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호

서울은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사회

길거리 간판만 봐도 안다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입력2012-05-22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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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에서 서울로 삶의 근거지를 바꾸자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에 느껴지는 것 등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만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다.
    서울은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사회
    지난해 가을 나는 도쿄에서 며칠을 보냈다. 도쿄의 가을은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쾌적했고, 나는 평안했다.

    그때 프랑스와 일본의 문화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불일(佛日)회관’이 개최한 ‘정체성, 민주주의, 세계화’라는 주제의 토론회에 참석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 여러 명의 프랑스 유학파 학자가 모여들었다. 그 행사 내용을 여기서 소개하려는 게 아니다. 그 모임을 주관한 일본학자 미우라 노부다카가 나를 다른 일본 학자들에게 소개한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는 나를 자신의 동료들에게 ‘프랑스화된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나를 그렇게 소개함으로써 내가 전형적인 한국 사람과는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했다.

    그렇다면 나는 17년이란 세월을 파리의 하늘 아래 살면서 어떻게 ‘프랑스화’되었을까? 아마도 내 친구인 미우라는 일본인 동료들에게 내가 형식적인 예절을 잘 지키지 않고 자기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상대방의 나이나 직위 등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당연의 세계 낯설게 보기

    파리에서의 생활을 접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이후에도 나의 몸속에는 프랑스에서 오래 살면서 나도 모르게 익힌 보이지 않는 습관들이 녹아 있을 것이다. 파리에서 서울로 삶의 근거지를 바꾸자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에 느껴지는 것 등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만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다.



    파리는 정신적 자유가 보장된 해방의 공간이고 서울은 억압의 공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서울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듯이 파리가 이상적 도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각각의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일정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문맥 속에서 만들어진 도시 공간 속에서 그런 맥락에서 형성된 삶의 방식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지난 호에서도 말했지만 이 글을 쓴 나의 관점은 인류학자의 그것이다. 인류학자는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보는 자”이다. 그는 남들이 공유하는 관습과 관행과 행동 양식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그 기원과 의미, 기능성과 역기능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나그네, 방랑자, 망명객, 유배자와 마찬가지로 기꺼이 즐거운 일상의 관찰자가 된다. 그는 주어진 당연의 세계와 물론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진다. 인류학자에게는 신처럼 세상을 만들거나 바꿀 힘이 없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져 어떻게 움직이고 있으며 사람들은 왜 저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파리에서 서울로 삶의 공간 이동은 나에게 두 도시를 비교할 수 있는 인류학자의 시선을 제공했다. 파리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삶의 장소를 바꾼 데카르트가 최종적 진실을 유보하고 자신과 세계를 끝없는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듯이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살아온 인류학자에게 서울과 파리는 끝없는 비교와 관찰의 대상이다.

    두 도시를 오가며 살다보면 저절로 비교의 관점이 생긴다. 파리에서는 서울이 비교의 대상이 되고 서울에서는 파리가 비교의 대상이 된다. 나는 서구중심주의자가 되어 서울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민족주의자가 되어 파리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비서구를 서구의 관점에서 아직 덜 진화한 세상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은 비판받아야 하고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똑같이 비서구의 관점에서 서구를 야만과 폭력과 퇴폐의 세상으로만 보는 옥시덴탈리즘의 관점도 경계해야 한다. 개화기에 쇄국을 주장하던 동도서기(東道西器)론자들은 서양 사람들은 ‘에미 애비’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야만인들, 자기의 물질적 이익과 육체적 쾌락만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들, 무력으로 남을 짓밟는 짐승 같은 놈들로 보았다. 오늘날 서양을 그렇게 보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우리나라가 그토록 비판하던 서양의 모습에 가깝게 다가가지 않았는가?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그토록 부르짖었던 인권과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건너온 사상이 아니었던가? 입고 있는 옷, 살고 있는 아파트가 다 서양에서 물 건너온 것들 아닌가? 이제 감상적 민족주의도 서구중심주의도 모두 벗어버리고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서울 거리에서 만나는 사소한 풍경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해석해보자.

