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안철수 신드롬의 허상

정치적 메시아가 아닌 ‘정치 로또’에 열광

  • 정해윤|미디어워치 객원논설위원 kinstinct1@naver.com

    입력2011-10-19 17: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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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 신드롬의 허상
    안철수 바람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그는 잠시 정치무대에 섰다 물러났을 뿐이지만 세상의 관심은 여전하다. 안철수 현상은 정치권에 보내는 경고이자 새 시대에 대한 요구로 해석된다.

    그러나 새로운 인물을 원하는 것 자체는 결코 새롭지 않은 현상이다. 한국인이 정치를 혐오하지 않은 때,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지 않은 때는 한순간도 없었다. 실제로 많은 이는 안철수 현상에 기시감(旣視感·처음 경험한 대상을 이미 과거에 본 대상으로 느끼는 것)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안철수를 보면서 박찬종이나 노무현을 떠올린다.

    분명 안철수 현상에는 이전에 없던 새로움과 반복되는 익숙함이 뒤섞여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필자는 안철수 현상이 한국인의 전통적 인물관이 재연된 현상일 뿐이라고 본다. 안철수는 복고적 인간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안철수 신드롬의 바탕에는 신화화된 스토리가 있다. 그것은 한류드라마의 서사구조처럼 한국적 특성을 띤다. 학창시절 모범생이 성인이 돼서 사회에 공헌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신화는 엘리트들의 부패에 신물이 난 대중에게 신선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장기에 아무런 일탈도 하지 않았던 그가 진보적이거나 변혁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한국 문화에 깊이 내재된 보수성을 체득했다고 판단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필자는 그가 기업가로서 한계를 가졌다고 본다. 올해 초 여러 여론조사는 그를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멘토이자 모시고 싶은 상사로 꼽았다. 우리 주변에는 리더 안철수 서울대 교수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안철수연구소㈜의 직원들이다. 현재의 사회 분위기대로라면 안철수를 상사로 모셨던 그들이야말로 더없이 행복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연애만 하고 싶은 남자

    그러나 정말로 그랬을까? 흥미로운 점은 입사하고 싶은 회사를 조사하면 안철수연구소는 결코 인기 있는 회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철수연구소는 기업가로서 안철수의 실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가 만든 기업문화, 보상체계 등이 직원들에게는 삶의 현실이다. 한국에는 ‘외부적으로 덕망 있는 인물과 함께 사는 이의 고충’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 ‘효자 남편을 둔 며느리’가 그것이다.

    지금 대중은 두 가지 상이한 잣대로 안철수 리더십을 평가하고 있다. 한국 여성은 연애할 남자와 결혼할 남자를 뚜렷이 구분하는데, 지금 대중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안철수와 결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연애하고 싶은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와 반대다. 창업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만 얻어먹었다. 그런데 ‘입사하고 싶은 회사’ 조사에선 만년 1위에 오른다. 대한민국 진보 인사가 미국 욕을 하면서도 미국으로 자식 유학을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 여론조사대로라면 삼성전자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안철수 같은 상사를 모시는 것이 대중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안철수연구소가 애플 같은 회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안철수 캐릭터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에 있다. 결혼을 앞둔 여성이 냉철한 현실감각을 회복하듯이 이제 우리는 그에 대해 조금 더 현실적인 평가를 내려야 할 때다. 어느덧 안철수가 한국인에게 결혼의 대상으로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치인 안철수가 어떤 한계를 가질지는 이미 다른 이가 지적한 바 있다. 박경철은 “안 교수의 최대 단점이 권력의지가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유시민은 “정치는 단순히 어떤 사상과 아이디어 정책의 경쟁일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때로는 비인간적일 수 있는 권력투쟁이 포함돼 있다. 이런 것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내면적 확신이 있어야 대통령선거에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정치인 안철수에 대한 평가는 필자가 기업가 안철수에 대해 내리는 평가와 결코 다르지 않다. 정치건 사업이건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져야 하는 성향이 있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면이다. 서구에서는 일찍이 군주에게 그런 예외를 용인했다. 그러나 유교문명의 군주론은 이런 정상참작이 없다. 선량한 인물이 덕을 베풀기만 하면 세상이 저절로 평온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 지난 세기 동양이 서양에 뒤떨어진 것은 도덕과 현실의 간극을 이렇게 혼동한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리더에게 비인간적인 면을 허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안과 밖에서 다른 현실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호전적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나라다. 이들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지도자는 때로는 전쟁을 결심할 만큼 대담하고, 때로는 아침에 한 말도 저녁에 뒤집을 만큼 표리부동해야 한다. 그런데 안철수처럼 선량한 얼굴을 한 인물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안철수 신드롬의 허상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는 안철수 교수의 시장후보 양보로 지지율이 급등했다.

