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2012 코리아의 봄

  • 입력2012-01-19 09:4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012 코리아의 봄
    2012년 3월 24일 토요일 오후 2시.

    호위사령부 소속 이철진 중좌가 평양특별시 모란봉구역 칠성문동에 위치한 호위사령부 본관으로 들어선다. 제복 차림으로 허리에는 툴라-토카레프의 북한식 개량품인 68식 권총을 찼다. 권총 손잡이 안쪽에 별 모양의 금장식이 붙어 있지만 권총집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측근 경호를 맡고 있다는 영예의 표시다. 본관 계단을 오르는 이철진을 향해 내려오던 군관 두 명이 경례를 했다. 낯익은 군관들이다. 아마 별장호위연대 소속인 것 같다. 가볍게 답례한 이철진은 곧 2층 복도 끝에 위치한 2호위대 참모장실로 들어섰다.

    “어, 왔나?”

    책상에 앉은 참모장 박장우 중장의 표정은 어둡다. 머리만 끄덕여 인사를 받은 박장우가 눈으로 앞쪽 의자를 가리켰다. 참모장실 안에는 둘뿐이다. 열린 창을 통해 차량의 배기가스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이철진이 자리에 앉자 박장우가 똑바로 시선을 주었다.

    “동무, 집은 광복거리에 있지?” “그렇습니다.” “집은 옮기지 않아도 돼.”그 순간 이철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입을 열지는 않는다. 이제는 박장우가 책상 위의 서류로 시선을 내리더니 말을 잇는다.



    “동무는 2군단 제27사단 3연대 1대대장으로 전직되었어. 일주일 후인 4월 2일까지 2군단사령부에 신고하도록 해.”

    “….” “호위대가 개편되면 다시 불러들일 테니까 당분간만 내려가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철진은 차분한 제 목소리를 듣고는 어깨를 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나도 곧 떠날 거야.” 마침내 박장우가 먼저 흔들렸다. 눈을 치켜뜬 박장우가 이철진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그때 다시 만나자고.” “예, 참모장 동지.” 자리에서 일어선 이철진이 어깨를 폈다. 심호흡을 했더니 매연 냄새가 더 진하게 맡아졌다. 요즘은 평양에도 차가 많아졌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철진이 경례를 했지만 박장우는 외면한 채 받지 않았다.

    2군단은 전연지대인 휴전선 중서부 지대에 배치된 정규군단으로 사령부는 황해북도 평산군에 위치하고 있다. 호위사령부의 제2호위대에서 전연지대라고 불리는 전방의 보병사단 대대장으로 전출되는 것은 좌천이라기보다 유배와 같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김정일의 측근에서 머물던 이철진은 2군단장도 눈 아래로 보았던 것이다. 참모장실을 나와 이제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올라오던 소좌 둘이 시선을 피하면서 지나쳤다. 이놈들도 낯익다. 그렇지, 제1호위대 소속으로 김일성 주석의 동상을 관리하던 놈들이다. 그러던 놈들이 이제는 대장 주위에 배치되고 있다.

    “인사 내용을 보셨습니까?” 이영호가 묻자 김정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주석궁의 집무실 안이다. 소파에 앉은 김정은 앞에 선 총참모장 이영호가 말을 잇는다.

    “당장 급한 곳은 전연지대 군단입니다. 조중 국경 지역 군단은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지금 둘은 군 고위지휘관의 인사를 의논하고 있다. 정색한 이영호가 김정은을 보았다.

    “지금은 서릿발 같은 위엄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래놓고 나서 자애롭게 대해주시면 더 감격합니다.”

    “알겠소.”

    “한꺼번에 하면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먼저 4군단의 사단장급부터 이동시켰습니다.”

    김정은이 잠자코 손에 쥔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모르는 이름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중 영전된 장성들은 새롭게 시작되는 김정은 대장의 인맥으로 분류될 것이었다. 이영호의 열띤 목소리가 이어졌다.

    “21사단장 하석훈 중장은 제1호위대에서 충성을 검증받은 동무입니다. 대장 동지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알겠소.”

    김정은이 하석훈의 인적사항을 읽는다. 하석훈은 1994년부터 14년 동안이나 김일성 주석의 묘소를 관리하다가 지난해 이영호에게 발탁되어 소장으로 진급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후에 총참모부에서 정찰국을 관리하다가 이번에 중장으로 진급해 사단장이 되었으니 이영호의 심복이다. 그때 이영호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김정은의 눈앞에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손짓으로 불렀으므로 김정은은 다가가 섰다. 그러자 수행원들은 제각기 발을 멈추고 둘을 위해 간격을 벌려준다. 날씨는 선선했다. 2011년 9월 중순의 오후. 평양 외곽의 평양방위사령부 소속 부대를 시찰하던 중이다. 다가선 김정은을 아버지가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다.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은아.”

    “예, 위원장 동지.” 그렇게 대답하자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낮게 말했다.

    “아버지는 오래 못 산다.”

    어금니를 문 김정은을 향해 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너한테 너무 큰 짐을 주고 떠나는 것 같구나.”

    “위원장 동지.” “아버지라고 해, 지금은.” “예, 아버지.” “아무도 믿지 마라.” “예, 아버지.” “견제세력은 꼭 만들어놓아라.” “예, 아버지.” “충성경쟁을 하도록 만들어라.”

    “예, 아버지.” 그러자 아버지가 길게 숨을 뱉는다. 젖은 눈동자에 미련이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김정은은 숨을 들이쉬었다.

    “지도자 동지, 시행할까요?”

    그때 이영호가 물었으므로 김정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이영호의 시선을 받은 김정은이 서류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시오.”

    당경공업부장이며 인민군 대장 직책을 겸한 고모 김경희가 들어섰을 때는 오후 4시, 이영호가 나간 지 30분쯤 지난 후였다. 앞쪽 자리에 앉으며 김경희가 묻는다.

    “지도자 동지, 이영호가 다녀갔지요?” 김경희는 둘이 있을 때는 자연스럽다. 그것이 김정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예, 전연지대 군단의 사단장급 인사 때문에.”

    김정은이 말하자 김경희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만하면 무난한 인사예요. 이 동무도 많이 자제하고 있어.”

    시선을 든 김정은을 향해 김경희가 말을 잇는다.

    “신중하단 말이죠. 자기 사람을 될 수 있는 한 줄이고 공평하게 처리하려고 해요.” “그런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유화책으로 나갑시다. 지금처럼 말이죠.” “예, 고모님.” “고모라고 부르니 가슴이 먹먹하네.” 그러면서 김경희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당과 군이 있는 한 공화국은 안전해요. 다만.” 이제는 정색한 김경희가 김정은을 똑바로 보았다.

    “당은 무력이 없으니 누르면 되지만 군 장악이 중요해요. 양지로 올라간 놈이 있으면 음지로 몰린 놈들이 있거든. 그놈들 관리를 잘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고는 김경희가 길게 숨을 뱉었다.

    “위원장 동지께서도 생전에 그것을 가장 신경 쓰셨거든요.”

    제2호위대 소속의 최명호 중좌는 이철진과 함께 제2호위대에서 김정일을 경호했다. 그런데 김정은 대장이 최고사령관 겸 지도자가 되면서 제1호위대 출신이 대거 중용되었고 2호위대는 소외됐다. 과거 김일성을 경호하던 제1호위대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서 김정일 경호대인 2호위대에 밀린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역전된 것이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 김정일은 당시 이미 2호위대를 자신의 경호대로 삼고 있었지만 김정은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명호 또한 이번에 임무가 바뀌었는데 2호위대는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새 임무는 17호 별장의 관리다. 17호 별장은 함경남도 함흥 근처에 있으니 평양을 떠나야만 한다.

    “넌 2군단이라고?”

    2호위대의 순안구역 지부에는 고급군관용 휴게실이 있다. 휴게실 매점에서는 중국산 제품이 대부분이지만 의류에서 식품까지 상품이 많았으므로 군관이 많이 모인다. 휴게실에서 만난 최명호가 묻자 이철진이 쓴웃음부터 지었다. 이철진은 식품을 한보따리 사들고 있다.

    “그래, 2군단 소속의 대대장이다.” 소문이 빠르다. 참모장을 만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은 것이다. 둘은 휴게실 구석의 탁자로 다가가 마주 보고 앉았다. 휴게실에는 그들 외에 TV를 보고 있는 군관 둘뿐이다. 이철진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잇는다.

    “아파트에는 그대로 있으라는군. 다시 보자면서 말야.” “박장우도 9군단으로 간다는 소문이 있어.” 최명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이철진은 들었다. 둘은 외면한 채 입을 다물었다. 제2호위대장 강일국 상장은 이미 연초에 조성수 상장으로 교체된 것이다. 강일국은 군수동원사령부로 전출되었는데 좌천이다. 그때 이철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야?” 눈을 부릅떴지만 이철진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지도자 동지께서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다고 무시하는 놈들은 우리 손으로 처단한다. 그것이 우리 임무다.”

    모두 숨을 죽인 채 이철진을 바라보고 있다. 이철진은 김정은과 밀담을 자주 나눈다. 바로 이것 때문인 것이다. 그때 넷을 대표하듯 최명호가 대답했다.

    “이미 우리 목숨은 지도자 동지께 맡겼어. 말은 더 이상 필요 없어.”

    이철진은 네 쌍의 시선을 받고 숨을 멈췄다. 자신의 표정도 그들과 같을 것이다.

    “지도자께서 주변 관리를 시작하셨어.”

    인민무력부장 김영춘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수행 경호대를 손수 고르셨더군. 호위사령관이 내쫓았던 놈들을 다시 불러들였지.”

    “저도 들었습니다. 제2호위대 소속이었던 놈들이더군요.”

    무력부부장 진재경이 정색하고 말했다.

    오후 4시, 둘은 지금 무력부장실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방금 비상회의를 마친 참이다. 전(全) 인민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린 지 8일째가 되는 날이다. 김영춘이 늘어진 눈시울을 올리고 진재경을 보았다.

    “들었나? 해주에서 보위대원 둘이 찔려 죽었다는 것 말야.”

    “언제 말입니까?” 놀란 진재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조금 전에 끝난 회의에서는 보고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영춘이 말을 이었다.

    “어제 오전 11시경에.”

    “누가 죽였습니까?”

    “장마당 장사꾼인 것 같은데 지금 해주 보위부는 발칵 뒤집혔어.”

    “보고는 되었습니까?” “당연히.”