    풍경 #10 서울 시내의 간판문화

    서울 거리가 파리 거리에 비해 정신이 없고 어지러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혼란스러운 간판 문화가 차지하고 있다. 크기와 색채에서 주변과 무관하게 자기만 내세우는 간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서울 사람들의 시야를 어지럽게 만든다. “목소리 큰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듯이 “눈에 띄면 이긴다”는 말이 간판 문화의 원칙이다. 서울에 밤이 오면 요란한 간판 문화는 절정에 달한다. 알록달록한 네온사인과 번쩍이는 전광판들은 서울의 밤을 축제 분위기로 만든다. 낮의 질서가 자취를 감추고 밤의 들뜬 분위기가 지배한다. 간판만이 아니라 건물의 외벽도 빛으로 디자인된 옷을 입고 현란한 무늬를 그린다.

    서울은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사회

    차분한 느낌을 주는 파리 시내의 한 상가.

    파리 시내의 간판은 일단 그 크기가 작고 요란하지 않은 색으로 되어 있어 도시 전체의 안정된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밤이 오면 은은한 전열등빛이 도시 전체의 분위기를 만든다. 특정한 상업지구를 제외하고는 화려한 네온사인이나 전광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에서 흔히 보는 건물 옥상에 설치한 위압적인 광고탑도 파리에서는 보기 어렵다. 여기저기 빛을 발하는 붉은색이나 흰색 십자가는 서울이 마치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서초구 강남고속터미널 앞 상가의 간판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서초구청이 어지러운 간판문화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시범 사업을 시작한 모양이다. 상가 외벽에 붙어 있던 중구난방의 간판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같은 크기 같은 글씨체의 네온 간판들이 설치되었다. 빨강, 자주, 보라, 초록, 노랑, 파랑 등 알록달록한 색체에 귀여운 글씨체로 약국, 식당, 치과, 부동산중개업소, 세무사 사무실, 학원 등을 알리는 간판들이 설치되고 나니까 이전보다 바라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갖가지 색채의 네온 간판들은 색동저고리나 오방떡을 연상시킨다. 귀엽고 아기자기하다.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구호와 잘 어울리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서울의 활동적인 밤 분위기보다는 다소 지루하지만 안정되고 그윽하고 고요한 파리의 밤 분위기가 더 좋다.

    풍경 #11 서울의 더블 에스프레소

    몇 년 전 서울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서울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원액의 진한 커피인데 괜찮으세요?”라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드물다. 그만큼 에스프레소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리라. 서울의 에스프레소 커피 맛은 이제 파리 여느 카페의 그것 못지않다. 그럼에도 개인적 취향 탓이겠지만 커피 가루를 머금은 커피 기계가 ‘치익’하는 소리를 내며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토해내는 파리의 카페 장면은 서울과 비교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서울 카페의 메뉴판에는 ‘더블(double) 에스프레소’라는 것이 있다. 아메리카노 등의 커피에 비해 에스프레소 커피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은 몇 모금 마시면 다 없어져버리는 에스프레소 커피의 양에 섭섭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서 싱글(single) 에스프레소 값에 500원 정도만 더 내면 에스프레소 곱빼기가 나온다. 에스프레소는 진한 커피 몇 모금을 입에 털어 넣는 게 제맛이다. 그걸 양을 두 배로 늘려놓은 것은 숭늉을 마시던 한국인 몸에 길든 습관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물론 파리에도 더블 에스프레소가 있다. 그러나 에스프레소 하면 에스프레소 전용 작은 커피 잔에 3분의 2 정도가 차서 나오는 싱글 에스프레소를 말한다.

    풍경 #12 아파트의 거실 중심구조

    아파트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기에 마당이 있는 한옥이나 이층 양옥집에 사는 사람은 극히 소수가 되었다. 방상훈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같이 아주 부자이거나 고만고만한 단독 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 주민을 빼놓고는 거의 다 아파트에 산다.