    무엇보다 한국에선 이런 성향을 내포한 사람만이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안철수 현상의 역설은 권력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려 든다는 점이다. 그가 마음을 비운 대가로 권력을 얻는다면 노자(老子)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한 사례로 기억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세계에서 가능한 일일까?

    역사적 인물에게 공(功)과 과(過)는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온다. 10월6일 사망한 스티브 잡스의 경우 긍정적 평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친딸을 사생아로 내버려둔 나쁜 아빠, 직원들을 극한까지 몰고 간 나쁜 경영자의 이미지도 함께 존재한다.

    ‘2m 수영장’論의 허구성

    유독 한국 사회는 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의 유별난 무균질 선호 성향은 검증받을 기회가 없던 신인이나 은둔거사형(型) 인물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 안철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무결점의 리더로 비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본격적인 검증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보다 본질적인 것은 큰 과를 기록할 만큼 큰 성취를 이룩하지 않은 데 있다.

    안철수는 서울시장 출마설이 나올 때 ‘2m 수영장’론(論)으로 행정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과시했다. 수영을 하는 사람에게는 수심 2m의 수영장이나 태평양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의 얘기는 듣기에 따라 ‘애플 같은 회사를 만들 수도 있는데 하지 않았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런 주장이야말로 안철수의 한계를 드러내 보인다. 높은 산이 큰 그늘을 드리우듯이 한 사람의 리더가 아무런 흠결 없이 세상에 성취를 남기는 경우는 없다. 스티브 잡스는 숱한 인간적 실수와 실패작을 양산하며 창의적 제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안철수는 그런 흠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거대기업을 만들지 못했다. 그가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기업을 키우는 것은 안철수연구소 정도가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스티브 잡스와 유사한 인물을 꼽자면 벤처기업가가 아니라 이병철 같은 산업화 시대의 경영자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병철이 위대한 기업가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소리는 삼성에 아부하는 소리로 간단하게 매도된다. 그가 위대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고매하고 인간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탐욕이 춤추는 기업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탐욕스러웠기 때문이고, 냉혹한 경영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차가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초일류기업이 된 삼성전자는 창업자의 이런 성향이 발현된 결과다.

    정치인 안철수를 김대중과 비교해보자. 많은 이가 안철수, 박원순의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1987년 양 김씨의 단일화 실패를 떠올렸을 것이다. 대중은 5%의 지지를 받는 인물에게 50%의 지지율을 헌납한 안철수를 칭송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상적 정치행위라면 김대중은 그렇게 했어야 했다.

    김대중은 1987년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김영삼에게 양보했어야 했다. 1992년 정계 은퇴선언은 반드시 지켜야 했고 정치복귀는 해서는 안 됐다. 독재정권이 금권정치를 펼쳐도 정치자금은 한 푼도 안 받았어야 했다. 이를 실천했더라면 비토세력으로부터도 존경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평적 정권교체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노벨평화상 수상도 없었을 것이다.

    이병철과 김대중은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이 아니다. 기업가가 더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것과 정치인이 최고 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본질이 동일하다. 그들이 소유한 강한 욕망이야말로 두 사람을 정상에 오르게 한 원동력이었다.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는 양 김씨가 역사적으로 심판받아야 할 사안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이 장면은 두 사람이 권좌에 오른 이유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기도 한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렬한 자기 확신은 세상과 불화하는 이유이면서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었다.

    김대중이 1992년 정계 은퇴선언을 했을 때 세상은 찬사로 가득했다. 그러다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했을 때는 정반대의 역풍을 맞았다. 그러나 김대중이 역사에 기록될 부분 중 가장 큰 페이지는 결국 집권 기간에 이룩한 일들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큰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직업윤리의 문제

    안철수 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근대적 직업윤리의 부재’에 있다. 근대적 인간형은 한 사람이 특정 분야의 직인(職人)으로 성장해가는 유형이다. 이병철과 김대중은 평생 기업가와 정치인으로 살았다. 반면 안철수는 많지 않은 나이에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의사가 되었다. 일본식 직업윤리를 적용한다면 가업을 이어나갔어야 옳다. 그는 이 길을 관두고 기업가의 길을 택했다. 이 역시 10여 년 만에 그만두고 교수의 길을 택했다. 그는 괜찮은 의사였고 괜찮은 기업가였지만 한 번도 최고가 되어본 적이 없다. 이런 안철수식 이력관리는 한국인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라고 미화하기도 한다.