    그러고는 김영춘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총참모장, 국방위 부위원장한테도 다 보고가 되었지.” “그럼.” “지도자 동지도 아십니까?” 그러자 김영춘이 입맛을 다셨다.

    “오늘 오전에 회의를 했는데 그 일은 보고하지 않기로 했어.”

    “….”

    “지도자 동지께 걱정만 끼쳐드리게 될 테니까 말야.”

    “그렇지요.”

    “그런 사소한 일로 신경을 쓰시게 하면 안 되지.” “‘그렇습니다.”

    장마당 단속은 남조선 총선이 끝날 때까지만 계속될 거야.“

    그러고는 김영춘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땐 북남 경기가 확 풀리게 되는 거지. 그야말로 조선의 봄이 오는 거야.”

    제2호위대 참모장 박장우 중장은 4군단 직속 포병여단장으로 전출되었는데 그 또한 열흘간의 여유를 받았다. 이번 주 안에 황해북도 신계군에 위치한 군단 사령부에 전입신고를 하면 되는 것이다. 4월 2일 오후 3시, 창광거리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던 박장우는 손님을 맞았다. 열흘쯤 전에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들였던 중좌 이철진이다.

    “어, 웬일인가?” 놀란 박장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철진이 다시 호위대로 복귀해 그것도 지도자의 수행 경호대가 된 것을 아는 것이다. 지도자의 특별 지시로 된 인사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절도 있게 경례를 한 이철진이 묻자 쓴웃음을 지은 박장우는 잠자코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 이철진은 권력자다. 군복 차림으로 온 것을 보면 공무(公務)다. 박장우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긴장한 가족들이 접근하지 않았으므로 둘은 응접실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동무는 잘되었어, 축하하네.”

    박장우가 건성으로 말했을 때 이철진이 정색했다.

    “참모장 동지, 잘 들으십시오.”

    놀란 박장우가 눈을 치켜떴다. 난데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준 채 이철진이 말을 잇는다.

    “지도자 동지께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려고 제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 그거야.” 당황하고 놀란 박장우의 얼굴이 금방 붉게 상기되었다. 박장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영광이네. 지도자 동지께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해드리게.” “곧 다시 연락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철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여기 온 것을 보위부에서 감시하고 있겠지만 건드리지 못합니다.”

    따라 일어선 박장우를 향해 이철진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참모장 동지도 말씀입니다.”

    “그놈이 왜 간 거야?”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경옥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앞에 선 대좌를 보았다. 오후 4시, 이철진이 박장우의 아파트에서 나온 지 30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잠깐 말을 멈춘 대좌가 시선을 주었으므로 김경옥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김경옥은 당중앙군사위원이어서 당과 군의 간부를 감시하는 것이 주 업무다.

    “하지만 뭐야?” 김경옥이 묻자 대좌는 작심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정복 차림에 호위대 차량으로 아파트 앞까지 갔습니다. 그것도 한낮에 말씀입니다. 그것은.” 대좌가 다시 말을 멈췄는데 잇지 않아도 다음 말은 뻔했다. 지도자 동지의 지시를 받고 간 것이다. 이것은 불가침(不可侵)이다.

    “우리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민주당과 통합한 민노당 대표 이정희가 말했다. TV 화면에 비친 이정희의 얼굴은 곱다. 언제나 짧게 자른 머리 스타일이 이제는 국민에게 낯익다. 서울역 대합실에 놓인 대형 TV 앞에 수십 명의 여행자가 앉아 화면에 뜬 이정희를 보고 있다. 이정희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남북 화해시대에 구시대의 낡은 유물인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민주주의는 역행됐으며 얼마나 많은 애국 시민이 전과자가 된지 모릅니다.”

    이정희의 맑은 눈이 반짝였고 목소리는 당당했으며 말의 내용은 설득력이 넘쳐흘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리에서 일어났을 노인들도 물끄러미 이정희를 바라보고 있다. 옆쪽 전광시계가 오후 5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2012년 4월 3일이다.

    같은 시각, 충주 제19비행단 159전투비행대대장 이성복 중령도 대기실에서 TV를 보는 중이다. 2011년 6월, 서방사(서북도서방위사령부)가 창설되면서 19비행단의 서해안 비행이 정기화되었기 때문에 이성복도 이틀에 한 번은 KF-16을 탄다. 159전투비행대대는 한국군의 최신형 전투기인 KF-16 비행대대인 것이다. 이정희가 잠깐 숨을 돌렸을 때 옆쪽 의자에 앉아 있던 1편대장 김태영 소령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시발, 지금도 국보법이 있으나마나 한 상황인데 뭘 또 폐지까지.”

    “이제 아주 간첩이 나 북에서 왔소 하고 나다니게 되겄구먼.”

    뒷모습을 보인 채 말을 받은 것은 유필수 대위다. 유필수는 김태영과 동기인데 내년에 소령 진급이 될 것이었다. 그러면 김태영보다 2년 늦다. 비행 실력은 오히려 유필수가 낫지만 진급이 비행 실력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그때 이정희의 말이 이어졌다.

    “둘째, 미국과의 FTA는 즉각 무효가 되도록 국회에서 법안을 상정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되는 악법은 즉시 철폐되어야만 합니다.”

    “옳소.”

    하고 대기 중인 장교 하나가 소리쳤지만 비아냥댄 소리다. 그때 유필수가 그 장교에게 말했다.

    “얀마, 너 앞으로 장군 되려면 그딴 수작 말아야 된다.”

    “얀마, 시끄러.”

    마침내 이성복이 말하고는 TV 앞에 앉은 장교한테 소리쳤다.

    “야, TV 꺼.”

    2012년 4월 4일 수요일 오전 8시.

    창광거리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와 인민대학습당, 평양고려호텔 등이 서 있고 창광산, 해방산을 옆에 낀 호화스러운 주택단지가 늘어서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북한의 최고 엘리트 계층이며 일반 서민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최고급 주택 지역인 것이다. 창광거리의 러시아 대사관 근처에 위치한 저택에서 장성택과 김경희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각각 바쁜 터라 이번 달인 4월에 아침을 같이 먹는 것이 오늘로 세 번째다. 그것도 김경희가 오늘 아침을 같이 먹자고 했기 때문에 성사가 되었다. 건성으로 숟가락질을 하던 김경희가 머리를 들고 장성택을 보았다.

    “이봐요, 지도자 동지가 소외감을 갖게 하면 안돼.”

    국을 떠먹던 장성택이 시선을 주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는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김경희가 말을 이었다.

    “정은이가 예민한 성품이야. 더구나 아버지를 대하던 당신들의 태도를 보아왔기 때문에 비교하는 것 같아.”

    “….” “신경을 많이 써야 돼, 특히 당신은.” “난 최선을 다하고 있어.”

    정색한 장성택이 김경희를 보았다. 수저를 내려놓은 장성택이 말을 잇는다.

    “내가 욕심이 없다는 건 당신이 가장 잘 알 거야. 그래서 돌아가신 지도자 동지께서도 나한테 정은이를 맡겨주셨고.”

    장성택의 목소리에 열기가 실렸다.

    “나만큼 정은이를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이 누가 있어? 정은이와 나는 일심동체야. 동고동락. 같이 살고 같이 죽는 사이라고.”

    “글쎄, 그걸 누가 모르나?” 김경희가 시선을 내리더니 길게 숨을 뱉는다.

    “다 알아. 하지만 정은이의 조바심, 자격지심을 우리가 이해하고 부드럽게 대해야 해. 그것이 가족으로서 우리가 더 짊어져야 할 의무야.”

    정찰총국장 김영철은 대남군사작전을 총괄해오는 동안 김정은에게 브리핑을 한 적이 네 번 있다. 그중 세 번은 김정일과 함께였고 한 번은 연평도 포격 사건 후에 김정은이 혼자 브리핑을 받았다. 물론 그때도 김정일이 듣고 오라고 시킨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김정은이 지도자가 되어 처음으로 부른 것이다. 주석궁 지하 3층의 상황실 안이다. 넓은 상황실에는 둘이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김정은의 뒤쪽 벽에 쉬어 자세를 한 채 측근 호위군관 하나가 석상처럼 서 있다. 이철진이다. 먼저 김정은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지도자 동지께선 사람마다 장점이 있다고 하셨어요.”

    시선을 준 채로 김정은이 말을 잇는다.

    “김 총국장은 우직하고 신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김영철이 눈을 치켜떴지만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떨어졌다. 그러나 입을 꾹 다문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때 김정은이 낮게 말했다.

    “해주 장마당에서 보위대원 둘이 피살되었습니다. 김 총국장은 알고 계시오?” 김영철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알고 있는 사건이다. 인민보위부에서 당중앙군사위와 당조직지도부 등 상급기관에 보고했기 때문이다. 김영철은 군사위와 당에 보고된 내용을 모두 읽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만.”

    “나한테는 보고가 되지 않았습니다.”

    김정은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자 김영철은 몸을 굳혔다. 갑자기 머릿속이 빈 듯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김정은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김 총국장을 오시라고 한 겁니다.”

    “김영철은 무엇 때문에 들어간 거야?”하고 이영호가 물었지만 김정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영호와 김영철, 김정각은 김정은의 군 장악에 필요한 3개 기둥이다. 김정일은 김정은의 측근으로 이 셋을 배치했다. 총참모장 이영호로부터는 군 지휘와 통제술을, 김영철로부터는 대남군사전략을, 김정각으로부터는 당과 군의 인맥과 군사지식을 습득시켰다. 그중 김영철이 가장 강골이며 직선적이다. 오랜 대남공작에 물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후 1시 반. 인민무력부의 총참모장실에 둘이 앉아 있다. 이영호가 김정각을 부른 것이다. 미제 담배 말보로를 꺼내 문 이영호가 말을 이었다.

    “지도자 동지께서 오전 10시에 김영철을 부르셔서 11시 반까지 한 시간 반이나 독대하셨어, 그리고.”

    쓴웃음을 지은 이영호가 제 손목시계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지금까지 나한테 연락도 하지 않는단 말야, 김영철이는.”

    “지난번에 호위대놈이 2호위대 참모장이었던 박장우를 만난 이야기 들으셨소?”

    불쑥 김정각이 묻자 이영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김경옥이한테서 들었어.”

    “박장우는 어제 4군단에 내려가 전입신고를 했소.”

    “그럼 제 놈이 그래야지.”

    “지도자 동지께서 측근 호위를 시켜 무슨 말을 전한 겁니다.”

