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호

가난한 사람들 돕기 위해 이념의 틀을 넘어서다

  • 안병찬│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 ann-bc@daum.net

    입력2011-12-21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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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리는 미국과 영국의 3대 스포츠 상을 동시에 거머쥔 세기의 스포츠맨이었다. 박애주의자인 그는 빈곤국 어린이들에게 식량과 의료품을 지원해왔다. 그는 또 예능인이자 작가였다.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앨범을 취입하고 책을 써냈다.
    6장/ 스포츠맨, 예능인, 박애주의자

    1. 복싱 저널리스트 플림턴의 증언

    가난한 사람들 돕기 위해 이념의 틀을 넘어서다
    참여 작가로 알리통(通)인 조지 플림턴은 알리가 대단한 위트 감각을 가졌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춤추면서 운율을 타고 경구와 입담을 구사하는 알리의 능력으로 봐서 래퍼의 원조로 봐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알리는 신랄하게 비꼬는 경구를 상대방에게 날린다. 만약에 모기가 쟁기를 끈다고 알리가 읊어대면 이유를 묻지 말라. 그냥 알리 말에 편승하면 된다.”

    다음 대목을 보아도 조지 플림턴이 알리를 얼마나 찬탄해 마지않는지 알 수 있다.



    “복싱 지망생들은 세 차례의 알리-프레이저 대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먹 역사상 최고라고 할 위대한 드라마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알리의 떠버리 야유와 알리의 댄스 권투와 알리의 로프 기대기(로프 아 도프)를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알리가 거친 스포츠에 미와 품위를 심은 점을 알 것이다.”



    다큐멘터리 ‘우리가 왕이었을 때’는 플림턴이 등장해서 인상적인 알리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는 알리가 하워드대학교(Howard University·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용대학) 학위수여식에서 촌철살인(남을 감동시키거나 비판하는 짤막한 말)의 연설을 하던 일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증언한다.

    “알리가 하워드대학교 학위수여식에 간 적이 있어요.

    특별 연사였는데 난독증이 있었어요.

    원고를 보고 묻더군요.

    ‘조지, 이게 무슨 뜻이오?’

    ‘충양돌기염’(맹장염)이라고 대답해주었지요.

    ‘뭐 이런 단어를 넣었지, 너무 긴데’ 하더군요.

    그리고 연사로 나섰지요.

    2000명쯤 되는 하워드 졸업생을 앞에 두고 짤막한 메모지를 보면서 입을 열었지요.

    훌륭한 연설이었어요.

    자신은 여러분처럼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여러분 졸업생들은 배움의 힘으로 세상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지요.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서 환호가 터져 나왔지요.

    그때 누군가 외쳤어요.

    ‘우리한테 시 한 편 들려주세요.’

    다들 잠잠해졌죠.

    바틀릿의 인용사전에 따르면 가장 짧은 영시가 있어요.

    제목은 ‘미생물의 고대 생활(원문 : Lines on the Antiquity of Microbes)’인데 그 내용은 ‘아담이 모두 소유했다’(원문 : Adam Had‘em.)는 세 단어뿐이지요.

    그렇게 아주 짧아요.

    그런데 무하마드 알리의 시는 더 짧았어요.

    ‘나, 우리.’(원문 : Me, we.)

    두 단어였지요.

    나는 바틀릿의 인용사전 출판사에 편지를 썼어요. 알리 시가 더 짧다고.

    특별한 걸 함축한 시입니다.

    ‘나, 우리.’

    굉장한 선수고 굉장한 인물입니다.”

    / ‘타임 선정 100인’ /

    1999년 6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 마지막 해의 ‘타임 100’을 발표했다. 금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을 선정한 것이다. 무하마드 알리는 ‘영웅과 우상’ 부문에 뽑혔다. ‘영웅과 우상’의 선정 기준은 지난 100년간 용기·이타심·충일함·초인간적 능력·높은 품위를 발휘해 동경의 대상이 됨으로써 확실하게 자리를 굳힌 인물이다. 알리를 평가하는 글은 알리를 잘 알고 ‘정글의 혈전’을 근접 취재한 참여 작가 조지 플림턴이 맡았다.

    ‘복싱하는 저널리즘’을 실천한 작가라고 불리는 플림턴은 알리의 역정과 특성을 해설했는데 글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비처럼 날고, 벌처럼 쏘고, 펀치를 먹이고, 승패를 예언하면서 알리는 자신의 스포츠를 개조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무슬림으로 개종해 노예의 이름을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라는 새 이름을 받고나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당신들이 바라는 챔피언이 되지 않을걸.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자유가 있어.”

