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나는 레즈비언·게이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지지한다”

장편 ‘채홍’으로 돌아온 김별아

  • 이소리│시인·문학in 대표 lsr21@naver.com

    입력2012-01-19 0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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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교사회 유지하기 위한 통제수단은 성(性)
    • “소설 재미를 위해 역사를 뒤틀고 싶지 않아”
    • “역사소설? 여성작가들이 쓸 여성 이야기가 더 많아”
    • 소아우울증…“엄마에게 폭군처럼 굴었다”
    • 신경숙, 공지영? “100만 부 작가보다 1만 부 작가 100명이 더 필요”
    • “좋아하는 음식은 소주, 모든 음식을 안주로 먹어”
    “나는 레즈비언·게이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지지한다”
    “나는 이성애자이지만 레즈비언이나 게이, 트랜스젠더 같은 동성애자가 지닌 자연스러운 욕망과 사랑을 지지한다.”

    2005년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받은 작가 김별아가 신작 ‘채홍’으로 돌아왔다. 채홍(彩虹)은 무지개란 뜻으로, 문종의 두 번째 부인 순빈 봉씨의 동성애 스캔들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 그동안 궁중 스캔들의 주인공 정도로만 회자된 순빈 봉씨에게 난(暖)이라는 이름을 주며 그녀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김별아에 따르면 ‘채홍’에 나오는 주인공 순빈 봉씨는 사랑이 죄가 된 시대에 허락받을 수 없는 욕망을 강렬하게 품었던 여인이다. 그는 엄격한 계급사회인 조선에서 유교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심하게 통제한 수단이 성(性)이라고 못 박는다.

    이성애자인 작가 김별아가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눈은 따뜻하다. 그는 레즈비언이나 게이, 트랜스젠더 등이 지닌 자연스러운 욕망을 적극 지지하는 작가다. 도덕과 제도에 앞서 인간이 먼저이기 때문이란다. 여성으로 성전환수술을 받은 가수 하리수에 대해서도, “호르몬 주사까지 맞아가며 여성으로 살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이에게 비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작가 김별아를 2011년 12월 29일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저 사랑하고 보니 사내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제가 사랑한 사람이 여인이었을 뿐입니다. ‘가라! 부디 다음 세상에선… 사내로 태어나라!’” -‘채홍’ 14쪽



    ▼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 걸리는 무지개(채홍), 그 빛에 가려진 사람들의 욕망과 사랑, 갈등, 질투 등이 곧 채홍인 거로 보이는데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핵심은 무엇인가요?

    “순빈 봉씨는 같은 여인을 사랑한 ‘죄 아닌 죄’로 궁에서 쫓겨났고, 사가(私家)로 돌아오자마자 오빠의 칼을 맞고 죽어요. 사실 조선실록과 야사 그 어디를 뒤져봐도 궁에서 쫓겨난 세자빈들의 인생을 적은 기록은 없죠.”

    그는 세종실록의 기록에 대해 설명했다.

    “성질이 투기가 많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며, 또 궁궐 여종들에게 항상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또 세자가 종학으로 옮겨 가 거처할 때에 몰래 시녀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 엿보아 외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세종실록’ 1436년 10월 26일자

    “요사이 듣건대, 봉 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1436년 10월 26일자

    “이 기록을 바탕으로 봉빈에게 ‘난’이란 이름을 붙여 유교와 성리학의 지배 속에 억압받던 한 여성이 지닌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려 했어요. 봉빈이 동성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문종 때문입니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말하면, 문종은 첫날밤부터 봉빈을 외면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요. 봉빈은 그래도 문종이 언젠가는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며 애타게 기다렸지만 허사였어요. 우연찮게 나인과 동성애에 빠지게 되고, 그 사실이 발각되면서 결국…. ‘채홍’은 동성애라는 소재 때문에 선정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정혼을 뺀 나머지 모든 남녀관계는 야합 혹은 간통으로 보았죠. 사랑 그 자체가 곧 죄가 되는 시대였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왕실은 특히 심했던 것 같아요. 사랑을 국법으로 처벌했으니까요. 나는 조선시대 사랑의 욕망을 억압당하다가 처벌받은 여자, 궁녀, 내시 등 ‘사랑을 거세당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내 소설에 나오는 봉빈은 엄격하게 따지면 동성애자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지아비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나인을 가까이할 수밖에요.”

