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토종자본에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한 최초의 근대적 대기업가

주제발표 ③ 인촌과 경제

  • 이영훈|서울대 교수·경제학

    입력2011-10-19 16: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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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6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전북 고창 김씨가의 김성수는 1917년 재정난에 처한 경성직뉴를 인수, 기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동년 일본 재벌계에 의해 최초의 근대적 면방직업체인 조선방직이 부산에서 설립됐다. 이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19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적 생산설비를 갖춘 경성방직을 창립했다.

    당초 납입자본 25만원과 직기 100대로 출발한 경성방직은 일본산 수입 면제품과 조선방직이 지배하는 면제품 시장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1930년대 일본의 대규모 면방직업체인 동양방적과 종연방적이 한국으로 진출했다. 그들과의 힘겨운 경쟁에서 살아남은 경성방직은 1936년 숙원이었던 방적공장을 건설함으로써 방적-직포의 일관 생산공정을 확보했다. 1939년 경성방직은 방추 2만5600추와 직기 900대를 갖춘 대규모 면방직업체로서 동양방적, 종연방적, 조선방직과 더불어 ‘조선4대방’으로서 그 지위를 확고히 했다.

    이후 경성방직은 더욱 번창했다. 1935년 사장에 취임한,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는 황해도와 평안도 3곳에 조면(繰綿)공장을 확보했으며, 경기도 시흥에 대규모 표백 및 염색 공장을 설립했다. 1939년 김연수는 만주국으로 진출, 서울의 경성방직과 동일한 규모의 남만방적을 설립해 1943년부터 조업에 들어갔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고창 김씨가의 김성수와 김연수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적 대기업의 면모로 성공 사례를 보였을 뿐 아니라, 최초의 기업집단, 나아가 최초의 국제자본으로서 선구를 이루었다. 고창 김씨가의 기업 활동이 지니는 경제사적 의의에 관해서는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조기준, 김용섭,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 주익종이 순차로 연구 수준을 대표했다. 이하 이들의 연구 성과를 소개한 다음, 필자 나름의 견해를 보첨하고자 한다.

    1973년에 출간된 조기준의 ‘한국기업가사’는 1950년대 이래 서유럽 학계가 착수했던 기업가사(史) 연구를 한국에서 최초로 수행한 성과라고 하겠다. 그는 여러 후진국에서 기업은 합리적인 이윤추구의 동기에서만 성립하지 않고 애국심, 민족주의 또는 국민경제의 근대화라는 사명감을 창업의 동기로 한다는 기업가사 연구의 일반적 전제에 입각해 개화기 이래의 한국에서도 많은 기업이 외세의 침략을 몰아내려는 민족주의를 기업 창립의 일차적 동기로 하였다고 주장했다. 조기준은 이들 기업을 민족기업이라고 규정하고 식민지 시기 대표적 성공 사례의 하나로 김성수의 경성방직을 소개했다.



    ‘민족기업가’로서 김성수

    토종자본에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한 최초의 근대적 대기업가

    경성방직.

    경성방직이 민족기업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조기준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김성수가 전국 각지로 유세하면서 거족적인 동조를 이끌어냈듯이 기업 창설의 기본 동기는 근대화 내지 실력 양성이라는 민족주의에 있었다. 경성방직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창설되었으며, 한국인만의 경영진과 기술진으로 운영되었다. 둘째, 경성방직의 민족주의는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상품의 개발로 나타났다. 상표도 태극성, 불로초 등과 같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경성방직이 성공을 거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대 최고의 기업가 능력을 갖춘 우수한 경영진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일찍이 일본 유학을 결행하여 근대적 문물과 제도를 익혔을 뿐 아니라, 6년의 도쿄 생활에서 이후 한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끌어가는 지도급 인사들과 긴밀한 연망(緣網)을 구축했다. 민족경제의 자립을 향한 그의 강인한 정신세계는 초창기의 경성방직이 오사카의 면제품 선물시장에 잘못 투자해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유감없이 드러났다. 그는 망설이는 부친을 설득해 가산을 담보로 잡히고 식산은행으로부터 8만2000원의 거액을 차입했다. 김성수의 가운을 건 은행 차입과 자본금 확충으로 경성방직의 자금사정은 이후 안정 기조에 들어섰다.