    나는 파리에서 지은 지 100년 넘은 아파트에서 10년을 살다가 서울의 30년 된 아파트로 이사 왔다. 두 아파트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나이가 아니라 공간 구성의 방식이다. 서울의 보통 아파트에는 일단 넉넉한 거실과 커다란 안방이 있고 거실과 이어지는 간편한 주방, 그리고 화장실이 함께 있는 안락하고 청결한 욕실이 기본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 나머지 공간에 작은 방 두세 칸이 배치되어 있다. 거실은 가족들이 모여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구조로 되어 있고, 안방은 그 집 주부의 옷장과 화장대 그리고 침대로 꽉 차 있다. 작은방에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침대와 책상과 책꽂이가 들어가면 빽빽해진다.

    그리고 공간과 공간이 서로 가까이 연결되어 있어서 도대체 혼자 조용히 숨어 있을 구석이 없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전형적인 공동체적 생활양식의 표현이다. 안방은 과거와 같이 안방마님의 공간이고 거실은 과거 시골집에 있던 마당 구실을 한다. 아파트에는 과거에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사랑방이 없다. 직장 일에 바쁜 남자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지면서 남자들을 위한 공간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금 내가 사는 아파트는 35평 크기이고 파리에 살던 아파트는 25평 규모인데 파리의 아파트가 훨씬 더 컸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우선 거실과 주방, 안방, 서재가 확실하게 분리되어 어느 한 곳에 조용히 머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각각의 공간은 복도와 문으로 잘 분리되어 있다. 공간마다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 외부 공간과 직접 소통할 수 있어서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줬다. 게다가 천장이 한국의 아파트보다 훨씬 높아 공간의 크기가 훨씬 크다는 느낌을 준다. 파리의 그 아파트 출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작은 방을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명상을 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그 공간에 들어가 있으면 외부와 차단되어 어느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마저 갖곤 했다. 책을 많이 가지고 사는 나는 서울 아파트의 거실을 서재로 꾸미고 거실과 주방을 구분하는 문을 설치해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지만 파리 아파트에서와 같은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풍경 #13 버스 색깔

    한 도시의 분위기는 일단 거리에서 느껴지고 그 가운데 자동차의 색깔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세계 어느 도시 어디를 가든 시내버스는 모두 같은 색깔로 칠해져 있다. 파리의 시내버스는 특별한 녹색으로 되어 있다. 파리공공운송회사 RATP가 운영하는 파리 시내버스의 녹색이 아주 특별해서 RATP녹색이라고 한다. 파리 지하철도 같은 색깔이다. 지하철의 표 파는 사무실 전면도 같은 색깔을 칠했다. 그 특별한 녹색은 파리의 공공교통 수단을 상징한다. 파스텔 톤의 녹색은 파리 거리의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들어준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을 실어 나르는 일반 버스는 파란색을 띠고 있다. 마을버스는 녹색이다. 자가용 승용차 없이 사는 나는 버스를 자주 타는 편인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멀리서 버스가 나타나면 그 색깔만 보아도 반갑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이참! 저 색깔보다는 조금 더 아름다운 색을 고를 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도시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버스의 색깔을 잘 선택함으로써 서울 시민들의 색채 감각을 세련되게 만들 수 있다. 도시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의 형태와 색채는 일상의 미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아름다운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시는 건물과 도로, 가로수와 공원, 자동차와 광장 등 공간과 사물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색채의 조합을 통해 고유한 분위기를 만든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라는 패티김의 노랫말을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풍경 #14 사이클 타는 중년 남자

    여름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기차에 자전거를 싣는 칸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누비다가 피곤하면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지하철에도 자전거를 위한 공간이 생겼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길 가장자리에 떼를 이루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볼 수 있다. 5월 어느 날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일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마 삼송역에서였을 것이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얇은 폭의 바퀴에 날렵한 모양을 한 사이클을 들고 지하철 객차 안으로 들어왔다.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머리에는 헬멧을 썼다. 딱 달라붙는 사이클 선수복을 입어서 몸의 윤곽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다소 민망스럽게 보였다. 그 남자의 모습은 내 머릿속에 여름 바캉스철이 오면 열리는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라는 프랑스 일주 자전거 경주대회를 떠올리게 했다. 사이클 선수들이 떼를 지어 전국을 누비며 벌이는 자전거 경주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전통이 되었다.

