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호

‘넬슨의 피’ 럼주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1-12-21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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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사망하자 당장 그의 시신을 넣은 관을 영국까지 안전하게 운구하는 일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냉장 보관시설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럼주를 관 속에 가득 채웠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해 관 뚜껑을 열어 보니 관 속에 채워두었던 많은 양의 럼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항해 도중 부하 선원들이 몰래 관에 작은 구멍을 내고 술을 빼 마셨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넬슨의 용기와 전투 능력, 그리고 인간적인 풍모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부하들이 그의 혼이 담긴 술을 마셨던 것. 그때 부하들은 관 속의 술을 ‘넬슨의 피(Nelson’s blood)’라고 했으며, 이후 영국 해군 장병들에게 배급되는 럼주를 ‘넬슨의 피’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됐다.
    ‘넬슨의 피’ 럼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는 일본이 자랑하는 해군제독으로 러일전쟁(1904~1905)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러시아 발틱 함대를 물리침으로써 일본에 결정적인 승리의 전기를 만들어준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동양의 넬슨’으로 불리며 일본에서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런데 도고 제독은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언급으로 유명해졌다.

    이야기에 의하면(물론 여러 변형된 이야기가 있다), 러일전쟁 승리로 세계 해군의 주목을 받던 당시에 임관을 앞둔 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일본을 방문해 도고 제독을 접견했다. 이때 도고 제독은 존경심에 가득 찬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나의 업적을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한국의 이순신 장군은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위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런데 사실 한일 양국을 제외한 세계를 놓고 볼 때, 세계 해군사의 핵심에 있으면서 지명도 측면에서 가장 유명한 해군 영웅으로 손꼽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영국의 넬슨 제독일 것이다. 이 때문에 도고 제독 역시 서양의 시각에서는 흔히 ‘동양의 넬슨’으로 불렸다.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친 ‘한국의 넬슨 제독’으로 소개하면 외국인이 쉽게 이해할 것이다. 넬슨의 이런 위상은 오늘날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르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웅장한 모습의 넬슨 동상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해군 지휘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넬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1758~1805)은 1758년 영국 노포크의 버넘이라는 마을에서 11명의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으나 그가 9세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

    학교에서 기본 교육을 이수한 넬슨은 1771년 1월 외삼촌이 선장으로 있는 배에 평범한 선원으로 승선해 키잡이로서 해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외삼촌인 서클링(Maurice Sucking·1726~1778)은 그 후 넬슨의 후원자가 돼 넬슨이 바다에서 경력을 쌓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넬슨은 선원이 된 지 얼마 후 곧 해군사관생도가 돼 본격적인 장교 교육을 받았다. 이후 넬슨은 외삼촌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여러 배를 옮겨 다니면서,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하고 북극해를 통한 인도항로 개척단에 참가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1775년 동인도회사를 보호할 목적으로 출항한 인도양 항해에서 첫 전투 경험을 쌓기도 한다. 그러던 중 1776년 초 말라리아에 걸려 6개월간 휴양을 했고, 병에서 회복해 배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해군 감사관(comptroller)이라는 고위직에 올라있던 외삼촌 서클링이 영향력을 발휘해 넬슨을 부관(lieutenant) 대리로 승진시키고, 상선 호송 목적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는 우스터호(號)에 그를 배속시켰다.



    1777년 4월 우스트호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 넬슨은 정식 부관 자격시험을 치른다. 무난히 시험에 합격한 그는 ‘대리’ 꼬리표를 떼고 정식 부관이 됐고, 카리브해의 자메이카로 항해하는 로스토프호에 배속된다. 1777년 7월 카리브해에 도착한 로스토프호는 미국 독립전쟁 와중에서 영국 승리를 위해 참전해 큰 전과를 올린다. 당시 함선의 지휘관이었던 파커 선장은 넬슨의 공로를 인정해 전리품으로 포획한 적함의 지휘권을 맡기기로 했다. 넬슨으로서는 생애 처음 지휘를 해보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코르시카 전투에서 한쪽 눈 실명(失明)

    이즈음 미국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미국 편으로 참전하면서 영국 해군의 공격 대상이 더욱 늘어나게 된다. 넬슨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큰 활약을 보이며 1778년 말에 이르러서는 많은 적국 선박을 취하게 된다. 파커는 마침내 그해 12월 넬슨을 함선 배저호의 선장으로 정식 임명한다.

