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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된 中 ‘이어도 도발’ 힘받는 제주해군기지 건설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계획된 中 ‘이어도 도발’ 힘받는 제주해군기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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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된 中 ‘이어도 도발’ 힘받는 제주해군기지 건설

필리핀 팔라완 서쪽 해상에서 대치한 필리핀 라자 후마본호와 중국 경비함 하이쉰 31호(아래).

영해에 대한 국제적인 혼란이 계속되자 유엔은 7년간 준비를 거쳐 195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차 유엔해양법회의를 개최했다. 제1차 회의에서 ‘어업 및 공해의 생물자원 보존에 관한 협약’ ‘대륙붕에 관한 협약’ ‘영해 및 접속수역에 관한 협약’ ‘공해에 관한 협약’을 채택해 성문화했다. 그러나 영해 및 어업수역 경계획정(outer limit) 및 200해리를 초과한 대륙붕 외측 한계 설정에 실패했고, 협약에 서명한 국가들이 비준 동의를 하지 않는 등 많은 허점을 안고 있었다. 1960년 제네바에서 제2차 회의를 개최했으나 역시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이후 영해와 배타적 어업관할권 확대를 주장하는 국가가 증가하면서 1967년에는 66개국이 12해리를, 8개국이 200해리를, 25개국은 여전히 3해리를 영해로 적용해 혼란은 여전했다. 결국 1973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3차 유엔해양법회의를 거쳐 1982년 자메이카 몬테고 회의에서 극적인 타협을 봤지만, 유엔해양협약이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 필요한 60개국의 비준이 이뤄지지 않아 유명무실했다. 협약을 맺은 지 12년 후 가이아나(Guyana)가 60번째 국가로 비준하면서 1994년 11월 16일, 드디어 유엔해양법협약(UNCLOS III, 17장 320조항 9개부칙)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

주요 내용은 ①영해 폭 최대 12해리로 확대 ②200해리 EEZ 제도 신설 ③심해저 부존광물자원은 인류 공동유산으로 정의 ④해양오염 방지를 위한 국가의 권리와 의무 명문화 ⑤연안국 관할수역에서 해양과학조사 시의 허가 규정 마련 ⑥국제해양법재판소 설치 등 해양 분쟁해결의 제도화에 관련된 내용이다. 영해 12해리, 접속수역 24해리, EEZ 200해리 개념을 규정한 명실상부한 국제법이기도 하다. 한국과 중국은 1996년 이 협약을 비준했다.

전술한 대로 이어도는 마라도에서 149㎞, 중국 서산다오로부터 287㎞ 떨어져 있다. 양국의 200해리 안에 있지만, 통상 해양경계를 확정할 때 양국 간 거리의 중간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어도는 중간선에서 48해리(약 89㎞) 한국 측에 들어와 있다.

대만해협 위기와 중국의 치욕

해군의 특권은 글로벌 접근성에 있다. 역사적으로도 해군력이 강성했던 국가는 식민지를 비롯한 새로운 영토와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다. 현재의 중국은 넓은 영토와 자원은 물론 경제력까지 갖추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해군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국의 해군력 증강은 2006년 후진타오 주석의 ‘해양대국’ 선언을 기점으로 활발히 진행돼왔다. 항공모함을 진수하고, 대함탄도미사일(ASBMs)과 대함순항미사일(ASCMs), 최신예 잠수함 등을 개발해 실전 배치한 것도 해군예산이 그만큼 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중국 해군에 새로운 2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첫 번째 임무는 중국의 주요 무역 항로이면서 경제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의 80%가 공급되는 인도양~말라카해협~남중국해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를 보호하는 임무였다. 이 임무는 1993년 중국이 석유 순수입국으로 전환되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두 번째 임무는 대만 독립을 저지하고 미국의 무력 개입을 차단하고자 하는 소위 ‘반접근 전력(anti-access force)’을 구축하기 위함이다. 1995~96년 대만해협 위기 당시 미국은 니미츠호와 인디펜던스호 2척의 항공모함을 대만해협에 배치해 중국의 도발을 저지했다. 중국으로서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고, 이를 차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 2가지 임무와 별도로 중국은 이미 30년 전부터 해군력 증강 정책을 꾸준히 실행해오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 창설된 중국해군(PLAN)은 1980년대까지 본토로부터 12해리 수역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연안 방어(near-coast defense)’가 핵심전략이었다. 이 시기 중국 해군은 본토의 화력 지원 없이는 독자적인 작전이 불가능했고, 특히 적 항공기와 잠수함에 매우 취약했다. 이집트가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Suez crisis)로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때, 이집트를 독자 지원하기 위해 30만 명의 자원병 파병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려고 했지만 함정과 수송선이 부족해 계획이 무산될 정도였다. 당시 중국 해군함정은 국민당으로부터 노획한 선박과 전국에서 징발한 중·소형 선박을 포함해 총 183척뿐이었다. 1960년대에는 인도와 소련과의 국경분쟁에 매달렸고, 1974년 인도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육상 전력 증강에 더욱 집중했다.

1980년대 들어 덩샤오핑(鄧小平)의 개방정책에 힘입어 해안 지방이 경제특구로 지정되면서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근해 적극방어(near seas active defense)’ 개념이 도입됐다. 이 전략을 이끈 인물이 덩샤오핑의 최측근이었던 류화칭(劉華淸)이다. 류화칭은 1982~88년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 ‘도련(島?, island chain)’ 전략을 수립했다. 도련은 ‘섬들로 이어진 사슬’이라는 뜻으로, 1951년 미국 국무장관 존 덜레스가 창안한 공산권 해양 봉쇄 전략이었다.

류화칭의 도련 전략은 3단계로 구분된다. 제1도련은 2000~10년에 류큐제도~필리핀~보르네오로 연결되는 수역의 통제권을 확립하는 것이고, 제2도련은 2010~20년에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괌~인도네시아 수역의 통제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3단계는 2020~40년에 중국 해군력의 핵심 요소인 항공모함을 이용해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미국 해군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는 1987년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 위치한 해군 교육기관에 ‘비행원 함장반’을 개설해 미래 항공모함을 지휘할 예비함장들을 육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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