    “위로나 했겠지.”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인 이영호가 길게 연기를 내품었다.

    “뿔뿔이 흩어진 제2호위대 놈들을 위무하시는 거야. 그건 잘하시는 일이지.”

    제2호위대를 김정은의 측근에서 배제한 것은 당연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측근 경호를 맡았던 제1호위대 대부분은 김정일의 경호에서 제외되었다. 김정일의 제2경호대가 지도자 경호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김정일이 죽었으니 새 경호대가 맡아야 한다. 그래서 소외되었던 제1경호대와 제3,4호위부에서 김정은의 호위로 차출된 것이다.

    오후 2시 반, 평양백화점을 시찰하고 나온 김정은이 차에 오르기 전에 머리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이철진을 보았다.

    “내 차에 타.”

    이철진이 잠자코 김정은을 뒷좌석에 태우고는 운전석 옆자리에 오른다. 차 안에는 운전사까지 셋이다. 백화점을 떠난 차가 뻥 뚫린 도로로 나왔을 때 김정은이 말했다.

    “진 부부장한테 가서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인민무력부에 보고된 사건을 정리해 오라고 해.”

    한 마디씩 힘주어 말한 김정은이 운전사를 힐끗 보았다. 운전사는 김정은이 대장이 되기 전부터 모시던 군관이다. 김정은이 말을 잇는다.

    “오늘 저녁 6시까지 동무가 비밀리에 주석궁으로 데리고 오라.”

    “예, 지도자 동지.”

    “아무도 모르게 와야 한다고 주의를 주라우.”

    “알겠습니다.”

    그러자 김정은이 소리 죽여 숨을 뱉는다. 해주 장마당 사건을 은밀히 김정은에게 말한 것은 진재경이다. 진재경은 비밀을 지킬 것이었다.

    “간나새끼들.”

    낮았지만 김정은이 잇사이로 뱉은 욕설을 듣고 이철진은 몸이 굳었다. 김정은이 입술도 달싹이지 않고 말을 잇는다.

    “이건 날 위하는 게 아냐. 날 소외시키면서 제 놈들 기반을 굳히려는 거야.”

    주석궁 지하 연회장 만찬에는 서열 20위권 안의 거물들이 거의 다 참석했다. 신년이 되면서 거동이 불편해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모습도 보였다. 커다란 원탁 주위에 둘러앉은 당과 군의 거물들을 둘러보면서 김정은은 또 지난날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함께 어울렸던 만찬 때의 장면이다. 그때도 바로 이 장소에서 파티가 열렸다. 자신이 앉아 있는 위치가 바로 아버지 김정일의 자리였다.

    “위원장 동지,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무엇을 시행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영호가 무섭게 긴장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허리는 곧고 눈은 치켜떠졌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자세다. 머리를 든 김정은이 이영호를 보았다. 이영호는 자신의 오른쪽 세 번째 옛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영호는 옆에 앉은 인민무력부장 김영춘과 이야기에 팔려서 이쪽에 시선도 주지 않는다. 머리를 돌린 김정은은 바로 정면에 앉은 장성택과 시선이 부딪혔다. 장성택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장성택은 웃음 띤 얼굴로 희미하게 머리를 끄덕여 보인다. 김정은은 심호흡을 했다. 그때 최용해가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지도자 동지의 건강과 이제 곧 다가올 통일의 그날을 위해 건배를 제의합니다.”

    그러자 모두 술잔을 들어 올리면서 일어섰다. 김정은은 포도주가 담긴 술잔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건배!”

    그 순간 최용해가 외쳤고 모두 따라 외쳤다. 선 채로 술을 삼키던 김정은의 눈앞에 지난날이 떠오른다.

    “자 동무가 해.”

    김정일이 무력부장 김영춘에게 지시했다. 그 순간 연회장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몸을 굳힌 김영춘이 김정일을 보았다. 눈을 치켜뜨고 있다.

    “무엇을 말씀입니까?”

    목소리도 굳어 있다.

    “건배.”

    던지듯 말한 김정일의 시선이 김정은에게 옮겨졌다. 그 순간 김정일이 부드럽게 웃는다. 그러고는 머리를 돌려 김영춘에게 후려치듯 말했다.

    “내 건강 따위는 필요없다. 핵을 위하여, 그렇게 해!”

    “예, 지도자 동지.” 벌떡 일어선 김영춘이 술잔을 들어 올리자 모두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김정일은 의자에 등을 붙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엉겁결에 일어선 김정은의 시선이 김정일을 스치고 지나갔다.

    “핵을 위하여!”

    김영춘이 선창하자 모두 우렁차게 따라 외쳤다.

    자리에 앉은 김정은이 다시 원탁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건너편에 앉은 장성택도 옆에 앉은 평양시당 책임비서 문경덕과 이야기를 하느라고 이쪽에 옆얼굴을 보이고 있다. 그때 머리를 돌린 김정은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김영철과 시선이 부딪혔다.

    밤 11시 반, 주석궁 지하 2층의 응접실에서 김정은과 김영철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문쪽 벽에 수행 경호원인 이철진이 붙어 서 있을 뿐이다. 연회는 조금 전에 끝나 모두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 가는 시늉을 하던 김영철만 몰래 돌아와 김정은과 독대하고 있다. 김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인민무력부에 접수된 보고서를 확인했더니 나한테 보고하지 않은 내용이 많았어요. 이건 날 무시한 것입니다.”

    김영철은 시선만 주었고 김정은의 말이 이어졌다.

    “해주 장마당 사건뿐만이 아니었어요. 강계 10군단 사령부에서도 총기 사건이 있었고 전연지대 1군단 구역에서는 상위 한 놈이 월남을 했고, 함흥에서는 보위부와 7군단소속 군관들이 총격전을 벌여 둘이 죽었습니다.”

    “지도자 동지.”

    김정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김영철이 정색했다.

    “그런 사건은 돌아가신 위원장 동지께서 계실 적에도 발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위원장님께 보고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것은….”

    말을 멈춘 김영철이 입안의 침을 삼켰다. 김정일이 인민무력부에 접수된 보고서를 직접 살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김정은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것이었다. 심호흡을 한 김영철이 말을 이었다.

    “지도자 동지, 지금 군은 비상대기 상태로 긴장된 상태에서 불평분자를 색출하고 기강을 세우고 있습니다. 지도자 동지께서 조금만 기다려주신다면….”

    “이영호, 장성택 체제가 굳어진단 말이지요?” “지도자 동지를 중심으로 한 체제입니다. 그들은 전혀….”

    “내 주변에는 호위군관 몇 명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총국장을 부른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도자 동지. 저는 그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이런 체제는 견딜 수 없어요. 변화가 필요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심호흡을 한 김영철이 손수건을 꺼내더니 이마의 땀을 닦는다. 그러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곧 방법을 찾아 보고드리겠습니다.”

    “이건 나와 총국장 둘이 추진하는 것입니다. 새 체제를 위해서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급해요. 주변에 눈이 많아서 즉시 시행해야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김영철이 다시 얼굴의 땀을 닦는다.

    2012년 4월 6일 금요일, 오전 9시.

    김영철이 불쑥 방으로 들어서자 이영호는 눈을 크게 떴다. 인민무력부의 총참모장실 안에는 장성이 둘 더 있었는데 이영호는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열흘이 넘도록 전군(軍)이 비상대기 중인 상황이다. 보고하던 장성이 주춤거렸을 때 김영철이 말했다.

    “총참모장 동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서열은 이영호가 높지만 김영철은 김정각과 함께 군(軍) 3두 체제의 일원이다. 김정일에게서 위임받은 권한은 서열을 떠나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이영호의 눈짓을 받은 장성들이 방을 나갔으므로 방 안에는 둘이 남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을 때 이영호의 시선을 받은 김영철이 말했다.

    “어젯밤 연회 끝나고 지도자 동지께 불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시고 나서 덧붙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며칠 전에도 불려갔지요.”

    “….”

    “지도자는 해주 장마당 사건뿐만 아니라 인민무력부에 보고되는 사건은 다 알고 있습니다.”

    “….”

    “그것을 보고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아니, 그것은 나도….” 이영호가 나섰으므로 손바닥을 들어 보인 김영철이 말을 잇는다.

    “지도자는 군(軍) 숙청을 원하시오.”

    그러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하고 함께 말입니다.”

    두 시간 30분 후인 오전 11시 반, 총참모장실 안에는 모두 아홉 명이 둘러앉았다. 소파 위 상석에는 이 방 주인인 이영호가 앉았고 건너편에는 장성택과 김경희, 그리고 오른쪽 긴 의자에는 정찰총국장 김영철과 총정치국1부국장 김정각, 끝쪽에 80객인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반대쪽에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그 옆에 가장 늦게 참석한 중국대사 유훙차이와 통역이 나란히 앉았다. 이미 방 안 분위기는 무겁고 긴장되어 있다. 김영철과 이영호가 번갈아 다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먼저 입을 연 사람이 김경희다. 김경희는 군 대장 직위가 있긴 하지만 군 관계자 회의에는 오늘 처음 참석했다. 그러나 김경희의 시선은 날카롭고 턱을 치켜들고 있다.

    “그래서 어쩌려는 겁니까?” 카랑카랑한 김경희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지도자를 제거하고 그 다음엔 나까지 숙청하고 나서 동무들끼리 천년만년 해먹겠다는 겁니까?

    “무슨 말씀을 그렇게.”

    의외로 가장 먼저 말을 받은 것이 노인 오극렬이다. 오극렬이 늘어진 눈꺼풀을 치켜들고 떨리는 목청으로 말했다.

    “내가 목숨을 바쳐 돌아가신 지도자 동지의 유훈을 지킬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 시체를 밟고 건너가야 될 것이오.”

    “그렇습니다.”

    김정각이 말을 받았다. 어깨를 편 김정각이 말을 잇는다.

    “지도자 동지는 우리들이 목숨을 바쳐 모셔야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김경희가 다그치듯 묻는다.

    “김 총국장이 그러려고 이렇게 모든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다만.”

    하고 김영철이 입을 열었다. 침을 삼킨 김영철이 말을 잇는다.

    “시기가 적당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때 헛기침을 한 유훙차이가 나섰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유훙차이가 말했다.

    “남조선의 총선이 끝날 때까지만 지도자 동지께서 자제해주시면 합니다. 총선이 이제 닷새 남았습니다.”

    통역이 분위기를 따라 재빠르게 말했고 유훙차이의 말이 이어졌다.

