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세계 지도자와 술 ⑩

‘넬슨의 피’ 럼주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넬슨의 피’ 럼주

2/4
결국 1793년 2월1일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하자(프랑스 혁명전쟁·1793~1801), 넬슨은 그해 5월 아가멤논호와 함께 지중해 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출항한다. 이듬해 코르시카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다. 그런데 이때 적의 포격으로 튀어오른 돌 파편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대승을 거둔다. 곧이어 치른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에 참패해 상당한 좌절감을 맛보기도 한다. 1796년 1월 지중해 함대의 새 지휘관이 된 저비스(Sir John Jervis·1735~1823) 경은 넬슨을 소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독자적으로 프랑스 해안의 해상 봉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작전에 따라 프랑스와 스페인을 효과적으로 압박해가던 넬슨에게 1797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바로 그해 2월 그는 훗날 그의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로 기록되는 포르투갈의 성 빈센트(St. Vincent) 곶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무찌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저비스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한 이 해전에서 영국군은 호세 데 코르도바 제독이 이끄는 27척의 스페인함대를 무찌르고 압승을 거둔다.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넬슨은 배스 기사단(Order of the Bath) 일원으로 기사 서훈을 받고, 얼마 후 해군 소장(Rear Admiral)으로 승진한다.

나폴레옹 동방 진출을 좌절시킨 ‘나일 해전’

그리고 이해 5월 넬슨은 테세우스호 선장으로서 카디스 연안에 대기하면서 스페인 함대의 동태를 살피는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오는 스페인 보물선을 기다리는 임무를 맡는다.

그런데 이 임무 중에 넬슨은 한 보물선이 정박하고 있다고 알려진 테네리페(Santa Cruz de Tenerife)를 직접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격렬한 교전 속에 상륙 작전을 지휘하는 도중 상륙보트에서 해변으로 내리다가 오른팔 위쪽이 적탄에 맞는 큰 부상을 당한다. 본선으로 돌아간 그는 부축하려는 부하들을 뿌리치면서, “나에게는 아직 온전한 다리와 왼팔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상이 워낙 심해 어쩔 수없이 군의관이 팔을 절단했는데 그는, 수술 후 30분 만에 붕대를 감은 채로 다시 지휘석에 앉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결국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만다. 전투 후 넬슨은 총사령관 저비스에게 “외팔이가 된 나 대신 새로운 사람을 찾으라”고 하면서 크게 낙심했다.



1797년 9월 넬슨이 영국으로 돌아오자 국민은 영웅의 귀환을 크게 환영했다. 성 빈센트 곶 전투에서 쌓은 공적과 테네리페에서 입은 부상은 당시 영국 국민에게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심지어 테네리페 전투에서의 패배마저 넬슨의 잘못이 아닌 다른 상급 지휘관들의 잘못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환영 속에 넬슨은 전쟁 중에 응급수술로 절단한 상처에 대한 후속 치료를 받으면서 그해를 보낸다.

1798년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한 넬슨은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바다에 나갈 기회를 찾는다. 마침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지중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정보가 포착됐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남부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것까지는 확인됐으나, 어떤 목적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1798년 3월 넬슨은 프랑스군의 동태를 감시할 목적으로 대포 74문이 장착된 방가드호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줄곧 나폴레옹군의 행적을 끈질기게 추적하던 넬슨은 결국 프랑스함대의 최종 목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나폴레옹은 이집트 정복을 통해 멀리 인도까지 진출할 계획으로 야심 차게 군사 활동에 나선 것이었다.

마침내 1798년 8월1일 아부키르 만에서 벌어진 유명한 ‘나일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대패시킨다. 위기를 느낀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포기하고 영국 군함들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가듯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멀리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무참히 좌절시킨 이 전투는, 후세 사학자들에 의해 7년 후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보다 세계사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나일 해전에서 크게 승리한 넬슨은 1798년 9월 그의 함대 근거지 중 하나였던 나폴리로 돌아간다. 당시 독립국가였던 나폴리 왕국에서 넬슨은 그곳 국왕과 함께 나폴리 주재 영국대사 윌리엄 해밀턴(Sir Willaim Hamilton·1731~1803)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후 두고두고 그의 명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해밀턴의 젊고 예쁜 아내 엠마(Emma Lady Hamilton·1765~1815)와 불륜에 빠진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엠마보다 34살 많은 윌리엄 해밀턴이 어느 정도 묵인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넬슨은 해밀턴의 집에서 엠마와 동거하다시피 지낼 정도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그들 간의 염문은 떳떳한 평가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즈음 영국군은 나폴리에서 프랑스 혁명정부군과 전투를 벌인다. 전투 초기에는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던 로마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 데 성공하지만, 곧 프랑스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해 오히려 나폴리까지 내준다. 그리고 그해 결국 재탈환한 나폴리에서 넬슨은 그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자코뱅 단원(Jacobin·프랑스혁명의 과격 공화주의자)들과 나폴리 내 배신자들을 관용 없이 처형할 것을 지시한다. 이때 그의 가혹한 처사는 엠마와의 염문과 함께 훗날 두고두고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

그러던 차에 저비스의 후임으로 그의 상관이 된 키스(Lord Keith·1746~1823) 제독에 대한 명령 불복종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넬슨은 오래전부터 상관에게 잘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일뿐만 아니라 엠마와의 염문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넬슨에 대한 키스의 부정적인 보고서와 엠마 사건에 대한 소문을 접한 영국 정부는 1800년 어쩔 수 없이 그를 본국으로 소환한다.

넬슨은 엠마와 해밀턴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다. 영국에서도 해밀턴 부부와 넬슨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는데, 그들 사이의 관계는 각종 소문과 함께 당시 영국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넬슨은 결국 1800년 본처 패니의 마지막 간청도 무시한 채 그녀와 관계를 청산했다. 엠마는 넬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해밀턴과 이혼은 하지 않은 채, 1801년 넬슨과의 사이에 딸을 낳는다.

2/4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목록 닫기

‘넬슨의 피’ 럼주

댓글 창 닫기

2019/09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