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호

시대마다 얼굴 바꾼 ‘미국 아이콘’ 뮤지컬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입력2011-12-20 17: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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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은 15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다양성을 모색하며 발전해왔다. 1600년대 오페라에서 발아한 뮤지컬은, 미국에서 ‘오페레타’와 ‘버라이어티쇼’가 결합하면서 최초의 뮤지컬 ‘쇼 보트’(1927)를 선보였고, 서정적인 ‘사운드 오브 뮤직’(1959)을 넘어 오늘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각색한 초대형 뮤지컬로 발전하고 있다. 미국 대표 아이콘이 된 뮤지컬,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시대마다 얼굴 바꾼 ‘미국 아이콘’ 뮤지컬

    뮤지컬 ‘스파이더맨 : 턴 오프 더 다크’.

    외국에 다녀온 사람을 출세한 사람으로 생각하던 초등학생 시절, 같은 반 친구가 미국 뉴욕에 사는 고모 집에 다녀왔다며 자랑했다. 현란한 공연광고 조명과 간판으로 뒤덮인 브로드웨이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왜 뉴욕에 사는 고모가 없을까” 하며 친구를 부러워했다. 어른이 돼 뉴욕에 살며 브로드웨이를 매일 가볼 수 있었지만, 유년기의 브로드웨이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브로드웨이는 맨해튼 남단의 배터리 공원 북동단에서 시작해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된 거리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북으로 통하는 긴 대로다. 1900년 42번가에 빅토리아극장이 처음 들어선 후 많은 극장이 생기면서, 브로드웨이는 미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말이 됐다.

    순수음악을 전공한 필자는 ‘브로드웨이산(産) 뮤지컬’을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중심계층인 세일즈맨들의 지친 삶을 위로해주는 오락문화라고 생각해왔다. 웃고 울며 하룻밤 즐기는 그런 공연양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이런 생각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구경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변했다.

    뮤지컬이란 장르는 오페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 비극의 공연양식인 ‘노래하는 연극’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뮤지컬은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된 그리스 비극의 공연양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오페라



    부연설명을 하면 이렇다. 오페라는 중세가 저물어가고 실증주의 사상이 대두하고, 신대륙 발견과 과학의 발달로 유럽세계가 크게 요동칠 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상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여기는 고전예술부흥운동, 즉 ‘르네상스’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예술가들은 그리스 연극의 공연 장면을 오로지 문헌적 고증을 통해 상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희곡작품의 대본을 바탕으로 공연 장면을 재구성하면서 ‘노래하면서 연기한다(recitarcantando)’는 기본 개념을 중심으로 새로운 극형식을 만들어냈다. 이는 마치 콜럼버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항로를 찾기 위해 통상적인 항로와는 반대방향으로 항해하다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다 하겠다. 그리스의 비극 공연을 되살려보려는 사람들에 의해 우연히 새로운 형식의 장르로 오페라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르네상스시대에 소수의 엘리트집단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귀족들과 특정 신분의 시민들이 즐겼던 오페라는 그리스의 비극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반 관객의 수요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을 틔우고, 관객과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과 변화를 거듭한 뮤지컬은 그리스의 비극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1600년대 중엽의 초기 오페라는 부유층을 위한 마땅한 여가선용 장르가 없었기 때문에 5막의 길이로 하루 종일 공연됐다. 그러다가 지루함을 막기 위해 막과 막 사이에 희극적인 가벼운 내용의 ‘막간극(Intermezzo)’을 넣어서 공연하기 시작했는데,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막간극인 ‘인터메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관객들은 이 짧은 공연을 보기 위해 지루한 본 공연을 참고 견뎠다. 처음에 시사적인 내용이 거의 없이 가벼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던 막간극은 관객의 호응 속에 ‘희극 오페라(Opera buffa)’로 발전했고, 희극 오페라에 다시 풍자적이고 희화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오페레타(Operetta)’, 즉 ‘작은 오페라’가 탄생했다.

    연극처럼 대사가 있고 무용의 비중이 컸던 이 오페레타는 뮤지컬의 탄생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오페레타는 개연성이 희박한 줄거리에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오페레타의 선구자였던 자크 오펜바흐(1819~1880)는 여기에 유쾌한 패러디와 성적인 은유를 가미했다. 이후 오페레타는 유럽 각 도시에서 관람객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다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 의해 흥겨운 왈츠풍의 ‘비엔나 오페레타’로 새롭게 변신했다. 뒤이어 런던 오페레타를 이끈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1836~1911)와 아서 설리번(1842~1900)은 고차원적인 풍자를 순화된 언어와 익숙한 멜로디에 결합시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현대 뮤지컬 출현의 발판을 닦았다.