    기자들이 알리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유를 물으면 마누라를 넷 거느리고 싶어서 그랬다고 대답한다. 한 마누라는 구두를 닦아주고, 또 한 마누라는 포도를 먹여주고, 또 다른 마누라는 근육에 오일을 문질러 발라주고, 마지막 마누라는 복숭아에 이름을 붙여준다고 농담을 한다.…

    언젠가 알리가 텔레비전 쇼에 나갔을 때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알리답지 않게 잠시 침묵하더니, 복싱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복싱은 그가 원하고 바라던 일이다. 그는 다른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복싱을 한다고 꼭 펀치로 한방 먹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말이오. 사람들은 이런 이치를 모른다니깐!’

    복싱 지망생들은 주먹 역사상 최고라고 할 위대한 드라마를 연출한 세 차례의 알리-프레이저 대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알리가 거친 스포츠에 미와 품위를 심은 점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알리가 놀랍고 풍부한 기술과 품격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가 된 것을 찬탄할 것이다. 참으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타임 100’에 이름이 오른 인물을 보면 지도자와 혁명가, 예술가와 예능인, 사업 추진가와 거인 기업가, 과학자와 사상가, 영웅과 우상의 다섯 분야에서 각 20명씩이다.

    무하마드 알리를 비롯해서 아메리칸 지아이(미군), 다이애나 왕비, 안네 프랑크, 빌리 그레이엄, 체 게바라,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 헬렌 켈러, 케네디 가문, 브루스 리, 찰스 린드버그, 하베이 밀크, 마릴린 먼로, 테레사 수녀, 에멜린 팽크허스트, 로자 팍스, 펠레, 재키 로빈슨, 안드레이 사하로프, 빌 윌슨 순으로 이름이 올랐다.

    /스포츠 대상 3관왕 /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경기에 기여한 공로로 많은 상을 받았다. 특히 그는 미국과 영국의 3대 스포츠 상에서 동시에 ‘세기의 스포츠맨’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첫째는 미국 최대의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맨’ 상이다. 둘째는 영국 BBC방송이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 인물’ 상이다. 셋째는 월드 스포츠 어워드(세계스포츠상)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맨’ 상이다. 이렇게 알리는 스포츠 대상의 3관왕이 되었다. 이 밖에도 알리는 미국 최대 남성월간지 ‘젠틀멘스 쿼털리(GQ)’가 선정한 ‘세기의 운동가’에 이름을 올렸다.

    플림턴 - ‘복싱하는 저널리스트’

    미국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가 킨샤사에 특파한 조지 플림턴. 그는 알리가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부터 추적해온 전문작가다. 플림턴이 속해 있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사가 1954년에 발간한 스포츠 전문지로서 미국 남성의 18%를 독자로 확보하고 있다.

    플림턴은 1977년에 ‘섀도 박스: 링 속의 아마추어’(Shadow Box: An Amateur in the Ring)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전 세계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아치 무어와 스파링(실전과 같은 연습경기)을 한 체험기를 쓰고, 무하마드 알리가 조지 포먼·소니 리스턴·제리 쿼리·조 프레이저와 벌인 대전을 조명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과 동창생인 플림턴은 아마추어 선수로서 미식축구·야구·복싱·골프를 직접 몸으로 뛰면서 글을 썼다. 이처럼 참여와 실천을 통해서 스포츠 저널리즘에 종사한 독특한 작가로 영화에도 참여해 17편이나 출연했다.

    1959년 32세의 플림턴은 라이트헤비급 선수권자인 46세의 아치 무어에게 스파링(실전연습)으로 한판 붙자고 도전장을 낸다. 어떤 평론가는 지성적으로는 헤비급이고 전투력으로는 초경량급인 천둥벌거숭이 플림턴이 늙은 몽구스(육식의 포유류 동물)에게 덤비는 격이라고 비유했다. 10년간 선수권을 보유하고 있던 아치 무어의 전적은 171전에 123케이오(KO)승이었고, 플림턴은 아무런 전적이 없었다. 물론 1회전에서 플림턴은 코피가 터졌고 무어는 플림턴을 데리고 놀았다.


    /‘세기의 스포츠맨’ 칭호 /

    상기한 3대 스포츠상이 같은 사람을 ‘세기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한 것은 알리를 포함해서 3명뿐이다. 첫 번째 스포츠 대상 3관왕은 골프의 전설인 잭 니클라우스다. 그는 1986년에 46세의 나이로 마스터즈 대회에서 여섯 번째 우승컵을 안은 후 3관왕이 됐다. 두 번째는 1958년 월드컵 때 17세의 나이로 브라질팀 우승의 주역을 맡은 펠레다. 그는 월드컵의 우승컵을 세 번 안았고 개인 득점은 통산 1000골을 넘기고 3관왕이 되었다. 니클라우스와 펠레에 이어 알리도 굶주리는 어린이와 가난한 주민을 위해 자선하고 헌신하고 있다.