    “잘 아시겠지만 남조선 총선만 이 상태로 끝나면 남북한 관계는 우리들 뜻대로 진행됩니다. 북조선 지도자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굳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통역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모두는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본 김경희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 사이에 이미 합의가 끝났음을 느낀 것이다. 다시 유훙차이가 말했고 통역이 이었다.

    “지도자 동지께서 부르시면 입장이 난처하실 테니 닷새 동안만 저희들이 모시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고는 유훙차이가 모두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지만 아무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오극렬도 외면했다. 그것을 본 김경희가 어금니를 물고는 옆에 앉은 장성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볼에 닿는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장성택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때 유훙차이가 김경희에게 말했다.

    “알고 계시지요? 중국 정부는 김정은 지도자의 후견인입니다. 아무도 김정은 지도자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2012년 4월 6일 금요일 오후 3시.

    김일성대학 시찰을 가려고 준비하던 김정은에게 이철진이 다가와 말했다.

    “지도자 동지, 대기실에서 정찰총국장과 장 부위원장, 그리고 김 대장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정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평양 동북방 제20호 관사라고 불리는 김정은의 별장이다. 호젓하고 시설이 좋아서 김정은이 자주 들르는 곳인데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무슨 일이라고 해?” 김정은이 묻자 이철진이 두 걸음쯤 앞으로 다가와 섰다. 얼굴이 굳어 있다.

    “긴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철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별장 밖에 중국대사관 차량이 넉 대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에 중국대사가 타고 있습니다.”

    “….”

    “김일성대학까지 도로 통제를 확인하려고 행사안전부에 연락했더니 호위사령관 지시로 이곳에서 중국대사관까지 도로 통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

    “지도자 동지께서 중국대사관에 가실 일정이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때 김정은이 입을 열었다.

    “동무는 이곳에 남아라.”

    “예, 지도자 동지.”

    “그리고 내가 중국대사관으로 간다면.”

    말을 멈춘 김정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터뜨려라.”

    “예, 지도자 동지.”

    “집단지도체제?” 혼잣소리처럼 되물은 김정은이 다시 웃는다.

    “누구를 위한 집단지도체제냐?”

    잠시 후에 응접실에는 김정은을 중심으로 셋이 둘러앉았다. 정찰총국장 김영철과 장성택, 김경희 부부다.

    “지도자께서 지시하신 일을 두 분께 상의했습니다.”

    김영철이 굳은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두 분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시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김경희가 바로 말을 받는다.

    “정보가 샐 염려가 없는데다 불순분자가 근접할 수 없는 중국대사관이 협의 장소로 적당합니다. 우리가 수시로 찾아뵐 것이고 지도자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라도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장성택이 거들었다.

    “군과 당의 재정비 작업에 최대한 4, 5일이 소요됩니다. 4, 5일 후에 전 지도층을 일신하시고 주석궁으로 돌아오시지요.”

    “쉽게 말하면.”

    머리를 든 김정은이 말하자 셋은 몸을 굳혔다. 김영철의 목구멍에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정은이 웃음 띤 얼굴로 셋을 보았다.

    “날 중국대사관에 연금하려는 것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셋이 입을 딱 벌렸지만 누구도 말을 뱉지 못한다. 김정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갑시다.”

    2012년 4월 10일 화요일, 오전 9시 30분.

    충주의 제19전투비행단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른 제159전투비행대대장 이성복 중령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자, 가자.”

    반복되는 출동이어서 지시할 것도 없다. 서방사로 불리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 구역으로의 정찰 비행이다. 대대장 이성복이 이끄는 2개 편대 8기의 KF-16은 각각 AGM-65메버릭 공대지 미사일 6기, 또는 AGM-88 하픈(Harpoon) 미사일 4기씩을 적재하고 있었으므로 중무장이다. 지난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로 서방사가 창설되었는데 전투기 무장에도 달라진 점이 있다. 그것은 공대공 미사일 대신으로 공대지 메버릭이나 하픈을 탑재하게 된 것이다. 연평도 포격을 받았을 때 공군이 반격하지 않았다고 박살나게 깨진 터라 이제는 북에서 화살만 날아와도 공군이 미사일을 쏠 태세였다. 편대가 대형을 맞췄을 때 헤드셋에서 서방사 파견 공군 담당 장교의 목소리가 딱 한 마디 울렸다.

    “확인.” 레이더, 위치, 지금 서방사 상공에 떠 있는 또 다른 2개 편대의 위치까지 다 정상이라는 말이다. ‘이놈도 일이 지겨운가보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이성복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전 9시 33분, 연평도.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에 2박3일 휴가를 받은 김선일 상병이 부둣가에 서있다. 아버지는 내일 대장암 수술을 받는다. 하늘은 맑고 바람도 없는 봄날이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김선일이 머리를 든 순간이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으므로 김선일은 눈을 치켜떴다.

    “꽈앙!”

    다음 순간 앞쪽에 정박해 있던 어선이 폭발했다. 파편이 불덩이와 함께 솟아오르면서 어선은 반으로 접힌 채 불길을 내뿜는다.

    “꽈앙!”

    이제는 쇳소리와 함께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부둣가에 세워진 트럭이 번쩍 치켜 들렸다가 폭발했다. 포격이다! 눈을 치켜뜬 김선일은 달리기 시작했다. 부대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또 포격이다. 놈들이 또 시작했다. 그 사이에 주위에서 연거푸 폭발음이 울렸고 이제는 사람들의 비명과 외침이 함께 들렸다.

    같은 시각, 서방사 사령관 겸 해병사령관 정용우가 보고를 받는다. 정용우는 마침 김포 해병 1사단에 와 있다. 무전기를 귀에 붙인 정용우 옆에 1사단장과 참모장까지 서 있다.

    “해주 남방 4군단 직속 포병여단의 4개 포병대대에서 집중적으로 포격하고 있습니다.”

    서방사 당직 장교가 소리치듯 말을 잇는다.

    “연평도의 해병 진지와 민간인 구역, 부두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하고 있습니다!”

    오전 9시 35분.

    서해 NLL 아래쪽 4㎞ 상공에 닿았을 때 이성복 중령이 한마디 했다.

    “발사!”

    그 순간 횡으로 펼쳐 날아가던 8기의 KF-16기에서 일제히 공대지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이성복의 애기 ‘수니’호에는 4기의 AGM-88 하픈이 탑재되어 있었는데, 사거리 110㎞의 미사일은 33㎞ 거리에 있는 적 포대를 3m 오차 범위에서 명중시킬 것이었다. 8대의 KF-16기에서 발사한 50여 기의 미사일이 흰 궤적을 이끌며 날아가고 있다. 이성복이 잇사이로 말했다.

    “시발놈들.”

    긴장한 부하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이성복은 한마디 더 했다.

    “잘 걸렸다, 개새끼들.”

    그때 헤드셋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왔습니다.”

    조금 전에 아래 상공에서 교대했던 김태영 소령의 2개 편대다. 비행단으로 귀대하다가 수도방위사령부 지시를 받고 돌아온 것이다. 김태영의 KF-16 8기에도 수십 기의 공대지 미사일이 그대로 실려 있다. 그 순간 이성복은 머리 위에서 날아가는 수십 기의 미사일을 보았다. 푸른 하늘이 수십 개의 흰 궤적으로 갈라져 있다.

    오전 9시 38분.

    대통령 이명박은 폭격을 받았다는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북한이 포격을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도 지금 두 번째 보고를 받은 것이다. 청와대 집무실 안이다. 국방장관 김관진이 영상화면을 통해 말을 잇는다.

    “바로 조금 전에 적의 포격이 그쳤고 아군도 반격을 멈췄습니다, 하지만.”

    이명박이 숨을 들이쉬었다. 10분 만에 포격, 반격이 끝난 것이다. 이명박이 ‘하지만 뭡니까?’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주위에는 비서실장 하금열, 안보수석 천영우까지 모여 서 있다. 지금 국정원장과 외교통상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등은 청와대로 달려오는 중이다. 그때 김관진이 말을 이었다.

    “적 4군단 포병여단의 5개 진지는 완전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치켜뜬 김관진이 똑바로 이명박을 보았다.

    “해주의 4군단 사령부도 아군의 하픈 미사일 3기를 맞고 붕괴되었습니다.”

    이명박이 숨을 들이쉬었고 주위의 분위기도 술렁거렸다. 이윽고 이명박이 물었다.

    “재폭 가능성은?”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김관진이 ‘하지만’이라고 했다. 조금 전에 ‘하지만 이게 뭡니까?’하고 물으려다가 전에 ‘확전’ 운운 때문에 시달린 것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하’나 ‘확’이나 입 벌어지는 것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김관진이 말을 잇는다.

    “4군단 포병여단 외에는 움직임이 없습니다. 해군도, 공군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중부전선의 지상군도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김관진이 잠깐 뜸을 들였다가 계속했다.

    “4군단 포병여단이 돌출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오전 9시 45분, 북한 인민무력부 안의 총참모장실에 총참모장 이영호, 무력부장 김영춘, 그리고 10여 명의 장성이 모여 있다.

    “적의 공격도 그쳤으니 포격하지 마라!”

    전화기에 대고 이영호가 소리쳤다.

    “이건 반역자가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려고 도발한 것이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

    이영호는 지금 전연지대 군단에 지시를 내리고 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영호가 충혈된 눈으로 둘러선 장성들을 보았다. 10분 가깝게 고함을 쳤기 때문에 목소리가 쉬어 있다.

    “지도자 동지는?”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누군가가 대답했다.

    “지금 대사관에 계십니다.”

    이영호는 어금니를 물었고 잠시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포격을 시작한 포병여단장 박장우는 제2호위대 참모장이었다. 그리고 박장우는 임지로 내려가기 직전에 지도자 동지의 측근 경호원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박장우는 이번 한국군의 반격을 받아 폭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때 장성 하나가 다가와 이영호에게 보고했다.

    “4군단 사령부의 사망자 중 21사단장 하석훈 중장이 추가됐습니다. 사령부에 들렀다가 당한 것입니다.”

    이영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하석훈 따위의 죽음에 신경 쓸 겨를이 아니다. 4군단 사령부가 미사일 공격을 받아 군단장과 참모장까지 폭사한 것이다. 전사자로 사단장급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오전 10시 40분, 이명박이 TV 화면에 나타났으므로 서울역 대합실은 조용해졌다.

