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호

21세기 환상의 출처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1-12-21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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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환상의 출처

    ‘픽션들’<br>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251쪽, 1만1000원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기억에서 출발해 망각을 향해 간다. 망각, 또는 죽음. 언젠가는 모두 죽게 마련인 인간이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치가 이야기인 만큼 인류는 끊임없이 이야기의 내용과 형식을 갱신해왔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16세기의 세르반테스, 19세기의 플로베르나 20세기의 조이스, 그리고 보르헤스 같은 작가들은 인류의 이야기를 종이(세상)에 기록하기 위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조국과 가문의 종교를 버리고 문학으로 개종(改宗)한 자들이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이 ‘문학’이라는 종교에 헌신했다. 보통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행적으로 인류에 빛나는 유산을 남겼고, 소설사에서 순교자, 또는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서관은 이들의 업적(작품)을 기리고 전파하는 성소(聖所)이자 보고(寶庫)다. 여기, 21세기 한국의 오래된 도서관에 막 입고된 한 권의 소설책이 있다. 라틴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출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

    위에서 나는 생(生)의 연장술로 ‘고안’(考案)해냈다고 했거니와 이 단어를 자연과학적인 용어로 달리 부르면 발명(發明)이 되고, 한 번 더 달리, 그러니까 인문학적으로 달리 부르면 창조, 그러니까 창작(創作) 행위가 된다. 20세기 후반 북아메리카 뉴욕의 폴 오스터는 여기에서 착상해 관념 세계의 ‘고독’을 물질 세계의 어떤 것처럼 발명해내기에 이르는데,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와 ‘기억의 서(書)’라는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고독의 발명’(1982, 한국어판 2001)이 그것이다.

    어느 날에는 삶이 있다. 이를테면 건강도 아주 좋고 늙지 않고 병력(病歷)도 없는 한 남자가 … 자기의 사업을 염두에 두고 오로지 자기 앞에 놓인 삶만을 꿈꾸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다음에는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다. 한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앉은 채로 무너져 내린다. … 그 집에 있었던 것: 시계 하나, 스웨터 몇 개, 재킷 하나, 자명종 하나, 테니스 라켓 여섯 개, 겨우겨우 움직이는 오래되고 녹슨 뷰익 승용차 한 대. 한 벌의 접시들. 커피 테이블 하나. 전기 스탠드 서너 개. 다이엘을 위한 미니 조니 워커 술병 하나. 텅 빈 사진 앨범.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오스터 가족. -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보이지 않는 초상화’(‘고독의 발명’ 수록) 중에서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폴 오스터가 서른 살 무렵 발표한 자전적 에세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오스터의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소설적’으로 읽힌다. 여기에서 피할 수 없이 질문 하나가 솟구친다. 도대체 ‘소설’은 무엇이고 ‘소설적’이란 무엇인가? 이해란 항상 비교를 통해 접근 가능하다.

    리델 하트는 ‘유럽 전쟁사’ 242페이지에서 1916년 7월24일 영국군 13개 사단이 1400문의 대포 지원하에 세르 몽토반 전선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29일 아침까지 연기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레델 하트 대위가 쓴 바에 따르면, 폭우 때문에 연기된 것이었지만, 그 연기로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지는 않았다. 칭다오 대학의 영문학 전직 교수였던 유춘 박사가 구술하고 다시 검토한 후 서명한 다음의 진술은 그 사건에 관한 의외의 진상을 밝혀주고 있다. 처음의 두 페이지는 분실되었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픽션들’ 수록) 중에서



    이것은 소설이다. 그런데 나는 명실상부 ‘소설’이라 명명된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왠지 소설보다는 다른 어떤 것, 예를 들면, 연구 논문, 아니 논문의 가설 부분이나 주석, 또는 여담(餘談)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다시, 여기서 피할 수 없이 질문 하나가 솟구친다. 도대체 ‘소설’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을 유발하는 위의 소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보르헤스가 마흔두 살 무렵에 발표한 ‘보르헤스적인 소설’이다. 보르헤스적인 소설이란 그의 나이 마흔 살 전후, 그러니까 1940년 전후에 생산된 새로운 양식의 소설을 가리킨다. 최초의 형상은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에 발표한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1939)라는 단편 소설에서 나타난다.