    그는 권투선수 초기에 일찌감치 ‘이슬람 국민’ 조직과 긴밀한 유대를 맺는다. 그는 노예의 이름인 캐시어스 클레이를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슬람의 이름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개명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차별받아온 흑인에게 자존을 되찾아주는 선구자로서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 미국 백인정권의 탄압을 받은 그는 미군에 입대하기를 거부하는 투쟁을 통해 1960년대 베트남 참전반대의 물결을 선도했다.

    알리는 킨샤사, 마닐라, 콸라룸푸르같이 멀리 떨어진 나라의 수도에서 기꺼이 챔피언전을 벌였다. 그는 권투 챔피언전을 초강대국 위주로 벌인다는 통념을 깨고 개발도상국가로 지평을 넓힌 챔피언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정치적인 이념의 틀을 용감하게 넘어섰다. 친선사절로 아프가니스탄과 북한을 찾아가고, 미국이 봉쇄한 쿠바에 긴급하게 필요한 의약품을 공급했다. 또 걸프전 때는 이라크를 여행하면서 15명의 미국인 인질이 석방되는 데 촉매 구실을 했고, 남아프리카로 달려가서 석방되는 넬슨 만델라를 맞았다.

    / 박애주의자 /

    근간에 무하마드 알리는 발전도상국이 봉착한 열악한 삶의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기아에 봉착한 세계 각지에 도합 2억3200만명분의 식사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코트디부아르, 인도네시아, 멕시코, 모로코와 다른 여러 빈곤국을 여행하면서 그곳 어린이에게 식량과 의료품을 공급해왔다.

    이런 국제적인 노력과 병행해 미국 내에서도 쉴 사이 없이 병원과 급식소와 자선단체를 방문해 돕고 있다. 그는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에 있는 ‘무하마드 알리 파킨슨 리서치센터’의 운영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그는 이른바 ‘무하마드 알리 복싱개혁안’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이 연방법안은 부도덕한 권투흥행사 때문에 권투선수가 건강을 망치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해주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알리는 미국 상원에 여러 번 증인으로 출석해 ‘무하마드 알리 복싱개혁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찍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무하마드 알리의 폭넓은 활동을 가리켜 ‘국제친선 인(미스터 인터내셔널 프렌드십)’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인도적인 노력을 기울인 공으로 수많은 상을 받았다. 중요한 상은 다음과 같다.

    1998~2008년 : 유엔 평화의 메신저상

    2005년 : 미국 최고 인권상 대통령 자유메달, 국제앰네스티 평생 성취상

    2005년 : 독일평화메달 주빌리2000 국제대사상, 세기의 켄터키인상, 세기의 루이빌시민상

    / 예능인 /

    무하마드 알리는 뛰어난 예능인의 소양을 타고났다. 그는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첫 작품은 자전적인 영화 ‘위대한 자(더 그레이테스트)’인데 여기서 그는 직접 자기 역할을 연기했다.

    그를 다룬 영화 중 대표적인 작품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우리가 왕이었을 때(When We Were Kings)’이다. 또 윌 스미스가 주연한 전기 영화 ‘알리’도 유명하다.

    알리는 텔레비전 영화 ‘자유의 길’에도 직접 출연했다. 그밖에 많은 텔레비전 영화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브로드웨이에 나가 뮤지컬 ‘백인에 항거한 위대한 시절(Big Time Buck White)’에 출연하는가 하면 ‘나는 가장 위대한 자’라는 제목의 앨범을 취입했다. 그는 ‘나비의 정신: 인생여행의 회상’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종교와 용서의 의미를 논하고 자기 인생사의 전환점이 된 순간을 짚어보는 내용이다. 또 ‘위대한 자의 관용과 이해의 일지: 나 자신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공저를 냈다.

    안병찬

    가난한 사람들 돕기 위해 이념의 틀을 넘어서다
    경찰에 앞서 살인사건 2건을 해결해 이름을 날린 사건기자 출신. 한국일보 베트남 특파원 시절이던 1975년 남부 베트남 패망(베트남 통일)의 마지막 현장을 취재하고 탈출한 후 르포르타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발간해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한국일보 주불특파원·논설위원을 거쳤고 시사저널 편집·발행인을 역임한 후 경원대 언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민영통신 뉴시스의 고정칼럼 ‘기자 49년차―안병찬의 영상르포르타주’(http://www.newsis.com)를 집필하고 소셜뉴스 위키트리의 개인 데스크 ‘안병찬 기자 49년차’(http://www.wikitree.co.kr)를 운영하며 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등 저서 1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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