    ▼ 이성애자인 작가가 동성애를 그리는 게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그럼요. 처음에 동성애에 대한 묘한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채홍’을 쓰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주인공인 순빈 봉씨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동성애에 대한 마음을 읽어내는 거였어요. 작가로서, 여성으로서 성에 대한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했어요. 그렇다고 소설의 재미를 위해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사랑을 거세당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 동성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레즈비언이나 게이, 육체적인 성과 정신적인 성이 반대라고 생각하는 트랜스젠더 등 인간이 지닌 자연스러운 욕망을 지지합니다. 도덕과 제도 이전에 인간이 먼저 아니겠어요? 동성애는 비난의 범주가 아니죠. 이성애자들이 이성에 대한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듯이, 동성애자들도 동성에 대한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니까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동성애자들은 선천적, 유전적으로 그렇게 태어나는 것 같아요. 스위스 심리학자 융(1875~1961)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개인적인 것과 종족의 역사와 목적, 욕망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요. 실재했던 과거와 가능성을 지닌 미래가 한꺼번에 인간의 현재 행동을 이끈다는 거죠. 나는 100% 이성애자도 100% 동성애자도 없다고 생각해요. 유전자에 따라서 남성이나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그 어떤 다른 영향에 의해 남성 혹은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나 또한 중성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나의 과격한 행동이나 내가 쓰는 강한 글 등에서 여성성보다 남성성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나는 레즈비언·게이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지지한다”
    ▼ 가수 하리수 같은,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들은요?

    “나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스타일이에요. 성전환수술에 대해서도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관은 없어요. 작가로서 그 어떤 현상을 보고 ‘왜 저럴까?’ 골똘하게 생각하곤 해요. 하리수도 여성으로 살기 위해 호르몬주사까지 맞아가며 수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비난을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겠어요. 일부러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소설에서는 특히 ‘도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하더라도 작가는 그 인간들을 옹호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 모든 짓거리가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라 이 세상과 우리 사회가 지닌 모순덩어리가 곪고 곪다가 저절로 터진 것이기 때문이죠.”

    ▼ 장편소설 ‘미실’이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작품집도 꽤 많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독고다이’예요. 10년 정도 무명작가였지만 한 번도 원고청탁을 받고 글을 쓴 적이 없어요. 그 때문에 문학에는 무한한 빚을 지고 있지만 문단에는 빚이 없어요(웃음). 어렵게 글을 썼죠. 하지만 그 10년이란 세월 동안 공부할 수 있었어요. 세계문명사와 인류사, 고대사, 라틴아메리카, 마야문명 등 공부를 참 많이 했죠. 그 덕분에 고대 역사를 다룬 ‘미실’과 중세 역사를 다룬 ‘영영이별’ ‘논개’, 근세 역사를 다룬 ‘백범’ ‘열애’ ‘가미가제 독고다이’ 등의 소설을 펴냈죠. 라틴아메리카와 마야문명을 다룬 장편 소설 ‘축구전쟁’을 펴낸 뒤 곰곰이 생각하니 문득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무리 잘 쓴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반면 소서노와 미실 이야기를 다룬 ‘미실’은 우리 고대사에 얽힌 여성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 썼어요. 그때부터 고대사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마침 ‘화랑세기’ 필사본 논쟁이 일었죠. 지금도 논쟁 중이긴 하지만. ‘화랑세기’를 읽다가 소서노와 미실 이야기의 힌트를 얻었어요. 소서노와 미실 이야기는 특색 있고 재미있는 소재여서 거침없이 썼어요. 지금은 소설을 쓰는 방식이 조금 세련된 것 같지만 그때는 알몸 그대로였어요. 그때 밀교 이야기 등도 담았는데, 문제가 될까봐 책을 낼 때 많이 삭제했어요. 조만간 무삭제 개정판 ‘미실’을 다시 내려고 해요. ‘삭제판’을 냈을 때 ‘이런 여자가 있을 수 있느냐’ ‘그런 역사는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분이 많았는데 걱정이에요(웃음).”

