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서울시장 선거는 시작일 뿐이다

  • 입력2011-10-19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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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손(養孫)이라고 했다. 양자(養子)야 흔히 들어온 단어이지만 양손은 낯설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는 13세이던 1969년 작은할아버지 집에 양손으로 입적했다고 한다. 그해 작은할아버지의 아들이 사망해 손이 끊기자 큰할아버지가 동생 집안 제사라도 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리 했다고 한다. 박 후보의 작은할아버지는 일제(日帝) 말기에 형을 대신해 징용을 갔다가 행방불명이 됐다고 한다. 당신 대신 아우를 징용 보내야 했던 박 후보의 큰할아버지로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빚을 덜려 했을 것이다. 양손은 “우리나라에 없는 제도”(김황식 국무총리)라고 하지만 40여 년 전 시골(경남 창녕)의 한 집안에서 양손제도가 있네, 없네, 미리 따져봤을 리는 만무하다. 큰할아버지의 결정에 아버지가 따랐고, 아버지의 어린 자식은 졸지에 작은할아버지의 손자가 됐을 터다.

    박 후보가 작은할아버지 집으로 호적을 옮기면서 그와 그의 형(당시 17세)은 둘 다 외아들이 되었고, 이는 훗날 병역 혜택으로 이어졌다. 박 후보는 부선망 독자(父先亡 獨子·아버지를 일찍 여읜 외아들) 규정에 따라 보충역 판정을 받고 1977년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보충역으로 병역을 마쳤다. 당시 행정착오로 박 후보는 6개월이 아닌 8개월을 근무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이 문제 삼고 나온 것은 박 후보의 아버지가 두 아들의 병역 면탈을 위해 차남의 호적을 옮긴 게 아니냐는 것이다. 홍준표 대표는 “(박 후보의 부친이) 큰아들의 병역 면탈을 위해 아들을 쪼개기 해 두 아들 모두 독자가 되었다. 형제를 위해 아버지가 (호적을) 쪼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징용을 갔다던 박 후보 작은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1941년 사할린으로 징용 갔다던 박 후보의 작은할아버지는 실제 1936년에 행방불명되었고, 그러니 큰할아버지 대신 징용 간 작은할아버지 손자로 입적했다는 박 후보 측의 양손 경위는 거짓말이라는 얘기다. 이 와중에 나경원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을 맡았다가 ‘음주 방송’ 물의로 물러난 신지호 의원은 일본 측 사료를 근거로 박 후보의 작은할아버지는 강제 징용 간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돈벌이 간 것이라고 주장해 또 다른 물의를 빚었다. 신 의원의 말인즉 일제의 조선인 인력동원은 1939∼41년에는 기업체 모집, 1942∼43년엔 조선총독부 알선, 영장에 의한 징용은 1944∼45년에 이뤄졌으니 1941년에 사할린에 갔다는 박 후보의 작은할아버지는 강제 징용 된 게 아니라 제 발로 돈 벌러 간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른바 일제의 조선 식민화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뉴 라이트 식’ 역사 읽기다. 역사를 읽는 데 있어 사료는 중요하다. 그러나 승자(勝者)의 기록만으로 정확한 역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일제야 모집과 알선, 징용으로 단계별 구분을 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식민지 조선 백성들에게는 같은 징용일 수밖에 없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일방의 기록(그것도 일제의 기록)을 무기로 삼아서야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박 후보는 자신의 가계사(家系史)에 대해 “아주 어릴 때 일인데, 할아버지는 징용 안 가셨고 작은할아버지가 대신 가셨고…, 사실은 그것도 정확지 않다. 아버님은 81년에, 어머님은 85년에 돌아가셨다. 들은 게 없다. 큰누님이 연세가 많으신데 누님도 정확히 기억 안 난다고 하신다”고 말했다(10월13일자 ‘조선일보’ 인터뷰).



    나는 박 후보의 이 말이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3살 소년이 병역 기피를 위해 호적을 바꿨다는 얘기냐? 최소한의 합리적인 판단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항변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다. 안상수 한나라당 전 대표는 절을 옮겨 다니며 고시공부를 하는 바람에 징집영장을 못 받아 제때 군에 갈 수 없었다는 취지로 자신의 병역면제 이유를 설명했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김황식 국무총리, 원세훈 국정원장 등 현 정권의 주요 인사들도 갖가지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이 박 후보의 병역특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의 말(10월13일 MBC 토론)처럼 “제 눈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탓하는” 격이 아닐지 모르겠다.

    10월11일, 국회의 대(對)정부질문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김황식 총리를 상대로 ‘박원순 때리기’에 집중했다.

