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간디와 민족독립 교감한 최초의 신문 경영인

주제발표 ④ 인촌과 언론

  •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사

    입력2011-10-19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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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디와 민족독립 교감한 최초의 신문 경영인

    동아일보 창간호.

    인촌 김성수 선생의 언론과 교육운동은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를 ‘문화적 민족운동’이라 한다. 인촌이 구축했던 언론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한국 언론에 뿌리내리고 있다.

    김성수는 대표적인 신문 경영인이었다. 총독부는 1920년 1월6일 3개의 민간지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가했다. 30세 청년 김성수는 이때부터 동아일보를 안정된 경영 상태에서 제작 발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무리 훌륭한 논객과 취재기자들이 모인 신문사라도 경영이 부실하면 유지될 수 없다. 독자에게는 취재와 편집의 우수성 여부가 신문의 성패를 가르는 것으로 비치지만 경영이 뒷받침되지 않는 신문은 존립이 불가능하다. 김성수는 안정된 경영으로 언론인들이 좋은 신문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최초로 성공한 신문 경영인

    김성수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신문의 대중적인 보급과 광고를 통한 수입, 인쇄의 근대화, 경리 등 일본식 및 서구식 운영기법으로 신문을 경영했다. 동아일보와 같은 때에 창간된 조선일보는 1933년 1월에 방응모가 신문을 인수할 때까지 경영면에서 안정을 기하지 못하여 경영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24년에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는 참신한 지면 구성으로 인기가 있었고, 최남선도 문인으로서 명망이 높았으나 경영난을 타개하지 못하여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신문 경영을 포기했다.

    김성수도 처음부터 신문 사업에 선뜻 나서지는 않았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조선에서 언론의 사명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시대 상황이 첫째였고, 둘째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30세 청년 김성수가 아직 ‘경제상 수지상상(收支相償)이 못되어 유지책이 곤란할 것’이 분명한 신문 사업에 손대기는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다음에는 적극적인 태도로 발 벗고 나섰다.



    동아일보의 발행 허가가 나오자 그는 서울 화동 138번지 중앙학교 교사에 ‘동아일보창립사무소’ 간판을 내걸고 자본금 100만원을 목표로 주식 모금에 나섰다. 동아일보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 사람이 김성수다. 그는 재력도 있었지만 신의의 인간성과 인재를 아끼는 경영 원칙으로 신문사를 이끈 것이다.

    김성수는 신문 경영인으로 누구와도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확고한 위치에 서 있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신문을 창간하여 언론인과 문인들을 당시로서는 첨단적인 신문사에 포용하여 일제 강점의 암흑기, 광복 후 건국과 전쟁의 혼란기에 민족 언론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인재의 집결, 건국세력 형성

    일제강점기에 신문은 인재의 집결처였다. 김성수는 언론인과 문인들을 신문사라는 선진적이고 첨단적인 조직에 포용하여 암흑기와 혼란기의 한국 사회에 민족 언론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했고, 광복 후에는 이들이 정계를 비롯하여 학계와 문화계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3대 민간 신문 중에서도 경영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동아일보에는 가장 많은 인재가 모여 있었고, 거쳐 갔다.

    김성수는 조선 최고의 명석한 지식인들을 논설진과 보도진으로 포용했다. 신문사는 명예로운 일자리였다. 동아일보의 주요 제작진 가운데는 당시에, 또는 후에 사회주의자로 활약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장덕수에 이은 제2대 주필 겸 편집국장 홍명희(1924.5~1925.4), 이광수에 이은 제4대 편집국장 김준연(1927.10~1928.5), 영업국장 홍증식(1921.9~1924.5)을 비롯하여 기자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1924년과 그 이듬해에 대부분 조선일보로 옮겨갔다.