    팔방미인형 인물이 정치에 입문하는 것은 필연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중년남자는 대개 정치 외도를 꿈꾼다. 늘 새로운 인물을 찾는 유권자의 성향도 이를 부추긴다. 우리가 한 분야에서 작은 성취를 이룩한 사람을 정치판에 보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대중이 괴물 취급하는 정치인도 크고 작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한때의 안철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안철수는 그동안 ‘기업가 정신’을 설파해왔는데 정작 그 자신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업을 일으켰으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철수가 살아온 삶으로 볼 때 그 자리에서 홀연히 떠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의사의 아들인 그가 노벨의학상을 목표로 하거나 한국의 슈바이처가 되는 것이 과연 대통령 안철수가 되는 것보다 못한 걸까?

    이런 행보에 대해서도 합리화의 근거는 있다. 우선 현실참여를 중시하는 사르트르적 지식인상(像)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창시절 겁이 나서 데모를 못했다는 그가 지금은 대한민국의 모든 고민을 짊어진 양 모양새를 취하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또 하나는 최근 유행하는 통섭형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시대가 다양한 분야의 통합적 지식인을 요구하니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인 안철수야말로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르네상스형 인간은 전통적인 선비상과 부합한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는 번지르르한 언변을 제외하면 대체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헛똑똑이’에 불과했다.

    외국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은 가업을 잇는 일본인의 직업윤리를 칭송한다. 일본인이 대를 이어가는 것은 구멍가게만이 아니다. 일본이나 서구에서는 정치도 가업으로 이어간다. 정치 역시 하나의 전문영역이라는 점에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를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과 비교해보자. 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음에도 자식들에게 지역구 하나 물려주지 못했다. 한국에서 정치는 공동구역으로 남겨둔다. 이 무주공산은 다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엘리트들이 최종적으로 승부를 겨루는 장이 된다. 덕분에 각 분야의 싹수 있는 인재를 모조리 정치가 징발해간다.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안철수가 기업을 떠난 행위는 기업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친다. 그는 기업가 본연의 활동을 통해 새로운 리더십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런 지적은 발견할 수 없다. 마치 동양화에서 여백의 미를 높이 평가하듯 적당한 선에서 멈춘 사람을 칭송한다. 덕분에 스티브 잡스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분야에서 완전 연소하는 인물은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병철의 삶을 재평가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아마도 그를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인간으로 꼽아야 할지 모른다. 그는 정주영이 정치영역을 기웃거린 것과는 달리 기업가의 외길을 걸었다. 심지어는 기업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전경련 회장 같은 감투도 한 번으로 그쳤다.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일본식 가업 개념이 존재하는 것은 대기업집단밖에 없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정상에 오른 것은 2대에 걸친 기업가 가문의 전통에 힘입은 바 크다.

    베스트셀러의 비밀

    안철수의 대중강연회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도 이유가 있다. 한 시대의 베스트셀러는 사회적으로 듣기 원하는 얘기를 들려줄 때 탄생한다. 그는 한국 대중이 듣기 원하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모든 베스트셀러가 양서는 아니듯 듣고 싶은 얘기가 모두 진실은 아니다. 안철수가 던진 메시지를 복기해보면 몇 가지 의문이 나온다.

    많은 이는 대기업을 비판한 그의 발언을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는 IT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대중과 만나는 자리를 생산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단임제하 한국 대통령이 임기 말에 보여주는 패턴이 있다. 지지도를 만회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재벌을 때리는 것이다. 안철수 신드롬의 바탕에도 이런 정서가 깔려 있다. 한국에서 비판적 지식인으로 보이기에는 반(反)재벌 발언만한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의 메시지는 결코 신선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안철수는 대중에게 진정으로 했어야 할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대기업 때문에 중소기업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산업에 한하자면 대기업보다 더 큰 장애물이 있다. 바로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없는 대중이다. 한국 사회는 안철수에 대해 신화화된 스토리만 기억한다. 그가 바이러스 백신을 무료 배포한 것을 큰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선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자의건 타의건 모두 무료로 배포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미약함은 대중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정품을 구매하지 않는 토양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

    여기에는 대기업을 비판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안철수는 수많은 대중을 만나면서도 이런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채 대중과 거래했다. 그는 대중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존경을 얻는 ‘윈-윈 게임’을 했다.

    안철수와 박경철의 대중 야합

    안철수 신드롬의 허상

    안철수와 박경철의 청춘콘서트 모습.