    그런데 지하철에 사이클을 들고 올라선 중년 남성의 복장이 프랑스 전국일주 자전거 경주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복장에 비해 전혀 못할 것이 없었다.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썼고, 손에는 손가락 앞쪽이 트인 미끄럼 방지 장치가 된 선수용 장갑을 끼었다. 팔목에는 세련된 디자인의 스포츠 시계를 찼고, 발에는 가벼운 자전거 선수용 신발을 신고 있었다. 붉은색에 짙은 청색 그리고 노랑이 섞여 디자인되어 있는 경주복에는 ‘장 드 라투르(Jean de Latour)’라는 프랑스 사람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꼭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한 선수처럼 보였다.

    나는 그 중년 남성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서양 따라잡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서양 따라잡기는 19세기 말 조선시대에 시작돼 지금까지 계속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프로젝트다. 지난 한 세기 이상 지속된 우리의 역사는 서양의 좋다는 문물은 다 들여와 흉내 내면서 힘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온 모방의 역사였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는 금방 흉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는 쉽게 흉내 내기 어렵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1970년대부터 정신문화는 우리 것을 지키고 물질문명만 서양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이 널리 유통되었다.

    그러나 이제 세계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가는 시대에 정신문화든 물질문명이든 그 기원이 서양이든 동양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이 어디서 나온 무엇이든지 간에 더 인간적이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면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변화의 방향이 아닌가?

    풍경 #15 여자 핸드백 들고 다니는 남자

    파리에서는 볼 수 없고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남자 윗옷을 들고 다니는 여자들의 모습이다. 봄날 공원이나 고궁에 나들이 나온 젊은 남녀들을 눈여겨 바라보면 남자는 양복 상의를 벗고 셔츠 차림인데 그 벗은 상의는 여자들의 팔에 걸려 있다. 파리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참 이상한 모습이다. 아니, 자기 옷을 벗었으면 자기가 들고 다닐 일이지 왜 데이트하는 여자에게 옷을 맡기는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여자의 핸드백이 함께 가고 있는 남자의 손에 들려 있지 않은가? 요즘 여자들의 핸드백이 점점 커지는 듯하다.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많아져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옷을 차려입고 하이힐을 신고 큰 백을 들고 다니다 보면 힘이 들 수도 있다. 큰 가방에 휴대용 컴퓨터라도 들어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여성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핸드백을 대신 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자란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소유 의식이 분명하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며 살아간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남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소지품은 철저하게 자기가 관리한다. 여자가 남자 상의를 들어주는 일도 없을뿐더러 남자가 여자 핸드백을 들어주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파리의 연인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상대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의 존재로 결합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신을 잃지 않는다. 아니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물건도 자기가 챙긴다. 그러나 서울의 연인들은 두 사람이 완전한 하나가 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듯 서로의 물건을 상대방에게 믿고 맡긴다.

    풍경 #16 하이힐 벗은 젊은 여자

    대한민국 대표 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 3층 연속간행물실 한구석의 복사실에서본 일이다. 4월 28일, 오후 4시경의 풍경이다. 복사기 옆에 한 켤레의 검은색 하이힐이 놓여있다. 그 구두의 주인인 듯 보이는 20대 초중반의 여성이 복사기 앞에서 손에 쥔 책을 넘기며 복사에 여념이 없다. 검은색 치마에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물론 맨발이다. 스타킹도 신지 않았다. 그 여성은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복사하기에 힘이 들었는지 구두를 벗어서 한쪽에 잘 모셔놓고 맨발로 서서 복사를 하고 있었다.