    오페레타와 버라이어티쇼의 결합

    20세기에 들어 세계의 중심이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하면서 각 오페레타 역시 다투어 뉴욕 공연을 시작했다. 그 결과 오페레타는 대중이 즐기는 다양한 연희 형태의 장르와 결합하는 ‘미국식 변화’를 겪게 된다. 요즘 TV 오락프로그램에서 많이 사용하는 버라이어티쇼(Variety Show)와 오페레타의 결합이 일어난 것. 흑인으로 분장해 희극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던 ‘민스트럴쇼(Minstrel Show)’에서 기원한 버라이어티쇼에는 노래·춤·만담·콩트 등을 엮은 ‘보드빌’, 외설적인 내용의 ‘벌레스크’, 줄거리만 없을 뿐 뮤지컬과 거의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던 ‘레뷔’ 등이 속해 있었다. 이 버라이어티쇼와 오페레타의 결합으로 뮤지컬이 재즈와 함께 미국 고유의 독창적인 대표 문화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초기 미국 대중은 선정적이고 외설적인 내용의 벌레스크에 먼저 심취했다. ‘더 블랙 크룩(The Black Crook·1866)이 벌레스크의 최초 공연인데, 일관된 스토리보다는 화려한 볼거리에 의존하는 미국적 특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코러스가 아름다운 여성들의 안무가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점차 코러스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이 때문에 코러스는 뮤지컬의 필수요소로 자리매김한다.

    당시 뮤지컬의 명칭은 희극적인 내용으로 인해 ‘뮤지컬 코미디’였다. 음악과 가사(대본), 안무가 연극적인 줄거리와 결합한 형식인데, 이때 음악은 내용의 전개와 연결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래서 혹자는 ‘더 블랙 크룩’을 최초의 뮤지컬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경우 극본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줄거리의 뼈대 없이 노래, 춤, 만담, 마술을 순서 없이 공연해 뮤지컬 장르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뮤지컬 코미디는 극본, 작사, 작곡, 연출에 출연까지 했던 조지 코헨(1878~1942)의 등장으로 장르의 성격을 분명히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다시 변화하게 된다. 독일과 비엔나풍의 오페레타는 미국 무대에서 사라지고 미국식의 색깔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미국은 유럽대륙에 이국적 음악인 재즈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1927년에는 최초의 미국 뮤지컬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해머스타인 2세(1895~1960) 대본, 제롬 컨(1885~1945) 작곡의 ‘쇼 보트(Show Boat)’가 탄생했다. 미시시피 강을 오가는 쇼 보트를 무대로, 당시의 세태와 흑인 차별의 비극을 사랑 이야기로 그린 작품이었다. 해피엔딩의 볼거리 위주가 아닌 공연으로서는 최초였다. 이 작품의 결말이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뮤지컬 코미디’라는 용어가 ‘뮤지컬’로 바뀌게 된다. 또 이 작품은 대화에 배경음악을 사용했고, 사실적인 스토리로 장면과 장면을 부드럽게 연결해 관객이 극에 몰두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후 미국 뮤지컬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온 수많은 공연예술인의 활동까지 더해져 질적인 성장을 빠르게 거듭했다. 그러던 중 1935년에는 뒤보스 헤이워드(1885~1940)와 이라 거슈윈(1996~1983)이 대본을 쓰고, 조지 거슈윈이 작곡한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가 무대에 올랐다. 작곡자 조지 거슈윈이 37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등져 차기 작품은 나올 수 없었지만, 이 작품은 흑인 배우들이 인간의 고난을 연기한 수작이었다. 1막에서 주인공 베스가 부르는 섬세하고 분위기 있는 선율의 ‘서머타임(Summertime)’은 아직도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미국 뮤지컬의 비약적인 발전은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1902~1979)와 작사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1895~1960)의 완벽한 콤비플레이에 의해 속도를 더했다.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의 농촌을 무대로 카우보이, 농부, 처녀들의 아기자기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오클라호마’는 뮤지컬을 제대로 연출된 ‘통일성 있는 뮤지컬’로 끌어올리는 대혁명을 이뤄냈다. 두 사람의 이니셜을 딴 ‘R·H 형식’이라는 말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공식으로 자리 잡을 만큼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오클라호마’ 이후 미국 뮤지컬은 낭만적이고 사실적이며 재미있는 줄거리를 가지게 됐고, 단순하고 흥미진진한 인물들이 긍정적인 주제를 아름다운 멜로디의 노래로 펼치게 됐다. 또 빠른 무대 전환으로 속도감 있게 극을 진행하고, 음악을 비롯한 무대, 안무, 조명, 의상 등의 모든 요소가 극본에 따라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미국 뮤지컬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뮤지컬 혁명 ‘오클라호마’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은 계속해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을 배경으로 두 쌍의 아름답고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담아낸 ‘남태평양’(1945), 19세기 태국 왕의 가정교사로 고용된 영국 부인이 겪는 문화 차이와 이해의 과정을 그린 ‘왕과 나’(1951), ‘도레미송’ ‘에델바이스’ 등으로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는 ‘사운드 오브 뮤직’(1959) 등을 만들었다. 인간미 넘치는 스토리와 아름답고 귀에 익숙한 선율로 가득한 이 두 사람의 작품은 관객들의 열광적 갈채를 받으면서 1950~60년대 미국 뮤지컬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와 함께 미국 뮤지컬 황금기에 공연된 ‘아가씨와 건달들’(1951) ‘마이 페어 레이디’(1956)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57) ‘맨 오브 라만차’(1964) ‘카바레’(1972) ‘지붕 위의 바이올린’(1964) 등은 빼어난 작품들로 현재도 활발히 공연되면서 사랑을 받고 있다.