    이후 1780년에 이르기까지 미국 배를 나포하거나 스페인 전초기지를 공격하는 등 크고 작은 작전에서 다양한 전투 경험을 한다. 넬슨은 각종 수송 호위 업무를 포함해 1783년 미국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투에 참가해 프랑스, 스페인 전리품들을 획득한다.

    1783년 6월 전쟁 종식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 넬슨은 얼마간 프랑스를 방문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국회 진출을 시도하는 등 한때 일탈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다가 1784년 보레아스호 지휘권을 맡아 카리브 해에서 임무를 수행할 당시 그는 네비스 섬의 지역 유지인 허버트(John Richardson Herbert)의 초대로 그의 집을 종종 방문했다. 이때 그가 만난 사람이 남편과 사별하고 돌아와 삼촌 허버트 집에서 생활하고 있던 젊은 부인 패니(Frances Fanny Nesbit·1761~1831)였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했고, 1787년 3월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후 곧 카리브해에서의 임무가 끝나자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가고, 패니도 얼마 후 그를 따라 영국으로 간다.

    1787년 하반기 이후 넬슨은 몇 년간 함선을 지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평화 시대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함선을 국가에서 많이 운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792년 프랑스혁명으로 새롭게 탄생한 프랑스공화국 정부가 네덜란드에서 당시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지금의 벨기에)을 점령하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해군 전력 보강이 급해진 영국 정부는 1793년 1월 넬슨에게 64문의 대포가 장착된 함선 아가멤논호의 지휘권을 맡기게 된다.

    결국 1793년 2월1일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하자(프랑스 혁명전쟁·1793~1801), 넬슨은 그해 5월 아가멤논호와 함께 지중해 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출항한다. 이듬해 코르시카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다. 그런데 이때 적의 포격으로 튀어오른 돌 파편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대승을 거둔다. 곧이어 치른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에 참패해 상당한 좌절감을 맛보기도 한다. 1796년 1월 지중해 함대의 새 지휘관이 된 저비스(Sir John Jervis·1735~1823) 경은 넬슨을 소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독자적으로 프랑스 해안의 해상 봉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작전에 따라 프랑스와 스페인을 효과적으로 압박해가던 넬슨에게 1797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바로 그해 2월 그는 훗날 그의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로 기록되는 포르투갈의 성 빈센트(St. Vincent) 곶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무찌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저비스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한 이 해전에서 영국군은 호세 데 코르도바 제독이 이끄는 27척의 스페인함대를 무찌르고 압승을 거둔다.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넬슨은 배스 기사단(Order of the Bath) 일원으로 기사 서훈을 받고, 얼마 후 해군 소장(Rear Admiral)으로 승진한다.

    나폴레옹 동방 진출을 좌절시킨 ‘나일 해전’

    그리고 이해 5월 넬슨은 테세우스호 선장으로서 카디스 연안에 대기하면서 스페인 함대의 동태를 살피는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오는 스페인 보물선을 기다리는 임무를 맡는다.

    그런데 이 임무 중에 넬슨은 한 보물선이 정박하고 있다고 알려진 테네리페(Santa Cruz de Tenerife)를 직접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격렬한 교전 속에 상륙 작전을 지휘하는 도중 상륙보트에서 해변으로 내리다가 오른팔 위쪽이 적탄에 맞는 큰 부상을 당한다. 본선으로 돌아간 그는 부축하려는 부하들을 뿌리치면서, “나에게는 아직 온전한 다리와 왼팔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상이 워낙 심해 어쩔 수없이 군의관이 팔을 절단했는데 그는, 수술 후 30분 만에 붕대를 감은 채로 다시 지휘석에 앉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결국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만다. 전투 후 넬슨은 총사령관 저비스에게 “외팔이가 된 나 대신 새로운 사람을 찾으라”고 하면서 크게 낙심했다.

    1797년 9월 넬슨이 영국으로 돌아오자 국민은 영웅의 귀환을 크게 환영했다. 성 빈센트 곶 전투에서 쌓은 공적과 테네리페에서 입은 부상은 당시 영국 국민에게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심지어 테네리페 전투에서의 패배마저 넬슨의 잘못이 아닌 다른 상급 지휘관들의 잘못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환영 속에 넬슨은 전쟁 중에 응급수술로 절단한 상처에 대한 후속 치료를 받으면서 그해를 보낸다.

