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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⑪

개인적 책임에 몰두한 이상적 자유주의자 황순원, 사회적 책임 실천한 현실적 진보주의자 리영희

황순원과 리영희

  •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개인적 책임에 몰두한 이상적 자유주의자 황순원, 사회적 책임 실천한 현실적 진보주의자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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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순원의 시대정신은 인간주의와 자유주의에 가깝다.
  • 리영희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와 진보주의에 기울어 있다.
  • 자유를 중시하되 황순원은 ‘개인적 책임’을, 리영희는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
개인적 책임에 몰두한 이상적 자유주의자 황순원, 사회적 책임 실천한 현실적 진보주의자 리영희
나는 4월혁명이 일어난 1960년에 태어나 1979년 대학에 입학해서 198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92년부터 모교 사회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으니, 연구자로서의 삶도 20년이 넘었다. 이른바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가로질러 온 셈이다.

그동안 다양한 지식인이 쓴 책들을 읽고 그들의 삶을 지켜봐왔다. 이번 호에서 다룰 지식인들을 선정하는 데는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을 골랐다. 황순원과 리영희가 그들이다.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도 없지 않을 듯싶다. 무엇보다 황순원과 리영희는 뚜렷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없는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고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작가를 한 사람 다루고 싶었는데, 황순원, 최인훈, 김수영, 고은 가운데 황순원을 선택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황순원, 최인훈, 김수영, 고은은 그 기여가 사뭇 다르다. 최인훈이 중도주의를, 김수영이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라면, 고은은 전통주의와 현대주의를 결합한 작가인 데 반해 황순원은 인간주의라 부를 수 있는 흐름을 대표한다.

이상주의에 가까운 인간주의

시대정신에서 인간주의란 모호한 말이다.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인간주의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순원의 인간주의는 독특하다. 내가 보기에 황순원의 작품에는 두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현실의 격류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의 구속을 벗어난 보편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황순원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전자보다는 후자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가 펼치는 인간주의는 현실주의보다 오히려 이상주의에 가깝다. 바로 이 점이 황순원을 다루고자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전공이 사회학이지만 철들기 시작한 이래 소설들을 꾸준히 읽어왔다. 한때는 오노레 드 발자크와 같은 리얼리즘 작가에 심취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포스트모던 소설가에 경도되기도 했다. 리얼리즘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모두 인간 문제를 다루기는 매한가지지만, 황순원의 문학에는 이러한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그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는 어떤 사조와도 무관했으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그 속에서 한국인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해왔다. 바로 이 점이 황순원을 다루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다.

황순원과 비교해 리영희는 사뭇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기자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지냈지만, 그의 사실상 전공은 국제정치학이다. 오랜 외신 기자 경험이 반영돼 있는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리영희는 냉전(冷戰)과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왔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해 그가 발표한 책과 글들은 이른바 운동권의 필독서이자, 1970년대 유신세대와 80년대 486세대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나 역시 그러한 정신적 자장 안에서 성장해왔다.

당대의 사회적 환경과 지식의 관계를 중시하는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리영희는 이례적인 사회과학자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197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성역이던 냉전과 반공주의에 도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냉전분단체제에 맞서는 게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이었다면, 리영희는 연구와 저술로 그 최전선에 서 있었다. 둘째, 실천적 지식인의 경우 흔히 운동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지만, 리영희는 사회운동보다는 글과 책으로 진보 세력에 기여했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말과 글이 사회변동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그보다 더 강렬하게 보여준 지식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리영희의 정치사상을 관통하는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다. 그는 외세 의존적 사상과 외교에 맞서 주체적인 관점에서 자주적인 대응을 요구했으며, 군사독재에 맞서 언론의 자유와 인권의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모더니티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진정한 현대주의자였다. 이념적으로 리영희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지만, 그가 소중히 생각한 것은 자유·평화·민주·민족 등과 같은 현대적 가치들이었다. 이 가치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온 것이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동안 이 기획에서 나는 원효의 불교사상과 최치원의 유학사상 이래 우리 역사에서 등장한 다양한 시대정신을 살펴봤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생태주의 등의 의미와 위상에 대해 검토했다. 이제 마지막 호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번 호에서는 시대정신에 대응하는 지식인의 태도를 주목하고자 한다.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내용 못지않게 그 사상에 접근하는 태도 혹은 방법 또한 지식인에게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순원과 리영희는 지식인의 태도에서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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