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행복한 ‘무지(無知)의 길’?

  •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입력2011-10-20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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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티브 잡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방식을 바꾸었다. 테크놀로지와 콘텐츠를 융합시켜 인류의 생활방식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혁신했다. 그는 ‘정말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물들지 않았다. 죽음을 겸허히 인정하며 떠났다. 더 행복해지려면, 지식이 아닌 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낙관주의적인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살았던 것처럼.
    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행복한 ‘무지(無知)의 길’?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죽었다. 언제나 검은색 터틀넥 셔츠, 동그란 안경, 그리고 턱을 뒤덮은 수염으로 특징을 이루는 그를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애플의 공식 웹사이트는 스티브 잡스의 흑백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스티브의 영민함과 열정, 에너지가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 덕분에 우리 삶은 윤택해지고 향상됐다”는 애도 성명을 내놓았다. 그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통해 한 가정에 입양되었다. 오리건 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 만에 중퇴하고 만다. 그는 컴퓨터를 전문가가 아니라 개인 누구나가 쓸 수 있게 하고,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를 내놓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방식,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즐기는 방식을 바꾸었다. 인류의 디지털 혁명을 이끌며 공학에 심미적 본능이라는 숨결을 집어넣고, 테크놀로지와 콘텐츠를 융합시켜 인류의 생활방식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혁신한다. 사용 가능한 거의 모든 지식을 손바닥 안에 쥘 수 있는 작은 기물(器物) 안에 집약한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정말 놀랍지 않은가?

    죽음은 최고의 발명품

    스티브 잡스가 지켰던 일곱 가지의 원칙. 첫째, 좋아하는 일을 해라. 잘 알려진 바대로 잡스는 대학 중퇴자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인도로 명상 여행을 떠나는 등 본질을 파고든다.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돈을 위해 일하지 말라. 잠자리에 들 때마다 지금 뭔가 멋진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 일을 하라”고. 둘째, 세상을 바꿔라. 잡스는 삶과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동력은 비전에서 나온다는 걸 알았다. 수많은 인재들이 그에게 몰려든 것은 그의 비전 때문이다. 그가 창업한 애플은 다른 기업과는 다른 비전을 제시한다. 다른 기업들이 이익 창출에 매달릴 때 애플은 모든 사람이 더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드는 것에 역량을 집중했다. 셋째, 창의성을 일깨워라. “창의성이란 서로 다른 사물을 조합하는 능력”이다. 잡스는 믹서와 전기밥솥에서 영감을 얻어 컴퓨터를 고안하고, 전화번호부를 보고 착안한 아이디어로 매킨토시의 크기를 정한다.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보는 방식이야말로 새로운 인식과 혁신을 낳는 지름길이다. 넷째, 제품이 아닌 꿈을 팔아라. 애플의 CEO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온 잡스가 맨 먼저 한 것은 30초짜리 광고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광고에 “미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독특한 비전을 담았다. 그는 제품이 아니라 꿈과 혁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섯째, ‘No’라고 1000번 외쳐라. 잡스는 냉혹할 정도로 완벽주의를 고집했다. 세상을 바꾼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은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기준에 들 때까지 ‘No’를 외친 끝에 만들어진 제품들이다. 여섯째,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라. 애플의 제품은 궁극적으로 고객을 향해 있다. 애플의 제품을 씀으로써 소비자들은 좀 더 행복해졌다고 느낀다. 소비자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잡스의 비전이 반영된 결과다. 일곱째, 스토리텔링의 대가가 되어라. 잡스는 항상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직접 나서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카민 갤로, ‘스티브 잡스 무한혁신의 비밀’, 비즈니스북스 참조)

    문명의 위대한 혁신자로 21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평가를 받은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 투병 중에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제게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운명의 중력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대신에 죽음에 순응하고, 그 바탕에서 삶을 깊이 성찰한다. 죽음이라는 한계 안에서 삶은 새로운 빛을 내는데, 그는 그 빛을 본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위대성은 그가 만든 기적 같은 디지털 기기에서도 번쩍이지만, 그보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이성이 결코 해결할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찰한다는 점에서 더 돋보인다. 그가 죽음의 불가해성 앞에서 죽음을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람이 이해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결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임을 통찰한 것이다. 그는 첨단 기술의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삶을 꾸린 사람이지만, 과학기술 만능주의의 오만함에 물들지는 않은 사람이다. 그는 매우 우아한 방식으로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서 죽음이 삶 전체를 둘러싼 무한한 신비임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한 유명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인생의 짧은 기간이 내 이전이나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원함에 흡수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차지하고 바라보는 작은 공간은 끝없는 공간의 광대함에 삼켜진다. 그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도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나는 거기에서보다 여기서 나 자신을 보는 것이 두렵고 놀랍다. 누가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는가? 누구의 명령으로 이 시간과 공간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여기서는 스티브 테일러, ‘자아폭발’에서 재인용)