    “적의 포격으로 민간인 17명, 우리의 해병 21명이 사망했습니다.”

    눈을 치켜뜬 이명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러나 아군은 적 진지 5곳을 초토화했으며 해주의 군단 사령부를 폭격, 지휘부를 궤멸시켰습니다. 우리는 백배의 응징을 한 것입니다.”

    이명박은 양복 차림이다. 노란색 작업복은 입지 않았다. TV를 응시한 시민들의 얼굴도 이명박과 비슷했다. 눈을 치켜떴고 어금니를 물었다. 다시 이명박의 목소리가 대합실을 울렸다.

    “한국군은 적의 어떤 도발도 격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정부를 믿고 지시를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오후 5시 30분, 시청 앞 소공동의 커피숍 안에서 정익준과 조기성이 마주 앉았다.

    “북한 내부 반란이요, 하지만.”

    북한연구소 소장 조기성이 단정했다.

    “종으로 연결된 군이어서 단편적으로 끝난 것입니다.”

    “소외된 그룹일까요?” 정익준이 묻자 조기성이 대답했다.

    “목숨을 걸고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를 기울인 조기성이 정익준을 보았다.

    “이것이 남한한테 보내는 신호 같기도 해요.”

    “여덟 시간 동안.”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정익준이 말을 잇는다.

    “북한은 어떤 코멘트도 내놓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방송에도 사건 발표를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북한이니까 가능한 일이지요.”

    쓴웃음을 지은 조기성이 정색했다.

    “군부 간 갈등이 있었다면 어느 한쪽이나 양쪽이 터뜨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신호 같다니까요.”

    같은 시각, 청와대 벙커에서 이명박과 김관진, 김성환과 원세훈 등이 둘러앉아있다. 이제는 모두 점퍼를 입었는데 푸른색이다. 노란색은 너무 튄다고 청와대 수석 하나가 건의해서 바꾼 것이다.

    “국민 사기가 오르고 있습니다.”

    비서실장 하금열이 말하자 이명박이 머리만 끄덕였다. TV는 위성사진으로 초토화된 북한군 진지들과 4군단 사령부 건물까지 비추고 있다. 그에 비교하면 연평도 피해는 미미했다. 예상 숫자지만 북한군은 1500여 명의 사망자와 2000여 명의 부상자를 냈고 4군단 소속의 포병여단은 궤멸되었다. 그때 안보수석 천영우가 허둥지둥 다가왔다.

    “대통령님, 후 주석 전화가 왔습니다.”

    순간 상황실이 조용해지면서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오전의 포격전 이후 오바마하고는 두 번 통화를 했다. 10시쯤 이쪽 자존심을 생각한 오바마가 먼저 전화를 해주었고 오후 2시경에 이명박이 연락을 한 것이다. 이명박이 옆으로 다가와 선 천영우에게 말했다.

    “시발, 나 없다고 그래.”

    그 순간 방안 분위기가 밝아졌다.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이명박의 전화를 후진타오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에 대한 보복이다.

    “예, 알겠습니다.”

    말을 그대로 알아들은 천영우가 몸을 돌렸을 때 이명박이 입맛을 다셨다.

    “전화 이리 돌려.”

    후진타오의 목소리에 이어서 통역이 말했다. 목소리도 비슷하다.

    “이번 사건은 우발적인 실수였습니다. 중국은 조정자로서 북남이 더 이상 충돌하지 않도록 강력히 제의하는 바입니다.”

    스피커로 돌린 터라 상황실의 모든 사람이 다 듣는다. 다시 후진타오의 말이 이어진다. 서두르는 것 같다.

    “북한은 휴전을 합의했고 중국이 보증합니다. 남한 정부도 합의해주시겠습니까?”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아침 뉴스에 또다시 어제 후진타오와 이명박 간에 통화 내용이 방송되었고 신문 1면에는 주먹만한 글씨로 타이틀이 붙어 있다. ‘연평대전’ ‘위대한 승리’ ‘자존심’ ‘대한민국군’ ‘영웅’ ‘우리의 국군’ ‘아! 대한민국!’ ‘대전쟁’ 등으로 제159전투비행대대는 모두 영웅이 되었고 연평도에서 부대로 돌아가다가 포탄을 맞아 전사한 김선일 상병의 사연은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이명박은 오늘이 국회의원 총선거일임을 감안해 대국민연설은 생략했다.

    4월 11일 밤 11시 30분.

    투표가 끝나기 전부터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전주 완산을 지역구 한나라당 후보 양순태는 선거사무장 오정달과 함께 한벽당 오모가리 집에서 8시부터 소주를 마시다가 결과를 본다.

    “됐다! 당선되었어!”

    사무장 오정달이 벌게진 얼굴로 말했지만 떠들지는 않는다. 개표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양순태가 앞서왔기 때문이다. 개표가 끝난 지금 양순태는 42%를 얻어 28%를 얻은 민주당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나머지는 무소속 후보들이 나눠가졌다.

    “이거 기가 막히군.”

    TV 화면을 보면서 오정달이 말을 잇는다.

    “한나라 압승이야.”

    그렇다. 한나라는 전국에서 고르게 지역구 145석을 획득했다. 민주당은 72석. 압승이다. 소주를 한 모금에 삼킨 오정달이 말을 잇는다.

    “북풍이야! 거대한 북풍이 불었다고!”

    그 시간에 김정은도 평양의 중국대사관 별관 응접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중국대사관에서 생활한 지 오늘이 닷새째가 된다. 이곳에서는 한국 방송도 나오는 터라 ‘연평대전’이니 ‘대전쟁’ 등으로 선전한 방송도 다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한나라당이 압승했다는 선거결과를 보는 중이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더니 최명호 중좌가 들어섰다. 김정은이 이곳까지 데려온 경호원 세 명 중 하나가 최명호다. 김정은의 옆으로 다가선 최명호가 낮게 말했다.

    “지도자 동지, 이철진 중좌를 찾았습니다.”

    김정은이 리모컨을 눌러 음소거를 하자 최명호가 말을 잇는다.

    “4군단 포병여단 지휘 벙커에서 나온 시체 중 하나가 이철진 중좌임이 밝혀졌습니다.”

    “….” “여단장 박장우와 같이 전사한 것입니다.”

    “내가 잊지 않을 거야.” 낮게 말한 김정은이 흐린 눈을 들어 최명호를 보았다.

    “내가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전화기를 귀에 붙인 유훙차이가 부동자세로 서 있다. 대사관 본관 집무실 안이다. 벽시계는 밤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유훙차이가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집단지도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상대는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다. 유훙차이가 말을 잇는다.

    “김정은이 주석궁에 있을 때는 존재감이 흐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사건이 터지자 당과 군의 실세들은 우왕좌왕할 뿐 어느 누구도 이끌어가는 자가 없었습니다.”

    후진타오는 듣기만 했고 유훙차이의 목소리가 열기를 띠었다.

    “김정은은 대사관에 억류되면서 주사위를 던진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끌어 갈 것이냐고 도전한 것이나 같습니다.”

    그러고는 길게 숨을 뱉는다.

    “호랑이가 강아지를 낳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주석 동지.”

    그러자 후진타오가 말했다.

    “내일 주석궁으로 모시고 가도록.”

    “예, 주석 동지.”

    그때 이번에는 후진타오가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이제 더 위험해졌군.” -끝-

    이원호

    2012 코리아의 봄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등이 있다.


    “우리가 지도자 동지께 목숨을 바쳐 충성한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돌아가신 지도자 동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어떻게 하실 것 같나?”

    “대장 주변에 있는 놈들 때문이야.”

    이제는 최명호가 입술만 달싹이며 말했다.

    “특히 이영호 그놈. 그놈이 우리를 배신하고 있어.” 다시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덮였다. 둘은 5년 가까이 김정일을 측근에서 경호해왔다. 그 당시에는 서로가 경쟁 상대였으므로 대화도 변변히 나눈 적 없지만 이제는 동병상련이 되었다. 그때 이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새 지도자 동지가 위험해. 그놈들이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어.” 최명호는 눈만 껌벅이고 있다.

    해주 시장마당은 여러 곳이지만 보위부 뒤쪽 양곡저장소 앞마당이 가장 크고 장사가 활발했다. 시장마당을 여러 번 풀었다가 단속해오던 당국은 지난해 말 지도자 김정일의 사망 이후로 단속을 풀었다. 그러나 느슨하게 풀어서 긴장감이 가신 것이 아니다. 해주는 전연지대의 정규군단인 4군단 사령부와 수많은 지원부대, 군수 창고가 결집된 군사도시다. 장마당에 나온 장사꾼 중 군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많아서 보위대원도 조심하는 편이다. 언젠가 보위대 상사 하나가 장마당에서 장사하던 여자 하나를 때렸다가 다음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하사로 강등되어 교도대로 전출됐다는 소문이 들렸는데 맞은 여자는 정찰대 중좌의 처제라는 것이다.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의 중좌면 정찰대대장이다. 보위대 상사쯤은 무슨 이유를 붙여서든지 잡아 죽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보오, 얼마나 팔았어?” 하고 김 씨가 묻자 박 씨가 대답했다.

    “600원밖에 못 벌었어.” “그만하면 됐네.” 박 씨 옆에 쭈그리고 앉은 김 씨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중국산 담배다.

    “난 250원 벌었어.”

    담배에 불을 붙인 김 씨가 길게 연기를 뱉으면서 말을 잇는다.

    “이렇게 1년만 풀어주면 살림이 좀 피겠는데 까짓 배급은 안 타 먹어도 좋으니깐 말야.” “거, 연기 좀 나한테 뿜지 마소.”

    이맛살을 찌푸린 박 씨가 비껴 앉았다. 둘 다 40대 중후반의 나이로 김 씨는 홀아비, 박 씨는 과부다. 주위를 둘러본 김 씨가 박 씨에게 묻는다.

    “남조선 비디오 있는데 팔 수 없을까?”

    “얼마 받을 건데?” “한 장에 50원.” 그들은 중국 위안화로 장사를 하는 터라 화폐 단위는 위안이다. 잠깐 눈썹을 찌푸렸던 박 씨가 머리를 끄덕였다.

    “40원에 팔아주지.” “드라마야.” “‘내 사랑 그대’도 있어?”

    “물론이지.”

    그때 박 씨 앞으로 손님이 다가섰으므로 둘은 말을 그쳤다. 박 씨 앞에는 중국산 운동화가 펼쳐져 있다.

    “이거 얼마요?”

