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꿈꾸는 절간 운주사 가는 길

전라도 화순

  •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입력2012-02-21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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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중략)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무진기행’(김승옥 작)의 ‘무진’, ‘삼포 가는 길’(황석영 작)의 ‘삼포’ 등 작가들은 가상의 지명들마저 잘도 지어낸다. 둘레의 풍경까지 그럴싸하게 그려놓아 남녘 길을 걷다보면 금세라도 무진이며 삼포에 닿을 것만 같다. 사평역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가상의 땅에 있는 가상의 역이지만 사평역은 강원도 산골에서, 충청도 강기슭에서 쉬 마주할 수 있을 듯한 살갑고 고단한 정취를 풍긴다.

    창밖으로 눈송이가 분분히 떨어지는 겨울밤, 톱밥난로 하나가 간신히 냉기를 지우고 있는 대합실 나무의자에는 막차를 기다리는, 가난한 손님들이 졸며, 기침을 하며 앉아 있다. 이들 모두는 벌써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시에서 그려지는 사평역은 우리 삶의 바다에 떠 있는 부표 같은 존재론적 공간인데 지금도 내 이웃은 물론 나 스스로 어느 한때 이곳에서 탄식하고 한숨 쉬며 남몰래 눈물을 흘린 기억들을 더듬어 새겨주는 회억의 공간으로 환치돼 있다.

    시를 거느린 간이역

    이 시가 담고 있는 내면의 이야기를 구체적인 이야기로 바꾸어 보여주는 것이 임철우의 단편소설 ‘사평역’이다. 소설에 이르면, 비로소 난로에 톱밥을 넣는 이는 늙은 역장이며 기침을 하는 이는 아들의 부축을 받아 대처의 병원으로 가고자 하는 농사꾼이다. 대합실의 모두가 각각의 성명과 과거를 지닌 개인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밖에도 대합실에는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사내가 있는가 하면 운동권 학생도 있다. 이들 개인이 가진 스산한 삶의 양상들은 대합실 한 공간에 밀집되었다가 바깥으로 분리 확산된다. 시와 소설의 언어가 여하히 다른지를 알아보고자 할 때 이 두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만큼 유익하고 재미있는 경우는 드물다.

    허구의 리얼리티에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현실의 사평역을 찾아 길을 떠난다. 전라도 나주의 남평역이 그곳이다. 광주에서 세 정거장, 통일호 열차로 40분 남짓 걸리는 그곳의 역은 파란 함석지붕에 성냥갑 같은 모양을 한 전형적인 간이역이다. 봄날 하오, 인적 드문 역의 뜰에는 환한 햇살만 가득하다.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굳이 이 먼 데를 찾아와서 목조 역 건물 곁으로 소나무들이 한가롭게 서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추억을 만들고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남평역 자체가 문화의 한 명소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필자 또한 화순 운주사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역인데 내친김에 ‘드들강’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며 강바람을 쐬고 싶다.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물줄기를, 이곳 사람들은 드들강이라고 부르는데 역에서 차로 10여 분이면 닿을 수 있다. 소박한 풍경이 정겹고 강가 음식점의 물고기 맛이 유혹적이지만 갈 길이 멀어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절, 운주사

    남평에서 도곡온천을 거쳐 운주사로 가는 길은 고요하고 아늑하다. 둔덕과 같은 산들을 쉼 없이 타넘고 들판의 힘줄 같은 물길을 건너는 동안에는 이 평화로운 땅 어디에 그런 기이한 절간이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동안 문화 인사들이 하도 많이 심각하게 소문을 낸 덕에 근래는 이 작고 보잘 것없는(?) 절간도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 지나치다 할 수는 없지만 의미 부여가 지극히 잘된 터라 유명 인사들이 써놓은 글들을 읽고 이 절을 찾아오는 이들은 사문(寺門)만 들어서도 금방 개벽의 땅 한 모서리가 열리는 양 경이로운 기대를 갖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그럴 턱이 없다. 이 땅의 오래된 절간치고 영묘(靈妙)의 이야기 하나 지니지 아니한 절간이 없듯, 운주사는 그냥 더 많은 이야기와 흔적을 지닌 절이라 여기면 되겠다.