    또 하나. 록뮤지컬은 순수한 록음악이 아니라 극장의 메커니즘과 극적 구성에 맞추어 서정적인 요소를 가미한 음악이다. 록뮤지컬은 젊은 세대의 열광적 환호를 받으며 1960년대에 크게 유행했다.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하자’는 주제의 히피족 뮤지컬 ‘헤어’(1968)가 대표적인 록뮤지컬이었다. 당시 이 작품은 출연진이 나체로 등장한다는 소문 때문에 유명세와 함께 외설논란을 겪었다.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둔 ‘그리스’(1972)는 3388회 공연이란 기록을 세웠고, 6년 뒤에는 영화로 제작돼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뮤지컬과 오페라를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로 마이크의 사용 여부를 든다. 뮤지컬에 마이크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40년경. 엄청난 기계적 음향을 필요로 하는 록뮤지컬이 등장하면서부터인데, 1970년대에 널리 사용됐다. 1981년 ‘드림걸스’의 공연에서는 5개의 무선마이크가 사용됐지만, 1년 후 공연된 뮤지컬 ‘캐츠’에서는 대사를 하는 전 출연진이 무선 마이크를 착용했다.

    미국 뮤지컬의 작품 세계 변화도 흥미롭다. 미국 뮤지컬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이후 사회기류의 변화에 맞추어 작품세계가 바뀐다. 베트남전쟁, 흑인폭동 등으로 여론분열과 사회갈등을 겪으면서 기존의 상식과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자 뮤지컬에서도 전통적인 로맨틱한 정서를 벗어나 현대적인 발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시대마다 얼굴 바꾼 ‘미국 아이콘’ 뮤지컬

    뮤지컬 ‘집시(Gypsy)’의 오프닝 행사 장면.

    이로 인해 1940~60년대 뮤지컬 황금기와는 달리, 평론가의 비평과 대중적 흥행이 일치하지 않는 일이 자주 벌어지게 된다. 비평과 흥행의 반비례 현상이 오히려 주류를 이루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또 영화와 TV로 몰려가는 관객을 잡기 위해 제작비가 상승하고, 브로드웨이 구간이 문화와 예술의 공간에서 향락업소와 소매치기의 온상인 뒷골목으로 변질되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게 됐다. 반면에 공연의 질적인 내용은 다양한 시도 속에서 일정한 내적 성장을 했다.

    이 시기의 핵심적 인물은 작곡가이자 작가로 활동한 브로드웨이 최고의 슈퍼스타 스티븐 손하임(Stephen Sondheim·1930~)이다. 손하임은 철저하게 등장인물에 맞는 선율로 극을 이끌어간 작곡가다. 그는 ‘손하임 방식’으로 평가받는 독창적인 형식의 노래와, 신랄한 가사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음악 흐름과 악기 구성을 구사했다. 동시에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유대인 동성연애자답게, 작품의 주인공으로 사회의 인습과 도덕성에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약자를 등장시켰다. 그래서 손하임 작품의 인물들은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이라고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가벼운 문제를 다룰 때에도 가볍게 느껴지지 않으며, 작품의 메시지는 언제나 어둡고 무겁다. 그의 작품은 즐겁게 웃음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웃음 후에는 무거운 사색으로 인도한다.