    이 소설가가 일생 동안 남긴, 눈에 보이는 작품들은 쉽고 간단하게 열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앙리 바슐리에 부인이 사기성 짙은 목록에 행한 삭제와 첨가는 용납하기 힘든 행위이다. 공공연하게 개신교 성향임을 드러내고 있는 어느 일간지는 프리메이슨이나 할례 받은 자들까지는 아니라도 소수의 칼뱅주의자들일지 모르는 애처로운 독자들에게 분별 없이 이 잘못된 목록을 그대로 제시했다. 메나르의 진정한 친구들은 이 목록을 견딜 수 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슬픔마저 느꼈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픽션들’ 수록) 중에서

    ‘보르헤스적인 소설’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 격인 이 작품의 제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 ‘돈키호테’의 저자는 16세기 스페인의 마드리드 근처에서 살았던 미겔 데 세르반테스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이 작품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제목은 ‘돈키호테’의 저자가 세르반테스가 아니라 메나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제목을 읽는 순간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대상 앞에서 잠시 망설이게 된다. 이때의 망설임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사실, 진리)를 교란하고, 나아가 전복시키는 작가의 의도를 수락하고 수용할 것인지, 그리하여 작가가 인도하는 작품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의사 결정 과정이다. 또한 이때의 망설임은 ‘소설’에서 ‘보르헤스적인 소설’로 넘어가는 관문(關門)의 문턱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세상의 독자는 이 망설임의 문턱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 문턱을 넘어 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자와 결연히 돌아서는 자. 한계를 해체하고자 하는 부류,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족속들은 전자로, 그들 앞에는 ‘환상’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보르헤스적인 소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 … 그 어떤 육각형 진열실에서도 위에 있는 층들과 아래에 있는 층들이 무한하게 보인다. … 좁은 복도에는 거울 하나가 있는데, 그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복제한다. 사람들은 이 거울을 보고 ‘도서관’은 무한하지 않다고 추론하곤 한다(만일 실제로 무한하다면 무엇 때문에 복제라는 눈속임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 반짝거리는 거울 표면이 무한함의 형태이며 약속이라고 꿈꾸고 싶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바벨의 도서관’(‘픽션들’ 수록) 중에서

    이쯤에서 보르헤스적인 ‘환상’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비현실 또는 초현실적인 것(마술, 환상)’, 또는 모든 소설의 본질에 해당하는 ‘헛것(illusion)’의 창출과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곧, 이미 알려진 인간이든 익명이든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는 전기를 가짜로, 또 그 사람의 행적 일부를 부연 설명하는 주석을 가짜로 꾸며내는 것. 또한 죽음이나 문학(소설), 철학처럼 ‘형이상학적 관념 세계를 구체화하려는 작업’. 한마디로 보르헤스적인 소설 또는 환상(픽션)이란 가짜 전기, 가짜 주석, 관념의 구체화 또는 탐구 과정으로 요약되며, 이 모두는 도서관의 책들에서 출발한다.

    보르헤스의 삶과 소설은 도서관과 따로 떼어놓고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파리, 제네바, 마드리드 등 유럽에서 교육받았고, 영어 및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도서관 사서로 출발해 국립도서관장 자리에 오른 보르헤스는 평생 도서관의 책을 섭렵하면서 시력을 잃어갔고, 인생 후반기에는 그가 평생 흠모했던 제임스 조이스처럼 실명(失明)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의 환상이란, 보이는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에 구체성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절체절명의 창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나는 젊은 시절 여행을 했다. 나는 한 권의 책, 아마도 편람 중의 편람일 책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제 내 눈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고, 나는 내가 태어난 육각형의 방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바벨의 도서관’(‘픽션들’ 수록) 중에서

    세상에는 소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보르헤스적인 소설’이 있다. ‘보르헤스적인 소설’이란 ‘보르헤스적인 환상’과 이음동의어이고, 21세기 세계 문화의 핵심 코드인 혼종성의 기원이며, 2000년대 맹활약하는 일군의 한국 젊은 작가들이 지향하는 소설 세계의 원형(原型), 곧 출처(出處)다. 20세기 말(1994년) 미 서부 텍사스 주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한 황병하의 번역문으로 소개됐던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나를 비롯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제시하려는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만큼 오랫동안 서가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번에 라틴아메리카 콜롬비아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한 송병선의 번역문으로 새롭게 소개된 ‘픽션들’은 21세기 한국의 작가와 독자에게 새로운 소설 미학을 열어줄 것이다.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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