 프레이저와 세 차례에 걸쳐 승부를 벌인 일이다. 그것은 극적인 대결이고 서사적인 싸움이었다.

    권투 경력 후반에 알리는 자기 역량을 끌어 모아서 근육질의 도전자 켄 노턴과 싸웠다. 이때의 알리는 생각하는 투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권투 역정의 끝판에 알리는 늙은 투사의 모습으로 레온 스핑크스와 두 번 싸웠다. 24세의 레온 스핑크스는 역량이 절정에 달한 기교파였다. 그는 알리가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딴 것처럼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거머쥔 선수였다. 알리는 첫 싸움에서 심판 불일치 판정패를 했다. 그러나 알리는 또다시 상식을 전복한다. 그는 항상 그랬다.

    스핑크스에게 지고서 꼭 반년 후인 1978년 8월15일 그는 뉴올리언스 슈퍼 돔에서 벌인 재대결에서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스핑크스를 다시 꺾었다. 알리의 이 통쾌한 역전승은 일찍이 타임지가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왕의 죽음’을 ‘왕의 부활’로 바꾼 듯한 승리였다.

    무하마드 알리는 헤비급 세계챔피언을 세 차례 획득한 최초의 세계챔피언이다. 알리의 고향 루이빌 시는 알리가 훈련하며 달리던 월넛 거리의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 대로(大路)’로 바꾸었다.

    /사점(死點)을 넘는 알리 /

    알리는 자신의 지구력, 즉 스태미나의 원천은 달리기를 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권투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자신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뛰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는 학교버스에 타지 않고 버스와 경주를 하면서 20구역을 뛰었다. 버스 안의 친구들은 알리가 뒤따라오는 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쟤 미친 애 아니야” 하며 웃었다.

    피곤과 고통이 올 때까지 달리는 것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진짜 체력 조정은 고통이 엄습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바로 그때가 힘을 내서 밀고 나갈 때다.

    그 후로는 남은 힘과 스태미나로 한 마일 또 한 마일씩 세면서 달린다. 예비 탱크를 쓰는 것이다. 링에서 버티는 한계 시간은 체력을 소진하고도 얼마나 더 나갈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알리는 사점(死點)을 말하고 있다. 사점이라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필자는 제주도에서 열리는 철인 3종 경기를 취재하러 떠나는 기자에게 마라톤 전 구간을 직접 뛰어본 후에 기사를 써보라고 주문한 일이 있다. 실제로 마라톤 전 구간을 달린 기자는 반환점에 이르러 극한점이 왔다고 기사에 썼다. 몸은 거의 탈진 상태, 그때 바로 정신적인 사점이 오더라고 한다.

    이때 “멈추면 안 된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기자는 마지막 기력을 모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마라톤 코스 42.195㎞를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는 데 걸린 시간은 7시간10분이었다. 발에 엄지손톱만한 물집이 네 개 생기고 오른쪽 발목을 삐고 인대가 늘어나는 중상을 입었다. 그 대신 해냈다는 포만감이 밀려들어 육체적 피로감을 말끔히 잊었다고 한다.

    알리는 말한다. “훈련의 매 분을 혐오한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고통의 시발점에서 진짜 체력 조정이 시작된다.” 이 말은 바로 ‘사점’을 뛰어넘어서 앞으로 나가라는 말이다. “멈추지 마. 지금 고통을 감내하면 인생의 나머지는 챔피언으로 산다.”

    훈련은 혹독하고 지치는 일이다. 그 대신 훈련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해준다. 훈련은 또 마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챔피언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챔피언은 마음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것, 마음속에 깃든 욕구와 꿈과 통찰로 만들어진다.

    알리는 의지가 훈련보다 더 강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챔피언은 최후 1분의 스태미나를 가져야 한다. 한발 속도가 빨라야 한다. 한발 기술이 앞서야 한다. 한발 의지가 강해야 한다.

    /다섯 가지 비결 /

    최고의 투사이고 영웅인 무하마드 알리는 어떤 비결을 가지고 있을까. 알리는 어떻게 자기 마음속의 장애물과 세상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돌파해 왔을까‘

    헨리크 에드베르그는 29세의 스웨덴 작가 겸 창작가다. 그는 무하마드 알리의 어록을 인용하면서 알리를 챔피언의 최정상에 이르게 한 다섯 가지 비결은 모험심, 내면의 장애 극복, 긍정적 사고, 과욕 금기, 패배의 지렛대라고 분석했다.

    모험심 알리는 “모험을 무릅쓰는 용기를 갖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서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상당한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모험에 두려움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이 두려움을 극복할까. 사람들은 두려움이라는 괴물을 실제보다 거대하게 인식한다. 그런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날 확률은 90%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겁부터 낸다. 이 점을 확실하게 깨달으면 자기 마음속의 저항선을 돌파하기 쉬워진다.

    내면의 장애 극복 알리는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올라야 할 눈앞의 산이 아니다. 구두 속의 작은 자갈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심리의 내면에 작은 자갈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흔히 잊고 산다. 이것이 큰 문제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냉정하게 전망해야 최악의 시나리오를 극복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옳다고 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면 내면의 자갈부터 제거해야 한다.

    긍정적 사고 알리는 “신념을 얻는 길은 긍정적인 생각을 되풀이해서 다짐하는 데 있다. 신념이 깊은 확신으로 자리 잡을 때 일이 성사된다”고 말했다.

    알리는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외쳐댔다. 그는 자기가 위대해지기 전부터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되풀이해서 강조해 하나의 굳은 확신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알리가 떠벌리는 입담은 허풍이 아니고 신념을 다짐하는 행동이다. 알리의 허풍에는 이런 것도 있다. “나는 번개에 수갑을 채우고 벼락을 감옥에 보내지!”

    과욕 금기 알리는 “우리는 주어진 일,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풀이 자라고 새가 울고 파도가 모래톱에 밀려오는 것처럼 과하게 욕심을 부리지 말고 주어진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지나치게 자만과 자아를 키워서 정도를 넘으면 경련을 일으키기 쉽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확립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는 것은 좋지만, 과욕하면 뱃전 너머로 바닷 속에 빠질 수 있다. 좀 더 즐겁게 순리대로 일하라는 말이다.

    패배의 지렛대 알리는 패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 적이 있다.

    “패배당한 심경을 겪어본 자는 자기 정서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특별한 힘을 끌어내서 승리에 도달할 줄 안다.”

    우리는 큰 곤경에 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최악의 곤경을 거친 체험은 훗날에 가장 효능이 큰 약이 된다. 패배의 감정을 지렛대로 활용해서 다시 떠올라 성공을 꾀하라는 말이다.

    안병찬

    패배의 밑바닥에서 승리를 길어 올린다
    경찰에 앞서 살인사건 2건을 해결해 이름을 날린 사건기자 출신. 한국일보 베트남 특파원 시절이던 1975년 남부 베트남 패망(베트남 통일)의 마지막 현장을 취재하고 탈출한 후 르포르타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발간해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한국일보 주불특파원·논설위원을 거쳤고 시사저널 편집·발행인을 역임한 후 경원대 언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민영통신 뉴시스의 고정칼럼 ‘기자 49년차―안병찬의 영상르포르타주’(http://www.newsis.com)를 집필하고 소셜뉴스 위키트리의 개인 데스크 ‘안병찬 기자 49년차’(http://www.wikitree.co.kr)를 운영하며 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등 저서 1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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