    “박원순 캠프에 가담한 한국진보연대의 행동강령은 ‘민중봉기론’이다. 박 후보가 시장이 되면 반미·반국가 투쟁의 전장이 될 것이고, 좌파의 체제 전복을 위한 투쟁기지가 될 것이다. 박 후보는 종북(從北) 좌파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박원순 후보가) 모금한 돈 중 재벌의 등을 쳐서 모금한 금액이 300억원가량 된다. 박원순씨는 한 손으로 채찍을 들어 재벌들의 썩은 상처를 내리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삥’을 뜯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해왔다. 저잣거리 양아치의 사업방식이다. 그들은 시장경제를 감시하는 대신 기생하고 있다.”(차명진 의원)

    “(박원순 후보는) 학생 기간에 등기소장을 하고 연수원을 다녔다. 악취 나는 학력, 경력의 의혹투성이 후보가 표를 외치고 있다.”(안형환 의원)

    도대체 총리가 답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니 애초 대정부질문을 빙자해 박 후보를 공격하자는 속셈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박 후보를 대변할 이유는 없다. 또한 이미 언론에 보도된 박 후보 측의 항변 또는 해명을 일일이 기술할 만큼 지면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다만 박원순이 이끌었던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가 “저잣거리 양아치의 사업방식”이었다면 감사원이든 검찰이든 당장 나서서 그 실체를 밝혀야 한다. 참여연대에서 재벌을 비판했던 박원순이 ‘아름다운재단’을 차려 재벌기업으로부터 ‘삥’을 뜯었다면 ‘삥’을 뜯긴 재벌기업은 당연히 박원순을 고발해야 한다. 더구나 박원순이 기부금을 만원 한 장이라도 착복했다면 당장 구속해야 마땅하다는 얘기는 해야겠다. 그게 아니라면 검증을 빙자해 무책임한 정치공세를 퍼붓는 구태(舊態)는 이제 그만 보였으면 한다. ‘안철수 현상’이야말로 바로 그런 지긋지긋한 삼류 정치를 그만 보고 싶다는 다수 국민의 갈망을 투영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한국의 정당정치가 ‘대표성의 위기’와 ‘인정의 위기’를 맞게 된 근원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설령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승리한다 해도, 머지않아 더욱 강력한 역풍에 직면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박 후보가 서울시장이 되면 (서울시가) 반미·반국가투쟁의 전장이 될 것이고, 좌파의 체제전복을 위한 투쟁 기지가 될 것”이라는 식의 ‘좌파 타령’은 식상하다 못해 역겨울 정도다.

    박 후보를 지지하는 서울시민은 종북 좌파에 이용당하는 인물을 지지할 만큼 어리석다는 것인가? 서울시가 체제전복의 전진기지가 되도록 서울시민이 두고 본다는 말인가? 이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레드 콤플렉스를 이용해 표를 얻자는 낡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20∼30대 젊은이들의 한나라당에 대한 소감은 대체로 ‘후지다’는 것이다. ‘후진 정당’에 투표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만날 젊은 층의 투표율이 낮아야 선거에서 이긴다는 소리나 되풀이하는 것이다.

    박원순 후보는 천안함 폭침은 북한 소행으로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발표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을 정부가 탓하기보다는 왜 그런 사람이 많은지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발언은 “이 정부 들어 북한을 자극해 억울한 천안함 장병들이 수장됐다”는 대목이다. 보수우파 진영에서는 예의 ‘종북 좌파’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나 박 후보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천안함 장병들의 죽음에는 북한을 관리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간접적으로 있다는 내 주장이 이상하냐?”고 반박했다.(10월13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여기서 한국 사회 좌·우파 논쟁(논쟁이라기에는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싸움에 가깝지만)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우파보수 세력은 북한이 한 짓을 믿는다면 그걸로 그만이지 왜 토를 다느냐? 북한 편을 드는 게 아니냐? 그러니 종북 세력이다, 라고 공격한다. 진보좌파 세력(과연 한국 사회에서 진보좌파란 개념이 적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은 북한 소행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이명박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정부 발표를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발표를 받아들이지만 직접 보지 않아 확신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민주당 추천)가 그 예다. 한발 더 나가 ‘남한 정부의 자작극’을 입에 올리는 극소수도 존재한다. 나 역시 그들은 종북 좌파라고 생각한다.

    서울시장 선거는 시작일 뿐이다
    全津雨

    1949년 서울 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저서 :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그러나 북한 소행에 대한 직접 책임과 현 정부의 평화관리 실패에 대한 간접 책임을 함께 묻는 정도까지 종북 좌파라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의 강경한(또는 원칙적인) 대북정책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를 두고는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이 존재할 수 있고, 또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좌파로(또는 우파로) 배척한대서야 진정한 자유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거듭 얘기하지만 ‘안철수 현상’은 그와 같은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잣대에 대한 거부를 내포하고 있다. 그 잣대에 의해 유지되는 현 정치질서에 대한 실망과 혐오를 함축하고 있다. 안철수 교수는 “예전 선거와 똑같은 양태로 가는 걸 시민들이 바랄까. 정치하는 분들이 아직도 잘 모르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원순 후보에 대한 한나라당의 집요한 네거티브 공세를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의 승패가 갈린다고 한국 정치의 숙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숙제에 대한 국민의 총체적인 평가는 결국 내년 총선과 대선으로 이어질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는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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