    그가 전하는 수평적 리더십론도 되새겨봐야 한다. 리더십은 일반 대중이 리더에게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함께 강연회를 한 박경철은 한술 더 뜬다. 공감과 연대, 수직이 아닌 수평, 직렬이 아닌 병렬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새로운 리더십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주장은 얼마나 근거 있는 소리인가?

    20세기 초 월가의 전설적인 투자가였던 제시 리버모어는 “인간의 본성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장의 패턴 속에 인간의 본성이 내재해 있음을 보았다. 21세기 초 우리는 또다시 탐욕에 오염된 시장을 목도하고 있다. 현재 겪는 금융위기는 인간이 진화했다는 증거인가, 아니면 변하지 않은 본성의 증거인가?

    진화심리학자는 인류사에서 모험을 떠맡은 집단이 따로 있다고 본다. 아무런 자원을 상속할 수 없는 비천한 신분의 젊은 남성들이다. 그들은 작은 가능성일지라도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면 목숨을 걸고 도전했다.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기업가 정신의 원형이다. 이처럼 어느 시대 어느 사회라도 모험은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가득 찬 젊은이의 몫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철수나 박경철의 이론을 적용한다면 기업(起業)과 정치에 나서야 할 리더는 누구일까? 아마도 신학대학교 학생이야말로 적합한 인물이 될 것이다. 리더의 역할을 성직자와 유사하게 이해하고 있으니 미래의 성직자가 창업과 정치를 해야 한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 사회의 개혁을 위해 외부에서 초빙된 인사들과 비교해보면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안철수보다 조금 앞선 시점에 카이스트의 개혁자로 등장했던 인물이 있다. 로버트 러플린이라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출신의 과학자다. 그는 카이스트 총장 시절 한국 과학도의 문제점으로 ‘킬러본능의 부재’를 들며 이런 평가를 한 바 있다.

    “한국 학생의 문제점은 ‘잔혹할 정도로 공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거칠게 뒹구는 근성이 필요하다. 한국에도 좋은 모델이 있다. 바로 삼성이다. 삼성이 좋은 기업인 것은 친절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싸울 줄 알고 이길 줄 알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은 이런 면에서 너무 공손하다.”

    이천수는 싸가지 없어서?

    한국인은 킬러본능을 히딩크가 축구선수들에게 요구했던 자질로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점잖은 과학자가 학생들에게 동일한 성향을 요구한 것이 인상적이다. 과학과 스포츠라는 영역을 떠나 탁월한 성과를 내는 사람들의 성향은 동일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발언도 비교해볼 만하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늘 굶주리고 바보짓을 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는 안철수식 리더십과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왜 그런 걸까?

    서구의 리더는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성공비결을 강조하고 있다. 안철수가 착각하는 점은, 그의 리더십 이론은 이미 정상의 자리에 선 제너럴리스트들에게 필요한 자질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젊은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모든 장삼이사에게 제왕학을 가르치는 꼴이다. 서구의 리더는 젊은이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얘기를 하지만, 안철수는 자신이 존경받을 얘기만 한다.

    히딩크나 러플린같이 외부에서 초빙된 개혁가들이 싸워야 했던 것은 한국적 문화였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문제는 경쟁을 회피하고 실패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홀로 튀는 자에 대한 집단적 따돌림이다. 뒤집어 얘기하면 킬러는 경쟁을 즐기고 새로운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찬사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문화는 80%의 인재를 괜찮은 수준으로 만드는 데엔 탁월하다. 반면 상위 1%의 천재, 리더를 키우는 데는 취약하기 짝이 없다. 이것이 한국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기업가, 리오넬 메시 같은 축구선수가 태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한국 사회는 이미 히딩크가 남긴 교훈을 잊고 있다. 그가 한국 선수들 가운데 가장 재능 있는 선수로 꼽은 이는 이천수였다. 이천수가 오늘날 한국 축구계에서 처한 위상을 보면 대한민국의 킬러들이 어떻게 거세되는지 드러난다.

    축구팬은 박지성의 팀 동료 웨인 루니와 라이언 긱스 같은 선수의 엽기행각을 기억할 것이다. 특출난 선수들일수록 사생활에서 유별난 행동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유럽팀 감독이던 히딩크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흔히 히딩크의 업적으로 축구계의 인맥을 타파하고 공정한 인선을 한 사실을 꼽는다. 그가 묻지 않은 것은 출신학교만이 아니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싸가지가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다. 오로지 그라운드 안에서의 기량만을 선발 기준으로 삼았다. 히딩크가 잘도 다루었던 이천수를 한국 축구계는 집단적 왕따로 대우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한국인 중 열에 아홉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면 유능하고 인간성 나쁜 인재라도 상관이 없는가’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리 없다. 이상한 것은 한국인의 도덕적 기준은 턱없이 높은데도 선진국보다 부패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불일치의 미스터리를 풀어야 한다.