    우리는 죽음의 신비와 불가해성 앞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죽음으로써 우리는 시간의 영원함과 공간의 광대함에 삼켜지면서 덧없이 사라진다. 우리의 삶이란 건 넓은 바닷가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과 같은 것이다. 파도가 와서 모래밭을 휩쓸고 지나가면 발자국은 사라진다. 그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왜 불행한가

    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행복한 ‘무지(無知)의 길’?
    지구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지구는 분당 30㎞의 속도로 24시간마다 자전(自轉)하는 행성이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분당 30㎞의 속도로 돌 때 태양은 250㎞의 속도로 은하계 안에서 돌고, 또 은하계는 태양보다 두 배나 더 빠르게 우주를 항해한다. 지구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맞는 가을은 지난해 맞은 그것과 올해 맞은 그것이 다르다. 지구가 우주의 궤도에서 전혀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까닭이다. 사람 역시 지난해 가을의 ‘나’와 올해 가을의 ‘나’는 다르다.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세포가 죽고 그 자리를 새로운 세포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우주 만물에 작용하는 영원한 법칙이다. 인류는 지구 위에서 태어나 삶을 꾸린다. 인류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양심을 가진 유일한 종(種)이고, 아울러 지구에서 가장 강한 종이다. 인간이 가장 강한 종으로 진화한 것은 자신의 몸집에 비해 가장 큰 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뇌의 겉 표면은 대뇌피질인데, 여기에는 신경세포체가 가지런히 모여 있고 주름이 잡힌 회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대뇌피질의 80%는 감각 자극과 운동 반응 사이의 연합 영역에 해당하고, 이것은 전두엽 영역의 활동과 의식 기억과 집중력을 관장하는 활동을 한다. 우리가 지능이라고 부르는 것을 관장하는 영역이다. 뇌가 커지고 지능이 높아짐으로써 인류는 더 많은 것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뇌가 커지고 앎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아의식을 발전시키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들 자신들의 잠재적인 부재(不在)도 알게 된 것”이다. (스티브 테일러, 앞의 책)

    발달된 자아의식 속에 깃든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자신을 싫어하는 더 많은 근거도 갖게 된 것이다. 심리학자 I. D. 얄롬은 이렇게 적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 내면의 체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별것 아닌 것처럼 계속 떠오르지만 표면 아래에서는 지속적으로 우르릉거린다. 그것은 의식의 주변에서 머물면서 우리를 어둡고, 불안하게 만든다.”(여기서는 스티브 테일러, 앞의 책에서 재인용)

    지금 지구 위에서 삶을 꾸리는 사람은 70억명이나 된다. 더 많은 지식 속에서 인류는 더 행복해졌는가?

    외계인이 지구에 거주하는 인류를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어느 순간 삶은 부조리한 것이 되었고, 인류 하나하나는 고통 받는 영혼들이 되었다. 사람이 행복을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토록 지독한 불행 속에서 허덕이다 죽는 까닭은 무엇일까? 비문명화 지역에 사는 아주 소수의 부족만이 정신질환이 없고, 쾌활한 낙관주의를 갖고 산다. 인류 대부분은 불행하고, 사람 하나하나는 결핍의 끝없는 악순환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 외계인들은 인류가 왜 그토록 넘치는 불평등과 범죄 따위의 사회병리현상 속에 내던져져 있는지, 왜 그토록 서로 증오하고 충돌하면서 전쟁과 살육, 인종청소, 폭력과 억압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열심히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뭔가 잘못되었다! 당연히 외계인들은 의문을 품고 여러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것이다.