    기온이 올라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소 쌀쌀했는데 그날은 기온이 예외적으로 올라가 다소 무더운 여름 날씨에 가까웠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발바닥을 대고 맨발로 서서 복사하는 그 여성의 모습은 분명 내 눈에 익숙한 장면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의 파격이었다. 자유로워보이기도 하고 다소 무례해보이기도 한 그 광경은 분명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 여성들의 몸가짐은 매우 자유로워졌다. 남자 어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몸짓을 자유롭게 한다. 파리의 여성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장소에 따라서 여성들의 몸가짐은 달라진다. 파리 여성들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공공장소에서는 예절을 잘 지킨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맨발로 복사하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파리지엔들은 여간해서는 신발을 벗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맨발로 복사하고 있던 그 젊은 여성을 불러다놓고 훈계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유로운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풍경 #17 스도쿠 하는 여자

    파리 지하철에는 인쇄된 노트를 펴놓고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 하는 사람이 많다. 가끔씩 가로세로 숫자 맞추기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퍼뜨린 가로세로 숫자 맞추기 놀이인 스도쿠가 프랑스 땅에 언제 상륙했는지 모르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이 숫자놀음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지난해 여름 나는 노르망디에 있는 프랑스 친구 브리지트와 베르트랑의 별장에서 며칠을 친구들 가족과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베르트랑은 나에게 “너도 스도쿠라는 숫자 맞추기 놀이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스도쿠(sudoku)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에 한국은 잠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적이 있으니까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낸 스도쿠를 한국 사람도 즐기리라 짐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 친구에게 우리나라가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 문화의 잔재를 잘 처리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다가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이 스도쿠를 하는 것을 보았다. 감색 짧은 반바지에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 여성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갈색 핸드백을 열더니 손바닥만한 크기의 책을 꺼냈다. 그 겉표지에는 ‘스도쿠365미니’라는 제목이 써 있었다. 경복궁역에서 탄 그 여성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스도쿠 풀이로 시간을 보내다가 연신내에서 노트를 닫고 서둘러 내렸다.

    그 여성은 프랑스에 여행을 가서도 스도쿠 놀이를 할지 모른다. 만약에 나의 프랑스 친구 베르트랑이 스도쿠 하는 한국여성을 만난다면 “아니 이게 웬일이야! 수복이 이야기한 것이 틀렸잖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그 친구가 서울에 와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여자가 스도쿠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내가 한일 문화 개방 이전 시대에 자란 구세대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풍경 #18 강아지 산책시키는 여자

    5월의 봄날, 밤 10시 30분.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자가용 승용차들이 즐비한 아파트 단지를 흰색 가로등이 환하게 비춘다. 아파트 현관을 나와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치와와였다. 강아지는 기뻐 날뛰며 내 앞으로 달려갔다. 강아지 뒤에는 어두워서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반바지에 편안한 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20대 중반의 여성이 따라오고 있었다. 강아지에게 밤 산책을 시켜주려고 나왔을 수도 있고 자기가 밤 산책을 하려고 강아지를 구실 삼아 데리고 나왔을 수도 있다. 강아지를 앞세우고 저만치 걸어가던 그 여성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약간 어두운 산책로였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나온 하얀 불빛이 마치 조명처럼 그 여성의 얼굴을 비췄다.

    서울은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사회
    정수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사회학박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기획연구실장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현)

    저서: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


    프랑스 사람들만큼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다. 그들은 시골집은 물론 도시의 아파트에서도 개와 함께 산다. 그건 아주 오래된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울의 아파트에서도 개를 키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작은 크기의 강아지를 가슴에 안고 다니는 여성이 많아졌고 동물병원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파리 사람들이 개를 키우는 이유는 늘 부족한 애정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애정 관계는 언제 어떤 일로 깨어질지 모른다. 그 위험천만한 애정 관계에 자신을 걸기에 지친 사람들은 이제 개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개로부터 변하지 않는 애정을 돌려받는다. 그래서 개에 대한 애정을 ‘우회된 애정’이라고 말한다. 사람에게 갈 애정이 한 바퀴 휘돌아 개에게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개 키우기 열풍도 애정 부족 현상의 표현일까? 아니면 단순한 유행이나 자기 과시의 표현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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