    10여 년 전, 학생들을 데리고 처음 운주사를 찾았던 나는 실망의 빛이 역력한 채로 돌아 나오는 녀석들에게 한 소리 했다. “내가 책의 글을 새겨 읽으라고 했지 언제 표현 그대로 믿으라고 했더냐.” 마찬가지다. 소문난 이백의 시 한 구절 읽고 중국 여산을 찾아가보라. 쯧쯧. 무릇 역사가 그렇듯이 자연도 개인의 새김이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개인에게 귀결되는 문제다.

    비구름 끼인 날

    운주사, 한 채 돛배가

    뿌연 연초록 화순으로 들어오네

    가랑이를 쩌억 벌리고 있는 포구

    천불천탑이 천만개의 돌등을 들고 나와 맞는다

    해도, 그게 다 마음 덩어리 아니겠어?

    마음은 돌 속에다가도 정을 들게 하듯이

    구름돛 활짝 펴고 온 우주를 다 돌아다녀도

    정들 곳 다만 사람 마음이어서

    닻이 내려오는 이 진창

    비구름 잔뜩 끼인 날

    산들은 아주 먼 섬들이었네

    - 황지우 시 ‘구름바다 위 운주사’

    맞는 말이다. 사람이 다듬은 돌이라 해도 돌로 보면 돌이고 마음이라 하면 마음이다. 산속 절간 하나를 두고 웬 돛배냐고? 우리나라 풍수지리에 대해 관여 않은 바가 없으신 도선선사가 그랬단다. 우리나라 전체 지형이 떠가는 배(行舟)의 형상인데 태백산, 금강산은 그 뱃머리이고 월출산과 한라산은 배꼬리란다. 영남 지리산은 삿대이고 이곳 운주는 뱃구레(船腹)라고 했던가. 배가 물에 뜨려면 마땅히 뱃구레를 눌러주어야 한다. 그래서 스님께서 도력을 발동해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천의 불상과 천 개 탑을 만드셨단다. 천불로 사공을 삼고 천 탑으로 노를 저어 항해를 잘해 보자는 뜻이었지. 그러니까 천불천탑은 풍수에서 말하는 약한 데를 보완하고 드센 데를 누른다는 보비(補備) 지리의 구체적인 물상인 셈. 도선 스님이 참 대단하다고? 아니, 시인이 대단해. 스님은 탑이며 불상밖에 못 만들었는데 시인은 내륙의 화순 땅을 가랑이 쩍 벌린 포구로 만들고 산들을 죄다 섬으로 바꾸고 운주사 절간은 돛단배로 고쳐 우주 항해를 하게 하지 않는가. 그러곤 결국 정들 곳은 사람 마음뿐이라 하지 않는다.

    산길을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들면 벌써 탑들이 줄을 서서 찾아오는 객들을 반긴다. 문외한이 봐도 골짜기며 둘레 산들의 형세는 특이할 것이 없다. 우리네 산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골인데 탑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다보탑 석가탑처럼 잘생긴 것들도 아니다. 거친 돌들을 함부로 다듬어 층수를 맞춰놓은 듯싶기도 하다. 암벽에 새겨 만들고 틈에 세워 만든 불상들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못난 탑들과 못생긴 불상들이 길가에 도열해 있으니 뜻하지 아니한 나그네는 찾아올 데를 잘못 알고 왔나 싶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한다. 실은 운주사 골짝 길을 걷는 재미가 이런 데 있다.

    그 사이 초입은 물론 절간까지 가는 길 주위가 잘 정비되었다. 주변 밭뙈기들은 모두 잔디밭으로 바뀌었고 새로 심고 키운 나무도 많다. 대웅전, 지장전도 번듯하니 모양새를 달리했다. 하나 주위가 달라졌다고 탑과 불상마저 달라질 턱은 없다. 예전, 호박넝쿨 뻗어가는 논두렁에 탑이 서 있던 때가 차라리 더 운치가 있었다면 너무 복고풍의 말이 되려나.