    1798년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한 넬슨은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바다에 나갈 기회를 찾는다. 마침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지중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정보가 포착됐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남부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것까지는 확인됐으나, 어떤 목적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1798년 3월 넬슨은 프랑스군의 동태를 감시할 목적으로 대포 74문이 장착된 방가드호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줄곧 나폴레옹군의 행적을 끈질기게 추적하던 넬슨은 결국 프랑스함대의 최종 목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나폴레옹은 이집트 정복을 통해 멀리 인도까지 진출할 계획으로 야심 차게 군사 활동에 나선 것이었다.

    마침내 1798년 8월1일 아부키르 만에서 벌어진 유명한 ‘나일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대패시킨다. 위기를 느낀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포기하고 영국 군함들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가듯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멀리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무참히 좌절시킨 이 전투는, 후세 사학자들에 의해 7년 후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보다 세계사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나일 해전에서 크게 승리한 넬슨은 1798년 9월 그의 함대 근거지 중 하나였던 나폴리로 돌아간다. 당시 독립국가였던 나폴리 왕국에서 넬슨은 그곳 국왕과 함께 나폴리 주재 영국대사 윌리엄 해밀턴(Sir Willaim Hamilton·1731~1803)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후 두고두고 그의 명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해밀턴의 젊고 예쁜 아내 엠마(Emma Lady Hamilton·1765~1815)와 불륜에 빠진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엠마보다 34살 많은 윌리엄 해밀턴이 어느 정도 묵인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넬슨은 해밀턴의 집에서 엠마와 동거하다시피 지낼 정도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그들 간의 염문은 떳떳한 평가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즈음 영국군은 나폴리에서 프랑스 혁명정부군과 전투를 벌인다. 전투 초기에는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던 로마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 데 성공하지만, 곧 프랑스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해 오히려 나폴리까지 내준다. 그리고 그해 결국 재탈환한 나폴리에서 넬슨은 그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자코뱅 단원(Jacobin·프랑스혁명의 과격 공화주의자)들과 나폴리 내 배신자들을 관용 없이 처형할 것을 지시한다. 이때 그의 가혹한 처사는 엠마와의 염문과 함께 훗날 두고두고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

    그러던 차에 저비스의 후임으로 그의 상관이 된 키스(Lord Keith·1746~1823) 제독에 대한 명령 불복종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넬슨은 오래전부터 상관에게 잘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일뿐만 아니라 엠마와의 염문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넬슨에 대한 키스의 부정적인 보고서와 엠마 사건에 대한 소문을 접한 영국 정부는 1800년 어쩔 수 없이 그를 본국으로 소환한다.

    넬슨은 엠마와 해밀턴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다. 영국에서도 해밀턴 부부와 넬슨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는데, 그들 사이의 관계는 각종 소문과 함께 당시 영국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넬슨은 결국 1800년 본처 패니의 마지막 간청도 무시한 채 그녀와 관계를 청산했다. 엠마는 넬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해밀턴과 이혼은 하지 않은 채, 1801년 넬슨과의 사이에 딸을 낳는다.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

    ‘넬슨의 피’ 럼주
    1801년 4월 넬슨은 코펜하겐 해전에 참전한다. 당시 덴마크와 스웨덴, 러시아, 프러시아 등은 영국의 프랑스에 대한 오랜 봉쇄 작전으로 자국의 무역에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연합군을 결성해 영국 해군의 봉쇄를 풀려고 시도했다. 이에 넬슨은 덴마크 해안을 차단해 발틱해의 움직임을 통제하자는 총사령관 파커(Sir Hyde Parker·1739~1807)의 의견에 반해 직접 코펜하겐을 기습공격하자는 전략을 내고 파커를 설득해 실천에 옮긴다. 전투 중에 덴마크의 반격이 예상보다 너무 강해 파커는 넬슨 함대에 철수할 것을 함상 깃발로 지시했다. 그러나 넬슨은 그의 기선을 지휘하는 폴리(Thomas Foley) 함장을 돌아보며, “폴리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오른쪽 일들을 종종 놓치곤 한다네”라고 말하고는, 망원경을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에 대고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공격을 지속했으며 결국 전투를 승리에 가까운 협상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다. 그해 5월 그는 발트 해를 담당하는 총사령관이 됐으며, 영국 왕실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긴장 관계는 1801년 10월22일 체결된 아미앵 휴전협정(Peace of Amiens)으로 일시적 소강상태로 들어가지만, 1803년에 다시 전쟁(나폴레옹전쟁· 1803~1815)이 일어난다. 넬슨은 곧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가 전쟁터로 갈 때 엠마는 둘째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이듬해 출산 중 사망하고 만다.