    ‘빨리빨리’ 외치는 현대사회는 좋지 않아

    ▼ 현대 여성들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쓸 생각은 없나요?

    “조선시대 여성들이 겪은 사랑이야기를 두세 편 더 쓸 계획이에요. 특히 억압과 좌절 속에서도 극적인 삶을 산 여성, 어마어마한 벽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기 운명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런 여성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나는 ‘빨리빨리’를 외치며 숨 가쁘게 달려가는 현대사회를 좋게 보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상상력이 역사 속으로 자꾸 기울어요.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현미경 같아요. 제대로 쓴 역사소설은 교육효과도 크죠. 예전에는 남성작가들이 역사소설을 많이 썼지만 지금은 여성작가들이 역사 속에 나오는 여성들 이야기를 다룰 게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 한국 문학작품, 특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해외로 번역돼 나가면 한국 홍보에도 좋을 거 같은데요.

    “제 소설 여러 권이 일본과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에서 번역됐어요. 그런데 제 소설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죠. 그보다는 우리 역사를 세계에 제대로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내가 캐나다에 있을 때 도서관에 가니까 우리나라 책은 한 권도 없는데 일본 책은 아주 많아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일본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일본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지원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책을 세계 곳곳에 있는 도서관에서 볼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왜 작가가 되려고 했나요?

    “나는 ‘독고다이’였어요. 어릴 때부터 그 어떤 집단이 주는 억압에 대한 반감이 많았어요. 내가 자란 마을은 강릉 정동진에서 10리나 더 들어간 곳에 있었고, 텃세가 세고 보수적인 마을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나 스스로 그 어떤 집단이나 전체주의를 싫어하는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주류가 되지 못했어요. 나도 모르게 ‘독고다이’가 될 수밖에 없었죠. 전교생이 63명인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강릉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어릴 때부터 시인이 아니라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초·중·고교에 다닐 때 말 그대로 ‘백일장 선수’가 되어 상도 많이 받았어요. 고 2때부터 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글을 썼어요. 시는 한 번도 쓴 적이 없고, 산문만 썼죠.”

    ▼ 개인주의자라….

    “부모님이 맞벌이 교사여서 양육환경이 불안정했어요. 외할머니를 비롯해 친척집 등을 자주 떠돌다보니 나도 모르게 불안한 정서가 생긴 거 같아요. 학교에서는 10년 동안 반장을 했지만, 그리 활동적이지는 못했어요. 어머니 앞에서 밥상을 차고, 도시락을 던지는 등 폭군처럼 굴었어요. 학교에서는 맞은 기억밖에 없어요. 오죽했으면 정신과 의사인 친구가 저보고 ‘소아 우울증’이라고 했겠어요? 그렇게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눌림’이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어요.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죠. 유명해지려고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유명해지지 않아도 문학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요. 지금도 가장 행복한 때는 글을 쓸 때이니까.”

    나는 ‘잡파’…사람 마음 움직이는 힘 키우겠다

    ▼ 그래서 작가가 됐네요. 작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면서 개인은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았어요. 사람마다 자기가 있는 위치에 따라 우리 사회에 대한 자기 몫이 있지 않겠어요? 나는 작가니까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누군가를 억지로 설득하려 하거나 명령을 내려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에요. 나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영향력’이라고 봐요. 좋은 영향력이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가 아니라 ‘잡파’입니다. 소설에서는 좌도 우도 없고, 진보도 보수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경계가 없는 게 작가죠. 사람 마음을 움직이려면 소설을 쓸 때에도 경계를 허물고 대중적으로 써야 해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고요.”