    조기준의 김성수 형제에 대한 평가는 유감스럽게도 충실히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조기준의 연구가 경성방직이 남긴 기업사 자료를 직접 천착하지 못한 가운데 실증의 면에서 오류를 범한 탓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1980년 이후 이른바 민중·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한국 근·현대사의 해석이 역사학계의 신주류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민중·민족주의의 역사학이 거대 이론으로 체계화하는 것은 김용섭에 의해서였다. 1979년 그는 ‘한말일제하의 지주제 -사례4: 고부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이란 유명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경성방직의 존재는 김씨가의 지주경영이 1910년대의 국내외 시장환경에 대응하여 지주자본의 일부를 공업자본으로 성공리에 전환시킨 형태로 평가되고 있다.

    김용섭에 의하면 경성방직은 그 성공으로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했다. 다시 말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한 총독부의 지배정책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씨가의 민족주의는 타협적인 자치운동으로 변질되어갔다. 경성방직은 지주자본이 공업자본으로 전환한 형태로서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반봉건 지주제를 기축으로 하는 식민지 지배체제와 타협하고 그 일부분으로 체제화했다는 점에서 민족 독립운동에서의 그 역할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제국의 후예’의 강변

    1991년 경성방직이 대표하는 일제강점기 한국 자본주의를 평가한 책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카터 에커트의 ‘제국의 후예’가 그것이다. 그는 경성방직으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자본주의와 기업가를 일본제국의 ‘후예’라고 묘사했다. 그는 경성방직이 남긴 각종 기업사 자료를 최초로 접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 자료들로부터 그는 경성방직에 투자한 주주들이 한국인만은 아니었음을, 일제강점기 후기로 갈수록 적지 않은 일본인이 참여했음을 밝혔다.

    에커트가 열람한 경성방직의 자료는 조기준의 주장대로 동 회사의 기술진이 순수하게 민족적이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에커트에 의하면 식민지 자본주의가 드러낸 주요 특징은 국가의 압도적 우위였다. 총독부는 산업정책을 수립하여 경제개발의 기본 방향과 우선순위를 정했으며, 식산은행이 중심이 된 금융기구를 통해 금융자원을 배분함으로써 개별 기업이 국가 정책에 순응하도록 강제했다. 경성방직은 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통제하에 있는 ‘준(準)공기업’과 다를 바 없었다.

    에커트는 그의 저작에서 한국 자본가들의 도덕적·정치적 헤게모니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제국이 낳은 ‘후예’로서 한국의 자본가들은 진정 혁명적이며 민족적인 그의 동족들에 대해 서유럽 시민혁명기의 자본가 계층과 같은 도덕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없었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전시기에 이르러 내선일체의 구호를 선창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제국의 전쟁터로 동원하는 데 협조했다.

    경성방직과 김성수 형제에 대해 기업사의 방법으로 접근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는 주익종의 ‘대군의 척후’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성립 이후 기업의 대군(大軍)이 출현하여 오늘날 한국 경제를 선진국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경성방직은 그 대군의 척후였다. 보다 정확히 주익종의 말을 인용하면, 경성방직과 김성수 형제는 20세기 한국 경제와 기업의 역사에서 ‘뛰어난 학습자’였으며 ‘성공적인 후발자’였다.

    주익종은 경성방직이 충실히 남긴 일기장, 총계정 원장, 경비 내역장을 자료로 하여 경영의 전반적인 상태와 흐름을 세밀하게 파악했다. 경성방직이 일본산 수입품과 일본 대기업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을 주익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경영능력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첫째는 확고한 사업 의지다. 김성수가 경성방직을 창립한 것은 개인의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경제의 자립을 추구해서였다. 둘째는 기업의 탄탄한 재무구조였다. 셋째는 자질 면에서 당대 최고의 경영진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넷째, 그들은 선진 기술을 제대로 학습했다. 다섯째, 그들은 정부에 대한 교섭능력과 사회에 대한 선전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 지난 40년간 경성방직과 김성수 형제에 관한 학계의 대표적인 연구를 순차로 소개했다. 한국의 현실과 과거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역사학은 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점과 관련해 김성수 형제를 ‘대군의 척후’로 평가한 주익종이 이미 상당한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우리는 오늘날의 한국 현실을 초래한 구조적인 요인으로서 이른바 ‘사회적 능력’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기업가 능력’을 독립운동 중심의 정치사로부터 해방시켜 올바로 평가해야 한다.

    지난 20세기는 한국사에서 몇 세기 만에 찾아온 문명사의 일대 전환기였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 전환의 최종 결착이 어떨지 우리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그 전환이 지금까지 한반도의 남부에서나마 성공적이었다면, 거기에는 ‘창조적 소수’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경성방직의 김성수 형제는 전통경제의 근대적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선구적으로 인도한 ‘대군의 척후’로서 곧 20세기 한국 문명사에서 ‘창조적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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