    50대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나이키 운동화를 가리키며 묻는다. 물론 짝퉁이다.

    “150원인데 100원만 내시라요.”

    박 씨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었다.

    “지도자 동지도 이 나이키를 신습니다.”

    “시장을 점점 풀어주고 있어요.”

    정익준이 술잔을 들면서 말을 잇는다.

    “지방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민심이 안정되는 분위기입니다.”

    오후 7시가 지나면서 인사동의 식당 골목은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식당에도 벌써 빈자리가 없다.

    “하지만.” 앞에 앉은 조기성이 정색하고 정익준을 보았다.

    “변수가 아직도 많아요.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정익준은 소주를 한 모금에 삼키고는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는다. 그러나 조기성의 말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익준은 국정원의 국장급 북한팀장이고 조기성은 국정원 부설 북한연구소 소장이다. 조기성이 제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50대 초반의 조기성은 6년 전 북한을 벗어난 탈북자다. 조기성이 말을 잇는다.

    “첫째는 군. 군이 종(縱)으로만 연결되어서 횡(橫)적 관계가 없기 때문에 위험 요소가 없다고들 하는데.”

    쓴웃음을 지은 조기성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어쨌든 인간들의 구성입니다. 기계처럼 구분할 수는 없고 그렇게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까?” 40대 중반의 정익준은 20년간 국정원에 근무하면서 철저하게 자료와 증거에 의거한 결론을 내왔다. 추측은 소설이나 같은 것이다. 정익준의 시선을 받은 조기성이 다시 웃으면서 말을 잇는다.

    “둘째는 김정은의 측근이 변수죠. 김정은의 환심을 사려고 접근해서 제 맨파워를 형성해보려는 무리들.”

    “또 있어요?” “김정은 본인이죠. 슬슬 자신감을 얻게 되면 당과 군, 인민한테 뭔가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르게 될 겁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자신의 위치가 불안정하다고 생각할 때는 더욱.”

    “….”

    “그때 실수하면 치명상을 입는 거죠.”

    “이젠 끝나셨습니까?” 지쳤다는 표정을 지은 정익준이 술잔을 들었을 때 조기성이 정색했다.

    “남조선, 대한민국입니다.”

    “우리가 왜요?” 그러자 조기성이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키고는 말을 잇는다.

    “대책 없는 신호를 보낼 때.”

    눈만 크게 뜬 정익준을 향해 조기성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쪽은 레일이 깔려 있지도 않은데 기관차를 향해 깃발을 흔드는 겁니다. 그럼 거대한 기관차가 달려와 넘어지는 것이죠.”

    “….” “이번 4월 총선의 가장 큰 이슈가 남북관계죠. 지금 북한도 그것을 주시하고 있단 말입니다.”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주석궁에서 점심을 마친 김정은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창밖이 내다보이는 2층 휴게실에는 김정은과 장성택, 최용해까지 셋이 둘러앉았다. 장성택은 이제 지도자 김정은의 후견인이며 당을 맡은 권력자가 되어 있지만 김정은 앞에서는 겸손하다. 김경희와 달리 둘이 있을 때도 철저하게 예의를 지킨다.

    그리고 최용해는 누구인가? 올해로 62세, 김정은과 동시에 인민군 대장이 된 노동당 비서로 당 서열은 18위. 김정일이 생전에 황해도 당비서였던 최용해를 김정은의 측근으로 임용해놓고 사망했으니 그만큼 신임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김정일이 최용해를 친동생처럼 아꼈다는 것을 김정은도 안다.

    그러나 최용해의 행로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기였던 인민무력부장 최현의 아들로 태자당 출신이지만 1998년에는 뇌물수수 혐의로 지방으로 좌천되어 2006년까지 8년 동안 고초를 겪은 적도 있다.

    “이번 4월의 남조선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압승을 거둘 것입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최용해가 김정은에게 말했다.

    “대북압박 정책을 고수해온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가 총선에서 폭발하는 것입니다.”

    최용해의 시선을 받은 김정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김정은은 이제 28세. 젊다. 최용해의 강단 있는 말투가 가슴에 닿는 것이다. 다시 최용해가 말을 잇는다.

    “그렇게 되면 4월 이후부터 북남 간 경제 협력이 극대화될 것이고 12월 대선도 우리 측이 먹습니다.”

    우리 측이란 말이 우스웠는지 장성택이 피식 웃었다. 최용해가 김정은을 똑바로 보았다.

    “지도자 동지, 조금만 기다리시면 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되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남조선만 먹으면 모든 것이 풀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최용해가 동의를 구하듯이 장성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그렇지.” 장성택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순식간에 풀려버리지. 그것을 위해 돌아가신 두 분 위대한 지도자 동지께서 그 기반을 만들어놓으신 것이 아니겠소?”

    “너무 풀어놓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김영철 대장이 묻자 이영호가 입맛부터 다셨다. 정찰총국장 김영철은 강골(强骨)이다. 대남군사작전을 총괄하는 정찰총국은 총참모부에 속해 있지만 지도자의 직접 지휘를 받아왔다. 따라서 김영철은 최고사령관 겸 지도자가 된 김정은의 직속이 된다. 오후 1시 반, 점심을 마친 후에 총참모부 특별식당의 밀실에도 셋이 모여 있다. 또 한 명은 총정치국 제1부국장 김정각 대장이다. 모두 김정은의 측근으로 부상한 인물들이다. 김영철이 다시 말을 잇는다.

    “지도자 동지는 장성택 부위원장 측 말만 듣는 것 같습니다. 군의 입장은 조금도 생각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김 동지, 그럴 리는 없소.”

    정색한 이영호가 김영철을 보았다.

    “군을 가장 신임하고 계시오. 장 동지도 국방위 부위원장이시오. 그럴 리가 없소.”

    “군의 긴장이 풀려 있는 것이 문제라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주의를 환기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김영철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을 때 지금까지 듣기만 하던 김정각이 헛기침을 했다.

    “문제는 불평분자들입니다. 지난번 군 인사부터 요직에서 물러난 불평분자들이 파당을 조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김영철이 말을 받는다.

    “군은 기강이 생명입니다. 요즘처럼 당이 주도해서 암시장을 풀어놓고 범법자를 다스리지 않으면 남조선에 오염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돌아가신 지도자 동지께서 가장 우려하셨던 일을 요즘 무책임한 유화론자들이 지도자 동지 주위에 붙어 잘못된 길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한번 오염되면 정화하는 데 엄청난 시간적, 경제적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김정일 정권 때 겪었던 일이다. 이영호가 둘을 차례로 보았다. 자신까지 포함한 이 셋이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을 보좌할 군(軍) 측 측근이다.

    “알았소. 내가 지도자 동지께 건의할 테니까.”

    말을 멈춘 이영호가 정색했다.

    “당과 행정을 맡은 장성택 동지도 우리와 같은 지도자 동지의 또 다른 기둥이오. 그 기둥이 기울면 우리도 같이 쓰러집니다. 그러니 서로 보좌하고 보완해야 됩니다.”

    “압니다.”

    김정각이 먼저 머리를 끄덕였다.

    “대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나와 이영호와 헤어졌을 때 김영철이 옆에서 걷는 김정각을 향해 투덜거렸다.

    “지도자 동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장 부위원장의 월권을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글쎄, 그거야….”

    “군 일각에서는 장 부위원장이 수렴청정을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김영철이 말을 잇는다.

    “이번 군 인사에서도 장 부위원장 측 장성이 몇 명 요직으로 들어왔어요. 총참모장 동지한테 청을 넣은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말한다.

    “아십니까? 그중에는 돌아가신 지도자 동지께서 내보냈던 놈들도 끼어 있단 말입니다.”

    그 시간에 베이징의 이화원 근처 안가(安家)에서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와 부주석 시진핑이 유훙차이의 보고를 듣고 있다. 유훙차이는 주(駐)조선 중국대사로 평양에서 날아왔다. 주석과 차기 주석 앞에 앉은 유훙차이는 몸을 굳히고 있다. 둘의 점심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들어온 것이다. 유훙차이가 말을 잇는다.

    “모두 지도자를 위해 충성을 바친다고 하지만 충성을 내세우면서 불만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시대에서는 감히 있을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후진타오가 냉정한 표정으로 입술만 조금 움직여서 물었다. 그러면 모두 몸이 굳어졌고 유훙차이도 예외가 아니다. 유훙차이가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군(軍)은 당의 정책이 너무 유화적이며 생색이나 내어 인기만 얻으려고 한다면서 비난하고 당은 군이 김정일 시대보다 더 월권을 한다고 비난합니다.”

    “실제로는 어떤가?” “군 내부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소외된 군 세력과 신진 세력 간의 대립이 수면 밑에서 꿈틀거립니다.” “신진세력은 장성택, 이영호 라인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든 유훙차이가 후진타오를 보았다. 긴장으로 얼굴에 땀이 솟아나 있다.

    “그러나 장성택, 이영호 라인도 합쳐지지 않고 갈라지는 분위기입니다.” “흐음, 거기에다 소외된 군벌까지 세 갈래로 갈라지고 있나?” “예, 그러나 모두 군의 기강이 풀려 있다는 데에는 공감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그것을 알고 있나?”

    “제 정보로는 이영호 측에서 곧 전달할 것 같습니다.” “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 같나? 숙청? 아니면.”

    후진타오가 굳은 얼굴로 옆에 앉은 시진핑을 보았다. 시진핑이 나서기를 기다리는 자세다. 그러나 시진핑은 입을 다문 채 나서지 않았고 후진타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발은 안 돼, 최악수야.”

    그러자 시진핑이 머리를 끄덕인다.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오전 10시.

    청와대 집무실에 앉은 대통령 이명박이 비서실장 하금열에게 묻는다.

    “이번에 한나라에서 몇 명이나 될까?”서류에 시선을 준 채로 툭 던지듯 물었기 때문에 하금열은 잠시 얼떨떨했다. 그러다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거야….”

    후보의 3분의 2를 새 얼굴로 바꿨고 민생에 더 밀착된 서민 정당으로 탈바꿈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했지만 기간이 너무 짧았다. 박근혜는 결사의 각오로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이명박이 혼잣소리처럼 묻는다.

    “100석은 건질 수 있을까?” 하금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거가 20일도 남지 않은 터라 여론조사 결과가 매일 발표되고 있다. 이명박이 방금 말한 100석은 꿈이다. 50석도 어렵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150석 정도. 한나라당은 정치에 환멸을 느낀 젊은 유권자의 타깃이 되어 있다.

