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호주 친한파 상징 존 브라운(변조은) 목사

한국 선교사에서 호주 한인교회 대부로

  • 시드니 = 윤필립 시인, 호주전문 저널리스트

    입력2011-10-26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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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침하자 호주는 불과 나흘 뒤인 6월29일 파병을 결정했다. 6월30일엔 공군 77비행중대 소속 무스탕 전투기를 6·25전쟁에 투입했다. 이어 9월28일에는 호주 육군 제3대대가 부산항에 당도했다. 호주 육해공군이 모두 6·25전쟁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호주는 6·25전쟁 상황을 주요 뉴스로 자세하게 보도했다. 전쟁 뉴스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된 호주 사람들은 그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밖에 없다. 호주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멜버른에서 대학에 다니던 한 호주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스코틀랜드 출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를 꿈꾸던 그는 연일 보도되는 6·25전쟁의 참상을 보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와 기나긴 피난민 행렬 때문이었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밥 먹고 잠잘 곳은 있을까? 온몸을 붕대로 친친 감은 그 아이는 아직도 살아 있을까? 혹 고아가 되지는 않았을까?’

    6·25전쟁이 만든 인연

    호주 친한파 상징 존 브라운(변조은) 목사

    변조은 목사는 1974년 호주 최초의 한인교회인 시드니 연합교회를 설립했다.

    불길한 상념은 또 다른 상념을 불러일으키면서 한국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나라의 전쟁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됐는지, 처음엔 자신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심했다. 저 나라에 가서 저들을 도와주리라고. 그는 곧바로 장로교단을 찾아가 한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겠다고 신청했다.



    그가 바로 존 브라운(75·한국 이름 변조은) 목사다. 그는 20대 초반에 한 결심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다. 한국에서 12년간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호주 장로교신학대 교수를 역임하고, 호주 최초의 한국인 교회인 시드니연합교회를 설립했다.

    변 목사는 멜버른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호주 장로교신학대에 입학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3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다. 그 사이 노마 브라운과 결혼하고, 아들 마이클 브라운(한국 이름 변선태·목사)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교단으로부터 대학시절에 접수한 한국 선교사 파송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연락이 왔다.

    1960년 초, 변조은 선교사 부부와 두 살배기 아들은 마침내 한국으로 먼 길을 떠났다. 보도를 통해 6·25전쟁의 참상을 접하고, 난민과 전쟁고아를 돕기로 결심한 지 10년 만이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피난민이 많이 모여 살던 부산. 휴전된 지 6년이 지났지만 부산 피난민촌의 환경은 열악하기만 했다. ‘하코방’이라고 부르는 판잣집이 즐비했다.

    피난민촌에 잠시 머물던 변조은 선교사는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위해 마산에 정착했다. 마산을 중심으로 거제도까지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봉사활동을 벌였다. 교인이 10∼20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회를 순회하면서 선교활동을 했다. 교회도 피난민들이 거주하는 집과 마찬가지로 판잣집이었다.

    농촌교회를 순회하던 변 선교사는 충북 음성의 한센병 환자들이 개간지에 세운 교회에 몸담기도 했다. 그 후 마산과 거제 지역 48개 농촌교회 담임목사와 당회장을 맡았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어 설교를 준비해 48번이나 반복했던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호주 양 50마리 싣고 태평양 건너

    변조은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도착한 지 8개월 만에 둘째딸 선혜가 태어났다. 그 후 고아인 순자를 입양해 자녀가 셋으로 늘어났다. 입양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위에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고선 그는 굳이 아이를 낳지 않고도 귀한 가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입양을 제안했고, 브라운 여사도 그 뜻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가난한 교인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변조은 선교사는 호주에 흔해빠진 양을 떠올렸다. 양을 키워본 적이 있던 그는 호주로 건너가 양 50마리를 배에 실었다. 다시 부산을 향해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배에서 손수 양에게 꼴을 먹이고, 배설물을 치웠다. 그 양들은 거제 지역의 가난한 농가에 무상으로 대주는 우유 공급원이 되었다.