    광복 후 동아일보 인맥은 한민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다. 한민당의 수석총무는 송진우였다가, 송진우가 암살당한 후에는 김성수가 맡았다. 동아일보는 한민당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논조로 발행되었다. 광복 이후 좌익지가 언론계의 기선을 잡았을 때에 동아일보는 우익지로 분류되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사상과 토론의 마당으로 제공했다. 신문과 잡지는 외국의 새로운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는 매개자였고, 외국과의 연계를 통해서 독립의 방안을 모색하고 논전을 벌이는 지식인들의 광장이었다.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총독부의 탄압과 사내의 갈등을 동시에 겪어야 했다. 필화와 논전이 벌어지는 회오리바람에 휩싸이고 위태로운 태풍의 눈이 되었다. 창간 논설기자였던 김명식은 “근대적 의미와 색채를 가진 필화와 논전”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회고했다.

    간디에게 보낸 편지

    가치관이 혼돈되고 사상적으로도 방황하는 시기였다. 3·1운동 후 민족주의 사상이 팽배했으므로 일본 당국은 이를 극히 경계했고, 한편으로 청년들은 진보적인 사고로 노년층 또는 유림과 대립하는 형국이었다. 동아일보 내부에서도 청년층과 노년층의 세대 차이에 의한 갈등이 있었다. 김성수가 제4대 사장에 취임하는 1924년에는 기존의 민족주의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각종 사조가 유입되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창간 초에 주식 제1회 불입금의 일부로 들어온 10여만원이 거의 다 없어졌다. 김성수 개인으로도 이때가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그가 일으킨 경성방직이 아직 공장도 세우기 전에 때마침 몰아친 경제공황으로 뜻밖의 큰 손실을 보아서 도산 지경에 이르는 사태에 처했던 것이다.

    김성수가 직면한 또 다른 어려움은 총독부의 언론탄압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창간 후 보름 만인 4월15일자(제13호)가 첫 발매금지를 당했고, 이어서 1920년에 19회, 1921년부터 1923년까지는 매년 16회의 압수, 1924년과 1925년에는 각각 68회와 67회의 압수를 당했다. 총독부 경무국이 남긴 비밀 자료집에 수록된 연도별 압수기사 건수를 보면 김성수가 사장으로 재직하던 기간에 가장 많은 압수를 기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성수 사장이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밝혀졌다. 총독부의 검열 기준을 적극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김성수의 편지는 인도의 ‘간디기념재단’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과 인도는 식민 치하를 벗어나려 했던 동병상련의 정신적 유대를 가진 나라였다. 김성수가 간디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신문이 어떤 방법을 활용하여 독립정신을 펼치려 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문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인도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저항운동의 사례가 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간디가 있었다. 조선에도 간디와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열망했다. 동아일보는 그래서 간디의 독립운동을 우리의 처지와 대비하여 보도했다.

    총독부도 이 같은 사실을 일찍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다. 김성수가 간디에게 편지를 띄운 날은 1926년 10월26일로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신은 인도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 조선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지도자이며 당신이 성공하면 우리는 기쁨을 나누고, 실패하면 우리는 슬픔을 느낍니다. 세상의 정의가 당신을 지지하기 때문에 당신의 이상이 실현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간디의 답장은 11월26일에 작성되었는데, 해가 바뀐 1927년 1월5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조선의 독립을 되찾으라는 메시지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제목이었다. 답장은 짧았으나 김성수는 그가 인도의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 약력과 공적을 상세히 소개하여 행간에 담긴 의미를 전달했다.

    일제 치하의 민족운동과 문화운동 사상운동 등은 거의 대부분 신문 또는 언론인과 관련이 있었다. 김성수는 경영 일선에 나설 때는 물론이고 ‘취체역’ 또는 ‘고문’으로 물러앉은 때라도 동아일보 사주로서 책임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중요한 결정은 그의 승인을 거쳐야 했던 최고 경영인이었다.

    김성수는 탁월한 경영 수완과 인재 포용력으로 험난한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아일보를 이끌어왔다. 주주대표가 되어 신문사를 일으켜 세웠고,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마다 막중한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의 업적은 동아일보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이래 오늘날까지 한국 언론의 전통 수립과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김성수는 언론 경영인으로 항일, 문화적 민족주의, 건국, 민주화의 큰 흐름을 이끌었던 거목이다. 암흑의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35년간 언론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면서 때로는 후견인으로 언론 발전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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