    “내가 왜?” 불쑥 머리를 든 이명박이 하금열을 보았다. 책상 옆에 붙어 서 있던 하금열이 놀라 숨을 들이쉬었을 때 이명박이 또 혼잣소리로 묻는다.

    “한나라당의 패배에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하금열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의 속내는 안다. 이명박처럼 열심히 일한 대통령이 없다. 좌우를 함께 포용하려고 온갖 수모도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쪽에서 다 욕을 먹는다. 마침내 하금열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대통령님의 진심과 업적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전주 완산을 국회의원 장세환의 불출마 선언은 유권자에게 매연 속에서 산소 호흡기를 붙여준 느낌을 주었다. 장세환의 인생 역정을 아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 완산을에는 무소속이 여섯, 민주통합당과 한나라당까지 합해 8명이 후보로 나섰다. 무소속 여섯이 모두 야권 인사여서 장세환의 불출마 선언이 무색해졌다. 그러나 그중 유력한 후보는 민주통합당의 이재천 후보였고 한나라당 양순태 후보는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8명 중 7위다.

    “난 얼굴을 내민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니까.”

    한나라당 후보 양순태가 백번집에서 콩나물국밥을 먹고 나서 말했다.

    “다만 몇 백 표를 얻더라도 끝까지 뛸 겁니다.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앞에 앉은 사무장 오정달은 말이 없고 양순태의 말이 이어졌다.

    “허참. 이번 선거에도 북풍을 맞고 있고만요.”

    오정달은 잠자코 깍두기를 씹었다. 맞다. 북한과의 화해, 평화 공존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민주당의 분위기는 여론을 압도하고 있다. 민주당은 총선이 끝나면 법을 고쳐서라도 대폭적인 대북 경협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북풍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때 씹던 것을 삼킨 오정달이 말했다.

    “선거는 변수라는 게 있으니께요. 끝까지 봐야 헙니다.”

    60대 후반의 오정달은 선거의 도사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오정달 본인도 어깨를 늘어뜨렸고 이재천은 아예 외면했다. 장세환이 불출마 이유로 내걸었던 깨끗한 정치는 이미 잊힌 지 오래다.

    3월 27일 화요일 오후 2시.

    평양시 창광거리에 위치한 노동당중앙위원회 청사 안의 식당에 장성택과 이영호, 그리고 최용해와 인민무력부장 김영춘까지 넷이 둘러앉아 있다. 오늘은 이영호가 그 세 명을 초대한 것인데 지난 2월에는 장성택의 초대로 이렇게 넷이 저녁을 먹었었다. 김정일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던 일이다. 실력자들이 이렇게 모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수저를 내려놓은 이영호가 머리를 들고 장성택을 보았다.

    “부위원장 동지, 강계 장마당에서 인민들이 보위부원을 패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장성택은 시선만 주었다. 놀란 것 같았지만 표정은 변화가 없다. 그때 이영호가 말을 이었다.

    “단속을 하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보위부원 둘이 중상을 입었고 나중에 인민들을 해산시켰지만 보위부대가 출동해야만 되었습니다.”

    “….”

    “기강이 문란해졌습니다.”

    “하지만.”

    하면서 나선 것은 최용해다. 최용해가 이영호를 똑바로 보았다.

    “그렇다고 갑자기 누르면 안 됩니다. 역효과가 납니다.”

    이영호는 외면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최용해보다 여덟 살 연상인데다 군의 실력자라는 자부심이 몸에 밴 이영호다. 최용해가 죽은 지도자 동지의 신임을 받았지만 지금은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그때 장성택이 입을 열었다.

    “원인은 갑자기 장마당을 풀어놓았기 때문일까요?” “군의 기강이 풀려 있다는 것을 인민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쓴웃음을 지은 이영호가 말을 잇는다.

    “그렇게 대내외에 알려졌으니까요. 군을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도, 군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도, 그리고 당분간은 장마당을 풀어놓는다는 것까지 말입니다.”

    식탁 주위에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덮였다. 그때 무력부장 김영춘이 입을 열었다.

    “나는 군의 기강을 확립하자는 의견에 공감하오. 지도자 동지께 그렇게 보고해도 좋습니다.”

    김영춘으로서는 당연한 말이다. 군은 정치적으로 흔들리면 안 되는 것이다.

    김정일 사후 만 4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이다. 북한은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김정은을 정점으로 집단지도체제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핵심은 있어야 돌아가는 법이다. 집단으로 나서면 아무것도 안된다. 난장판이 되는 것이다. 그 핵이 장성택과 이영호다. 당과 군을 책임진 둘이 김정은 앞에 나타났을 때는 그로부터 두 시간쯤 후인 오후 4시경이다. 이곳은 주석궁의 김정은 집무소. 새롭게 보강된 제1호위대가 철통처럼 김정은을 호위하고 있다.

    “지도자 동지, 사회 전반에 기강이 풀려 있습니다.”

    장성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련한 장성택은 표적을 넓게 잡았다. 김정은의 시선을 받은 장성택이 말을 잇는다.

    “장마당에서 보위부원이 인민들한테 맞아 중상을 입고 불평분자들이 소문을 퍼뜨려 사회를 혼란시킵니다. 적절한 조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때 이영호가 헛기침을 했다.

    “군의 불평분자를 색출해 숙청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전군에 비상을 걸어야 합니다.”

    “장마당은 당분간 놔둬야 합니다.”

    장성택이 나서더니 김정은을 향해 말을 잇는다.

    “명절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도자 동지.” 김정은의 시선을 받은 장성택의 얼굴에 웃음기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장마당은 명절 끝나고 단속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파에 깊숙이 등을 묻고 앉은 김정은이 앞에 나란히 앉은 두 후견인을 보았다.

    그때 김정은의 머릿속에서 아버지 앞에 서 있던 둘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해인 것 같다. 먼저 장성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만수대 예술극장 귀빈실에 이렇게 앉아 있었고 장성택은 앞에 서 있었다. 장성택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는데 감히 아버지의 시선을 받지 못한다. 그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만 할 뿐이다.

    생각에서 깨어난 김정은이 장성택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제 장성택은 빙그레 웃는다. 그러고는 시선도 떼지 않는다. 김정은이 머리를 돌려 이영호를 보았다.

    “알아들었나?” 하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이번에는 지난해, 966부대를 시찰 갔을 때 아버지가 이영호에게 지시할 때가 떠오른다.

    부동자세로 선 이영호가 기를 쓰고 대답했다. 턱을 들고 이를 악물었다.

    “예, 지도자 동지.”

    “그럼 시행하라우.”

    “예, 지도자 동지.”

    추운 날씨였는데도 이영호의 볼은 땀에 덮여 번들거리고 있다.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이영호의 몸을 떠올렸던 김정은이 앞에 앉은 이영호를 보았다. 시선을 받은 이영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호의를 보내는 것이겠지만 문득 강아지를 다룰 때도 저러지 않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심호흡을 한 김정은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기강을 세워야 합니다.”

    “누구세요?”

    현관에서 묻는 양옥희의 목소리가 떨렸으므로 이철진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후 5시 반, 중학교에 다니는 딸 현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집 안에는 둘뿐이다.

    “중좌 동지 계십니까?” 이제는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이철진이 현관으로 다가서자 양옥희가 돌아보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데다 입술이 떨리고 있다. 어금니를 문 이철진이 배에 힘을 주고는 소리치듯 묻는다.

    “나 여기 있어, 누구야?” 이제 각오는 했다. 올 테면 오라.

    한 시간 30분 후인 오후 7시, 이철진은 주석궁 지하 3층에 위치한 지도자 휴게실로 들어섰다. 이곳은 이철진에게 익숙한 곳이다. 돌아가신 지도자 동지를 모시고 여러 번 와보았다. 코끝이 매워진 이철진이 머리를 들고 소파에 앉은 김정은을 보았다. 넓은 방 안에는 둘뿐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김정은이 웃었다. 천진한 웃음이다.

    “그 권총에 실탄 들었어?” 김정은이 이철진의 허리에 찬 권총을 눈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아닙니다. 비었습니다.”

    탄창은 주석궁 입구에서 다 빼놓았다. 이젠 제2호위대 소속이 아닌 것이다. 그러자 김정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제2군단으로 전출되었다고?” “예, 지도자 동지.”

    “내가 총참모장한테 지시했어. 지금부터 내 측근 호위야.”

    “예, 지도자 동지.”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지만 이철진은 닦지 못한다. 그때 김정은이 손을 내밀었다.

    “그 권총 이리줘봐.”

    “예, 지도자 동지.”

    다가선 이철진이 권총을 빼내 김정은에게 내밀었다. 김정은이 68식 권총을 쥐고 흔들어본다. 지난해 여름 주석궁 지하 사격장에서 김정은은 이철진이 차고 있던 권총을 빌려 사격 연습을 했던 것이다. 사격 성적은 좋았다. 이 권총으로 15m 거리에서 지름 20㎝ 타깃에 20발 중 16발을 맞혔다. 그때부터 김정은은 이철진을 보면 알은체를 했다. 앞쪽 화병을 권총으로 겨누면서 김정은이 말했다.

    “내 측근 호위로 몇 사람이 더 필요해. 동무가 추천해봐.”

    김정은은 심복을 자신의 손으로 고르겠다는 것이다.

    2012년 3월 28일 수요일, 오전 10시.

    국방장관 김관진이 대통령 이명박에게 보고한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안이다.

    “오늘 오전 9시를 기해 북한은 전군에 비상대기 명령을 내렸습니다.”

    긴장한 이명박이 시선만 주었고 김관진은 말을 잇는다.

    “전군 외출 외박 금지. 출동 대기 상태가 되었지만 특이 동향은 없습니다.”

    그때 이명박이 가볍게 기침소리를 냈다. 김관진이 급하게 들어오긴 했지만 원탁에는 하금열 비서실장과 외교통상장관 김성환, 그리고 국정원장 원세훈과 외교안보수석 천영우까지 둘러앉았다. 이명박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그 특이 동향이라는 게 어떻게 구분되는 겁니까?” “예, 정상적인 행동에서 벗어난다는 표현입니다만 특별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숨 쉴 여유도 주지 않고 이명박이 물었지만 김관진도 바로 대답한다.

    “김정은이 지도자가 된 후로 북한 내부 기강이 해이해진 징후가 보입니다. 그래서 군부터 기강을 잡는 것 같습니다.”