    “왜 인간들은 행복해지기가 그토록 어려워 보일까? 왜 그토록 많은 인간들이 우울증·마약남용·정서장애·자해와 같은 여러 다른 종류의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러워하거나, 근심·걱정·죄의식·후회·질투·비통함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 짓눌려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왜 그토록 많은 인간들은 만족감을 느끼면서 휴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행복을 추구하지만 절대로 행복을 얻지는 못하고, 세상이 어떻게든 자신들을 속인 것처럼 인생을 살면서 실망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가?”(스티브 테일러, 앞의 책)

    이런 물음들은 자연스럽다. ‘과도하게 발달된 자아’가 인류 문명에 깃든 불행과 정신병리학의 뿌리임을 밝혀 말하는 스티브 테일러는 이것을 ‘자아폭발’이라고 명명한다. ‘자아폭발’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뇌가 극단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두뇌폭발’이라는 용어와 평행되는 용어다. 사람의 뇌는 지난 50만년 동안 3분의 1이 더 커졌고, 더 커진 뇌로 지적 능력을 갖게 되면서 자연 생태계를 지배하는 거인이 될 수 있었다. 뇌의 성장과 그에 따른 변화에 견줄 만하게 인류의 정신도 어느 지점에서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를 갖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자아폭발’이다. ‘자아폭발’은 인류 문명의 기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과도하게 발달된 자아’의 표면에 들러붙은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걱정, 사기와 협잡, 강제와 소유에 대한 애착이 자라난다. 그것들은 모든 다양한 형태로 자라나는 악의 싹이 된다. 한마디로 인류는 “타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자아폭발

    우리는 스티브 테일러의 성찰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구 위에 인류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사람이 쓸 수 있는 지구 자원은 급격하게 준다. 자연은 무한이 아니다. 진화 그 자체―혹은 생명체 그 자체―가 생명체를 고도의 복잡성과 의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어떤 타고난 추진력을 갖는데, 그 결과로 자연을 지배하게 된 인류는 그것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연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야만 하고, 정복해야 하는 적이 되었으며, 이는 틀림없이 인간과 자연현상 간의 공감 관계를 깨뜨렸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어려운 새 환경이 개인과 공동체의 분리, 마음과 몸의 분리, 개인과 자연의 분리를 촉진했다. 그리고 자성과 합리성의 더 큰 능력이 필요해졌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것이 ‘분리되고, 예리하며, 공간적으로 결정되는’ 새로운 정신을 창조했다. 인류는 더 똑똑해졌고, 자아의식을 과도하게 키운다. 이게 ‘자아폭발’의 배경이다.

    “자아폭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 지난 6000년의 역사는 이러한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본 모든 종류의 사회적, 정신적 병리 현상들이 가진 모든 특징들―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계급분화, 물질주의, 지위와 권력을 향한 욕망, 성적 억압, 환경파괴, 우리를 괴롭히는 내면적인 불만과 불화―의 연원은 6000년 전에 중동과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심화된 자아의식의 등장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스티브 테일러, 앞의 책)

    심화된 자아의식은 인류에게 발명·창조성·합리성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혁신과 발명이라는 인류의 새로운 능력으로 인해 문자의 발명, 수학과 천문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항공여행, 우주여행, 양자물리학, 유전자생물학, 컴퓨터, 인터넷, 수십억 인간의 생명을 개선한(그리고 생명을 연장시킨) 위생과 의학의 발전들”(스티브 테일러, 앞의 책)이 가능해진 문명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자아폭발’은 곧바로 지식폭발로 이어졌다.

    인류는 좀 더 진화하고, 과학과 기술은 발달한다.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한 세계에서 삶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에 지구 환경은 이전보다 훨씬 나빠졌다.

    “우리는 지표면 아래의 광물과 금속을 고갈시키고 지구의 껍질을 아프게 벗겨냈다. 여러 종의 동물들을 멸종시켰다. 폐수와 쓰레기로 하천을 질식시키고, 토지에 비축된 영양분을 빼앗고, 드넓은 땅을 헐벗게 만들어 침식의 위험에 노출시켰다.”(웬델 베리, ‘지식의 역습’)

    재앙은,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이 모든 걸 해결해 주리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시작된다. 리처드 도킨스라는 진화생물학자는 “인간의 두뇌는 용량이 충분해서 …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인류의 친구인 오만이며, 신성한 오만으로 가장한 불경한 무지”다. (웬델 베리, 앞의 책)

    인류의 지적 능력에 대한 과신은 무지한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물질주의적 무지, 도덕적 무지, 박식한 무지, 공포의 무지, 이익추구형 무지, 권력추구형 무지가 그것들이다. 이런 무지들이 결합해서 만든 오만함은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

    “무지, 오만, 편협함, 불완전한 지식, 위조된 지식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이런 지식이 거대 권력과 결합하면 심각한 파괴를 낳는다.”(웬델 베리, 앞의 책) 우리는 눈앞에서 그 파괴의 심각성을 목격하고 있다.