    넬슨은 전함 빅토리호를 기함으로 해 프랑스의 툴롱 항구 봉쇄에 참가했다. 봉쇄 작전 중인 1804년 5월에는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로 승진했다. 1805년 1월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1763~1806)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툴롱 항구를 출발해 서인도제도로 향하자 넬슨 함대는 추격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수개월간에 걸친 추적이 사실상 실패하고 넬슨은 의기소침해 1805년 7월말 지브롤터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간다. 넬슨은 국내에서 어느 정도 비난을 예상했으나, 영국 국민은 오히려 그를 프랑스군으로부터 서인도제도를 지켜낸 영웅이라고 또다시 열렬히 환영했다.

    1805년 9월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간 지 2개월도 안 돼 다시 출정에 나선다. 이번에는 스페인의 카디스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그곳에서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빌뇌브 제독 지휘 아래 모두 33척의 전함으로 구성돼 있었다. 나폴레옹의 목적은 이 연합함대를 이용해 영국 침공시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영국군과의 교전을 머뭇거리는 빌뇌브 제독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지휘관 교체를 결심하는데, 이 와중에 넬슨의 척후선에 의해 연합함대가 항구로부터 출항하는 것이 포착된다. 그리고 다음날인 1805년 10월21일 넬슨은 그의 마지막 전투가 되는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가한다. 넬슨의 함대는 상대방(33척)보다 적은 27척이었다.

    교전에 앞서 넬슨은 유서를 미리 쓴 뒤 부하들을 격려하며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한다. 양측 함대 간의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됐다. 넬슨이 탄 빅토리호는 프랑스군의 기함 뷔상토르호와 교전하다가, 옆에 있던 프랑스군 르두타블호 등 2척의 적함으로부터 공격 대상이 되고 만다. 바로 이때 르두타블호의 프랑스 저격수가 불과 150m 떨어진 지점에서 넬슨을 겨냥했다. 저격수의 총알은 넬슨의 왼쪽 어깨에 적중해 폐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혔다. 넬슨은 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전투를 지휘하려고 노력한 한편, 죽음을 예감하고 그의 소지품들을 엠마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진 넬슨

    넬슨은 전투 승리가 확실시된다는 보고를 받고 힘들게 낮은 목소리로 “내 임무를 다 할 수 있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 오후 4시30분, 총상을 입은 지 3시간 만에 사망하고 만다.

    넬슨의 시신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술로 채워진 관에 보존돼 런던으로 옮겨졌다. 국왕 조지 3세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리가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라고 애도했고, ‘더 타임스(The Times)’는 이번 전투의 결과를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논평했다.

    넬슨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 엠마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 정작 그녀는 성대하게 거행된 넬슨의 장례식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이는 넬슨의 혼외정사 상대였던 그녀에 대한 당시 사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엠마는 빚더미에 허덕이다가 1815년 쓸쓸히 숨을 거둔다. 넬슨에게 수여된 보상금과 명예 작위 모두가 그의 법적인 가족인 동생에게 대신 내려졌기 때문이다.

    넬슨은 사후 지금까지 영국 국민의 가슴에 영웅으로 남아있다. 비록 일부에 의해 엠마와의 부적절한 관계와 나폴리에서의 반(反)정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그리고 그의 성격 등이 구설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2002년 BBC에서 실시한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100 Greatest Britons)’을 뽑는 프로그램에서 넬슨은 전체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최후의 트라팔가르 해전 이전에도 넬슨은 이미 성 빈센트 곶 해전과 나일 해전으로 영국 국민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에 맞서 싸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그가 맞이한 영웅적인 죽음은 그 상징성 때문에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 정서와도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넬슨에게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죽음과 관련해 술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럼(Rum)’이라는 술과 연결된 이야기다.

    영국군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넬슨이 사망하자 당장 일은 그의 시신을 넣은 관을 성대한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는 영국까지 안전하게 운구하는 일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냉장 보관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긴 항해 동안 시체의 부패를 최대한 막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럼주를 관 속에 가득 채웠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해 관 뚜껑을 열어 보니 관 속에 채워두었던 많은 양의 럼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진상을 파악해보니, 항해 도중 부하 선원들이 몰래 관에 작은 구멍을 내고 술을 빼 마셨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넬슨의 용기와 전투 능력,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풍모에 더할 수 없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부하들이 그의 혼이 담긴 술을 마심으로써 그를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그런 행위를 한 것이었다. 그때 이들은 관 속의 술을 ‘넬슨의 피(Nelson?s blood)’라고 했으며, 이후로 영국 해군 장병들에게 배급되는 럼주를 ‘넬슨의 피’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정확한 진위에 관해서는 사실 이론이 많다. 보다 정확한 기록에 의하면 그때 관 속에 채운 술은 럼주가 아니라 프랑스산 브랜디였으며, 이 또한 부패 방지를 위해 장뇌(camphor)와 몰약(myrrh)을 함께 넣었기 때문에 음용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진위와 관계없이, 당시 적국의 술이 아닌 영국 해군을 상징하는 무엇인가를 그들이 존경하는 넬슨의 죽음과 연결하고 싶어 했을 정서를 고려하면, 럼만큼 어울리는 대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패를 막기 위해 관에 넣은 럼