    “기강을 잡으려고 비상대기시켰단 말이죠?” “예, 그런 경우가 여러 번 있습니다.”

    그때 원세훈이 나섰다.

    “북한이 곧 장마당도 엄격히 단속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도 일신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건 모두 누가 하는 겁니까?” 이명박이 묻자 아무도 얼른 나서지 않았다. 김정은을 전면에 내세운 채 장성택도, 이영호도 모두 드러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혼자서 이 일을 한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 시간에 주조선 중국대사 유훙차이는 대사관의 접견실에서 정찰총국장 김영철과 독대하고 있다. 둘은 구면인 터라 격식에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훙차이다.

    “군의 비상대기 선포로 남조선이 긴장하고 있을 겁니다. 선거도 며칠 안 남았으니까 충격을 주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통역을 통해 말하자 김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부탁하실 것까지야.”

    하고는 얼른 통역한테 말을 잇는다.

    “이건 통역하지 마시오.”

    했지만 중국인 통역은 그 말까지 다 한 것 같았으므로 김영철은 입맛을 다셨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고 하시오. 그리고.”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김영철이 말을 잇는다.

    “이왕 만났으니 말씀인데 유 대사께서 우리 인민군 장성들을 자주 만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놈들 대부분이 불평분자라는 것도 압니다.”

    말을 그친 김영철이 통역의 말을 듣는 유훙차이의 얼굴을 주시했다. 유훙차이는 정색한 채 표정이 변하지 않는다. 다시 김영철이 말을 이었다.

    “그놈들을 불러 뭐하시는 겁니까? 불평분자들을 모아 반란이라도 일으키실 작정입니까?” 통역의 말이 끝나자 유훙차이가 머리를 돌려 김영철의 입을 바라보았다. 더 나올 말이 있느냐는 시늉 같았으므로 김영철이 입맛을 다셨다.

    “말 다했소.”

    그 말을 들은 유훙차이가 입을 열었다.

    “다 김정은 정권을 위한 일입니다. 소외된 장군들을 위로하고 다시 충성을 바칠 기회를 만들어주려는 것이오. 배신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북한 정권은 우리한테 고맙다고 해야 됩니다.” “단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어요.”

    “위험합니다.”

    머리까지 내저은 유훙차이가 말을 잇는다.

    “김정일 지도자도 군을 그런 식으로 숙청하지 못했어요, 장군.” 눈을 치켜뜬 유훙차이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우리는 당신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이 중조 동맹을 맺은 후로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장군.”

    통역이 한 마디씩 힘주어 말하자 김영철은 소리 죽여 숨을 뱉는다.

    3월 31일 토요일, 오후 7시 30분.

    아침에 김경희가 같이 저녁을 먹자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에 김정은은 다른 약속은 취소했다. 김경희는 혈연인 것이다. 오늘은 모란봉 초대소에서 둘이 저녁상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서둘지 마.”

    불쑥 말한 김경희가 그늘진 표정으로 김정은을 보았다.

    “시간이 다 해결해줄 테니까.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잠자코 쇠고깃국을 떠먹던 김정은이 머리를 들었다. 방 안은 조용하다. TV는 켜놓았지만 음소거를 해서 그림만 움직이고 있다.

    “상의할 사람이 없어요.”

    김정은이 낮게 말했지만 김경희는 들었다. 눈을 크게 뜬 김경희가 물었다.

    “왜? 나도 있고 장 부위원장, 최 비서, 이 참모장이 있잖아? 김 총국장, 김정각 부국장도 있고.”

    숨을 고른 김경희가 말을 잇는다.

    “네가, 아니, 지도자 동지가 부르면 자다가도 달려올 사람들 아냐? 그런데 상의할 사람이 없다니.”

    “고모 난 어린애가 아닙니다.”

    정색한 김정은의 말에 김경희가 긴장했다. 서너 술 떠먹던 밥그릇 옆에 수저를 놓고 김경희가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도자 동지를 누가 어린애 취급을 해? 어떤 놈이 감히.” “보면 알아요. 허리를 깊게 꺾어서 절을 한다고 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심호흡을 한 김정은이 말을 잇는다.

    “가만 보면 내가 결정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다 만들어놓고 나한테 승인을 받는 시늉만 하는 거죠.”

    “….” “나한테 뭘 물어보지 않아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말입니다.” “지도자 동지.” 김경희가 입을 열었지만 김정은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때마다 난 아버지 앞에 서 있던 그들을 떠올려요. 그러면 엄청난 차이가 느껴져요. 그들은 날 허수아비로 보고 있어요.” “아냐, 지도자 동지.”

    “이대로 가면 난 그들의 꼭두각시가 돼요.” “지도자 동지.”

    김경희가 다급하게 불렀을 때 김정은도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지그시 김경희를 보았다.

    “고모, 이 이야기를 장 부위원장한테 하실 건가요?” “아니, 안 해. 절대로.” 손까지 저은 김경희가 정색하고 김정은을 보았다.

    “장성택은 남이야. 우리 핏줄이 아니라고.”

    “그래도 믿고 의지할 사람은 고모하고 장 부위원장뿐입니다.”

    “그래도 속은 보이지 말아야 돼.”

    목소리를 낮춘 김경희가 말을 잇는다.

    “이런 말은 그 사람한테 안 하는 게 좋아.”

    “알고 있어요, 고모.”

    “참고 기다려.”

    다시 말한 김경희가 길게 숨을 뱉는다.

    “인내해야 돼. 오빠도 오래 기다렸어. 오래 참고 기다렸다고. 그건 내가 알아.”

    김정은은 시선을 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의 초점이 흐려져 있는 것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김경희가 다시 말을 잇는다.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푹 쉬어라.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보통 집안 고모처럼 말하고 있다.

    4월 1일 일요일, 오전 10시.

    “동무는 집에 안 가나?” TV를 보던 김정은이 불쑥 물었으므로 뒤쪽에 서 있던 이철진이 주춤 놀랐다.

    “예, 지도자 동지. 전 괜찮습니다.”

    “쉬고 오라우. 난 여기서 TV나 볼 테니깐. 경호 필요 없다.”

    그러더니 쓴웃음을 짓고 덧붙였다.

    “남조선 애들이 습격해올 것도 아니고 말야.” “아닙니다, 지도자 동지.” 여전히 정색한 이철진이 겨우 말을 잇는다.

    “저는 없는 놈으로 취급하십시오, 지도자 동지.” “요즘 자주 어머니 생각이 나.” 김정은이 표정 없는 얼굴로 이철진을 보았다. 숨을 삼킨 이철진이 김정은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으므로 이철진은 이를 악물었다. 김정은은 올해 28세, 위대한 지도자이시지만 어리다. 지난해 말 의지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므로 혼자가 되었다. 어머니 고영희는 김정은이 20세 때인 2004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때 김정은이 다시 입술만 움직여 말을 잇는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 뒤를 잇기를 바랐겠지만 이렇게….” 말을 그친 김정은이 고인 침을 삼키더니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렇게 혼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이철진은 겨우 콧숨을 뱉고 나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도자는 외로운 것이다. 그러나 경호원인 주제에 어쩔 수가 없다. 대신 죽으라면 당장에라도 뛰어들겠지만.

    “한 번만 봐주오.”

    박 씨가 보위대원의 소맷자락을 잡고 사정했다.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것 다 가져가면 난 굶어죽소. 이번 한 번만 봐주오.”

    “이것 놓으라니깐!” 버럭 소리친 보위대원이 소매를 뿌리쳤지만 다시 잡혔다. 장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달리는 장사꾼과 뒤를 쫓는 보위대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상품이 널려 있는 터라 장마당 안에서만 빙빙 돈다. 몸만 빼내 달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고 외치지만 장마당을 벗어나지 못한 채 법석을 떠는 것이다.

    “아이구우, 나 좀 살려주소.”

    이제 보위대원 둘이 제각기 보따리를 들고 일어섰으므로 박 씨가 울부짖었다. 이곳은 창고 맨 바깥쪽이어서 앞은 트였다. 오늘 장마당에 늦게 와 맨 끝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보위대원 수백 명이 들이닥쳤을 때 재빨리 보따리를 싸들고 일어섰지만 마악 빠져나가려는 순간에 이 두 놈한테 걸렸다.

    “아이구, 제발, 제발.”

    하면서 박 씨가 보위대원 한 명의 다리를 부둥켜안았지만 다른 발길에 차였다.

    “커억!”

    가슴을 차인 박 씨가 입을 쩍 벌린 순간이었다. 옆에 선 보위대원이 털썩 보따리를 어깨에서 떨어뜨리더니 무릎을 꿇고 엎어졌다. 그때 박 씨는 눈앞에 나타난 김 씨를 보았다. 김 씨는 손에 칼을 쥐었다. 군용 대검이다.

    “억!”

    이번에는 박 씨에게 다리를 잡혔던 보위대원이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박 씨는 김 씨의 칼이 보위대원의 가슴에 깊게 박히는 것을 보았다.

    “자, 빨리 그 보따리 들어!”

    보위대원 가슴에서 칼을 빼낸 김 씨가 소리쳤다. 김 씨가 떨어진 보따리를 집으면서 다시 소리쳤다.

    “그 보따리 들고 날 따라와!”

    함경남도 함흥의 제17호 별장 관리 책임자로 전출 명령을 받았던 최명호 중좌는 다시 원대복귀함과 동시에 지도자 수행 경호대가 되었다. 이철진이 김정은에게 추천한 것이다. 또한 김정일의 수행 경호원 중 다른 곳으로 전출 명령을 받았던 소좌 윤일호, 박기철, 조태경도 수행 경호대에 합류했다. 총참모장 이영호와 국방위 부위원장 장성택이 고심 끝에 김정은의 새 경호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최측근의 수행 경호대는 김정은이 직접 선발한 셈이다. 이것은 김정은이 지도자가 되고나서 직접 시행한 첫 군(軍) 관계 인사가 되겠다.

    “동무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주석궁의 수행 경호대 대기실은 주석 집무실 바로 건너편이다. 지도자 김정은이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는 사이에 이철진이 핵심 수행 경호원들을 모아놓고 말을 잇는다.

    “지도자 동지께서 의지하고 계신 것은 영광스럽게도 우리 다섯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 그 은혜에 보답해야 될 것이다.”

    모두의 얼굴이 비장감으로 굳어졌다. 모두 지옥으로 떨어지다가 건져 올려진 상황인 것이다. 이철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