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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⑩

‘넬슨의 피’ 럼주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넬슨의 피’ 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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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

‘넬슨의 피’ 럼주
1801년 4월 넬슨은 코펜하겐 해전에 참전한다. 당시 덴마크와 스웨덴, 러시아, 프러시아 등은 영국의 프랑스에 대한 오랜 봉쇄 작전으로 자국의 무역에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연합군을 결성해 영국 해군의 봉쇄를 풀려고 시도했다. 이에 넬슨은 덴마크 해안을 차단해 발틱해의 움직임을 통제하자는 총사령관 파커(Sir Hyde Parker·1739~1807)의 의견에 반해 직접 코펜하겐을 기습공격하자는 전략을 내고 파커를 설득해 실천에 옮긴다. 전투 중에 덴마크의 반격이 예상보다 너무 강해 파커는 넬슨 함대에 철수할 것을 함상 깃발로 지시했다. 그러나 넬슨은 그의 기선을 지휘하는 폴리(Thomas Foley) 함장을 돌아보며, “폴리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오른쪽 일들을 종종 놓치곤 한다네”라고 말하고는, 망원경을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에 대고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공격을 지속했으며 결국 전투를 승리에 가까운 협상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다. 그해 5월 그는 발트 해를 담당하는 총사령관이 됐으며, 영국 왕실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긴장 관계는 1801년 10월22일 체결된 아미앵 휴전협정(Peace of Amiens)으로 일시적 소강상태로 들어가지만, 1803년에 다시 전쟁(나폴레옹전쟁· 1803~1815)이 일어난다. 넬슨은 곧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가 전쟁터로 갈 때 엠마는 둘째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이듬해 출산 중 사망하고 만다.

넬슨은 전함 빅토리호를 기함으로 해 프랑스의 툴롱 항구 봉쇄에 참가했다. 봉쇄 작전 중인 1804년 5월에는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로 승진했다. 1805년 1월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1763~1806)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툴롱 항구를 출발해 서인도제도로 향하자 넬슨 함대는 추격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수개월간에 걸친 추적이 사실상 실패하고 넬슨은 의기소침해 1805년 7월말 지브롤터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간다. 넬슨은 국내에서 어느 정도 비난을 예상했으나, 영국 국민은 오히려 그를 프랑스군으로부터 서인도제도를 지켜낸 영웅이라고 또다시 열렬히 환영했다.

1805년 9월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간 지 2개월도 안 돼 다시 출정에 나선다. 이번에는 스페인의 카디스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그곳에서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빌뇌브 제독 지휘 아래 모두 33척의 전함으로 구성돼 있었다. 나폴레옹의 목적은 이 연합함대를 이용해 영국 침공시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영국군과의 교전을 머뭇거리는 빌뇌브 제독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지휘관 교체를 결심하는데, 이 와중에 넬슨의 척후선에 의해 연합함대가 항구로부터 출항하는 것이 포착된다. 그리고 다음날인 1805년 10월21일 넬슨은 그의 마지막 전투가 되는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가한다. 넬슨의 함대는 상대방(33척)보다 적은 27척이었다.

교전에 앞서 넬슨은 유서를 미리 쓴 뒤 부하들을 격려하며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한다. 양측 함대 간의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됐다. 넬슨이 탄 빅토리호는 프랑스군의 기함 뷔상토르호와 교전하다가, 옆에 있던 프랑스군 르두타블호 등 2척의 적함으로부터 공격 대상이 되고 만다. 바로 이때 르두타블호의 프랑스 저격수가 불과 150m 떨어진 지점에서 넬슨을 겨냥했다. 저격수의 총알은 넬슨의 왼쪽 어깨에 적중해 폐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혔다. 넬슨은 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전투를 지휘하려고 노력한 한편, 죽음을 예감하고 그의 소지품들을 엠마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진 넬슨

넬슨은 전투 승리가 확실시된다는 보고를 받고 힘들게 낮은 목소리로 “내 임무를 다 할 수 있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 오후 4시30분, 총상을 입은 지 3시간 만에 사망하고 만다.

넬슨의 시신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술로 채워진 관에 보존돼 런던으로 옮겨졌다. 국왕 조지 3세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리가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라고 애도했고, ‘더 타임스(The Times)’는 이번 전투의 결과를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논평했다.

넬슨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 엠마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 정작 그녀는 성대하게 거행된 넬슨의 장례식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이는 넬슨의 혼외정사 상대였던 그녀에 대한 당시 사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엠마는 빚더미에 허덕이다가 1815년 쓸쓸히 숨을 거둔다. 넬슨에게 수여된 보상금과 명예 작위 모두가 그의 법적인 가족인 동생에게 대신 내려졌기 때문이다.

넬슨은 사후 지금까지 영국 국민의 가슴에 영웅으로 남아있다. 비록 일부에 의해 엠마와의 부적절한 관계와 나폴리에서의 반(反)정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그리고 그의 성격 등이 구설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2002년 BBC에서 실시한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100 Greatest Britons)’을 뽑는 프로그램에서 넬슨은 전체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최후의 트라팔가르 해전 이전에도 넬슨은 이미 성 빈센트 곶 해전과 나일 해전으로 영국 국민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에 맞서 싸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그가 맞이한 영웅적인 죽음은 그 상징성 때문에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 정서와도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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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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