    ▼ 지금까지 주로 어떤 책을 읽었고, 가장 영향을 끼친 책은 뭔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으로부터 생일선물로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을 받았어요. 이어령, 김동리 등이 기획하고 중역(重譯)한 책이었어요. 너무 기쁜 나머지 2박3일을 꼬박 밤을 새워 끝까지 다 읽었어요. 나는 그 이야기에 홀딱 빠져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정도였어요. 그 길이 인생 망가지는 길인 줄도 모르고(웃음). 어릴 때는 토마스 만,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참 좋아했어요. 그분들이 펴낸 책을 빠짐없이 다 읽었죠. ‘양철북’과 ‘백 년 동안의 고독’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국내 작가로는 현기영, 김원일, 최인석 등을 좋아해요. 여름에는 주로 대하소설을 즐겨 읽는 편인데, 그중 가장 뛰어난 작품은 ‘임꺽정’이었어요.”

    ▼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스스로 직·간접 체험을 많이 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글쓰기 전 취재할 때 얘기를 해주시죠.

    “저는 직접체험이 적은 편이에요. 아이 낳아 기르고 살림하다 보니 직접 취재를 하기 위한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요. 직접체험은 가정을 돌보는 여성작가에게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주로 책을 통해 간접체험을 해요. 책을 읽고 상상 속에서 계속 돌아다니는 거죠. 내가 요즈음 이야기보다 역사 이야기를 많이 다루는 것도 직접체험에 대한 심한 목마름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 작가 신경숙과 공지영이 펴낸 책이 인기가 많은데요, 같은 ‘주부’로서의 섬세함 때문일까요?

    “그 부분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 왜요?

    “저는 책이 100만 부 팔리는 작가 1명보다, 1만 부 팔리는 작가 100명이 훨씬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 무슨 뜻인가요?

    “책은 적게 팔리더라도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더 좋다는 거죠. 인기 영합 작가보다는…. 특별히 말하고 싶지 않아요.”

    ▼ ‘김별아’란 이름이 독특한데요.

    “부모님이 사범학교 출신이어서 그런지 문학적 기질이 조금 있었나 봐요. 이름은 아버지가 별처럼 반짝거리면서 살라는 뜻에서 지어주셨어요. 금성 즉 ‘샛별’이란 뜻이죠. 한 가지 답답한 것은 이름이 ‘별아’이다 보니 영어로 표현하기도 어렵고, 중국어로는 아예 없어 불편해요.”

    ▼ 요리는 좋아하나요?

    “다른 살림은 하기 싫어도 요리는 좋아해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소주입니다. 나는 어떤 음식이든지 가리지 않고 잘 먹지만 주로 술안주로 즐겨 먹죠(웃음).”

    ▼ 2012년 계획이 있다면?

    “백두대간 산행을 다녀온 뒤, 무삭제판 ‘미실’과 칼럼을 엮는 작업을 할 거예요. 사회를 바라보는 칼럼도 많이 쓸 것 같아요. 칼럼은 현실에 대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데 참 좋아요. 언론에서도 특정 작가들만 ‘편식’하지 말고, 수많은 작가를 소개했으면 좋겠어요. 그 작가들이 펴낸 작품도 좀 더 상세하게 다루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독자들이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 거 같아요.”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작가 김별아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꿈의 부족’이 있으며, 장편소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개인적 체험’ ‘축구전쟁’ ‘미실’ ‘영영이별 영이별’ ‘논개 1,2’ 등을 펴냈다. 산문집으로는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가족 판타지’ 등이 있고, 동화로는 ‘김순남’ ‘장화홍련전’ ‘치마폭에 꿈을 그린 신사임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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