    “무지와 오만과 탐욕이 합해져 ‘화학과 함께하는 더 나은 삶’을 외친 결과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고 멕시코 만에 죽음의 해역이 생겨났다.”(웬델 베리, 앞의 책)

    오만한 무지는 ‘지역 생태계의 완전성’을 존중하지 않는데, 그 때문에 개발지상주의라는 망령이 세상을 이끌어간다. 오만한 무지는 지식에서 나온다. 인류는 스스로 축적한 지식의 오만으로 무지의 길에서 벗어난다. 사람의 본질적 속성인 무지에 대한 부정이다. 비극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웬델 베리는 “인간이 습득한 지식의 양은 언제나 무지의 양과 똑같을 것”이기 때문에 인류에게 오만한 무지에서 벗어나 참다운 무지의 길로 가라고 말한다. 그 무지의 길은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와 효능을 제대로 알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며,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적절한 규모로 일하는 것이다.”(웬델 베리, 앞의 책)

    본성에 충실하라

    스티브 잡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그 순간 나는 우연히도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던 중이었다. 카잔차키스는 젊은 날 우연히 조르바라는 사내를 만나 그와 함께 갈탄을 채굴하는 사업을 벌인 적이 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한 사람이다. 오로지 본성과 야생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인생을 꾸리는 사람이다. 조르바는 ‘잘난 머리’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긴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조르바는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따라서 지식을 통한 인식의 길 따위와는 아예 담을 쌓고 제 본성과 밀착한 무지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는 거침없이 책에서 얻은 지식에 기대어 사는 교양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라, 인간이란 짐승이로구나. 여보쇼, 두목. 책은 책대로 놔둬요. 창피하지도 않소? 인간은 짐승이오. 짐승은 책 같은 걸 읽지 않고.”

    그는 짐승같이 타고난 본성에 충실하고 그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그는 넘치는 생기와 발랄함으로 세상과 부딪쳐가며 문제들을 해결해간다. 그 모습을 옆에서 오래 지켜본, 카잔차키스 자신임에 틀림없을 작중화자의 입을 빌려 조르바를 “위대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이성보다 더 깊고 더 자신만만한 그의 긍지에 찬 태도를 존경했다. 우리들이라면 고통스럽게 몇 년을 걸려 얻을 것을 그는 단숨에 그 정신의 높이에 닿을 수 있었다.”(카잔차키스, 앞의 책)

    더 행복해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조르바가 살았던 것과 같이 살아야 한다. 그는 쾌활하고 낙관주의적인 태도로 삶을 살고,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다. 조르바가 거침없이 걸어간 그 길이 바로 무지의 길이다. 위대한 작가 카잔차키스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이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카잔차키스, 앞의 책)

    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행복한 ‘무지(無知)의 길’?
    장석주

    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저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나는 스티브 잡스와 조르바를 겹쳐보았다. 두 사람은 극과 극처럼 다른 사람이다. 한편으로 닮은꼴의 사람이기도 하다. 조르바가 그랬듯이 스티브 잡스 역시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한다. 그런 몰입 속에서 독창성과 혁신을 일구고, 디지털 혁명가가 되었다. 삶은 기적이다. 우리 삶의 뿌리는 알 수 있음이 아니라 알 수 없음에서 더 많은 자양분을 길어낸다. 우리 삶이 알 수 없는 신비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단 한 번의 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제 스티브 잡스는 삶을 내려놓은 뒤 죽음이라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저 신비한, 알 수 없음의 길을 간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웬델 베리 | ‘지식의 역습’ | 안진이 옮김 | 청림출판, 2011

    ● 스티브 테일러 | ‘자아폭발’ |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2011

    ● 에두아르도 푼셋 | ‘인간과 뇌에 관한 과학적인 보고서’ | 유혜경 옮김 | 새터, 2010

    ● 니코스 카잔차키스 | ‘그리스인 조르바’ |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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