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감성은 소중하다

  • 박술녀│ 한복예술가

    입력2012-01-19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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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감성은 소중하다
    광음여전(光陰如箭)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리자 선생의 문하생으로 지내던 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한복 짓는 일을 한 지도 어언 28년째로 접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한복에 매달려온 셈이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느냐고 묻는 이가 왕왕 있다. 그럴 때마다 선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그냥 웃는다. 돌아보면 그것은 운명이 아니었나 싶다.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나는 한복을 유별나게 좋아했다. 한복을 즐겨입으신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내가 어릴 적에도 한복을 입는 이가 많지는 않았다. 한복은 부잣집 마나님들이나 입는 외출용 의상이었다. 우리 집 형편은 입에 풀칠하기 힘들 정도로 궁핍했지만 어머니는 한복을 자주 입고 다니셨다. 비록 화려한 비단 한복은 아니었어도 빳빳하게 풀을 먹인 모시 저고리와 치마가 내 눈에는 선녀 옷보다 더 우아하고 멋져 보였다.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면 한참을 한복집 앞에 서서 발을 떼지 못했다. 비단의 은은한 광택과 고운 결, 한 땀 한 땀 공들여 지은 한복의 고운 맵시를 넋을 놓고 구경했더랬다. 어머니가 한복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날에는 한복이 너무나 예뻐서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만지작거리고 간혹 몰래 입어보기도 했다. 막연하게나마 한복을 입기 편하게 고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릴 때는 그보다 더 간절한 것이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다들 먹고 살기가 팍팍했던 시절이니 여느 가정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는데 눈앞에 놓인 가난한 현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렇다고 부모를 원망하거나 투정을 부린 적은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7남매를 먹여 살릴 걱정에 한시도 편히 쉬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예순두 살에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바닥으로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만드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작은언니와 함께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거들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새끼를 제법 길게 꼬면 모양이 엉성해도 어김없이 솜씨가 좋다고 칭찬해주셨다.



    송충이와 개구리를 잡으러 다닌 일도 유년기의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벌레나 세균을 죽이는 약이 귀해 송충이를 사람 손으로 잡았다. 요즘 농가에서 유기농 채소의 상품 가치를 높이려고 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송충이를 잡아다가 관공서 같은 곳에 갖다주면 수를 세어 잡은 만큼 돈을 줬다. 우리 남매들은 여름이면 송충이를 잡아 돈을 벌고 한겨울에는 꽁꽁 숨어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를 잡아다가 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번 돈은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어머니에게 몽땅 갖다드렸다.

    어머니가 그때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이 말만은 잊을 수가 없다.

    “개구리를 잡더라도 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기술을 익혀야 잘살 수 있다.”

    “우리 옷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한복은 우리나라가 건재한 동안에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을 게다. 하지만 난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흘려들은 적이 없다. 어머니의 그런 귀한 가르침과 올곧은 품성은 이후 내 인생에 나침반이 됐다.

    어머니는 한도 많고 상처도 많은 분이었지만 늘 밝고 긍정적이셨다. 남매 중에 유독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내가 외모 콤플렉스를 떨쳐낼 수 있었던 것도, 남보다 늦은 나이에 한복 짓는 일을 배우기 시작해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긍정의 힘 덕분이리라.

    한복을 어떻게 만들지 늘 고심하면서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온 지난 세월은 내게 훈장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콤플렉스를 극복하면 경쟁력이 되고, 오늘의 내 행동이 먼 훗날 결과물로 나타난다는 삶의 진리를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한복에 모든 열정을 쏟은 덕에 한복을 잘 짓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두 아이의 엄마나 아내, 딸로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해 10월 20일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가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노환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시느라 거동이 불편했다. 그런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가슴에 사무친다. 어머니가 사경을 헤맬 때도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지 못했다. 마음은 어머니에게 가 있었지만 일에 쫓겨 몸은 함께 가지 못했다. 그때의 갑갑한 심경은 휴대전화 메시지 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 어머니가 너무 위독하시다. 어찌하면 좋을까.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는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다만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야속함뿐이다. 눈물을 참을 수 없으면서도 돌잔치며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 현실이 아아, 슬프도다. 귀하고 소중한 내 어머니, 한번 가시면 다시 못 올 길을 떠나시려 한다. 이럴 때는 평범한 일상이 그립다. 가슴으로 뜨거운 눈물만 흐른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보내면서도 나는 조문객을 맞느라 목 놓아 울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일에 쫓겨 눈물을 보일 겨를이 없었다. 가슴이 미어지는데도 먹먹한 마음을 다잡고 언제 어디서든 씩씩한 척, 담담한 척했다. 그토록 참았던 울음이 49재를 치르면서 터져 나왔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 한없이 커 보였던 어머니도 한 사람의 여자였다는 것을. 7남매를 키우느라 그 많은 한과 상처를 꾹꾹 누르며 사신 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이 참으로 고귀하다는 것을. 어머니가 몹시 그립다. 내가 지은 한복을 입고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좋아하시던 어머니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복 짓는 장인의 그것과 많이도 닮았다. 한복은 재봉틀로 박아 대량생산하는 기성복과 차원이 다르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야 비로소 완성되는 진정한 명품 의상이다.

    한복에 ‘짓는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완성하기까지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기 때문일 게다. 짓는다는 말은 아무 때나 쓰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정성 들여 만들어야 하는 밥이나 집에 쓴다. 어쩌면 내가 28년 동안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도 한복이 지닌 느림의 미학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감성은 소중하다
    박술녀

    1957년 충남 서천 출생

    1982년부터 이리자 선생 밑에서 한복 짓는 기술을 배움

    1986년 독립해 가게를 열고 한복예술가로 본격 활동

    2000년부터 매년 ‘사랑 나눔’등을 주제로 한복 패션쇼 개최

    예지원 공로상, 동아TV 선정 한복문화예술 공로상 등 수상


    그러나 한복도, 부모에 대한 존경심도 구시대의 촌스러운 유물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민족의 명절이나 경조사에 한복을 차려입던 풍습마저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받드는 일은 인간의 도리인데도 인륜이나 천륜을 저버린,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리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고 세상이 점점 각박해진다고 해도 우리가 지켜내야 할 소중한 전통과 가치까지 저버려선 안 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감성은 소중하다. 디지털 기기는 삶을 풍요롭게 할진 몰라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 건강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임진년 새해에는 가까이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지 미처 깨닫지 못한 내 가족과 이웃, 친구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인생의 마지막 날, 살아온 세월을 돌아봤을 때 미련이나 후회가 남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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