    사실 럼은 왠지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는 술이다. 그 이름이 매우 간명하고 기억하기 좋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애주가에게는 ‘캡틴 큐’라는 술에 대한 추억이 럼에 대한 막연한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캡틴 큐는 1980년대 초 롯데주조(지금의 롯데칠성음료)에서 만든 것으로, 이른바 기타재제주(其他再製酒)에 속하는 술이었다. 기타재제주는 1990년 주세법 개정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위스키, 브랜디, 럼, 보드카 등의 원액에 값싼 알코올을 섞어 만든 싸구려 술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100% 진짜(?) 양주를 일반 국민이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원액 함량이 제품 전체 알코올의 20% 이상이 되면 정식 증류주로 분류돼 주세가 높아졌기 때문에 원액 20% 이하를 함유하는 기타재제주가 탄생하게 됐고, 캡틴 큐는 그 대표 주자였다.

    세월이 흘러 캡틴 큐는 과거의 인기를 뒤로한 채 ‘일반증류주’라는 이름으로 계속 생산되고 있다. 주정에 럼 향을 혼합한 제품으로 알려진 이 술은 지금은 가짜 양주제조의 주된 재료로서 종종 매스컴에 소개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이미지의 럼은 최근에 와서 ‘캐리비안의 해적’이란 히트 영화에 등장해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잭 스패로(조니 뎁)가 해안가 모래사장에서 불타고 있는 럼주 통들을 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장면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사실 럼이란 술은 카리브 해와 인연을 맺기 전에 그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의 여정을 따라 먼 길을 돌아왔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사탕수수는,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라비아와 북아프리카를 경유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소개됐다. 이 사탕수수가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에 따라 자연스럽게 천혜의 경작 조건을 갖춘 카리브 해 연안에 전파된 것이다. 럼이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당즙(molasses)을 그냥 두면 자연히 발효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에 의해 시작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영국 해군과 럼의 인연은 1655년 영국군이 자메이카를 점령하면서 럼의 대량 공급이 가능해지면서 시작됐다. 이전까지 영국 승무원들에게 지급되던 프랑스 브랜디 대신에 럼을 지급한 것이다. 결국 넬슨 제독과 럼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국 해군의 럼 지급 전통은 1970년 7월31일 그 제도가 폐지되기까지 무려 300년 이상 지속됐다. 그리고 지금도 황실의 결혼식 등 특별한 국가 행사가 있을 때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군에 럼을 지급하기도 한다.

    현재 럼은 많은 국가에서 생산되고 있고 나라마다 제조 기준과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분류 방법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증류 후 별다른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는 ‘라이트 럼(Light Rum)’과 숙성 과정을 거치는 ‘골드 럼(Gold Rum)’으로 나뉜다. ①라이트 럼은 나무통 숙성이 없어 흰색을 띠기 때문에 화이트 럼(White Rum) 또는 실버 럼(Silver Rum)으로도 불린다. 칵테일 재료로 주로 사용되며 푸에르토리코가 주산지다. ②골드 럼의 색깔은 나무통 숙성으로 만들어지는데 주로 미국 버번위스키 숙성에 사용된 오크통을 이용한다. 골드 럼 중에서 오크통에서 장기 숙성을 시키는 제품을 특별히 다크 럼(Dark Rum)이라고 하기도 한다. 다크 럼은 골드 럼에 비해 색깔이 짙고 맛이 깊으며, 주로 자메이카, 아이티 등지에서 생산된다.

    이밖에도 럼에는 최고급품을 뜻하는 프리미엄 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오버프루프 럼(Overproof Rum), 과일향을 가미한 가향 럼(Flavored Rum)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자, 이런 정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잔의 럼 속에서 ‘넬슨의 피’가 상징하는 역사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면, 이만한 지적 낭만이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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