    슈퍼스타 스티븐 손하임

    이전의 뮤지컬 극본이 ‘이야기’를 중시했다면 손하임은 ‘아이디어’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의 뮤지컬은 ‘콘셉트 뮤지컬’이라 불리며 형식과 내용이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는 명성을 얻을수록 상업성을 무시하면서 과감하고 다양한 예술적 방식으로 자신의 역량을 무대 위에서 펼쳤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1979)는 그의 그런 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여왕 시대에 손님의 시신을 고기파이로 만들게 했던 영국의 악마 이발사 ‘스위니 토드’를 소재로 한 작품. 이 뮤지컬은 ‘스위니 토드’로 불리는 벤저민 베커가 누명을 쓰고 15년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후 사회에 대한 증오로 살인마가 되어 복수극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시신을 고기파이의 식재료로 쓴 노숙자는 자신의 부인이었고, 자신을 파멸시킨 판사를 죽여 복수에는 성공하지만 본인도 어이없이 살해당한다. 손하임은 이 작품으로 그해의 토니상 8개 부문을 휩쓸었고, 관객의 호응도 뜨거워서 예술성과 상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공연 첫날 관객 절반가량이 역겨움을 주체할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스위니 토드’에 사용된 음악은 현대 오페라 음악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의 악기구성과 확장된 화성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 오페라’라고 불린다. 손하임의 공연은 비평가들에게서는 극찬받았지만, 예외적인 몇 작품을 제외하고 상업적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18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3월22일 같은 날에 태어난 손하임과 웨버는 자주 비교가 된다. ‘오페라의 유령’ ‘캐츠’의 작곡가인 로이드 웨버(1948~)와 손하임을 두고 사람들은 “손하임을 예술가로 만들어준 것은 영국의 연극계이고, 로이드 웨버를 벼락부자로 만들어준 것은 미국의 대중”이라면서, 공연사상 이런 기괴한 문화교류는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손하임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지적으로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1980~9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활동하며 자존심을 세웠지만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유럽발(發) 일명 ‘메가 뮤지컬(Mega-Musical)’의 상륙으로 퇴보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에서 처음 쓴 ‘메가 뮤지컬’이라는 용어는 종종 ‘블록버스터 뮤지컬’이라고도 쓰이는데, 감상적이고 로맨틱한 주제로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유도하는 양식을 말한다. 이 ‘메가 뮤지컬’을 가리켜 ‘영국의 침략’이라 말하거나 맥도널드 햄버거에 비유해 ‘맥 뮤지컬’로 비하하는 평가도 있지만, ‘빅4’(캐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는 미국시장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의 유령’은 850만달러의 제작비로 사전 매표 수익만 1600만달러를 벌어들일 정도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1991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미스 사이공’은 미국 순회 공연 시 대형트럭이 37대나 동원될 정도로 초대형이어서 그 입장료는 중간좌석도 100달러가 넘었다.

    ‘디즈니 애니’ 각색한 초대형 뮤지컬

    이 같은 추세 속에서 1990년대에는 디즈니의 초대형 애니메이션 영화를 각색해 초대형 뮤지컬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미녀와 야수’(1994) ‘라이언 킹’(1997) ‘아이다’(1998) 등의 공연은 작품의 예술성보다는 풍성한 볼거리 위주의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선사하는 공연이다. 그 때문에 2000년대에 이르면 뮤지컬 제작비는 400% 상승한 1000만달러까지 오르게 되고, 입장료도 80% 올랐다. 이렇듯 제작비 상승에 이어 브로드웨이의 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상상력 넘치는 창의적 예술의 온상지라는 이미지는 브로드웨이에서 오프브로드웨이, 또는 오프오프브로드웨이로 옮겨갔다(흔히 브로드웨이는 세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상업적인 뮤지컬로 대표되는 브로드웨이, 예술성과 흥행성을 갖춘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는 오프브로드웨이, 예술성만을 추구하는 실험극들이 주로 오르는 오프오프브로드웨이가 그것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생명력을 잇고 있는 ‘지킬 앤 하이드’ 같은 참신한 작품들은 오프브로드웨이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 ‘맘마미아’는 성공한 뮤지컬을 영화로 다시 만든 것이다. 이 ‘맘마미아’와 같은 뮤지컬을 돈을 넣으면 음악이 나오는 ‘주크박스(Jukebox)’에 비유해 ‘주크박스 뮤지컬’ ‘팝 뮤지컬’이라 한다. 그것은 이 뮤지컬이 창작음악이 아니라 기존의 팝음악을 뮤지컬의 요소요소에서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보여주는 잦은 변화와 예술적이지 못한 작품 현실을 두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주저앉을지 모른다며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뮤지컬은 관객들과 함께 다양성을 모색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그 변화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국의 대표 아이콘 뮤지컬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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