    둘러보면, 이곳 골짜기의 암석들은 미끈하고 단단한 바위와는 거리가 멀다. 속리산의 그 잘생긴 바위들하고는 유가 다르다. 색깔도 그렇거니와 손을 대면 표면이 쉬 일어나고 바스러지기도 하는 허술한 암석들인 탓이다. 그런데 그 옛날 사람들은 무슨 까닭에 이 골에 들어와 몹쓸 암석들로 그 많은 불상과 불탑을 만든 것일까. 모를 일이다. 만든 이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는데 탑과 불상들은 풍화의 세월 한가운데서 천연덕스럽게 제 몸을 맡겨놓고도 무심하다. 못난 돌로 빚었으니 탑불 또한 절로 못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 탑불은 하도 태연하고 무연해 차마 조악, 투박, 치졸이란 말조차 갖다 붙이기가 어렵다. 말하는 이가 되레 낯짝이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동동구루무(크림)’ 장수가 동동동 북을 치며 동네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때에도 무연히 콩밭을 매고 오줌통을 이고 나르던 우리네 큰누나, 어머니의 모습이 이렇지나 않았는지.

    절 마당을 지나 왼편 산등성이에 오르면 거대한 불상 한 쌍이 누워 있다. 반듯이 누워 천공을 쳐다보고 있는 불상의 모습은 기이하면서도 경이롭다. 체장이 12m라던가. 일반적으로 와불(臥佛)은 석가모니의 열반 모습을 재현하고 있게 마련이다. 둔황석굴에서도 봤지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인데 이곳 와불은 전혀 그런 자세가 아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이 한 쌍의 와불은 미완성의 불상이다. 고려 때라고 했던가. 고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백제 유민들이 선지자(?)의 예언을 들었다.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이곳 운주골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미륵세상이 온다 하여, 그들은 밤새워 탑을 일으키고 불상을 세워나갔다. 그런데 한밤중 느닷없이 수탉 한 마리가 울었고 이 울음소리에 부근 닭들도 잠을 깨어 합창을 해버렸다. 날이 샜으니 만사는 도루묵. 사람들은 일할 기력을 잃고 정과 망치를 놓아버렸다. 그때 미처 완성하지 못한 두 구의 불상이 이 와불이라는 것이다. 이 전설은, 와불이 스스로 일어나 우뚝 서는 날, 새 세상이 열린다는 또 다른 예언으로 끝을 맺는다.

    근래에는 운주사가 가지는 이러한 수수께끼와 전설의 특이성을 두고 소외된 호남인들의 저항의식과 연결해 변혁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담은 상징체계로 파악하는 연구도 생겨났으며 이곳을 미륵사상을 믿는 천민들이 공동체사회를 열었던 곳으로 해석하는 작품과 주장도 없지 않다. 다음의 시도 민중의 그러한 염원을 형상화한 것 중의 하나다.

    망치와 정, 쇠좆메를 들고 쫓겨온 사람들

    아 通姓도 없이 通姓도 없이

    李서방이나 金서방 한물댁이나 여산댁들

    한밤내 모닥불 지피고 내게 이르는 말

    오금 펴 앉도 못하고 서도 못하는 세월

    明火賊떼나 되라 하네 활빈당이나 되라 하네

    저 들머리 나자빠진 시무룩한 돌미륵들

    너는 떨거지떼 말고 구름에 가 살지도 말라 하네

    이 세상 끝을 지켜선 산꼭대기 와불을 세우라 하네

    - 송수권 시 ‘운주사 운(韻)’ 부분

    그러나 동심으로 세상을 보는 시인은 산등성이의 이 와불한테서도 지극한 모성만 느낄 뿐 다른 뭐가 없다.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

    겨드랑이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 정채봉 시 ‘엄마’ 전문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 동 대학 교육대학원 석사

    197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현 고려대문인회 회장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그물의 눈’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화담명월’등


    천불천탑이라고 말하지만, 지금 운주사 역내에 남아 있는 것은 석탑이 20기, 석불이 90구 정도다. 1980년대까지도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한 탓이다.

    인근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칠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와불 부근에는 운주사의 또 하나 수수께끼로 일컫는 칠성석이 있다.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한 것인데 모양이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이 칠성석으로 인해 운주사가 일반의 불교사찰이 아닌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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