    변 선교사의 열성적인 활동은 서울에까지 전해졌다. 장로교신학대에서 그를 교수로 초빙했다. 그는 장로교신학대에서 주로 히브리어를 강의했지만 영어로 구약을 가르치기도 했다. 여기서 그가 한국어를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그의 제자인 홍길복(64·시드니우리교회) 목사의 얘기다.

    “존 브라운 교수님한테서 이사야서 41장 원서강해를 듣고 시험을 쳤습니다. 그 며칠 후에 답안지를 돌려받았는데,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한국에 온 지 5년 남짓한 선교사가 학생들이 한글로 작성한 답안을 빨간 펜으로 일일이 교정해놓았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틀린 한글 맞춤법을 정확하게 지적했더라고요.”

    변 목사가 한국에 기여한 공로는 선교사 생활과 장로교신학대 교수생활이 전부가 아니다. 한국 농촌의 빈곤퇴치운동과 도시빈민운동, 노동자인권운동, 정치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도 결코 그에 못지않다. 우선 그가 가르친 제자 중 도시산업선교회 총무를 지낸 인명진 목사와 빈민운동을 하면서 활빈교회를 설립한 김진홍 목사가 있다.

    “변 목사님은 호주로 돌아온 뒤에도 한국의 민주화에 무관심할 수 없었습니다. 비단 정치·사회적인 사안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닙니다. 빈민구제 쪽에 더 큰 관심을 뒀습니다. 그래서 김진홍 목사가 설립한 활빈교회에 호주의 소를 보내줬고,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해 노동운동과 도시빈민운동을 함께 지원했습니다.”(홍 목사)

    시드니 최초 한인교회 설립

    그뿐 아니다. 변 목사는 1974년 호주 최초의 한인교회인 시드니연합교회를 설립한 주인공으로, 호주 한인교회 30년 역사의 산 증인이자 정신적인 지도자다. 그래서 호주동포들은 변 목사를 한국 사람보다 한국과 한국인을 더 지극하게 사랑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변조은 목사가 12년간의 한국 파송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온 1972년, 호주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서너 가구의 한국인과 만날 수 있었지만 본격적인 예배모임을 갖기는 어려웠다.

    1974년 9월6일, 마침내 한인들이 모여 예배하는 ‘시드니 한국인 크리스천 교제회’라는 모임이 시작됐다. 이 모임이 훗날 최초의 호주 한인교회인 시드니연합교회로 발전했다. 그 후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수백 명의 한국인 기술자가 임시체류 비자인 관광비자를 받아 호주로 몰려왔다.

    서너 가정이 꾸려가던 교제회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정보센터 및 취업알선 기구로 돌변했다. 경우에 따라선 숙소까지 제공했다. 더욱이 교회가 호주 영주권을 얻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기 때문에 교회는 오랫동안 한인공동체 기능을 했다.

    변 목사는 1977년부터 호주 연합교단 업무를 맡게 됐다. 호주의 장로교(주로 스코틀랜드계), 감리교(주로 잉글랜드계), 회중교회(주로 웨일스계)가 통합해서 만든 유나이팅 처치(Uniting Church·연합교단)의 발족은 호주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변 목사는 존 하워드 당시 호주 총리와 논쟁을 벌일 정도로 호주 원주민 인권 보호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아무런 협상이나 강화조약도 없이 호주대륙을 강점한 백인들이 애버리진을 학살하고, 혼혈 원주민 아동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고아원 등에 수용했던 잔혹행위에 대해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소수집단인 호주 원주민 그룹과 소수 이민자 그룹이 힘을 합해 다수집단인 유럽계 백인에게 차별당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며 이 같은 대안이 현실화되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물론 여기엔 호주 내 소수 이민자 그룹 중 하나인 한인들을 위한 배려도 담겨 있다. 변조은 목사는 원주민 인권운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현재 행정수도인 캔버라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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