    서구의 리더가 과열된 경쟁심에 너그러운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직업윤리 자체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이것을 금욕적 직업윤리라고 했다.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칼뱅은 다른 형태의 욕망에는 엄격했지만 직업을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은 허용했다. 욕망이란 물과 같아서 메말라서도, 넘쳐서도 안 된다. 프로테스탄트 문명은 욕망의 치수작업에 성공했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직업에서 최고가 되는 방향으로 욕망을 통제해 활용한다. 이것이 서구 사회가 우리보다 경쟁을 강조하면서도 부패하지 않은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사회 발전을 위해 이런 성향의 인물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양의 오행이론에서는 상극관계가 발전을 촉진한다고 본다. 킬러란 본질적으로 불편한 존재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체계와 충돌하고 이 결과로 세상은 진화한다. 한국 사회는 안철수처럼 반듯한 인물에게 열광할 것이 아니라 스티브 잡스처럼 삐딱한 인간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그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대기업 때문이 아니다. 뿌리 깊은 한국적 문화가 주범이다.

    안철수 현상의 암울한 미래

    안철수의 미래를 예상해볼 만한 인물이 있다.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이다. 한국 대중은 마치 안철수 같은 사회적 기업가가 과거에는 없는 줄 안다. 그러나 유일한과 같은 성자(聖者)형 기업가는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병든 민중을 위해 제약회사를 설립했다. 유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했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존경하는 기업가를 조사해보면 그는 완전히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다. 왜 그럴까? 간단히 말해 그가 남긴 회사의 존재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한 일간지에 회고록을 연재하는 원로배우 신성일은 젊은이들이 깜짝 놀랄 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1950년대 후반 유한양행은 대한민국에 거의 유일한 기업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기업들이 세계적 존재로 성장하는 동안 유한양행은 무엇을 한 것일까?

    착한 기업이 겪는 성장의 한계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유일한은 아들에게 한 푼의 유산도 물려주지 않았다. 청교도적 자본주의에 충실했는지는 모르지만 부모로서는 매정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주인 없는 회사가 된 유한양행은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는 동안 아주 느린 성장만을 했을 뿐이다. 창업자가 남긴 도덕적 경영도 족쇄처럼 작용했을 것이다.

    유일한의 삶은 역사적 존경도 현실적 성취의 바탕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지금 우리가 이병철과 정주영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남긴 기업이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 이상의 이유는 없다. 예술가가 사후에 작품으로 평가받듯이 기업가가 자신이 남긴 기업으로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한 인물을 특정분야에 매진하게끔 독려하는 것은 그를 진정으로 보호하는 일이다. 한국 사회는 멀쩡한 인재를 정치판에 밀어 넣어서 망가뜨리는 악순환을 멈춰야 할 때가 되었다.

    기업가와 정치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괴물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 분야에 매진하는 자들은 정직하다. 더욱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욕망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이들은 비(非)정치의 정치를 행하는 이들이다. 정당에 가입하지도 않은 채 선거를 치르고, 사실상의 정치행위를 하면서도 출마할 의사는 없다고 한다. 이런 무책임하고 비겁한 정치가 한국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우리는 중년에 이른 엘리트들이 거창한 명분으로 정치외도를 하는 행위를 감시해야 한다. 나른한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데 속아서는 안 된다. 안철수 현상의 이면에는 박경철이나 조국처럼 중년에 이른 안철수의 친구들이 있다. 이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이들이 자신의 본업에 얼마나 충실한지 검증해야 한다. 놈 촘스키는 적어도 젊은 시절 학문적 업적이라도 남겼지만 조국에게 이 사회가 갖는 관심은 훤칠한 외모밖에 없다. 박경철은 아예 본업이 뭔지 정체조차 모호하다. 그는 지금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나 된 듯 행세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안철수 현상은 위험하다. 지금 위기에 처한 것은 정당 정치만이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매진하는 모든 사람이 위기에 빠졌다.

    새치기와 정치 로또

    도대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지름길이 어느 날 문득 나타나서 새치기를 하는 것이라면 그런 교훈이 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도움이 될까?

    지금 이 나라의 대중이 원하는 것은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정치 로또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위대한 리더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을 가지고 유능한 리더를 만들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대중의 변덕과 조급함만이 문제일 뿐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리더는 너무나 가까이서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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